*히반요소있음



"조금만 더 잘래" 크리스가 옹알 거리며 더욱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톰이 그의 부드러운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주었다. 그 손길이 좋은 것인지 크리스가 으응 하면서 머리를 톰의 가슴에 부비었다. 서로 옷가지 하나 없이 피부와 피부가 맞닿아 기분이 좋았다. 부드러운 살결과 따뜻한 몸의 체온이 자꾸만 크리스를 잠의 세계로 빠트렸다. 어린아이와 같이 투정을 부리는 크리스를 내버려둬야할지, 아니면 너무 늦었다고 일으켜세워야할지 톰이 살며시 고민을 하였다. 어떤 선택이든 행복한 고민이었다. 톰이 자신의 안으로 파고드는 크리스를 바라보며, 몸을 살며시 굽혔다.그러고서는 그의 오똑한 이마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워.." 크리스가 잠긴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톰이 멈추지 않고 계속 그의 이마에 쪽-쪽-쪽- 하고 버드키스를 남겼다. "푸흐흐, 하지마" 그제서야 크리스가 무거운 눈을 살며시 떴다.아직 졸음끼가 있어 눈꺼풀이 반 정도 덮인 눈이 톰을 올려다보았다. "크리스, 착하지. 일어나야 입에도 해주지" 크리스의 뒷머리에 머물었던 손을 내려 그의 뒷목을 쓰다듬었다. 그의 몸 여기저기에는 어제 정사의 흔적으로빨간 자국이 남아있었다. 질투도 심하고 크리스에 대한 독점욕도 심한 톰은 항상 시간을 들여 크리스의 온 몸에 자신의 자국을 남기곤 하였다. 쇄골 근처에 자국을 남겨 크리스가 언제 한번 회사에 크게 곤란함에 처한적이 있었다. 그 뒤로 항상 자국을 남기지 말라며 화를 내기는 하였지만 늘 어른스러운 톰이 유일하게 고집을 부리는 부분이었기에 타협은 불가능 했다. 크리스의 몸을 덮은 시트를 걷어내자 새하얀 나신과 함께 자신이 남긴 자국들이 가득 보였다. 이미 볼장 다 봤으면서도 여전히 맨 몸을 보여주는것이 부끄러운 크리스가"하지마" 하면서 투정을 부렸다. "입에다 받기 싫어?" 톰이 크리스의 불평을 묵살하며 뒷목을 쓰다듬던 손을 점점 아래로내렸다. 등줄기를 쓰다듬는 손길이 오싹오싹했다. "해줘, 이마말고 입에다 아니 입 안에다 해줘" 크리스가 도발하듯이 톰을 향해 낼름 하고 혀를 내밀었다."그런 못된건 어디서 배웠어, 응?" 발칙한 자신의 연인의 도발에 톰이 단숨에 크리스의 몸에 올라탔다. 그러고서는 단숨에 고개를 숙여 크리스의 입술을 물었다. 입술을 살짝 핥고, 벌려진 입 안에 혀를 집어넣고 입천장을 훑었다. "흐읏" 웃음섞인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한번 크리스의 입 안을 맛보고 입술을 떼었다.자신의 입술을 혀로 할짝 거리며 웃고있는 크리스가 보였다. 


"잠 다깼지?"

"설마 이대로 아침 먹자고 하는건 아니지?"

"그러면"

"나부터 먼저 먹어야지"


부끄러워서 몸을 베베 꼬고있는 주제에 하는 말은 당돌하다. 크리스가 다리를 올려 톰의 허리를 감쌌다. 톰도 지지 않고 크리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쪽 소리를 내면서 입을 맞췄다. "프흐흐, 간지러워. 아 진짜 간지러워..하앗..하크.." 웃음소리가 점점 들뜬 소리로 바뀌었다.톰이 신경을 쓰지 않고 계속 크리스의 어깨왜 쇄골 주변을 물고 핥고 빨았다. "하아..톰.." 이제 완전히 여유를 잃은 크리스가 자유로운 두 손으로 톰의 머리를 정신없이 매만졌다. "그냥..그냥 넣어줘.." 톰의 가벼운 애무에도 금방 뒤가 젖어 애액이 나오는 크리스가 톰을 재촉하였다. 크리스의 얘기에 톰이 마지막으로 목 주위에 쪼옥 하고 깊게 입을 맞추고 몸을 떼었다. 씨근덕 거리면서 들뜬숨을 내뱉고 있는 크리스가 보였다. 


"어디서 배운거야, 그런말. 혼나야지" 

"응..톰한테 혼날래. 빨리 혼내줘. 응? 혼내주세요"


톰이 급하게 크리스의 다리를 살짝 들어 자신의 것 삽입 하였다. 빠르게 채워지는 안에 만족하며 크리스가 톰의 몸에 손을 걸었다. 크리스의 안으로 다 들어간 톰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시 크리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점점 내려와 눈, 코, 볼, 입 쪽쪽쪽 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하아..사랑해 크리스" 톰이 계속 크리스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중얼 거렸다. "나도..나도 사랑해, 톰" 톰의 입맞춤을 정신없이 받고 있는 크리스가 몸을 떨며 대답하였다. 나도, 나도 사랑해.






벌떡, 크리스가 단번에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이게 무슨..무슨 꿈이지. 꿈이라고 하기엔 부적절한 말일지 모른다. 상상속의 일이 아니라 실제 겪었던 일이 잠을 자면서 리플레이 된 것이었으니까. 크리스가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 다시 털썩 하고 침대에 누웠다. 내가 개꿈을 꾼거다. 개꿈을 꾼거야. 눈을 감으니 꿈속에서 보았던, 과거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조금만 생각해도 바로 떠올릴 수 있는 톰의 손길, 체취, 목소리.그동안 애써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단번에 불러져왔다. 이게 다 어제 멋대로 톰이 자신을 찾아온 탓이다. 사랑해. 그 얼마나 서로가 서로를 향해 속삭였던 말인가. 얼마나 진심을 담아 말했던 말인가. 겨우 잊고있었던 일이 한번의 만남으로 단번에 생각나다니이처럼 허무한 일은 없었다. 크리스는 침대위에서 혼자 몸부림을 치면서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런데 몸을 뒤척이는데 뭔가 축축한것이 느껴졌다. 아닐꺼야, 아니어야해. 크리스가 천천히 자신의 손을 바지안에 넣었다.    


애액이 흘러 넘치고 있었다.



결혼하긴 싫었다, 더 일을 하고 싶었으니까. 나에게는 아직 야망이 있으니까, 꿈이 있으니까. 더 많이 성공하고 더 성취하고 싶었으니까. 그걸 가로막히기 싫었으니까. 오메가의 행복은 결혼이라고? 높은 자리는 알파밖에 못올라간다고? 엿먹으라 그래라. 크리스는 전형적인 워커홀릭 계열의 야심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톰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헤어지기 직전까지도 사랑했다. 헤어지고 나서도 그를 못 잃어 밤에 눈물을 흘리는 일이있었으니, 어쩌면 헤어지고 나서도 그를 사랑했었을지도 몰랐다. 이 사람이 마지막의 상대라고 제 짝이라고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왜 헤어지자고 말했을까. 톰에게 소리를 지르며 헤어지자고 했던 밤을 떠올렸다. 그 날은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 밖에 하지 않아 대화가 되지도 않았고, 이미 흥분할대로 흥분한 크리스는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지르고있었고 화가 날 수록 냉정해지는 톰은 그런 크리스를 엄하게 대하기만 했다..그 때 좀 더 서로 차분히 대화를 했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헤어지자고 말한 밤 이후 크리스는 회사 내에서 톰을 무시로 일관하였다. 톰이 자신보다 상사이기에 대화를 섞지 않는것은 불가능 하였지만 어느정도 피하는 것은 가능했다. 톰도 굳이 크리스에게 말을 걸려고 하거나 화해를 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톰이 왜 그래는지는 몰랐지만 딱히 크리스를 붙잡는 듯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톰과 헤어졌다는 소문이 사내에서 돌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많이 들렸다. 그때 쯤 크리스도 회사를 그만 둘 결심을 한 상태였다. 크리스가 샤워기를 돌려 물줄기를 멈추었다. 


그 때, 만약 둘이 차분하게 대화를 하였어도 정말로 '어른'스럽게 앉아서 대화를 하였어도 크리스가 회사를 나온다는 선택지는 변함이 없었을것이었다. 꿈때문에 계속 왓이프를 생각하고 혼란스럽긴 하였지만 냉수마찰로 머리를 식히고 나서 차분해진 머리로 생각을 한 결과였다. 그리고 또 확신하는게 있다면 아마도 톰과의 관계도 계속 이어나가지 않았을 것이었다. 크리스가 톰과 헤어짐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결혼'이 아니라 '다른 이유'때문이었으니까.



수건으로 머리를 털털 털면서 크리스가 탁자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열었다. 총 4건의 메세지가 와있었다. 크리스는 세 회사에 입사지망서를 작성하였다. 합격문자가 와있지 않을까 싶은 크리스가 메세지 내용을 빠르게 확인하였다.[안타깝지만..] 으로 시작하는 메세지가 세개 와있었다. 이번에는 좀 자신있었는데 설마 서류면접에서 다 탈락이라니...어제는 두 남자한테 휘둘려, 오늘 밤에는 개꿈을 꿔, 그리고 지금에서는 세 회사에 탈락을 해. 최악이 따로 없었다.어떻게 이렇게 하루하루가 흘러가며 최악의 날을 갱신하는 걸까? 그 날이 최악일 줄 알았으면, 그 보다 더 최악의 날이 생기고. 그 날이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하면 또 가장 최악의 날이 생기고. 우울하기만 한 생각에 빠져있던 크리스가 자신의 한 손으로 자신의 뺨을 찰싹 하고 한대쳤다.이렇게 절망에 빠져있을 시간은 없다. 벌써 반년이 지났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공백기간은 길어지고 그러면 면접에 불리해질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톰의 앞에서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직장을 얻었어야했다. 그래서 톰에게 보여줘야한다.


그러고보니 아직 미확인 메세지가 하나 있었다. 멜리사...? 멜리사의 메세지였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크리스가 메세지를 읽을까, 그냥 삭제할까 고민하였다.하지만 읽지도 않고 삭제하는것도 너무 정없어보이는 행동이고 설마 무슨일 있겠어? 라는 안도감이 메세지를 읽게 하였다. 꾸욱 확인버튼을 누르자 [크리스 오늘 점심에 뭐해요? 저 오늘 월차냈어요~ 같이 점심이라도 먹어요] 라는 글이 보였다. 역시 너무 과한 걱정이었던것 같다.



"오랜만이예요 크리스! 잘 지냈죠? 저는 잘 지냈어요. 그보다 면도 다시 하셨네요? 전에는 안하셨는데! 그때도 나름 분위기 있으셨어요. 그래도 면도하니까 잘생긴 얼굴이 확 살아서 좋네요!  대부분의 사람도 그렇지만 크리스는 유독 면도를 하면 더 젊어보이는거같아요! 아참,여기는 파스타가 맛있어요. 저는 크림 파스타 먹을꺼예요. 크리스는 뭘 드실래요?"

"아..저도 그냥 크림 파스타요"


멜리사는 만나자마자 그녀 답게 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메세지를 읽고 만날까 말까를 망설였지만 혼자 먹기도 적적하였기에 만나기로 결정을 하였다. 입이 아플정도로 입을 여는 그녀가 가끔은 시끄럽기도 하였지만 지금과 같이 우울한 상황에서 만나자니 오히려 비타민과 같이 활력을 주는 인물로 변모하였다. 크리스는 어느새 멜리사가 열어놓은 이야기에 푹 빠졌고 오늘 아침까지만 했던 고민들에 대해서 새까맣게 잊기 시작했다. 주로 하는 이야기는 그냥 일상적인, 소모적인 단적으로 말하면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엿지만 그렇기에 크리스는 더더욱 멜리사와의 대화가 좋았다. 이렇게 점심식사를 하며 아무걱정없는 이야기를 하니 정말로 일상을 즐기고 있는 평범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멜리사 남자친구의 고약한 술버릇의 이야기가 방금 전 막이 내렸다. 이제 막 새로운 주제로 넘어가려는 타이밍에 멜리사가 "크리스도 갈꺼죠?" 라고 대뜸 물어왔다.


"네? 어딜요?"

"어디라뇨. 마리아과장님의 결혼식 말이예요!"

"네?! 마리아 과장님 결혼하세요?"

"어머어머. 크리스 몰랐어요? 이상하네? 마리아 과장님이 얘기안하셨어요?"


마리아는 크리스의 윗 선배였다. 오메가 여성이었지만 알파 여성과 남성 못지 않게 당찬 인물로 회사내에서는 흔히 말하는 '기센 오메가' 로 통하는 사람이었다. 마리아와 크리스는 꽤 절친한 사이로 마리아가 아직 아무것도 몰랐던 햇병아리였던 크리스를 도와주었던 적이 자주 있었다. "꿈이 있는 오메가 동지끼리 열심히 해봅시다" 그것이 언젠가 마리아가 크리스를 향해 내뱉었던 말이었다. 마리아는 크리스를 마음에 들어했고 크리스 또한 자신과 성향이 비슷한 마리아를 마리아 선배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이 알파중심사회에서 그리고 스스로가 한수 접는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오메가사이에서 둘은 꽤나 쿵짝이 잘 맞는 콤비였다. 마리아는 언제 크리스에게 자신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오메가가 회사에서 살아남기 어려운데, 결혼을 한 오메가는 더더욱 어려웠다. 그렇기에 크리스는 마리아의 결혼 안해 선언에 대해서 별로 놀랍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 답다라는 생각까지 하였다.그런데 그런 그녀가 결혼이라니.놀란 크리스가 토끼눈을 하자 멜리사가 더 놀랍다듯이 입을 벌렸다. "마리아과장님이랑 크리스랑 친하지 않았어요? 저는 당연히 크리스한테 얘기했을 줄 알았는데. 어머어머. 왜 안했지?" 


아마도 마리아가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는 크리스를 배려해서였을 것이다. 나쁜 소문에 휩싸여 쫓기듯 회사를 나간 크리스는 아직 한번도 스스로가 먼저 마리아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크리스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먼저 선뜻 연락하기 힘들다라는 점을 말을 하지않아도 그녀는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힘든시기를 보내고 있을지모르는 아끼는 후배에게 자신의 결혼식에 와달라고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래서 아마도 마리아는 크리스에게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멜리사는 마리아와 달리 생각이 깊은 타입이 아니라 무심코 말해버렸지만. 


"제가 마리아과장님한테 얘기해줄게요! 결혼하는거 크리스한테 알려줬다고! 아마도 마리아가 결혼준비하느라 까먹고있었나봐요!"

"하하..네.."


마리아가 무슨 의도로 자신을 초대하지 않았는지 말하지 알아도 안 크리스가 애매하게 멜리사에게 웃어보였다. 아마 마리아의 성격이라면 멜리사에게 왜 크리스에게 말했냐고 화를 낼지도 몰랐다. 초대를 받지 못한것이 섭섭한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리아의 배려에 대한 감사와 마리아의 결혼에 대한 기쁨이 컸다. 그 마리아가 결혼을 하다니, 상대방은 누구일까. 크리스가 디저트로 나온 커피를 후룩 마시며 곰곰히 생각을 했다. 어쩌면 멜리사가 알고있는게 아닐까 멜리사를 떠보았다.


"마리아의 예비배우자는 어떤사람이예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과장님이 워낙 사생활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제가 매일매일 졸라도 얘기도 안해주고 액자같은것도 안 놓으니까요. 제가 듣기로는 여성 알파라고 했던거 같아요! 신부가 둘이니까 결혼식은 분명 이쁘겠죠. 아아. 빨리 가보고싶어요. 뭐 삼일뒤면은 갈 수 있지만"

"삼일뒤요?!"

"네! 그렇다니까요! 크리스도 꼭 오세요! 저는 블랙미니드레스를 입고 갈꺼예요! 크리스는 뭐 입고올꺼예요? 아아아! 세바스찬 씨랑 같이 오면 어때요? 다들 제 말 안믿는거있죠? 제가 크리스의 잘생긴 남자친구를 봤다고 했는데, 다들 너무 과장하는거아니야? 이러는거예요. 아니잖아요? 그쵸? 세바스찬씨 진짜 잘생겼잖아요!"

"아..아..네..근데 삼일 뒤면 너무 갑작스러워서"

"안돼요! 크리스! 저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꼭 데리고 와주세요!"


이 후 크리스는 멜리사와의 대화에서 세바스찬과 벗어난 화제로 돌려보려고 하였지만 무리였다. 멜리사는 회사동료들에게 세바스찬의 외모에 대해서 어찌나 미사여구를 붙여서 설명하였는지 다들 믿지 않는 분위기라고 하였다. 멜리사가 비유한 세바스찬의 외모에 대한 것은...솔직히, 정말 객관적으로! 정말정말 객관적으로 사심 하나도 들어가지 않고! 생각해서 틀린것이 없었다. 멜리사가 설명한 것 처럼 세바스찬은 잘생겼으면서 사랑스러웠고, 남자다우면서 모성애를 자극하였고, 큰 키에 완벽한 바디라인을 가졌으니까. 솔직히 외모로는 원탑에 가까운 사람이니까. 크리스가 세바스찬에게 물어보고 가능한 데려갈게요. 라는 말을 내뱉어서야 멜리사가 꼭이예요! 라는 말을 덧붙이고서야 화제를 돌렸다. 다음 화제는 마리아의 결혼식에 크리스가 어떤 복장을 하고 올지였다.


멜리사와의 폭풍과 같은 시간을 마치고 크리스는 자신의 오피스텔로 향하였다. 원래 점심만을 먹기로 했던 약속이었던지라, 비교적 이른 시간안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보다 마리아가 결혼을 한단 말이지, 축하한다는 메세지라도 보내야하나? 크리스가 길을 걸으면서 핸드폰을 두드렸다. 마리아, 오늘 멜리사에게 들었어요. 결혼하신다면서요? 축하해요. 결혼식장에 제가 가도 괜찮을까요? 저도 직접 축하해주고 싶어요. 마리아의 결혼 스토리도 들어보고 싶고:D  자주 쓰지도 않은 이모디콘까지 붙여 메시지를 전송하였다. 답신은 빠르게 왔다. 오, 맙소사. 멜리사 그것이 또 입방정을 떨었군. 크리스 내가 초대하지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지? 크리스가 많이 바쁠까봐 말하지 못했어. 온다면 나야 환영이지. 장소와 시간은 자세히 보내줄게. 혹시 부담스러우면 안와도 괜찮아, 물론 와주면 나야 기쁘겠지만. 나도 오랜만에 둘만의 회포를 풀고싶어!! 그녀다운 화통한 답변이었다. 크리스가 큭큭 웃고 알겠으니 그날 보자며 답장을 보냈다. 



오피스텔에 도착하고 엘레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걷는데, 자신의 집 옆에 그림자가 보였다. 누구지? 싶어서 걸음을 빨리하자 익숙한 인물이 복도에서 서있었다. "세바스찬, 여기서 뭐해요?" 자신의 이웃사촌인 세바스찬이 자신과 그의 집 사이인 복도의 벽에 기대어 서있었다. "크리스!" 세바스찬이 크리스를 보고 믿기지 않지만 반갑다듯이 웃으며 이름을 불렀다. 뭐야, 불안하게. 밝은 세바스찬의 태도에 이 인간이 또 뭐 사고를 쳤나, 아니면 어머니라도 집에 방문해서 내가 필요한건가 싶어 크리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걸어갔다. 


"어디 나가요? 왜 여기서 서있어요"

"인상 좀 펴요 크리스. 이쁜 얼굴 망가지잖아요"


..이쁜..얼굴..? 뭐지..? 시비거는건가? 새로운 류의 시비인가? 크리스가 극혐하는 듯한 표정으로 세바스찬을 쳐다보았지만 세바스찬은 그 답지 않게 계속 너털웃음을 보였다. 난 이새끼가 웃으면 불안하더라...


"갑자기 왜이래요. 닭살돋게"

"닭살돋게라뇨. 전 항상 이래왔는걸요"

"...아니 그보다 어디 나가세요? 왜 때빼고광내고 복도에 서있어요? 복장 보니까 클럽이라도 가세요?"


세바스찬의 복장은 그 어느때보다 화려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금발의 머리는 왁스칠까지 칠해져있었고 그의 얼굴은 그 어느때보다 생기가 넘쳤으며, 옷은 패션에 무지한 크리스가 보아도 잘 입었다라는것을 알 수 있을정도로 멋있었다. "아..아뇨..어디 가는건 아니고. 그냥 집에있을건데요" 세바스찬이 자신의 뒷목을 긁으며 우물쭈물 거렸다. "...집에서 그렇게 입고있어요..?" 크리스가 못믿겠다는 눈치로 그를 훑어보았다. 이거 아무래도, 그동안 잠잠했던 떡방아집을 돌릴려는거같은데, 아 그래서 지금 내 눈치를 보는건가?


"오늘 오메가 만나러가요?"

"네?! 아니예요!! 그럴리가요!! 오늘 하루종일 집에있을 예정이예요! 저 만나는 오메가 없어요!"

"근데 왜이렇게 제 눈치를 봐요. 그리고 복장이 집에있을 복장이 아닌데요"

"무슨소리예요. 저는 항상 이렇게 입고있어요 집에서. 아 그보다 크리스 점심 먹었어요? 아직이면"

"방금 먹고왔는데요"

"..아...방금 먹고왔구나"


싱글벙글 웃고있던 세바스찬이 갑작스레 표정을 죽였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바짝 들고 눈동자를 빛내더니 "디저트는요! 점심먹고 디저트 먹어야 하잖아요!" 라고 말을했다. "아..아니..디저트도 먹고왔는데, 왜그래요" 사태파악이 되지 않은 크리스가 불안함을 느끼며 뒷걸음질을 쳤다. "디..디저트도 먹고왔어요? 아니..그냥 크리스랑 같이 점심이라도 먹으려고했죠.." 혼난 강아지 처럼 세바스찬이 시무룩하게 눈동자를 울망거렸다. 귀..귀여워. 아냐 속지말자 크리스 에반스. 저거 자유자재로 변하는거잖아. 너도 알잖아. "저랑 점심을..요..? 왜요?" 그보다 더 놀라운것은 자신과 점심을 함께하려는 그의 태도였다. 이제 서로 갚을것도 없어 '아무관계'가 아닌 둘이 점심을 같이 할 이유는 없었다.


"네? 왜라뇨. 크리스랑 점심먹고싶어서죠"

"왜 저랑 점심을 먹고싶어하는데요"

"..그..음...저번에 저 아프다고 스프도 끓여주시고..."

"아...그거요?"


그래도 은혜를 모르는건 아닌것 같다. 그런것까지 신경을 쓰다니.


"아뇨, 신경쓰지 마요. 어차피"

"아뇨. 매우매우 신경쓰이는데요. 그래서 저는 매우매우 크리스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싶은데요. 그러니까 저는 매우매우 크리스와 점심을 함께하고싶은데요"


열정이라는 단어가 보일정도로 세바스찬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크리스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저랑 같이 있으면 속이 울렁거린다면서 역겹다고 돌려 말하던 이가 이제는 같이 점심을 함께하고 싶다며 달려들고있다니. "무슨 꿍꿍잉예요" 의심스러운 눈빛을 띄우며 크리스가 물었다. "꿍꿍이라뇨..전 진짜 그냥 같이 점심먹고 싶은것뿐인데" 세바스찬이 자신의 두 손을 만지작 거리면서 수줍게 대답하였다. 아니, 왜. 왜 나랑 점심을 먹고싶어하는 건데. 더이상 그의 손에 놀아나지 않겠다고 다짐한 크리스였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그러고서는 자신의 집 문을 열고 "나중예요. 나중에. 나중에 먹어요" 라고 말을 하고서는 홱 자신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쾅 하고 문을 닫고 바로 문을 잠가버렸다. 밖에서 크리스! 하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한번 났지만 못들은척하였다. 도대체 뭐냐고요. 나한테 왜이러냐고요. 크리스가 당황스러워 쿵쿵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아아..저 얼굴에 속지말자. 저인간은 서큐버스다. 



또 몇개의 자기소개서를 쓰고나자 시간이 저녁시간을 가리켰다. 대충 오늘 분은 끝났다. 오늘도 당황스러운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이성을 되찾고 잘 할 수 있었다. 크리스가 기지개를 쭈욱 피고 "끄으으읕" 이라고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오늘 저녁은 뭘로 먹지, 인스턴트 식품이라도 데울까? 의자에 일어나 크리스가 자신의 뭉친 어깨를 주무르며 냉장고를 열었다. 그 때


"크리스! 크리스!"


문을 두드리며 자신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말을 하면 입이 아픈 세바스찬이었다. 크리스가 또 인상을 팍 구겼다. "왜요! 왜!" 문을 열어주지도 않은 체 크리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녁 같이먹어요!" 또 밥타령이었다. 


"네? 저녁이요? 왜요!"

"아까 나중에 먹자고 했잖아요! 지금이 '나중'아닌가요!"

"더..더 나중이요! 더어어어어 나중이요!"

"그러지 말고 같이 저녁 먹어요!"

"아 싫어요!"

"싫다고만 하지말구요! 저 오늘 멜리사씨한테 메세지도 왔는데!"


...멜리사?! 이름만 듣고 당황한 크리스가 자신의 방 문을 활짝 열었다. 문을 여니 그 곳에 낮의 상태와 다르지 않은, 때빼고광낸 세바스찬이 입을 쫘악 벌리고 웃으며 서있었다. "드디어 열어줬네요" 저렇게 웃으니 아기사자가 웃는거 같다. 항상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던것과는 전혀다른 웃음이었다. 


"멜리사가 뭐라고 했는데요?"

"치- 정없게 그 얘기만 묻기예요? 같이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얘기해요"


세바스찬이 어울리지도 않은 애교를 부렸다. 치- 라니......항상 연상을 상대로만 했던 크리스에게 연하인 세바스찬의 애교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행위였다. 크리스가 저도 모르게 으웩- 이라고 말하였다. "으웩이라니..너무해요.." 세바스찬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불평을 토했지만 크리스에게서는 한계가 초과된 모습일뿐이었다. 세바스찬과 옥신각신 싸울때는 그저 옆집의 섹스킹이었을뿐이었기에 나이를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세바스찬 또한 자신에게 보여준 모습은 꽤 어른스러운 모습이었고. 지금의 이 연하라는것을 어필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저 크리스 방안에 들어가도 되요? 아, 크리스 방안에서 저녁 먹을까요? 아 너무 부담되시려나? 그러면 저희 나가서 먹을래요? 제가 살게요. 뭐 좋아하세요?"

"아..아니...뭐 컨셉 바꾸셨어요?"

"네? 컨셉이라뇨?"

"아니..가..갑자기 저한테 왜이렇게 친절하게 구세요"


갑작스러운 세바스찬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크리스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원래부터 좋은 감정이라고는 없이 시작한, 그러니까 악감정으로 시작된 사이였다. 사건도 많았고 사연도 많았고 우역곡절도 많았던 둘이 몇개월간에 걸쳐 드디어 '평범한' 이웃관계로 돌아온 지금 크리스는 세바스찬이 우리의 관계에 또 일을 저지를까봐 두려웠다. "저..저 원래 친절했어요" 저도 그 말이 거짓말인지 아는지 세바스찬이 답지 않게 여유를 잃고 말을 버벅거렸다. 이제와서 다시 우리 둘이 싸우게 된 이유, 섹스킹의 신화에 대해서 말을 하여 그를 나무랄까 싶었지만 이렇게 져주면서 들어오는 그가 밉지는 않기에 크리도 입을 꾸욱 다물었다.


"멜리사 얘기는 뭐예요? 걔는 왜 연락했데요?"

"와- 진짜 너무 섭섭하다. 멜리사씨 얘기 때문에 문열어준건 알았지만, 바로 본론부터 넘어가요? 같이 저녁먹어요 크리스. 제가 근처에 맛집을 알아냈는데.."

"쓰읍. 사람을 협박해놓고 어딜"

"협박이라뇨. 저는 그저 크리스에게 관심을 얻기 위해 조미료로 멜리사씨 이야기를 했을뿐이예요"

"아니 저랑 왜 저녁을 먹고싶은데요?"

"네? 크리스랑 저녁 먹고싶으니까요"


말을 해봤자 입만 아픈 싸움이었다. 그래도 과거를 되짚어보았을때 이렇게까지 말이 통하지 않은 사람은 아니었던거같은데... 크리스는 세바스찬이 나쁜 사람이라고 평가하지 않았다. 물론 개새끼소새끼뇌가아랫도리에달린새끼라며 속으로 욕하던 시절도 있었고 이웃으로서 매너가 좋은 편이라고 생각지도 않았지만 가족을 대하는 그의 태도나 몇번 크리스를 위로해주는 그의 모습과 그리고 어제 아무이유없이 톰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경우로 인해 인상이 크게 달라졌다. 뭐, 내가 이렇게 좋게 평가해봤자 그에게있어서는 가까이 가면 구역질 나는 사람이겠지만.


"저 역겹다면서요"

"네?!!? 누가요?! 제가요?! 언제요?!"

"저번에 아프다고 하셔서 스프 끓여줬을때요. 가까이 다가가니까 구역질 난다면서요"

"아니예요. 그건 너무 좋아서 심장이 빨리 뛰어서 그런거였어요. 역겹다니요"


크리스는 마지막 말이 매우 이상하게 들렸지만 이내 뇌 속에서 소거해버렸다. 못들은 말로해야지. 무슨 꿍꿍이가 있으니 좋은말만 내뱉는게 틀림 없었다. 잊지마 크리스 에반스. 저인간은 서큐버스야.


"제 방에서 먹기는 그렇고. 나가서 먹어요. 다행히 오늘 점심 약속이 있어서 깔끔한 상태네요. 나가요, 어디서 먹을건데요"

"이 근처에 있어요. 그런데 크리스 계속 면도할꺼예요?"

"네? 아...요즘 공부하느라 통 신경을 안썼는데. 그래도 면도는 하고 다닐까봐요"

"에이. 하지마요. 그러다 다른사람들이 크리스만 쳐다보면 어떻게해요"


세바스찬의 얼굴에 주먹질을 하는것을 크리스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서 꾸욱 참았다는것을 세바스찬은 아마 모를것이다.






둘이 이동한 장소는 오피스텔 가까운 피자집이었다. 무엇이 먹고싶냐는 세바스찬의 질문에 점심으로 파스타를 먹었으니 그 외의 음식은 아무거나 좋다고 하자 세바스찬이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라며 데려온 곳이었다. 그냥 체인점이겠거니 싶었지만 막상 가보니 꽤나 '수제'와 '이탈리아'를 강조하는 값비싸보이는 가게였다. 이거 내가 얻어먹는거 맞나? 좀 부담스러운데. 싶어 크리스가 주춤 거리긴 했지만 "제가 원래 입이 좀 비싸서 이런거밖에 못먹어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라며 세바스찬이 크리스를 설득하였기 때문에 에라이 싶은 마음으로 그냥 들어섰다. 도대체 돈이 어디서 샘솟는지 모를 남자였다. 저번에 집을 방문하였을때 그렇게 상류층으로 보이지만은 않았는데. 직업이 없다 들었지만 제비나 호스트같은건가? 싶기도 하였다. 그의 얼굴이면 그런 직업을 삼는다면 아주 돈을 쓸어다 모을것 같았다. 그러다 이런 추리는 매우 실례되는 생각이라는것을 깨닫고 머릿속에 뭉개뭉개 떠오르는 상상을 접었다. 아니- 세바스찬이 이야기 해준 멜리사의 이야기로 강제적으로 접어야했다.


"멜리사가.....멜리사 그것이..!!그것이!!!"

"쉬- 진정해요. 크리스. 그렇게 화낼 필요는 없잖아요"

"화낼필요가 왜 없어요!! 그놈의 입방정 아주 그냥!"


그러니까, 멜리사가 크리스와 헤어진 뒤로. 꼭 남자친구를 마리아의 결혼식에 데려오라는 말을 당부한 뒤, 멜리사가 세바스찬에게도 메세지를 보냈다 이거였다. 크리스의 친한 선배인 마리아의 결혼식이 3일뒤에 있으니 세바스찬씨도 같이 참석해 줄 수 있냐는 말이었다. "아니 지가 마리아 선배도 아니고 왜 남의 결혼식장에 사람을 막 초대하고 그래!"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크리스가 포크로 피자를 푹푹 찌르면서 없는 멜리사에게 화를 냈다. 한참 혼자 분이 안풀려 씩씩 거리며 피자를 찌르고 있는데 앞의 세바스찬이 헤실헤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고있었다. 


"남이 화내는데 왜 웃어요? 제 고통이 그쪽 기쁨이예요?"

"네? 아뇨. 그게아니라. 화내는것도 이뻐서요"

"엄마야"


크리스가 저도 모르게 엄마를 찾아대었다. 멜리사는 멜리사대로 사고를 치고 이쪽은 이쪽대로 왜 저지랄인지 모르겠다. 어제 그렇게 나를 흔들어대놓고도 그것만으로 성이 안차는 건가? 우리의 타임라임은 이제 고작 하루밖에 안 지났거든? 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모른느 크리스가 다시 세바스찬의 마지막 말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꼭 안가셔도 되요. 제가 그냥 가서 사정이 있어서 못왔다고 하면.."

"네? 왜요. 저는 같이 가주려고 했는데"

"네..?"

"크리스도 저희집 가서 제 남자친구 역할 해주셨잖아요. 이번에는 제가 해드릴게요. 마리아씨 결혼식 가서 크리스의 남자친구 행사"

"아니 근데 제가 먼저 멜리사한테 세바스찬을 남자친구라고 거짓말해서 그렇게된거고...안그러셔도되는데"

"A/S는 확실히해야죠. 다들 안 믿는 눈치라면서요. 그러면 크리스가 저한테 남자친구 행사해준거 말짱꽝 아니예요? 가서 확인도장 꽝꽝 찍어줘야죠"


이건 또 이거대로 혹하는 이야기다. 사실상 멜리사에게 거짓말을 친 이유도 아직 회사에 남아있는 동료들에게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백수 크리스가 아닌 잘생긴 알파랑 사귀고있는 크리스로 꾸미기 위해서. 근데 아무도 믿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냥 세바스찬의 남자친구 역할을 봉사활동으로 한거나 다름 없었다. 크리스가 혹하는 이야기에 고민을 하자 세바스찬이 결정타를 날렸다.


"거기에 그 사람도 오잖아요. 팀장님이요"

"...톰이요? 확실히...마리아 부장님이랑 사이가 나쁜편은 아니었으니까 오겠네요"

"그러니까 더더욱 제가 가야죠. 생각해봐야, 크리스. 제가 가지 않으면 크리스는 또 거기서 그 사람이랑 단 둘이 마주쳐야되요. 저번에 보니까 그새끼 아주 막무가내인 놈이던데, 막 크리스씨 손목잡고. 거기서도 사람 없는 틈에 크리스씨한테 그럴수도있잖아요"

"막무가내하면 세바스찬도 만만치 않은데.."

"그리고 크리스씨는 그새끼한테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했잖아요? 그새끼 때문에 회사 나간거니까. 그런데 어제 그새끼 태도 봤어요? 절대 안믿는다는 태도. 제가 와 어이없네 크리스 씨 남자친구라고 했는데 끝까지 안믿는 태도"

"..맞아요. 그건 좀 화가나요. 제가 지 아니면 남자친구 못사귈줄아나!"

"그래요! 그러니까 제가 더더욱 마리아씨의 결혼식에 가야죠. 그런 공식적인 행사에 따라가서 당당히 보여주는거예요. 제가 당신 남자친구라고. 크리스씨 남자친구는 저라고. 크리스 에반스의 남자친구는 세바스찬 스탠이라고!"


뭔가 같은말을 세번이나 한 기분이 들었지만 세바스찬의 논리에 완전히 현혹이 된 크리스는 연신 고개만을 끄덕이기 바빴다. 그새끼-그새끼- 라고 톰을 칭하는 어조를 보면 어쩐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세바스찬도 톰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은 눈치였다. 크리스가 "그런거같아요.." 하며 고개를 숙여 피자를 노려보며 웅얼거렸다. 세바스찬은 작게 흔들리는 크리스의 말에, 그 작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랑 같이가요. 마리아씨 결혼식에"



멜리사의 마리아씨 결혼식의 이야기를 들은 세바스찬은 생각했다. 그 결혼식에 크리스를 절대 혼자 두면 안된다고. 그 톰인지 제리인지 뭐시기인지 하는 놈과 크리스를 단 둘이 두게 해서는 안된다고. 크리스에게 완전히 반했고 그것을 인정한 세바스찬은 머리를 최대한 굴린결과가 그 생각이었다. 일단 저놈부터 떼어내야한다.




세바스찬은 톰으로부터 크리스를 빼앗기지않기위해 크리스는 톰으로 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또 한번 서로가 서로의 목적을 위해서 팀업을 하게되는 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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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중간에 한번 다 날려서 포기할까 싶었는데...() 어찌저찌 썼습니다. 

찾는 분이 있으셔서 끝까지 완결은 낼게요! 사실 완결을 못내는 병이 있어서... 그 병을 고치기 위해 이번 연성만큼은 노력하겠습니다. 정말 전부 날아갔을때의 멘탈은 진짜...제가 세즈반스 - 로코물은 한편당 길게 쓰는편이거든요. 근데 그게 다 날아간 그 슬픔은..정말..

평소 연성은 출퇴근 이동시간에 하는 편입니다. 따로 연성을 하는 시간을 두지는 않아요. 그러기엔 일상이 너무나도 치열해서... 그래서 평소 연성은 카카오톡으로 스스로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한다음에 집에와서 붙복해서 컴퓨터로 퇴고를 하는 형식인데. 7편은 왜인지 새벽에 삘이 팍 와서 우다다다 썼는데 저장도 안했는데 픽 하고 날아가 버렸지뭐예요. 진짜 모든것을 때려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아 사담이 길었네요. 어디서 연성이야기라든가 연성하면서 생긴 에피소드라든가 할 곳이 없어서.... 저도모르게...(트위터 왕따의 슬픔)


이전 다른 연성의 사담에도 썼지만 지금 저희 집 컴퓨터의 키보드가 맛이가서 오타가 많을지도 몰라요. 

 


끝났다. 아직 오후 다섯시밖에 안되었는데. 평소 다른 날보다 해야할 일이 빠르게 끝난 크리스가 시계를 보고 빙긋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곳저곳에서 취직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크리스는 매일 자기소개서를 썼는데 오늘은 무려 세개의 자기소개서를 쓴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혹시 오탈자가 없는지 그리고 앞뒤문맥이 없는지 천천히 확인해보았다. 없어. 완벽해. 진짜로 쉴 수 있어. 크리스가 저장버튼을 누른 다음에 쭈욱 기지개를 폈다. 아침에는 뉴욕잡스에서 일자리 및 구인광고를 살펴보았고 점심쯤에는 경제신문을 읽으며 면접을 대비해 사회현상등을 요약하고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였다.그리고 오후 두세시쯤 되어서야 구인광고에서 찾은 회사에 맞춰 자기소개서를 썼는데 예상했던것보다 훨씬 일찍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최근 조용해진 옆집 덕분에 스트레스 받지 않고 푹 잠을 잘자서인것 같았다.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것 같아 크리스가 커피 한잔을 타고서는 침대에 앉았다. 그러고서는 슬금슬금 뒤로 가 콩 하고 살며시 벽에 기대었다. 이 벽 너머에 세바스찬이 있겠지. 그렇게 생각이 들자 기분이 묘했다. 그의 집에서 연인행세를 했던 것이 일주일 전이었는데... 지금은 그의 모습은 커녕 밤마다 들려왔던 소음소리도 듣기 힘들었다. 크리스가 들고있넌 커피를 후륵- 하고 마셨다.


오늘로 일주일 째, 크리스는 세바스찬을 만나지 못했다.



-



크리스는 그 날 세바스찬의 본가에 하룻밤을 머물러야 했다. 시간이 늦은것도 늦은것이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크리스가 어머니에게 이끌려 술을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신 것이 원인이었다. 이미 술로 이성이 날아간 크리스는 디즈니의 곰돌이 푸우 노래를 흥얼 거리면서 어른들 앞에서 장기자랑을 하고 있었다. 저 상태로 오피스텔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자신의 집 비밀번호도 두드리지 못할것이 뻔했다. 그렇게 된다면 그를 좁은 자신의 방 안에서 재워야 했다. 멀쩡한 알파와 자신을 제어할 줄 모르는 오메가가 한방이라니... 그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까딱하여 크리스가 페로몬을 방출한다면 둘은 손을 잡고 본능이라는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침대 위에서 뒹굴어야 할 지 몰랐다. 


"크리스 어디서 재우죠?"

"어디서 재우긴. 니 남자친구인데 니방에서 재워야지"

"그럼 저는요?"

"......니방에서 자야지???"


당연한 걸 묻는다듯이 어머니의 말에 세바스찬이 "그렇죠" 하고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진지한 관계까지 생각하고 있는 애인과는 잠자리를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그의 어머니 입장에서는 둘이 침대에서 같이 잠을 자든 다른 의미에서 잠을 자든 전혀 문제 없는 일이었다. 아직 순결을 지키고 있는 커플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당연히 조금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아들 세바스찬인걸. 어머니와 가족들의 생각이 어떤지 뻔히 아는 세바스찬이 이제와서 우리 둘은 아직 같은 침대를 쓸 만한 사이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것은 웃기는 일이었다. 


세바스찬이 몸을 못 가누는 크리스를 등에 업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아직도 술에 취해있는지 그는 이제 인어공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방에 올라와 그를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오메가 이기는 하지만 자신 못지 않게 키와 덩치가 큰 크리스를 업고 올라온것은 자존심 상한 말이지만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세바스찬이 자신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고서는 옷장을 뒤졌다. 크리스가 침대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바닥에 자신의 잠자리를 마련해야했다. '아, 그러고보니..' 휙 하고 뒤를 돌아 침대에 누워있는 크리스를 보니 이불이나 담요하나 없이 그냥 누워 자고있었다. 여름이라 춥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저렇게 자다가는 감기에 걸릴지 몰랐다. 세바스찬이 자신의 침대보를 찾기 전에 크리스에게 덮어줄 만한 담요를 먼저 찾았다. 다행히, 오늘 낮에 그에게 덮어주었던 담요가 있었다. 세바스찬이 노란 담요를 들고서는 크리스의 곁으로 갔다.


"크리스, 담요 덮엇.."


그러다 순간 갑작스레 팔을 붙잡는 힘에 의해 기우뚱 하고 침대쪽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헤헤. 세바스찬 뭐어해애요?" 자신을 잡아 이끈것은 술에 취한 크리스였다. "담요 덮어주려고요. 그보다 크리스 안자고 있었어요?" 크리스에 의해 바로 그의 옆자리에 눕게 된 세바스찬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너무 가까워. 바로 코 앞, 누워있는 크리스가 보였다. 괜시리 눈을 마주치기 민망해 세바스찬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갔다. "자~상~도~하~셔~라~아~"  술에 취해 크리스가 느릿느릿하게 발음을 하였다. 아, 위험해. 여러가지 의미로 위험해. 술에 취해서 그런가 속도 너무 울렁 거렸고 바로 앞에 보기 좋은 오메가가 때문에 열도 올랐다.


"저리 비켜요. 전 바닥에서 잘꺼예요"

"바닥? 왜에? 아직 여름이어도 바닥에서 차면 입돌아가요 입입입"

"그러면 전 어디서 자요? 크리스랑 같이 침대에 누워잘까요?"

"그러면 되죠"

"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다 큰 알파와 다 큰 오메가가 서로 아무짓도 안하고 한 침대에서 뒹굴다니. 아니 그보다 나랑 침대에서 잠을 자도 된다고? 세바스찬이 더위가 아니라 당혹스러움에 땀을 흘렸다.


"아니..아니 그건 아니죠..어..저기..크리스"

"왜요? 제가 매력 없어요?"


크리스가 삐쳤다듯이 볼을 부풀리고 얼굴을 더욱 가까이 했다. 아. 이 남자는 취하면 많이 위험해 진다. 세바스찬이 가까이 오는 크리스를 피하기 위해 목을 뒤로 뺐다. 몸도 뺄 수 있으면 좋으려만 크리스가 세바스찬을 안듯이 가까이 팔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어려웠다.버둥거리면서 한 번 빠져나가보려했지만 술에 취한 사람이 뭐 이리 기운이 좋은지 꿈쩍도 하지 못했다. 오메가여도 세바스찬 보다 몸이 좋은 크리스의 위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왜 대답 안해요? 제가 매력이 그렇게 없어요?" 크리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계속 칭얼 거렸다. 아뇨, 매력 많죠. 당근빳따죠 쉬바. 넘쳐서 문제죠. 라고 당장 말하고 싶었지만 세바스찬이 어쩐 일인지 얼굴만 뻘개지고 말 한마디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말을 못하게 된 사람 마냥 입만 뻥긋뻥긋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였다. 아니, 근데 나한테 이런걸 왜 묻지? 뭐지? 나 유혹하는건가? 아냐 취한 사람이잖아. 혼란스러운 머릿속 세바스찬이 술에 취해 아무생각이 없는 크리스를 상대로 혼자서 세바스찬 세계의 백분 토론을 진행하였다. 크리스는 대답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세바스찬을 노려보더니 "에잇" 하고서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순간 세바스찬의 심장이 쿵 하게 내려앉은 듯했다. 아예 몸이 맞닿자 크리스의 달달한 체취가 확 하고 올라왔다. 오메가의 페로몬에 세바스찬의 머리가 아찔해졌다. 아...안돼. 술에 취한 사람을 상대로 이러면 안돼, 잃어가려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세바스찬이 혼자서 기도를 하고있었다. 그 때


"악!!"


갑작스러운 어깨의 통증에 세바스찬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서는 양 손으로 크리스의 어깨를 밀쳐 떼어놓았다. 크리스가 히히히 하면서 혼자 실실 웃고있었다. "뭐한거예요?!" 세바스찬이 자신의 어깨를 살펴보자 커다란 이빨자국이 나있었다. "지금 물었어요?!" 당황스러운 행동에 세바스찬이 신경질을 냈다. 크리스는 그것도 상관하지 않은체 또 웃더니 단번에 다가가 세바스찬의 반대편 어깨를 물었다. 


"악..! 이 사람이 왜이래!"

"오늘..저..힘들어 죽을꺼같았는데..막..세바스찬은..조엘이랑 놀구..얄밉고..물어주고싶어요..얄미우니까"

"그건..그건 따로 사정이 있어서. 아니 얄밉다고 무는게 어딨어요"

"여깄어요"


크리스가 그 말을 마치고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고 있는 세바스찬의 손을 잡아 낼름 손가락을 물었다. "아파요! 진짜 아파요!" 세바스찬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크리스를 밀쳐내려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세바스찬이 이렇게 아프다고 외쳤지만 자신의 비명소리에 달려오는 가족은 한명도 없었다.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둘째 손가락을 입에 물고 질겅질겅 이빨로 긁었다. 아픔도 아픔이었지만 이 상황 엄청 묘하게. 내 손가락을 물고있는 크리스가. 아. 근데 진짜 아프긴 아픈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세바스찬이 침대아래 바닥에서 아무것도 덮지 않고 혼자 누워있었다. 아니...뭐라도 깔고 눕지, 왜 이러고 자고있지? 크리스가 침대위에서 바닥에 누워있는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조금 쳐다보고 있자 세바스찬이 충혈되어 시뻘개진 눈을 떴다. "헉, 세바스찬 잠 못잤어요? 눈이.." 술에 취하면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크리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다크서클이 밑까지 내려온 세바스찬이 자신의 눈을 비비고서는 천천히 일어났다. 자세히 보니 그의 몸 여기저기에 빨간 자국이 잔뜩 있었다. "모기라도 물린거예요?" 여름이라 밤 사이에 세바스찬이 잔뜩 시달렸나보다 라고 막연히 생각이 들었다. 모기가 좋아하는 타입이있고, 안 좋아하는 타입이 있다던데 세바스찬이 딱 좋아하는 타입인가보구나 싶었다. 


"네..아주..아주 큰 모기한테..잔뜩 물렸어요"


세바스찬이 무서운 기억을 떠올렸다듯이 자신의 몸을 부여잡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이 재미도 없고 영양가도 없는 대화가 둘의 공식적인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몰랐었다.





-



세바스찬과의 약속은 그 날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본가에 다녀온 뒤로 끝이 날 터였을 것이다. 크리스는 멜리사에게 세바스찬이 남자친구라고 속였고, 세바스찬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크리스가 남자친구라고 속였다. 이제 서로 쌤쌤이 되었기에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눈치를 볼 일도 없어졌고 세바스찬도 크리스의 눈치를 볼 일이 없어졌다. 그래서 크리스는 막연히, 이제 세바스찬 떡방아집이 다시 문을 열겠구나. 라고 생각을했다. 그런 생각을 할때 화도 나면서 뭔가 기분이 싱숭생숭 하였지만 뭐 어쩌겠느냐. 섹스킹 세바스찬이거늘. 그런데 이상한것이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삼일이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세바스찬의 집에서 소리가 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존이 옆집에 살았을때보다 훨씬 조용했다. 덕분에 크리스의 공부와 취업준비는 순조롭게 되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세바스찬의 안부가 걱정 되었다. 그렇게 몇달을 너죽고나죽고 하는 사이었는데 데이트 한번 하고 본가 한번 다녀왔다고 마음이 이렇게 바뀐것도 웃겼지만, 크리스는 원래 남들에게 정을 잘 붙이는 성격이었다. 뭐지? 이제는 진짜 모텔에 가는건가. 근데 아무런 소리도 안들리는데. 혹시 이사라도 한건가? 아냐..이삿짐 옮기는 소리도 안들렸는걸. 그럼 어디 아픈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과적으로 크리스는 세바스찬이 아프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 아프다. 수면 아래로 잠잠했던 걱정이 순식간에 올라왔다. 크리스는 침대에 벌떡 일어나 자신의 방을 빙빙 돌아다녔다. 많이 아픈건가? 어쩐지 너무 조용하다 했어. 침대에 이불 보를 뒤집어 쓰고 끙끙 거리며 아파할 세바스찬을 떠올리자 괜시리 가슴이 아려왔다. 혼자 살때 아픈것 만큼 서러운건 없는데... 크리스가 우왕좌왕 몇번 더 좁은 방안을 돌아다니다가 결심을 했다듯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래, 먼 친적보다는 가까운 이웃이 이럴때 챙겨줘야지.





"저기요, 세바스찬. 저예요 크리스"


문을 두번 두드렸다. 금방 반응도 없기에 정말 집에 없는건가 싶어 걱정했지만 다행히 조금있자 끼이익 하고 문이 열렸다. 일주일 만에 보는 세바스찬의 얼굴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도 잠시 세바스찬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보였다. "...무슨일이예요?" 아픈게 정말 맞는 것인지 세바스찬의 모습은 그 어느때보다 수척해보였다. 항상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을 약올렸던 모습은 어디가고 지금은 다크서클과 함께 푹하고 죽어있는 표정이 정말 병자의 모습이었다. 


"혹시 아프신거아니예요? 제가 스프좀 끓여왔는데" 

"네? 아프다뇨....아니 그보다 이거 저 먹으라고 갖고온거예요?"

"혼자 살때 아픈것만큼 서러운건 없잖아요"   


냄비를 들고 서있는 크리스를 세바스찬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말도 안한 세바스찬에 민망해 크리스가 자신의 냄비를 들어보았다. 그러고서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어깨를 으쓱해보았다. 스프를 만들고 끓일때는 몰랐지만 생각해보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웬수지간이었던 사이에서 웬수를 위해서 스프를 끓여오다니. 마치 사이좋은 이웃지간 같지 않은가. 아니 보통의 이웃지간도 이정도는 하지 않았을터였다. 민망한 정적의 시간이 일분정도 흘렀다. "..크리스는 점심 먹었어요?" 연인행세에 서로의 이름을 친밀하게 부르게 된 둘이었다.


"아뇨... 저는 세바스찬한테 주고 따로 먹으려고했죠"

"..그냥 같이 먹어요. 혼자 먹기도 그런데"


세바스찬 또한 크리스 처럼 민망한지 한손으로 뒷목을 긁고서는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크리스가 어쩌지 싶다가 걱정되서 스프도 끓여준 마당에 같이 점심먹자는 제안을 거절하기도 뭐해 실례하겠다는 말 한마디를 하고 성큼 그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망나니라고 생각했던 세바스찬 이기에 그의 방도 매우 지저분하고 더러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의 방은 깨끗한 편이었다. 오히려 크리스의 방보다 깔끔하였고 인테리어에도 신경을 쓴 것인지 벽지와 가구부터 달랐다. 분명 오피스텔에는 제공되는 가구들이 있었을 터였는데. 값비싸보이는 가구들이 공용의 제품이 아니라 세바스찬이 스스로 사온 제품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오피스텔의 상태를 마구 바꾸어도 되는건가?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대공사를 한 것을 보면 주인의 허락을 구하고 갈았겠지 싶었다. 크리스가 두리번 거리면서 냄비를 들고 있자 세바스찬이 오라며 손짓을 했다. 크리스의 방과 달리 식탁엔 의자가 두개 있었다. 오는 사람이 항상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살짝 데울까요?"

"아뇨 방금 끓여서 따뜻할꺼예요"


크리스가 의자에 앉자 세바스찬이 국자와 그릇 수저등을 갖고왔다. 국자로 스프를 떠서 서로 나누고 수저를 드는 동안에도 둘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처음 세바스찬과 억지로 햄버거 집에서 합석을 했을때와 같은 의미의 정적은 아니었다. 그 때 처럼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워서 짜증나서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것이 아니라 무슨 대화를 해야할지 몰라서 나누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무슨 대화를 해야하는 걸까. 아니 왜 내가 이사람과의 대화주제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거야? 뇌가 아랫도리에 달린 소음공해 남자한테. 크리스가 괜히 들뜨려고 하는 저의 기분을 죽이면서 자책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세바스찬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깔끔하게 이뻐보였다라는 변명이라도 있지, 지금은 적지 않지만 그래도 털도 있고 전처럼 깔끔한 상태도 아니었는데 괜시리 세바스찬을 긴장하게 만들고 그랬다. 


"어.흠..저기..요즘은 조용하시네요"

"네?"

"그거..안하셔서..조용하시다고요"


그냥 조용하다는 얘기를 하려고했는데 갑작스레 섹슈얼한 이야기가 나왔다. 크리스가 자기가 말을 내뱉고도 살짝 민망하였다. "....취업 준비하신다면서요" 세바스찬이 계속 수저를 뜨면서 말했다.


"그때 울면서 그랬잖아요. 열심히 준비하신다고..그래서..뭐"

"어..그러니까 저때문에 조용히 지내시고있는거예요?"

"아니..뭐.."


이건 또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세바스찬이 자신때문에 자제를 하면서 조용히 지내다니. 섹스킹의 말로에 웃음이 나올것 같으면서도 작은 배려에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크리스가 웃음을 꾹 참고 짓궃게 말을 던졌다.


"제가 처음에도 말했는데 왜 이제와서 배려하는척해요"

"아..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고요. 그래서 뭐 싫어요? 또 난잡하게 놀아볼까요?"

"아뇨아뇨 싫은건 아니고요. 그냥 왜 그렇게 마음이 바뀌었나 싶어서요"

"기억안나요? 그때 크리스 제앞에서 펑펑 울었거든요? 펑펑 울면서 그러는데 저도 인간인지라 동정심이 조금 들더라구요"


세바스찬 또한 지지않게 짓궃게 대답하였다. 대답에 전부 거짓말만이 있는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세바스찬은 크리스의 눈물에 약했다. 이 남자는 냉정하고 딱딱해보이면서도 눈물을 펑펑 잘 쏟아내곤 하였다. 지금까지 세바스찬의 자신의 집에서 잠자리를 가진 이유는 단순하게 별 거 없었다. 내 집에서 내가 성생활을 즐기겠다는데 뭐가 문제냐? 딱 이 태도였다. 그러나 둘의 약속이 끝나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세바스찬은 이 태도를 계속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코를 훌쩍거리며 펑펑 울고있는 크리스의 모습이 계속 아련하게 떠올려서 였다. 그 마음에는 죄책감도 섞여있었으면서 세바스찬도 자각하지 못한 무언가도 같이 섞여있었다. 자신의 집에서 연인 행세를 하던 크리스, 코를 훌쩍 거리며 펑펑 우는 크리스, 같이 침대에 누워서 세바스찬의 손가락을 물고 잠들었던 크리스. 떠올리기만 해도 갑작스러운 열과 활력에 세바스찬이 침대를 마구 뒹굴다 침대에 떨어지는 일도 다반수였다. "제..제가 울었다구요?" 크리스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네. 그것도 펑펑 울었어요. 기억 안나세요?"

"..하..하나도 기억 안나요"

"그러면 저 깨물었던 것도 기억 안나겠네요"


세바스찬이 자신의 티셔츠를 늘어당겨 어깨죽지를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크리스가 맨 처음 가장 세게 물어 남긴 자국과 멍이 아직 남아있었다. 다른 부분은 세바스찬이 크리스를 밀쳐내었기에 자잘한 자국 뿐이어 하루가 지나 사라졌지만 어깨에 남긴 것은 아직까지도 남아있었다. 크리스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짓말..! 다른 사람한테 물고 저한테 덤탱이 씌우는거아니예요?!"

"아니거든요! 제가 최근에 누구 집에 데려온거 봤어요? 그때 크리스가 침대위에서 얼마나 난동을 부렸는데요"


크리스가 못 믿기겠다듯이 계속 눈을 꿈뻑 거렸다. 술에 취하면 기억이 날아가 주변 친구들에게 술을 자제하라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지만 설마 세바스찬이 앞에서까지 추태를 벌였을 줄은 몰랐다. 부끄러운 크리스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세바스찬은 그런 크리스가 조금 보기 좋아 계속 말을 이었다. 


"얼마나 아팠는데요, 제가 바닥에서 자겠다고 했는데도 막 저 안 놔주고 깨물고 진짜" 

"미..미안해요.."

"아아..사실 온 몸 구석구석에 있었는데 사진이라도 찍어놓을껄 그랬나봐요"


세바스찬이 자신의 티셔츠를 늘려 어깨를 보인체 계속 떠들었다. 이제 그에 대한 안좋은 감정이 거의 완전히 사라진 크리스는 미안함만이 가득 하였다. 설마 내가 물어서 아픈걸까? 라는 과도한 상상이 섞인 생각마저 들었다. 앞에서 뭐라 떠드는 세바스찬의 이야기를 경건히 기울인 체, 크리스가 자신의 셔츠를 늘여뜨려 어깨와 가슴 부분을 보이게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세바스찬이 저도 모르게 말을 하다 혀를 깨물었다.


"뭐..뭐하는거예요!"

"대신 세바스찬도 물으세요..! 미안해요!"

"무..물으라고요? 가슴..아니 어깨를요?"

"네..."


크리스가 아픔을 참겠다듯이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옷을 더욱 늘렸다. 옆으로 늘여 어깨만 보여도 되는 것을, 옷을 앞으로 늘려 어깨를 비롯해 풍만한 가슴까지 보였다. 근육으로 다져진 그의 하얀 몸은 부드러워 보였다.특히 보일듯말듯해서 더욱 야릇한 느낌을 주는 핑크색으로 된 유두는 매우 자극적이었다. 세바스찬이 놀라 자신의 두 손으로 눈을 가린뒤 "뭐하는거예요! 가려요!" 라고 외쳤다. 미쳤어, 세바스찬. 니가 본 오메가의 몸이 백명을 넘을텐데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수십명의 어쩌면 백명이 넘는 단위의 오메가와 잠자리를 가졌으면서도 크리스의 몸에 왜 부끄러움을 느꼈는지는 세바스찬도 몰랐다. 일단은 저 민망한 모습부터 가리는게 먼저였다. 크리스가 그치만..하고 말을 흐렸지만 당황한 세바스찬이 "빨리가려요! 진짜!" 하면서 큰소리를 냈다. 기껏 깨물려주겠다는데..그러면 쌤쌤일텐데..아쉬운 크리스가 시무룩해하면서 당겼던 옷을 놓았다. 티셔츠의 목이 제자리에 가서야 세바스찬이 천천히 눈을 떴다.


"다..다음부터는 그런짓 하지 마세요"

"같은 남자끼린데 뭐 어때요"

"아..안돼요! 그래도 크리스는 오메가고 저는 알파잖아요! 여튼 진짜..."


오메가라면 사족을 못쓸것 같은 세바스찬이 저렇게 눈을 감고 얼굴까지 찡그리니 괜히 마음이 시무룩해졌다. 최근 관리를 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 인기있는 몸이었는데. 그렇게 보기 싫었나. 자신감이 떨어진 크리스에게서 세바스찬이 부끄러워서 그랬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멋쩍은 크리스가 자신의 볼을 긁었다. 세바스찬은 그런 크리스의 모습을 보다가 욱..하고서는 자신의 입을 막았다.


"왜그래요? 진짜 어디 많이아파요?"

"..요즘 이상해요. 몸에서 막 열이나고 속이 울렁거려요"

"병원 가봐야하는거아니예요? 저도 저번에 부정맥 검사 받고왔는데 제가 갔던 병원 소개시켜줄까요?"

"그래야겠어요..몸에 열도 나는거같아요"

"어디 봐봐요"


크리스가 손을 뻗어 세바스찬의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서는 자신의 다른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세바스찬의 몸에 열이 살짝 있기는 하였지만 아프다고 할 정도의 큰 열은 아닌것 같았다. 세바스찬은 크리스의 행동을 살펴보다가 욱.. 하고서는 자신의 이마에 있는 크리스의 손을 빼었다. 


"크리스가 오면 더 울렁거리는거같아요" 

"..지금 제가 역겹다 이거예요?"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울렁거린다니까요?"


그게 역겹다는 거잖아. 크리스가 분노와 짜증과 뭔가의 섭섭함이 섞긴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저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렇지, 역겹다는 말을 이렇게 바로 앞에서 할 수 있을까. 걱정되서 수프까지 끓여다 줬는데 괜히 서러웠다. 뭐, 세바스찬과 같이 잘생긴 알파 남성이다. 자신같은 것이 눈에 찰리는 없겠지. 그래도..그래도 역겹다는 좀 아니잖아. 역시 잘해줄 필요가 없는 남자였다. 애초에 잘못은 저사람이 먼저 저질렀는데..괜히 걱정해서 수프를 끓여준 자신이 우스운 꼴이 된 것 같았다. 크리스가 자신의 그릇을 들고 벌컥벌컥 스프를 삼켰다. 그러고서는 탁! 하고 책상 위에 빈 그릇을 놓았다. "그러면 속 안울렁거리게 먼저 가볼게요" 이미 덜어 내용물이 없어진 냄비를 들었다. 세바스찬은 크리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지만 간다는 이를 붙잡을 만한 이유도 없었다.

"어어- 잠시만요. 크리스" 세바스찬이 이미 뒤돌아서 가려는 크리스를 불러세웠다. 크리스가 새침하게 입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돌아보았다.


"갔다는 병원이 어디예요? 저도 오늘 다녀오게요"

"....이 근처에 허니종합병원센터있어요. 인터넷 검색하면 나와요"


크리스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러고서는 방 문을 열고 쾅 소리와 함께 문을 닫아버렸다. 

나 뭐한거니 진짜.






뇌가 아랫도리에 달린 새끼. 오메가가 없으면 못사는 새끼. 섹스중독증에 걸린 새끼. 못된 새끼. 나쁜 새끼. 빌어쳐먹을 새끼!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욕을 하면서 공원을 달렸다. 오늘분의 진도도 다 나갔고, 더 한다 해도 집중도 되지 않을 것 같아 밖으로 나와 오랜만에 운동을 했다. 몇 바퀴를 전력질주 하였을까 온 몸은 땀으로 젖어있었고 숨은 가빠졌다. 그나마 뛰니 몸이 힘들어 아무생각도 나지 않았다. 크리스가 헉헉 거리며 가져온 물통을 들어 목을 축였다. 인간은 참으로 신기하단 말이지. 이렇게 조금 운동한걸로 엔돌핀이라는 것이 돌아서 기분이 조금 좋아지니까. 대충 손으로 땀을 닦은 크리스가 물통을 쥐고 공원 밖으로 나섰다. 그래, 내가 그런 씹새끼때문에 시간을 잡아먹는게 아깝지. 지금이 어떤때인데. 정신차리자 크리스 에반스. 저놈이 조용해질때가 기회란 말야. 응? 이제 아무것에도 휘둘리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크리스가 자신의 마음을 다 잡으며 걸었다. 이렇게 상쾌한 기분이 되고나니 방금전에 우울했던 것이 거짓말이 된 것 같았다. 앞으로는 매주 저녁에 조깅을 해야겠어, 상쾌하고 기분 좋네. 그렇게 세바스찬의 생각을 저 멀리 우주로 날려버린 크리스가 휘파람을 불며 오피스텔로 향했다. 





아무에게도 휘둘리지 말아야하는데, 왜 신은 그를 돕지 않는걸까?





"크리스. 오랜만이야"

".......진짜 오늘 재수 더럽게 좋네"


세바스찬에 휘둘리는것도 모자라, 이새끼 얼굴까지 봐야하다니. 아직 엔돌핀빨이 남은 크리스가 피식 하고 웃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최악의 상황이다. 면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얼굴에 뜀박질을 해서 온 몸은 땀범벆이, 그에 비해 톰은 늘,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정갈한 정장에 차분하게 뒤로 넘긴 머리까지 완벽한 상태였다. "왜 여기있어?" 크리스가 바로 감정적인 태도가 나오지 않은 것은 그나마 저번에 톰과 마주쳤었기 때문이다. 그 때, 크리스는 톰을 보고 바로 도망을 쳤지만 그 눈치좋은 톰이 자신을 못봤다는 생각은 하지않았다. 이미 최악의 상황을 한번 보여줬으니, 두번째 최악의 상황은 조금은 대처가 가능했던 것이다. "전화했는데 안받더라. 그래서 메세지 남겼는데 대답이 없어서 기다리고 있었어" 크리스가 자신의 주머니속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오늘 저녁 세바스찬과의 일이 있으 후 기분이 나빠 진동상태로 돌려놓고서는 재운듯이 놓았던 핸드폰이었다. 핸드폰에는 톰의 말대로 부재중 통화와 함께 메세지가 남겨져있었다. "내가 미리 메세지를 봤으면 오지 말라고 했을텐데, 아쉽게 됐네. 그냥 가지 그랬어?" 크리스가 다시 핸드폰을 닫고 날카롭게 얘기했다. 감정적이게 되면 안돼, 크리스. 그러면 니가 지는거야.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하는 크리스와 달리 톰은 늘 똑같이 차분하고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니가 오지말라고 했어도 여기서 기다렸을꺼야"

"..왜?"

"아직 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남아있지 않아?"

"우리사이에 할 얘기? 난 없는데? 반년 전에 끝난거 아니었어?"

"반년 전에 뭐? 니가 헤어지자고 소리 지르고 나 무시하고 다니다가 일방적으로 회사 그만두고 나가버린거?"


톰이 오히려 어이가 없다듯이 말했다. 그 때 크리스는 일방적으로 사직서를 썼다. 결혼 못하겠다고 한 이유가 일 때문이라고 말했으면서 크리스는 사직서를 쓰고 톰의 곁을 떠나버린것이었다. 어떤 메커니즘으로 크리스가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못하는것은 아니었다. 분명 자신이 위에 있는 회사에서는, 소문에 휩싸인 회사에서는 자신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여서 떠난거겠지.


"....그래. 난 더이상 할 얘기 없어. 그냥 가"


크리스가 톰을 노려보고서는 몸을 돌려 오피스텔의 입구로 들어가려했다. 톰은 무작정 도망가려는 크리스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앞으로 이끌었다. "이거 놔!" 크리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넌 할얘기 없지만, 난 할얘기 많아. 너무하다고 생각한거아냐?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4년이야, 4년. 그런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끝내고 가도 되는거야?" 늘 냉정하던 톰이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를 떠올리면 톰도 할 말이 많았다. 


"이제와서 무슨할말? 반년이나 지났는데. 반년동안 가만히 있다 왜 이러는건데"

"연락? 연락했으면 니가 받아줬을꺼같아? 난 기다린거야 크리스 에반스. 니가 그나마 덜 감정적일때를. 말이라도 걸려고 하면 도망부터 치려했으니까 시간을 준거라고"

"웃기지마. 기다리긴 뭘 기다려. 우린 그때 끝났어"

"그때 끝났으면 왜 레스토랑에서 날 보고 도망쳤어?"


톰이 숨기고 싶었던 크리스의 이야기를 들추었다. 패배해서 진 개처럼 꼬리를 내밀고 후다닥 도망갔던 그 모습을.


"그만 이기적으로 굴어. 내가 널 모른다고 생각해? 니가 무슨 생각으로 그 자리에서 그렇게 도망쳤는지 모른다고 생각해?"

"닥쳐"


일때문에 결혼 못한다고 거절하였고, 이 회사 아니면 일할 곳 없냐 말하며 그만두었다. 자신도 안다 얼마나 일방적으로 굴었는지. 톰만이 이기적인게 아니었다, 자신도 같이 이기적이었다. 그러니까 더 잘난 모습을 보여줬어야했다. 적어도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선택에 얼마나 값진 것이 있는지. 혼자서 성공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줘야했다. 적어도 톰 히들스턴에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그런데, 그게 무슨 모습이냔 말인가. 취직자리 하나 구하지 못하고 부끄러움 차림새로 마주쳐야 하다니. 감정이 북받쳐 오를것 같았다. 정말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멀쩡한 취직자리를 얻어 멀쩡한 차림새로 자신의 쪽에서 먼저 만나자고 하고 싶었다. 고질병처럼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울지마 크리스. 지금 난 널 달래줄 수 없어" 톰이 혼내듯이 크리스에게 말했다. "안 울거든, 병신아" 지고 싶지 않아 말을 험하게 내뱉었다.


도망치고 싶다, 더이상 톰이랑 대화하고 싶지 않다. 작아지고 싶지 않다.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 크리스가 톰에게 잡힌 손을 흔들어 털어내려 했지만 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여긴 사람이 많아, 어디 가서 얘기해" 톰이 크리스의 손목을 잡고 어딘가로 이끌려고 했다. "거기, 잠시만요. 지금 뭐히시는거예요?" 그 때 기적처럼 세바스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크리스 손목 잡고 뭐하는거냐고요. 모르시나 본데 요즘 그렇게 강제로 손목잡는거 성추행 성희롱입니다.한국드라마도 아니고 뭐하는거예요?"

"뭐라고?"

"제가 성평등주의자거든요. 아니 그 전에 크리스한테 뭐하는거냐고 묻잖아요"


한 손에 슈퍼마켓 봉투를 들고,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던 세바스찬이 천천히 걸어왔다. 톰이 방해물을 본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크리스의 손을 놓아주었다. 억센 손아귀에 잡혀 새빨간 손자국이 크리스의 팔목에 남아있었다. 톰이 주머니에 자신의 손을 넣고서는 고압적인 자세로 세바스찬을 내리 깔아보았다. 


"제가 크리스랑 할 얘기가 있어요" 

"얘기할때 꼭 손잡고 해야되요? 애예요? 저랑도 손잡을래요? 얘기해야하니까"


저번에 봤던 그 어린 알파놈이다. 유치하게 말 싸움을 거는 꼴이 우스워 톰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쪽은 누구신데 대화하는데 끼어드시는 거죠? 대화예절교육 안받으셨어요?" 자신을 얕보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깨달은 세바스찬이 봉투와 담배를 땅에 버리고 성큼 걸어와 크리스와 톰의 가운데에 끼어들었다. 그러러고서는 움츠러들어있는 크리스의 어깨를 안았다. "크리스 애인이요. 제가 대화예절교육은 잘받았는데, 갑자기 누가 우리자기를 건드려서 좀 당황해서요." 세바스찬의 돌발행동에 당황한것은 크리스였다. 톰은 세바스찬의 행동을 그저 지켜보았다. 그러고서는 크리스의 어깨를 안듯이 잡은 세바스찬의 손을 노려보았다. "진짜야 크리스?" 톰이 세바스찬을 무시한 체 크리스에게 물었다.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라 크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럼 진짜지 가짜겠어?" 세바스찬이 크리스를 두둔한다듯이 아프지 않을정도로 힘을 주었다. 크리스가 멍 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야, 내 남자친구야. 그러니까 더이상 너랑 할 얘기 없어" 말은 떨림없이 잘했지만 문제는 시선이었다. 크리스가 톰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랜기간 사귀었던 경험으로 크리스보다 크리스를 더 알고 있는 남자가 톰이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니면 진실을 말하는지 정도는 대화만 하고 있어도 알 수 있었다. 톰이 고개를 올려 자신을 노려보는 세바스찬을 쳐다보았다. 그러고서는 웃기다듯이 피식 웃었다. "지금 웃어? 웃었어?" 톰의 비웃음에 도발당한 세바스찬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톰은 그런 세바스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숙여, 다시 크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방해물이 없을때" 그러고서는 몸을 돌렸다.


완전히 무시당한 세바스찬이 뒤돌아 걷는 톰을 향해 "다시 연락하긴 뭘 다시 연락해!! 연락하기만해봐!!" 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고 톰의 보폭이 느려지거나 빨라지진 않았다. 그저 변함없이 톰의 페이스 대로 걸어갔다. 완전히 졌다. 거짓말이 통하지 않았다. 세바스찬이 욕 한바가지를 꺼내줄까 하려다가 자신의 옷깃이 당겨져 말을 멈추었다. "그만해요, 세바스찬"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크리스였다. 세바스찬은 어..하면서 지금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생각해보니 계속 크리스를 안고있다시피 있었다. 화들짝 놀란 세바스찬이 뛰듯이 그의 몸에서 떨어졌다. "미..미안해요. 갑자기 안아서" 저 시꺼먼 놈에게 손목을 잡는건 성희롱이니 뭐니 외쳤으면서 자신은 그의 허락없이 어깨를 부여잡고 있었다. "괜찮아요.." 크리스가 기운빠진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안 괜찮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



오피스텔, 5층의 옥상공원에서 둘이 벤치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대로 크리스를 혼자 두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세바스찬이 잠깐 경치좀 보자고 권유를 하였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의 그는 바람빠진 풍선처럼 모든것에 의지를 잃은 사람 같았다. 다행히도 옥상공원에는 크리스와 저 둘밖에 없었다. 크리스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올려 밤하늘만을 쳐다보았다. 세바스찬이 방금 전 들고있던 봉투에서 맥주 두캔을 꺼냈다. "마실래요?" 한 캔을 건내주자 크리스가 말없이 잡았다. 딱- 하며 캔이 따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바스찬이 다시 부시럭 거리면서 봉투에서 안주가 될만한 것을 찾았다. 


"젤리빈 좋아해요? 이거라도 먹을래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거예요. 고마워요"

"아 진짜요? 다행이네요"


세바스찬이 봉투에서 젤리빈을 꺼내 뜯었다. 그러고서는 크리스의 작고 통통한 손에다가 털털털하고 젤리를 털어주었다. 크리스는 그냥 아무말 없이 세바스찬이 주는것을 받고 있었다. 분명, 그놈은 레스토랑에서 봤던 그놈이었다. 크리스가 보자마자 도망친 인물. 그리고 아마 추측하자면 그 놈은 크리스가 말한 팀장이라는 놈일것이었다. 그러니까....크리스의 전 남자친구. 아니 근데 헤어졌으면 헤어졌지 왜 찾아오고 난리야? 세바스찬도 맥주캔을 딴뒤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마셨다. 


"아까, 크리스가 말해준 허니종합벼원다녀왔어요. 다 정상이라고 하더라구요. 내시경도 받아봤는데"

"다행이네요"

"그러다가 슈퍼마켓좀 들렸죠 냉장고좀 채울려고. 아 근데, 그냥 들리지 말껄 그랬어요. 슈퍼마켓 봉투를 들고 그러는건 좀 안멋있잖아요"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맥주마시고 젤리빈 먹을 수 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요, 뭐."


크리스는 방금 전의 남자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전 남자친구의 일이니, 이야기 주제로 꺼내는것은 당연히 싫은 일이겠지만 세바스찬은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러니까, 왜인지 모르겠지만 크리스에게 고맙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 남자한테서 꺼내줘서 고맙다고. 세바스찬이 둘의 사이를 방해한게 아니라고. 그런 확인이 듣고 싶었다. 제가 방해한건 아니죠? 라고 물어보려다가 크리스의 표정이 좋지 않아 세바스찬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마음만 생각해서 크리스에게 몹쓸짓을 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크리스는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려운 남자인거같아요" 조용한 공간속 세바스찬이 중얼 거리듯이 말했다. 


"저요? 단순하다는 얘기 많이 듣는데"

"단순하긴 한데. 뭐랄까 공같아요. 아, 이건 노란색 공이야 라고 단번에 알 순 있지만. 어디로 튈 지 모른다고해야하나요"

"그게 뭐예요"

"그러니까... 너무 어려워요. 제가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닌데, 크리스는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어요"


처음 옆집에 살았을때는 각양각색의 방법을 펼쳐 세바스찬을 공격했다. 그러고서는 세바스찬의 집 앞에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도주하였고, 바로 본인 앞에서 뇌가 아랫도리에 달렸냐는 말을 서슴치 않게 내뱉었다. 그렇게 세바스찬 하면 질색을 하더니 나중에는 어떤 여성에게 자신을 남자친구라고 속이기도 하였고, 데이트를 하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멜로영화에 펑펑 울기도 하였다. 또 그 뒤에 하는 짓을 어떻단 말인가. 레스토랑에서 갑작스럽게 뛰쳐나가 울고, 갑자기 면도를 하고 옷을 빼입어 잘난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의 부모님 앞에서는 이상적인 남자친구의 모습을 하고. 침대위에서는 자신을 깨물고. 갑자기 아픈게 아니냐며 음식을 만들어오고. 울보이면서 자신의 전 남자친구 앞에서는 눈물한방울 안보이고. 정말 어렵다. 패턴을 알 수가 없다.


"크리스르 보면 울렁거리는건 크리스가 너무 어려워서 일꺼예요. 수포자들은 어려운 수학문제를 보면 속이 막 울렁거리거든요"

"제가 어려운 수학문제고, 세바스찬은 수포자예요?"

"비유하자면 그렇죠. 너무 어렵잖아요. 저는 어려운건 질색이거든요"


세바스찬이 남아있는 자신의 맥주를 단숨에 입에 털어버렸다. 크리스는 전과 같이 무표정하게 세바스찬을 보다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요? 세바스찬은 어려운거 좋아할꺼같은데요" 맥주를 다 마신 세바스찬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크리스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아, 울렁거려. 것봐. 또 이렇게 알 수 없는 얘기를 하니까 어지럽잖아. 해바라기를 담은 눈동자, 오똑한 코, 하얀피부와 상기된 볼, 오동통통한 입술. 전과 다르게 털이 나있는 상태인데 왜 이뻐보이는거야. 세바스찬이 홀린듯이 계속 크리스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왜 어려운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요?" 크리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계속 하늘만을 쳐다보았다.


"세바스찬은 싫증을 잘내잖아요. 어렸을때부터 그랬다면서요, 어머님이 그러시더라구요"

"아.....그랬죠. 뭐. 근데 그거랑 어려운거랑은 무슨 상관이예요"

"그러니까 세바스찬은 뻔하고 단순한걸 싫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금방 싫증을 내는거구요. 정을 붙이기도 전에 싫증을 내시니 좋아하는게 별로 없을꺼예요. 그러니까 매일 오메가를 갈아치우시는거구요. 매일 다른 사람이면은 싫증 낼 수 없으니까요"


예상치 못한 예리한 관찰력에 세바스찬이 놀랐다. 그건 세바스찬 스스로도 떠올려본적 없는 생각이었다. 확실히, 싫증을 잘내서 한 사람과를 오래 사귀지 못한것은 정답이었다. 왜냐면 너무 뻔한걸, 뻔한건 재미없는걸. 항상 같은사람, 항상 같은 패턴의 데이트, 항상 같은 패턴의 잠자리. 하지만 스스로가 싫증을 잘 내는 타입인것은 알았지만, 싫증을 잘 내기에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런 사람은 없었으니까.


"세바스찬은 정없는 사람은 아니예요. 정이 없었으면 가족들한테 그렇게 대하지도 못하겠죠. 그때 세바스찬의 어머님의 얘기를 듣고 생각했어요. 세바스찬이 제대로 된 연인을 만나지 못한 것은, 세바스찬이 정을 붙이기 전에 싫증을 안 낼 수 있는사람, 그러니까 세바스찬이 말한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을 못만난게 아닐까 하고요"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대답을 듣고있는 기분이었다. 세바스찬의 동공이 확대되면서 숨소리가 가빠졌다. 뚫어져라 크리스의 옆모습을 살펴보았지만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아, 이렇게 말하니까. 제가 엄청 세바스찬이 찾고있던 이상형 같네요. 싫증 안나는 어려운 사람. 아 아직 정을 안붙였으니까 탈락인가?" 그제서야 크리스가 배시시 웃으면서 세바스찬을 쳐다보았다. 아, 그러니까. 너무 갑작스럽게 정답을 알아버렸지만 그러니까. 세바스찬이 아무말도 못하고 껌뻑껌뻑 자신을 쳐다보자 크리스가 민망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바스찬의 속이 뒤틀리듯이 울렁거렸다.아니 울렁거렸다는 잘못된 표현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세바스찬은 지금 크리스를 보면서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있었던 것이었다. 온 몸에 열기가 쏟아 뇌가 어지러웠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세바스찬이 고개를 푹 하고 숙이고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그러니까 나, 크리스한테 반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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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존나 급전개...사실 마음만 같아서는 좀더 늘려트려서 화를 두개로 나누고 싶었는데.....

그러면 제가 이 연성을 중도포기할꺼같아서.......


(5)



그러니까 모든것은 호기심이 문제다. 세바스찬은 요 삼일 내내, 예행연습인 데이트가 끝나고 한번도 보지 못한 크리스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자꾸 펑펑 우는것이 생각이 나 마음을 참 심란하였다. 세바스찬은 이 현상의 이유가 크리스가 울었던 이유를 몰라서, 그게 궁금해서, 그래서 계속 생각나는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렇지않다면 이렇게 떠올릴 이유가 없었으니까. 세바스찬이 베개를 안고 침대를 왼쪽으로 떼구르르 오른쪽을 떼구르르 구르면서온 몸으로 자신의 심란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아 도대체 뭐야 뭐냐고 왜 운건데, 왜" 닿지 않는 질문을 세바스찬이 멍하니 중얼 거렸다. 이 질문의 대답을 듣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세바스찬이 그런 생각을 하다가 침대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알아야지!! 내가 누구 명예를 위해서 남자친구 행세까지 해주는데!" 크리스가 자신의 남자친구 행세를 해서 집에 방문해준다는 사실을 지워버리고 세바스찬이 저좋을 생각만 하였다. 그래도 어쩌면 오늘 들을수 있을지 모른다. 세바스찬이 힐끔 탁자위의 시계를 보았다. 새벽 5시 50분, 약 한시간 뒤면은 그는 자신의 고민거리의 장본인을 만날 수 있었다. 


항상 약속시간 10분전에 나오는 것이 습관이 된 세바스찬이 주차된 차에 기대어 담배를 피며 크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놀러가는것도 아니고 부모님 댁에 가는것이니 세바스찬의 차림새는 그 어떤때보다 간편하고 가벼워 보였다. 남색 반팔 티셔츠에 검정색 스키니진. 그래봤자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그가 못나보이거나 그런것은 아니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어느새 7시가 되었다. 데이트때 거의 정각에 도착하는 크리스를 생각하면 이제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것 같았다.세바스찬이 담배를 땅에 떨어트리고 발로 몇번 지져서 담뱃불을 껐다. "담배도 피셨어요?" 아, 역시. 약속시간에 맞춰서 도착했네. 크리스의 목소리에 세바스찬이 고개를 올렸다. "뭐 가끔식 폈어요"  그다지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세바스찬의 대답에 크리스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갈까요? 조수석에 타실꺼죠?"

"남자친구니까 조수석에 타야겠죠"


"잘 아시네" 훌륭한 크리스의 모범대답과 행동에 세바스찬이 피식 웃으면서 차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크리스도 반대편의 조수석 부분의 문을 열고 탑승하였다. "그렇게 멀진 않지만 그래도 두시간정도 걸릴꺼예요. 안전벨트 매세요" 세바스찬이 차에 시동을 걸면서 얘기했다. "안전운전이나 잘하세요" 크리스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하여튼 뻣뻣하기는... 이래갖고 가족들 앞에서 잘할 수 있을련지. 악연으로 뭉친 사이지만 그래도 한번 데이트 했다고 크리스에게 어느정도 친밀감을 갖고있는 세바스찬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 남자는 자신의 과거때문에 내가 삼일동안 고생한것은 알기나 할까? 괜시리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크리스. 좀 부드럽게말해줄수없......"


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


"누구세요?!!"

".........뭐라구요?"


세바스찬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좁은 차 안에 세바스찬의 비명과 같은 목소리가 울렸고 그 소리에 크리스가 저도 모르게 양 귀를 틀어막았다. "누..누구세요? 뭐예요? 크리스 에반스씨는요?" 과장된 연기를 하는 배우 처럼 세바스찬이 온몸을 파드득 떨면서 소리를 꽥꽥 높였다.


"아 시끄러워요. 왜이렇게 오바예요. 방금 눈 마주치고 인사 다하다가 왜 차안에서 이래요"

"아니, 그. 어. 음. 아? 면..면도했어요?"


분명 차 밖에서 크리스의 모습을 보긴 보았다. 그런데 세바스찬은 순식간에 크리스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그것은 세바스찬의 잘못이 아니라 뇌의 잘못이었다. 너무 당황한 인간의 뇌가 저도 모르게 크리스의 모습을 인식시키지 못하고 '우우움. 뇌는 저런사람 모르게쬬요. 아마도 크리스에반스씨인가봐요' 라고 인지시켜버렸고 덕분에 세바스찬은 차 밖에서태연하게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래도 똑똑한 뇌가 '아! 저 모습 많이 달라진 크리스의 모습이잖아!' 라고 인식을 해버렸고, 그제서야 세바스찬이 현재의 크리스의 모습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깔끔하게 수염을 면도하여 드디어 보인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 미남이었다. 모든 시선이 그 풍성한 수염으로 가서 알지 못했던긴 속눈썹, 해바라기를 담은 듯한 눈동자, 날렵한 얼굴선, 립스틱을 바르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빛을 내고있는 통통한 분홍색 입술. 남을 잘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저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한 세바스찬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미남이었다. 게다가 깔끔하게 단정한 저 머리는 뭐란말인가. 그의 모습은 더이상 옆집 취업울 준비하는 백수가 아니라 대기업 회사에 근무하고있는 훈남 대리와 같은 모습이었다. 세바스찬이 어버버하며 입을 떡 벌리고 크리스의 몸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몸과 맞는 새하연 셔츠는 크리스의 떡 벌어진 어깨와 큰 가슴을 눈에띄게 해주었고, 바로 얄쌍하게 들어나는 허리라인 또한 아낌없이 빛이났다. 그리고..그리고.. 세바스찬이 슬쩍 눈을 내리깔아 크리스의 바지 부분을 쳐다보았다.지금은 잘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 얼핏 봤을때 분명..분명......."스몰애스..." 세바스찬이 저도 모르게 중얼 거렸다. 


"지금 성희롱 하신거예요? 맞을래요?"

"아..아니..죄송합니다. 저도모르게 그만..아니...엄..엄청 잘생겼네요. 크리스"


그의 미모에 공격을 당한 세바스찬이 멍청이처럼 말을 더듬었다. 평소에도 이쁜 오메가와 잘생긴 오메가와 잠자리를 함께한 세바스찬의 태도 답지 않았다. 크리스가 다른 오메가들 보다 빼어나게 잘생긴 편이긴 하였지만 그래도 맨날 자기 얼굴을 보고 사는 - 세바스찬은 그래도 자기가 크리스보다 잘생겼다고 생각한다 - 세바스찬이 이렇게 당황할 정도는 아니었단 말이다.이건 갭(GAP)때문 일 것이다. 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니는 크리스와 지금 이 잘생기고 끝내주는 오메가와의 차이 때문에 시너지 효과로 더 흥분한것이다. 크리스는 오히려 놀라는 세바스찬이 이상하다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손을 들어 벌린 세바스찬의 턱을 살며시 닫아주었다."세바스찬. 이제 그만 출발해요. 괜히 그러니까 민망하잖아요" 전혀 민망해 보이지 않는, 그저 무표정인 크리스가 덤덤하게 말하였다. 그의 정적인 태도에 드디어 어느정도 정신이 돌아온 세바스찬이 "앗,네.네." 하고서는 핸들을 잡았다.  "어...? 이거..왜 갑자기 안움직이지..? 고장났나?" 급하게 차를 밟았으나 차도 세바스찬처럼 당황을 한 것이지 움직이지 않았다.뭐야, 비싼 차인데. 벌써 고장났나? 세바스찬이 기어를 올리면서 허둥지둥 차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의 모습을 크리스가 '정말 극혐이다' 라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보았다.


".......시동을 안거셨잖아요"

"..아.."


민망한 정적이 흘렀다.





"다왔어요, 내려요" 원래 운전을 하면 조수석에있는 사람이 매너있게 대화상대를 해줘야 하는게 아닌가? 차가 움직이자마자 10분도 안되서 잠이 든 크리스가 미워서 세바스찬이 조금 거칠게 어깨를 흔들며 그를 깨웠다. "으음..벌써요?" 살짝 침을 흘린것인지 그의 입술주의가 반짝반짝 빛을 내고있었다."차 막혀서 30분이나 더 걸렸거든요? 일어나요. 그리고 침좀 닦아요" 세바스찬이 툴툴 되면서 자신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크리스는 백미러를 보면서 자신의 입 주의를 닦고서는 조금 흐틀어진 자신의 머리를 탈탈 털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랑 데이트할땐 신경도 안쓰더니.... 자존심이 상한것인가 뭔가 울컥울컥 치솟는 화에 세바스찬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정원도 있고, 엄청 좋은 집이네요. 집이 잘 사나봐요?" 따라 내린 크리스가 바로 앞의 집을 보면서 감탄을 하였다. 이 근교는 대부분 주택가로 되어있는 곳으로 미국인들의 이상적인 집 모양새를 유지 하고 있었다. 큰 정원과 차고, 외관이 훌륭한 이층집. 이 일대의 집이 다 이렇게 생겨 개성이 없고 딱딱하다고 생각했던 세바스찬과 달리 크리스는 연신집이 좋다고 부산을 떨었다. "대출받아서 산거예요. 그냥 평범하게 살아요. 다행히 마당에 누가 나와있진 않네요. 준비는 되셨어요?" 세바스찬이 크리스에게 손을 건내며 물었다. "당연하죠" 크리스가 밍기적 자신의 바지에 손을 한번 닦고서는 세바스찬의 손을 잡았다. 이제부터는 개인 플레이가 아닌 협동 플레이였다.


"저왔어요" 세바스찬이 초인종을 누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미 30분정도 시간이 늦은 탓에 부모님이나 친척들이 집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조금 있자 쿵쿵쿵- 하고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오랜만......." 문이 벌컥 열리자마자 세바스찬과 크리스는 압도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놀람을 뛰어넘어 압도였다. 그러니까, 저 조그만한 문 사이로. 그냥 세바스찬의 어머님이나 아버님이 문을 열어주신것이 아니라. 족히 10명을 되어보이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서있었기 때문이다. "아..안녕하세요" 크리스가 겁에 질리듯이 인사를 하였다. 뒤에있는 친척들은 크리스의 모습이 안보여서 인지 폴짝폴짝 점프를 해면서까지 그의 모습을 보려고 안달을 내고 있었다. 스탠가의 사람들은 크리스의 말에 바로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들의 눈은 오로지 서로 잡고있는 세바스찬의 손과 크리스의 손에 집중되어있었다.그 시선에 민망한 크리스가 슬쩍 손을 빼려고 하였지만 세바스찬이 손을 강하게 잡아 실패로 끝이났다. "크리스! 어서오렴!" 그나마 얼굴을 뵈었던 세바스찬의 어머니가 혼자 문에서 폴짝 뛰어나왔다. 그러고서는 자신의 아들인 세바스찬을 옆으로 밀치고서는 와락 크리스에게 격한 포옹을 했다. "저기...아들한테 해줄 포옹은 없는겁니까?" 밀쳐진 세바스찬이 조금은 섭섭하다듯이 - 사실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다 - 말을 하였지만 그의 어머니는 세바스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어서오렴! 어서오렴! 다시 만날 줄 알았단다!!" 크리스는 격하게 자신을 안고 콩콩 뛰고있는 어머니에게 어떻게 할 줄몰라 자신도 살짝 콩콩 뛰면서 "저도 다시 만나서 기뻐요" 라며 만든 멘트를 날렸다."진짜다..진짜 세바스찬의 남자친구가왔어" 그의 친척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서야 웅성웅성 거리며 중얼 거렸다. 그러더니 "진짜다!!!!!! 진짜다 나타났다!!!!" 라고 환호성을 지르고 다같이 손을 흔들면서 "예!!!!!!" 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식구들의 민망한 행동에 세바스찬이 마른 세수를 하면서 크리스의 시선을 피했다. 크리스의 눈빛에는 '아오..저 망나니새끼' 라고 써있었기에 안본것이 다행일지도 몰랐다.



격한 환호성 속에서 크리스는 가족들 하나하나와 인사를 나누며 악수 및 포옹을 나누기 바빴다. 이미 찬밥신세가 된 세바스찬은 소파에 멀거니 앉아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크리스를 도와주기 위해 세바스찬이 그의 옆에 뻐팅겨서서 친척들을 제지해보았으나 이미 '진짜 세바스찬의 남자친구'인 크리스에 눈이 먼 친척들은 방해가 된다며 세바스찬을 이리저리 밀고더니 나중에서는소 파에 앉혀놓고 말았다. '크리스..힘내요...' 어쩔줄 몰라하면서 고개를 이리돌렸다 저리 돌렸다 하면서 대답을 하고 있는 크리스를 향해 세바스찬이 살짝 응원구를 던져주었다. "와아- 형. 난 솔직히 안믿었는데 진짜였다니" 크리스와 인사가 끝난 친척동생 조엘이 와서 세바스찬의 소파에 앉아 말했다. 남들보다 일찍 발현이 된 조엘은 이제 막 알파가 된 혈기왕성한 남동생이었다. "그러면 진짜지, 가짜냐? 왜들 이렇게 못믿는거야" 친한동생에게 세바스찬이 불만을 담아 투덜거렸다.


"못믿을 만도하지. 형이 맨날 오메가 갈아치우는걸 누가 몰라? 9살이었던 나도 알았는데"

".......그렇게 심했나"

"응..내가 알파로 발현되자마자 엄마랑 아빠가 절대 세바스찬형 처럼 되지 말라고 한시간 동안 설교했어"

"야..내가 잘나서 그런거야. 잘나서. 안 잘났으면은 어?"

"나는 형이 뻥친줄알았어. 그냥 원나잇 상대인데 고모한테 안 맞을려고 진지한 남자친구라고 입턴거라고 생각했어"


조엘이 세바스찬의 자화자찬적인 말을 자르고 냉철하게 아픈 부분을 찔렀다. 윽. 이자식 예리한걸. 방심하면 안되겠어. 세바스찬이 괜시리 조엘의 머리를 헝크러트리듯이 쓰다듬었다. 그의 집중을 분산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임마, 형을, 못믿어서, 되겠냐, 어, 좀 믿으라고"

"아 하지마! 하지마!!"


조엘이 웃으면서 세바스찬의 쓰다듬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양 손을 머리위에 올렸고, 세바스찬은 자신의 작전이 성공한것이 기뻐 따라 웃으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편 크리스는 친척들에게 둘러쌓여 이곳저곳에서 질문 공격과 칭찬공격을 받으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씨.....좀 도와주지. 지는 친척동생이랑 놀기도 하고. 새가슴이었던 크리스는 들키지 않을까 무서워 온몸이 긴장되는데 여유롭게 놀기만한 세바스찬이 얄미웠다. 


'아..진짜...못참겠으면 나 그냥 확 말해버릴꺼야! 정말!'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세바스찬의 어머니는 이 날을 위해 만찬을 준비했다며 긴 테이블로 식구들을 불렀다. "크리스는 내 옆에 앉지 않을련?" 처음부터 크리스를 이뻐하던 그의 어머니가 세바스찬의 옆자리가 아닌 자신의 옆자리에 톡톡 하고 쳤다."아..네!" 세바스찬의 옆에 앉아 시선을 받는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의 옆에 앉아 시선을 받는것이 덜 부끄럽겠다고 생각한 크리스가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에는 정말 만찬이라는 이름답게 로스트 치킨 부터 시작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자까지, 각양각색의 음식들이 펼쳐져있었다. "우와..너무 맛있겠어요"크리스가 저도 모르게 칭찬을 내뱉었다. 그러자 "허허허!! 애가 말도 참 이쁘게 하는구려!!!" "어휴!! 싹싹한것이 참 보기좋네요!!" "그래그래! 많이 먹을렴! 뭘 좋아하니! 여보! 거기 피자한조각좀 여기 줘봐" 라며 이곳저곳에서 크리스에 대한 칭찬을 쏟아 내고 있었다. 아 민망해, 민망해. 크리스가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세바스찬을 쳐다보았다. 세바스찬도 자신의 친척들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였고 너무 부끄러웠다. "거..그냥 먹어요...애 부끄러워 하잖아요" 세바스찬이 크리스를 도와주기 위해 중얼 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역효과였다. "아하하하하!! 벌써부터 자기 애인 챙기는 것봐! 어! 아주 그냥 잉꼬부부가 따로없네 잉꼬부부가 따로없어!!""애 부끄러워 하잖아요 라니 세바스찬!! 이녀석... 이녀석...!!"  이미 내 가족들은 미쳤다. 세바스찬이 쪽팔려 얼굴을 붉히고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이미 한층 울상을 진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시선을 응시하였다. '미안해요 크리스. 무리예요' 세바스찬이 친척들이 흥분한 틈을 타 입모양을 뻐끔 거리며 메세지를 전했다. '아니예요..괜찮아요...' 크리스 또한 입모양을 뻐끔 거리며 세바스찬에게 대답을 하였다.



"우리셉이랑은 어떻게 만났어요?" 점심 식사의 주제는 당연스럽게도 크리스와 세바스찬의 연애담이었다. 적응력이 빠른 크리스는 이미 어느정도 그의 가족에 익숙해졌고 이제 슬슬 연기에 물이 올랐다.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크리스가 수줍게 "사실 제가 세바스찬옆집에살아요. 그냥 자주부딪치다가 이렇게됐네요" 라고말했다.가족들은 크리스의 말한마디에 맞장구를치며 대화하기바빴다. "그래 원래 가까이살고자주보는 남자친구가 최고지"부터시작해서 "이건인연이아니라운명이다"까지. 진짜 세바스찬이랑 연관시킬 수 있는 말은 어떤 말이라도 다 뱉는 것 같았다.세바스찬은 초조하게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분위기를 살폈다. 가족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크리스에게 부담을주는것같아 신경이쓰였다. 하지만 크리스는 정말 훌륭한 연기자인지 아니면 정말로 부담스러운 것이 아닌지 세바스찬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가족들과 하하호호웃으며 말을 잘 이어나갔다. 어른들은 깊게 둘의 관계 - 그러니까 연애담 - 을 묻지 않고 이제 크리스에 집중되는 질문을 하였다. 나이는 몇살인지, 어디 출신인지 -  이미 그들이 방금 전 개개인적으로 다 들은 내용이었다 -아마도 나이먹은 어른들이 젊은 애들의 사랑이야기에 관심을 갖는것이 주책맞아 보일까 몸을 사리는 듯 했다. 복병은 따로있었다. "셉 형의 어디가좋아요?" 아직 어린 나이의 조엘이 맹랑하게 치고 들어왔다. 당황한 세바스찬이 자신의 발로 옆자리에 앉은 조엘의 왼쪽발을 꾸욱 하고 밟았다. 그딴걸 왜 묻냐는 뜻이었다. 조엘은 발의 아픔을 무시한채 생글생글 웃으며 "궁금해요. 크리스형!" 하며 미소를 지으며 물어보았다. 이새끼, 분명 저번에내가 게임세이브데이터를 덮어서 엿먹이려는 걸꺼야. 사실은 둘의 연애담이 궁금했던 나이 든 친척들이 입을 다물고 눈만 크리스 쪽으로 돌렸다. 그들의 머릿속을 상상해보자면 "나이스 조엘!"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바스찬은 불안에 떨며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안돼 여기서 욕하면 게임 끝나는 거예요 크리스. 아무리 제게 좋은점을 찾을 수 없었더라도 지어내서 얘기해야해요! 크리스!


세바스찬의 걱정과 달리 예상외로 크리스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살짝 살짝 홍조를 띄더니 "난감한데"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정말 자신의 귀여운 연인과 같은 행동이어서 세바스찬이 살짝 당황하였다. "음..다정해서..? 세바스찬이 진짜 다정하거든요" 뻔한말이지만 그의 부모님을 울릴만한 말이나왔다. 세바스찬도 그의 입에서 다정하다라는 칭찬이나와 조금 얼떨떨했다. 대답을 들은 아버지는 "맞아맞아 우리세바스찬이 다정하긴하지. 애가 너무다정해서 자꾸 오메가가꼬이는것뿐이지. 사실애자체는 그냥 다정하고착한애야! 암 그럼!" 그의 아버지가 눈에띄게기뻐하며 혼자 세바스찬의 칭찬을 하기시작했다. 크리스가 그말에웃으며 맞다고맞장구를치자 기분이좋은지 껄껄껄껄껄 하고식탁을 울릴정도로 웃었다. 이제 식탁에서는 웃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세바스찬은 여유롭게 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크리스를 보았다. 가슴..또 잡고있네.. 버릇처럼 가슴을 잡고 경쾌하게 웃는것이 왜인지 거짓 웃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식사가 끝난 뒤 어머니가 크리스를 데리고 세바스찬의 어릴적 사진을 보여주겠다며 거실로이끌었다. "우리집은 원래 설거지는 남자몫이거든" 그말은거짓이아니었다. 스탠가는 주로 알파와오메가로 분업을 하기보다는 드물게 여자와남자로 나누어일을하였는데 거의 칼과같이 반을 나눠서 가정일을하였다. 세바스찬이 맞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편히 쉬고있어요 크리스. 설거지 금방 하고 갈게요" 아무리 지금 까지 잘해 왔다 할지라도 세바스찬과 막상 떨어져 혼자가 되려니 크리스가 불안해하는것같았다. 그러나 가족의 룰까지 깨버려 세바스찬과 함께 있겠다고 말할 수 없는 크리스는 "알겠어요 일찍 끝내고 와줘야해요?" 라며 세바스찬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뭐야, 뭐야. 왜 소..소매를. 세바스찬의 속이 갑작스레 울렁울렁했다. 이러니까 기분이 정말 묘하잖아, 진짜..진짜 연인 사이 같잖아. 얼굴이 붉어지려는 세바스찬이 괜히 흠흠 헛기침을 하고 "알겠어요" 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러고서는 바로 뒤를 돌아 성큼성큼 부엌을 향했다. 연기를 얼마나 잘하는거야. 애꿎은 앞머리를 잡아당기며 세바스찬이 혼란스러운 자신의 정신에게 소리를 쳤다. 


"이열 형 좋나봐?"


부엌에 도착하자 이미 장소에 있었던 조엘이 깐죽거리며 말했다. "너 이자식! 잘만났다!" 세바스찬은 조엘이 도망가기 전에 그를 붙잡아 헤드락을 걸었다."야 거기서 그런걸물어보면어떻게해! 부담되잖아!" 조엘이 목이 조인상태로 깔깔웃으며 "내가뭘?!내가뭘?!"하며 더더욱깐죽거렸다. "이자식이" 세바스찬이 더욱 힘을주어 목을조르자 항복항복 하며 조엘의 웃음섞인소리가 들렸다."조엘! 세바스찬! 놀지말고 빨리뒷정리해!"고무장갑을 끼면서 설거지를 하고있는 아버지가둘을 나무랐다. 세바스찬이 조엘의 헤드락을 풀고 아버지에게도 입을 삐쭉 내밀며 항의하였다. 


"아버지도 그래요! 거기서오메가가 잘꼬인달얘길하면어떻게해요! 크리스가 절 뭘로보겠요!"

"아니 내가뭘그랬다고..그리고 걔도어느정도알고있지않니?"

"아 ..알긴아는데 그래도 쫌..! 절 망나니같은사람으로볼거아니예요"


세바스찬의 그동안 저의 행동을 신경쓰지도않고 괜히 아버지에게투정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동안 자기가한짓이있어서 크리스가 자길이상하게보는것은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확인사살까지 할 필요가있나? 싶었다.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더 엉망이될꺼같아 마음이 편치않았다. 조엘과 아버지는 괜시리 저들에게화풀이하는 세바스찬을 보면서 어이가 없으면서도 신기하여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삐쭉 내민 세바스찬을 쳐다보았다. 저 마이웨이 세바스찬이 누구 눈치를 보고있다니. 지금까지 오메가 라고는 일주일은 넘게 사귀지 못하며 제멋대로 굴던 그 세바스찬이 한 오메가에게 저러다니!  조엘은 놀라움이 컸고 아버지는 기쁨이 컸다. 세바스찬이 혼자 씩씩 거리며 고무장갑을 끼우면서 "다음부터는 조심히 해주세요. 진짜.." 라는 철딱서니 없는 말을 내뱉었다. "이게 어디다대고 화풀이야 응?" 그러던 중 뒤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들렸다. 부엌이시끄러워서 와보니 세바스찬이 말도 안되는걸로 투정을 부려 야단을 치러 온것이었다.  하지만 그를 야단치는 목소리엔 엄숙함보다는 어딘가 기쁨이 깃들어져있는것같았다. 그를 낳고 27년간을 키운 그녀였지만 세바스찬이 한 상대방에게 이렇게 목 을 메는걸 본건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자신과 똑같이 얼떨떨해하는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끄덕였다. 절대 저 크리스라는 남자를 놓치면안되겠다는 둘만의 신호였다. 


"그보다 세바스찬 넌 이제니방으로올라가라" 

"왜요.아직 설거지 안 끝났는데"

"지금 크리스 니 방에혼자있어.  여기와서 부담되었을텐데 가서 좀풀어주고와"


크리스가 내방에 혼자 있다고? 세바스찬이 냉큼 자신의 고무장갑을 풀었다. 


"..내방에들어오지마요"

"그정도로 눈치없진않다"

"몰래엿듣지도마요"

"....아쉽구나"


그말을 마지막으로 세바스찬이 뛰듯이 계단을 올라갔다. 폭풍같이사라지는 그를 보고 어머니가 피식 웃으며 자신의 남편의 옆으로가 어깨를 기대었다.


"아까 크리스가 뭐라고했는지 알아요? 제가 세바스찬이직업도 없는데 괜찮냐니까 사랑하니까 상관없다고한거있죠?"

"아니 우리 아가가 그런말을했어?"


이미 크리스를 자신의 사위라고 인정한 아버지가 그가없을때를틈타 -부담이될까봐 눈치를 보고있었다- 아가라는호칭을사용하였다. 그말에 어머니가 호호웃으며 "그랬다니까요" 하며 맞장구를쳤다.


"뭐 크리스도 직업이없다지만 둘이사랑만하면되죠. 애가어쩜 그렇게 예의가바른지. 얼굴고이쁘고 성격도좋고 세바스찬이 어떻게저런애를데려왔나몰라요 호호호"

"거 들어보니 예전에 좋은 회사에서 일했다던데? 지금은 이직 준비고. 애가 똑부러졌어! 아주 그냥, 우리 세바스찬과 달리"

"원래 한쪽이 어물쩡 하면 한명이 똑부러져야지 잘맞는 환상이야 환상의 짝궁. 이거 금방 손주얼굴 보겠어!!"


조엘이 서로 하하호호 웃으며 미래를 꿈꾸는 그들의 고모와 고모부를 못말리겠다듯이 쳐다보았다.






"크리스, 여기서 뭐해요"

독립을 하기전까지 자신의 방이었던 다락방에 올라가자, 크리스가 자신의 침대위에 누워있었다. "너무 피곤해요......" 크리스가 베개에 얼굴을 묻어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나왔다.세바스찬은 살며시 그의 옆에 앉았다. 정말 피곤한 것인지, 상태가 어떤 것인지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뒤돌아 있었기 때문에 살펴볼 수 없었다.  세바스찬이 살며시 고민 하다가 손을 올려 크리스의 뒷 머리를 쓰다듬었다.혹시 바로 내치지 않을까 걱정하였는데 피곤해서인지 크리스가 그냥 가만히 세바스찬의 손을 냅두었다. "저희 가족들이..좀..많이 피곤하긴하죠? 제가..좀 속썩인게 많아서" 부들부들한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왔다.쓰다듬 받는 것도 아니고 쓰다듬는것 뿐인데 어쩐지 세바스찬의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들 좋으신 분이예요..." 또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음이 뭉쳐지는 것이 뭔가 어린아이가 말한 것 같아 귀여웠다.


"다들 좋으신 분이죠"

"...그러니까 그만 속 썩이세요"


크리스가 결국 세바스찬을 향해 한마디를 내뱉었다. 지금까지 개새끼니소새끼니뇌가아랫도리에 달렸다느니 험한 말은 다 들었지만 그 어떤 욕보다 가장 세바스찬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예전과 같았으면 제가뭐요!? 뭐요?! 하면서 소리를 높였을텐데 세바스찬은 지금의 크리스에게는 왜인지 그렇게 하지 못했었다. 계속 크리스의 뒷 머리를 쓰다듬으며 세바스찬이 물었다. "...아까 다정하다고 한거 뭐였어요?" 점심식사때 세바스찬의 어디가 좋냐는 질문에 크리스가 한 대답이었다. "아 그거야?" 크리스가 웃기다듯이 웃었다. 뒷머리가 살짝 떨리는것이 세바스찬의 손에 느껴졌다. "사실 할 말 없어서 말한건데, 너무 식상했나?" 할말 없어서 말한건데. 세바스찬이 쓰다듬는 손길을 멈추었다. 아, 뭐지. 이 기분. 왜 섭섭하지. 


몇 달을 걸쳐 방 하나를 두고 전쟁을 하는 저와 크리스의 사이다. 크리스가 저를 안좋게 보는것도 뻔히 알고 있었고 당연했다. 비록 삼일 전, 데이트를 하고 그를 위로해주긴 하였지만. 하긴, 크리스가 자신한테서 다정함을 느낄 리 없지. 아니 그런 순간도 내가 보여준 적이 없었지.세바스찬은 왜인지 아픈 가슴을 꾹 참고 다시 손을 움직여 크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것 같았어요" 크리스가 자신의 표정을 못봐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바스찬은 지금 그 어느때보다 표정관리가 힘들었다. 그렇게 둘이 아무말 하지 않는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어쩌면 크리스는 이 상태로 잠이 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바스찬은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었다. 그러고서는 살며시 크리스의 어깨를 잡아 크리스를 돌렸다. 이대로 베개에 코를 박고자면은 숨이 막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바스찬이 예상했던 대로 뒤집으니 크리스가 눈을 감고 색색 숨을 고르고 있었다.가족에게 그렇게 시달렸으니 피곤할만도 했다. 세바스찬이 자신의 옷장을 열어 얇은 이블울 꺼내 그의 몸에 덮어주었다. 어깨까지 잘 덮어질 수 있게 세바스찬이 몸을 숙여 크리스의 어깨주변까지 이불을 올렸다. "...갑자기 왜 잘해줘요?" 자고있을꺼라 생각했던 크리스의 몽롱한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올리니 바로 눈앞에 크리스의 얼굴이 보였다. 눈에 졸음끼가 있어보이는 것이 잠이 들다 세바스찬의 행동에 깬 것 같았다. 


"제가요?"

"..왜 쓰다듬고 이불 덮어줘요"


크리스는 몽롱한 정신이어서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세바스찬이 그 자세에서 움직이지 않고 크리스를 응시하였다. 크리스가 숨을 내뱉자 뜨거운 김이 세바스찬의 입술을 간질였다. "크리스는 제 남자친구잖아요" 세바스찬이 전과 같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목소리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고 한치의 거짓말도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말에 크리스가 푸흐..하고 작게 웃었다. "....데이트때 처럼 말이죠." 크리스가 입을 움직일때마다 살짝 올라가는 입술이 세바스찬의 입술과 닿을 것 같았다.아...크리스의 향이 맡아진다. 세바스찬이 침대에 손을 올리고 크리스를 가두고 있는 형태에서 꼼짝도 안하고 계속 그렇게 크리스를 내려다 보았다. "..저도 그럴 줄 알았어요" 크리스가 나지막히 그렇게 말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금 뒤에 색색- 하고 숨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잠에 든것 같았다. 세바스찬은 잠이 든 크리스를 두고 그 상태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전과 마찬가지로 그냥 평범한 세바스찬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달랐다. 크리스를 쳐다보고 있는 눈동자 그것 하나만이 달랐다. 세바스찬은 크리스가 잠들고 나서도 한동안 계속 그렇게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코가 맞닿을 거리였다.





저녁은 바베큐 파티였다. 오늘 하루를 그냥 기념일로 삼을 작정이었던 친척들은 공원에 바베큐를 구우면서 부어라 마셔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또 찬밥인 세바스찬은 조금 구석진 곳에 가서 남몰래 조엘에게 술 한잔을 쥐어지고 홀짝이고 있었고 - 조젤은 세바스찬의 이런 면을 대단히 좋아했다 - 크리스는 또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이 고기 저 고기를 입 안에 잔뜩 담아 우물거리고 있었다. "우와....형, 크리스 형좀 구해봐 저러다 죽겠어" 맥주 한잔이 들어가 알딸딸해진 조엘이 혀를 꼬며 말했다. 역시 아직 애여서인가 맥주 한 잔에 벌써 취해있었다. "내가 가봤자 역효과만 날 뿐이야.." 세바스찬이 자신의 맥주를 들이켰다.그래, 자신이 가봤자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이미 알코올이 들어간 친척들은 판단력이 흐려져있을테고 무서운게 없을터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은 '술에 취했으니까' 라는 변명으로 세바스찬과 크리스의 연애담을 듣겠다고 소리를 지를지도 몰랐다. 다가가지 않아도 뻔히 보였다. 세바스찬이 기댄 벽에서 일어났다. 아직 조엘과 술을 기울이기에는 그는 너무 어렸다.


"어디가?"

"잠깐, 담배"


세바스찬이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들고 흔들었다. 순간 조엘은 그 모습이 너무 알파다워서 멋있다고 생각하였다. 역시 비쥬얼이 깡패야...망나니라는 소리를 몇십번이나 들었지만 순간순간 알파로서 세바스찬에게 동경하는 마음이 생기는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녀와, 괜히 고모나 고모부한테 잡히지말고" 세바스찬이 조엘의 말에 고개를 뒤로 돌리고 빙긋 웃었다. 그러고서는 천천히 집을 돌아 뒷마당을 향했다. 


뒷마당은 아무도 없어 조용하였다. 앞마당에서 파티하는 소리가 들려 떠들석 한 목소리가 들리긴 하였지만 그래도 훨씬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세바스찬이 잔디 위에 풀썩 하고 주저 앉았다. 그리고서는 담배 하나를 물고 불을 붙였다. 세바스찬은 어릴 때부터 종종 이렇게 뒷 마당에 나와서 부모님 몰래 담배를 피우곤 하였다. 등장 밑이 어둡다고, 그들은 세바스찬이 훨씬 외진곳에서 담배를 피면 귀신같이 찾았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뒷마당에서 피는것은 찾지 못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자 수만개의 별이 보였다.괜히 감성적인 기분이 된 세바스찬이 담배를 손에서 빼고 후- 하고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일은 예상외로 척척 진행되었다. 들킬지 모른다 어쩐다 하면서 데이트 했던 것이 바보같았던 것 처럼 크리스는 연기를 훌륭하게 해주었고 가족들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이제 몇달 뒤에 부모님에게사실 크리스와는 헤어졌다. 며 울적한 전화한통이면은 모든일이 끝날 것이었다.


"....예상외로 싱겁게 끝나네"


끝나는 것이 당연한데 그것이 왜인지 세바스찬의 기분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이게 다 크리스 때문이다. 왜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거야. 세바스찬이 오늘 하루내내 가족들을 대하던 크리스를 생각해보았다. 정말로 그는 자신의 남자친구와 같았다. 한번도 자신의 제대로 된 연인을 만들어 본 적이 없던 세바스찬이 연인을 가족에게 소개하는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세바스찬은 모든게 서툴렀다. 가족들에게 그를 빼낼 방법도 몰랐고 어떻게 소개할 지도 몰랐다. 그런데 크리스는 달랐다. 그는 알아서 척척 가족들을 예의바르게 대했고 어른들에게 쉽게 점수를 따는 방법도 알았다. 문득, 이게 크리스가 훌륭한 연기자가 아니라 어쩌면 정말로 이랬던 적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자신의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의 집에 가서 진짜로 자신을 가족들에게 소개하는 거 말이다.그렇게까지 생각이 나아가자 기분이 더 나빠졌다. 크리스가 정말 자기 남자친구도 아니면서 뺏겼다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뭐해요?" 그렇게 혼자 울적이고 있자, 마음속으로 내내 그려왔던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인가 싶어 고개를 올려보자 크리스가 맥주한캔을 들고 비틀비틀 거리며 서있었다."세바스찬의 비밀 장소같은거예요? 헤헤" 그가 세바스찬의 옆에 풀썩 앉으며 말했다. 술에 취하면 웃음이 헤퍼지는지 계속 빙긋빙긋 웃고있었다.


"많이 취했어요?"

"조금? 조오오오금?"

"조금이 아닌거 같은데요"

"몰라요. 고기랑 술을 너무 많이줬어요. 그래서 잠깐 피했어요"

"어이구, 그 가족들을 어떻게 뚫고 왔어요"

"세바스찬에게 간다고 하니까 순순히 보내줬지롱"


줬지롱.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어린아이와 같은 말투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술에 취하기는 많이 취했나보다. 세바스찬이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담배를 땅에 비벼 껐다. 아직 반 정도 남아있지만, 크리스를 배려해서였다.크리스는 막상 세바스찬의 곁에 오긴 하였지만 딱히 할말은 없는데 앉아서 벌컥벌컥 자신의 맥주를 마셨다. 세바스찬도 딱히 크리스에게 할말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그의 옆에 앉아 조용히 별을 바라보았다. "저기요, 그때 미안했어요" 옆에서 뜬금없는 사과가 들려왔다. "뭐가요?" 세바스찬이 계속 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떼..다 세바스찬 탓이라고 했던거요. 그러면 안되는 거였는데" 크리스는 아마도 그 일이 마음속에 계속 남아있었나보다. 세바스찬이 작게 웃으며 "아니요, 저도 진짜 안말해줬잖아요. 제 잘못도있죠" 라고 말했다.그 말에 크리스가 갑자기 "그만!" 이라고 소리쳤다.


"네?"

"데이트 할때처럼! 그러지마요! 그만!"

"데이트 할때처럼이라뇨?"

"그거 있잖아요. 어울리지도 않게, 막.막. 저 챙겨주는거요. 배려해주는거. 그거. 차라리 맞아요 니탓이예요 라고 말하라구요. 세바스찬 원래 저한테 그랬잖아요"


크리스가 씩씩 거리면서 내뱉었다. 세바스찬도 크리스의 말에 정곡을 찔렸다듯이 몸을 굳혔다. 그러게, 나 왜 지금 크리스한테 저런말을 했지. 데이트 상대방에게만 했던 인위적인 배려와 매너가 저도 모르게 크리스에게 튀어나왔다. 세바스찬이 자신의 앞머리름 만지면서 평정을 가장 하였다. 데이트를 해서 몸에 밴건가? 스스로도 곡할 노릇이었다. 크리스는 씩씩 거려서인지 아니면 술에 취해서인지 얼굴이 붉어져있었다. 그는 세바스찬에게 그렇게 내뱉고서는 다시 술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제가 그때 왜 도망쳤는지 알려줄까요?"

"..진짜로 알려주게요?"

"네. 진짜로요. 그때 궁금해 했잖아요"


세바스찬은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엘레베이터에서 원래대로 행동하겠다고 일부러 크리스를 약올렸던 것이 생각이 났다. 아, 그때 왜그랬지. 세바스찬이 얘기하기 힘들면 안해도 되요. 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그러다간 크리스에게서 또 위선부리지마라며 혼날 꺼 같았다. 하지만 이건..이건 진짜 일부러 그런것이 아니라 진짜였다. 미칠도록 궁금하긴 하였지만 크리스가 힘들다면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다른 사람들은 다 내가 차였다고 생각하니까. 그냥 세바스찬만 알아줘요. 내가 차인게 아니라 찬거라구요"

"....혹시 회사에서 누구랑 사겼어요?"


세바스찬이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사겼어요? 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입안이 까끌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같은 부서 팀장이랑요" 크리스가 그 말을 끝으로 단숨에 자신의 맥주캔을 비웠다. 팀장이랑. 크리스는 몰랐지만 세바스찬도 회사를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도 백수생활을 하기전에 어엿한 직장인 이었고, 그렇기에 사회생활도 잘 알았다. 그래서 '오메가'인 '부하직원' 크리스가 아마도 '알파'인 '팀장'과 사귀었다는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말하지 않아도 잘 알았다. 


"근데요..멜리사도 그렇고, 다른사람도 그렇고 다 제가 차였다고 생각한다니까요? 웃기지 않아요? 아 원래 사귄건 비밀로 사귀었지만, 회사내에 뭐 알음알음 아는게 있어요. 완전한 비밀이라는건 없거든요"


크리스가 맥주캔을 잔디위에 올려놓고, 손으로 공기를 훠이훠이 저으며 열변을 토했다.


"헤어져서 나온거예요?"

".......그렇죠. 뭐. 세바스찬은 직장생활 해본적 있어요? 없어도 뭐 회사를 주제로 한 드라마는 봤죠? 그게 참 그래요. 같은회사에 있기가. 원래 전남친을 보는게 힘들긴 힘들지만. 그거랑은 차원이 달라요. 그러니까 그새끼는 팀장이라구요? 전 대리인데. 팀장에게 밉보이는 거잖아요. 진짜 공기가 완전 달라져요. 물론 그새끼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긴 했지만. 이미 알음알음한 사람들이 막-막 저를 힐끔힐끔 쳐다보고.막 저는 이리휩쓸리고 저리휩쓸리고. 소문에 시달리고. 그새끼는 팀장이란 이유로 아무 영향도 안받는데. 배알꼴리게 저만 그러고"


술에 취해서일까 아니면 전남자친구의 이야기여서일까 크리스의 말이 점점 험악해졌다. 사실상, 헤어졌다,차였다의 개념을 잘 모르는 세바스찬에게 있어서는 공감하기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면 그에게 헤어진다는 것은 다시는 안본다였고 다시는 생각 안한다였고 우연히 마주쳐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회사생활은 조금 알았기에 크리스가 어떤 부분에 난처해했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알파여서 오메가인 그의 입장을 전부 이해하기 힘든것을 감안해서 생각하면 크리스는 아마도 세바스찬이 생각한 것보다 더한 곤란함을 회사에서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그래서 그냥 확 나와버렸죠. 여기 아니면 내가 일할 곳 없는 줄아냐? 더러워서 안한다!"

"그랬군요"

"근데..근데 좀 이 욱한 성질좀 버려야겠어요. 지금 봐요. 취직 안되서 이러고 있는거. 이직은 결정되고 나오는 건데"

"그래도 그 욱한 성질때문에 지금 제 남자친구 하시잖아요"


세바스찬이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스스로의 발언에 또 한번 스스로가 놀란 세바스찬이 하늘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리고 바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마치 지금의 발언은 크리스의 욱한 성격에 고맙다고 말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크리스는 그 말에 "하하하 그렇네요 하하하 빌어먹을" 하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다행히 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왜 헤어졌는지 물어봐도 되요?" 요는, 크리스가 그 팀장이라는 남자와 헤어져서 회사에 있기 곤란해져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 빠진것이 있었다. 둘이 헤어진 이유. 무슨 이유로 헤어진지 몰라도 크리스의 주장한 대로라면 "크리스가 찼다" 크리스는 왜 팀장을 찼을까? 그것도 궁금 하였지만 그가 회사애 있기 곤란해질것이 뻔한데, 그러니까 계획적으로 이직을 준비하고 헤어지는 루트를 밟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마 크리스가 그런것을 잘 생각 안하는 성격도 있었지만 아마도 뭔가에 욱해서 헤어지자고 말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크리스를 욱하게 만들었던 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아무리 전 남자친구에게 엉망인 꼴을 보여주기 싫다는 것은 어느정도 이해해도 크리스가 레스토랑에서 그렇게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도망친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차인것도 아니고, 찬 사람이라면 그래도 어느정도 당당한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까지 했던거였을까.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질문에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입을떼었다.


"청혼 받았거든요"

".........네?"

"결혼하자고 그러더라구요"

"..저기,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그러니까 청혼을 받아서 헤어졌다구요?"

"네"


크리스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분명 앞뒤문맥이 맞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이해를 하지 못한 세바스찬이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띄우고 크리스를 쳐다봤다. 어디가 크리스가 욱할 포인트 인지 몰랐다. 


"청혼이..마음에 안들어서 욱 하고 차버린거예요?"

"...아뇨..솔직히 청혼 자체는 기뻤어요"


이건 또 예상외의 말이다. 기뻤다니. 세바스찬의 속이 살짝 뒤틀리는 것 같았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회사 입사하자마자 사귀었거든요. 뭐 병아리 같은 저를 그새끼가 낚아챈거나 다름없죠. 저 인기 많았거든요? 진짜로요. 여튼 사겼어요. 사겼다구요. 그 레스토랑에도 가고 거기 그새끼 단골집이거든요"

"아하.."


어쩐지 안색을 굳혔다 싶었다.


"사귀는건 나쁘지 않았어요. 아니 좋았어요. 연애 처음은 아니었지만 제일 좋았어요. 아씨. 이미 전 남친이긴한데 진짜 다 좋았었어요. 가치관도 잘 맞고 사고방식도 잘 맞았고. 사실 저희 둘, 둘다 야근하다가 눈맞은거거든요. 그땐 그새끼가 팀장이 아니었는데. 여튼"

"둘다 일 좋아하는 괴짜였군요"

"크큭. 네. 여튼 성격도 잘맞았고 그랬어요. 제가 사실 연륜있는 알파를 좋아하거든요. 그러니까 좀. 좀 어른스러운 알파요. 약간..좀 무서운 알파? 아 이러니까 좀 변태같은데. 전 좀 강압적인 느낌을 좋아해요. 아버지 같다고 하면 다들 대디이슈라고 놀리는데..아 몰라 여튼 진짜 그런 사람한테 끌리던데. 딱 이상형에 들어맞기도 했어요"


크리스와 가치관도 잘맞고 사고방식도 잘 맞고 어른스러운 알파. 세바스찬은 크리스를 정반대의 남자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진짜 정 반대의 남자는 그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은 세바스찬은 크리스의 이상형과 정 반대의 사람이라는 것이었다.크리스는 이제 이래저래 그남자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다. 분명 헤어졌다고 말한 주제에 내용의 절반이상이 칭찬이였다. 주어는 그새끼였지만 키가크다, 머리가 좋다, 예의바르다 등이 딱봐도 칭찬이었다. 왜인지 울화통이 터질것 같은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말을 잘랐다.


"그렇게 좋으면서 왜 헤어졌어요. 결혼하지"


그 말에서야 크리스가 말을 멈추었다. 아, 건드리면 안되는 부분이었나? 세바스찬이 아차 싶었다. 


"..고했거든요"

"..네?"

"저한테 일 그만두라고 했거든요"

"..일을 그만 두라고 했다고요?"


만약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상황이었다면 땡큐! 란 소리와 함께 반지를 덥석 받아 자신의 넷째 손가락에 끼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바스찬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진 크리스에게서는 그 말은 정말로...기분나쁜 소리였겠지.


"그새끼가. 와. 진짜 다시 생각해도 웃긴새끼네. 여튼. 결혼하자고 했어요. 그때 그새끼 결혼 적령기였거든요? 나이가 딱 알맞았어요. 여튼 집에 압박도 있었고 시기도 알맞고 팀장으로 승진했고 그래서 결혼하자고 한거같아요. 근데 그거까진 좋은데. 진짜 청혼받은것도 좋았는데. 제가 청혼을 거절했어요. 전 더 일하고 싶었거든요. 저 28살이잖아요. 아직 막 막 막 일할 시기잖아요? 자기 캐리어도 쌓고. 그래서 결혼을 좀 미루자고 했거든요? 근데 그새끼가. 막. 어차피 결혼하면 일 그만둬야할텐데 무슨 소리냐는거예요"


크리스가 자신의 빈 맥주캔을 들고 힘을 주어 꾸겼다. 


"그래서 제가. 아니 왜 일을 그만두냐고. 나 일 안그만둘꺼라고. 니가뭔데 내 일을 그만두게하냐고 그랬거든요? 근데. 와 진짜. 걔랑나랑 잘통해서 만난거였다니까요? 저도 걔도 일에대해 프라이드도 있었고. 둘다 더 일하고 싶어했어요.그러니 절 잘 알았을꺼아니예요? 근데 저한테 일을 그만두라는거예요."

"진정해요 크리스"

"진짜.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그래도 헤어질 생각까지는 아니었거든요? 그땐 아직 좋아했으니까. 그러니까. 헤어질 생각까지는 없었단 말이예요. 근데"


크리스가 갑작스레 울먹이기 시작했다. 설마 싶어서 크리스를 바라보자 크리스가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새끼가 저한테. 아 진짜. 어차피 오메가로는 높은 자리까지 못 올라간다고. 안된다고.그러니까 자기랑 결혼하고 일 그만두라고 하더라구요. 와 진짜. 서러워. 내가..내가 얼마나 야망있는지 알면서"

"알았어요. 크리스 뚝해요. 왜 맨날 울어요"


세바스찬이 또 손으로 크리스의 뺨을 문질러 주었다. 축축한 눈물이 세바스찬의 손등을 타고 흘러들었다. 


"진짜..진짜. 그 소리 많이 들었거든요? 어차피 오메가니까. 같은 오메가한테도 들었어요. 오메가는 그렇게까지 못해. 아 근데. 진짜. 내가 그새끼 만큼

열정있는 사람인데. 아니. 어떻게 나한테 그런말을 해요? 그래서 그냥. 헤어지자고. 헤어지자고 소리 질러버렸어요. 근데 아 씨. 그렇게 일 하겠다고 헤어지고 회사도 뛰쳐나왔는데. 그랬는데. 씨. 아직 일도 못찾고 그새끼랑 그런꼴로 마주치고"

"알았어요. 정말 나쁜 사람이네요. 크리스 뚝해요. 네?"


세바스찬이 손에 힘을 주어 크리스의 고개를 자신의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는 크리스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왜이렇게 자주 우세요" 세바스찬이 엄지손가락을 문질렀다. 크리스는 그런 세바스찬의 손을 피하지 않고 킁- 하고 코를 삼켰다. 그의 풍성한 부채꼴 모양의 속눈썹이 부들부들 흔들렸고, 앙 다문 입술을 울음을 참으려는 듯 서로를 꽉 물고 있었다. 아, 예쁘다.세바스찬이 크리스가 슬퍼 우는것을 잠시 잊고 그렇게 생각하였다. 살짝 상기되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하늘위의 별을 쏟는것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이렇게 느끼한 생각을 하려는게 아닌데. 그러니까.너무 예뻤다. 세바스찬이 손짓을 멈추고 우는 크리스의 볼을 그냥 잡기만 하였다. 속이 또 울렁 거렸다. 지금 이렇게 그의 볼을 잡고 마주보고 있으니까, 마치 입맞춤을 하기 전의 모습같았다.


"..크리스..다음부터는 면도하지마요"


이게 다 오늘 너무 이쁘고 잘생기게 온 크리스 탓이었다. 세바스찬은 이제 크리스를 향한 자신의 모든것을 크리스 탓으로 하기 마음 먹었다. 그러니까 세바스찬이 크리스에게 입맞춤을 하고싶은건크리스 에반스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잘생기고 이쁜 오메가에게 입맞춤을 하고 싶은 감정이랑 똑같은거라고. 세바스찬이 천천히 크리스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했다. 크리스는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것인지 그런 세바스찬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훌쩍이고 있었다.




"고모!!!!!!!!!고모부!!!!!!!!!!!!!!!!!!!!!! 크리스 형 울어요!!!!!!!!!!!!!!!!!!!!!!!!!!!!!!!!!!!!!!!!!!!!!!!!!!"




분위기 좋은 타이밍에 갑작스레 조엘의 목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란 세바스찬이 크리스에게 손을 떼고 오른쪽 방향을 쳐다보았다. 뒷마당을 보고 서있던 조엘이 앞마당에있는 친척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뭐?!?!?!! 세바스찬 너 이노무새끼!!!!!!! 여보!! 야구방망이 어딨어!!!!!!!" 앞마당에서 무서운 소리가 들렸다. 놀란 세바스찬이 벌떡 일어나 상황을 살폈다. "여보!!! 야구뱡망이가 뭐예요!! 여기 골프채!!" 골프채!? 미쳤어?! 세바스찬이 서있자 집의 옆길 쪽에서 정말로 아버지가 골프채를 들고 뛰어오는것이 보였다. 


"잠깐!! 잠깐만요! 오해예요!!"

"오해는 무슨 오해야. 이노무새끼. 내가 잘좀 해보라고 말했는데 또 울려? 오늘 다리몽둥이 한짝 나갈줄알아라"

"아니!! 진짜 제가 울린거 아니라니까요!! 크리스!! 뭐라 말좀 해봐요!!"


세바스찬이 뒷마당을 빙빙 돌아 아버지를 피하면서 크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크리스는 그 광경을 보고 푸하하 웃음을 짓기만 할 뿐이었다. 어?!어?! 저사람이!?그러더니 크리스는 도망다니는 세바스찬을 향해 메롱 하고 혀를 한번 내밀고서는 앞마당쪽으로 향해 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당장 크리스에게 달려와서 무슨일이니 크리스 하며 달래주기 시작했다."저기!!저기요!! 저 진짜 맞아죽을지 모르거든요!!" 세바스찬이 마지막 sos를 던졌지만 끝내 크리스는 뭐라 말한마디 해주지 않았다. 아악. 내가 미쳤지. 저런 사람이랑 입맞춤을 하려고 하다니. 세바스찬이 헐레벌떡 도망치면서 속으로 자신을 저주했다. 



스탠가의 집, 앞마당에는 고기굽는 소리와 웃는 소리가 들렸고 뒷마당에는 서로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두 남자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리고 세바스찬의 주머니에는 사실 아직 깨끗한 손수건이 있었다.




-



"멜리사 저랑 잠깐 얘기좀 할 수 있을까요?"


퇴근을 하려던 멜리사가 붙잡는 소리에 바로 뒤를 돌았다. 늘 항상 싱글벙글 웃는 멜리사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서는 살짝 얼굴을 굳혀졌다.


"엇..! 티..팀장님 왜요? 혹시 실수한거라도"

"아니 실수한건 없는데, 확인하고 싶은게 있어서요"

"네? 뭔가요?"

"크리스에 대한 소문 말이예요. 다들 멜리사한테서 들었다는데 사실이예요?"


크리스? 소문? 워낙에 소문을 많이 알고 퍼뜨리는 멜리사가 어떤 소문인지 감을 못잡는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크리스씨가 아주 잘생기고 똑똑하고 돈 많은 남자친구를 사귀었다는거요"

"아! 그거요!"


크리스의 소문을 믿는것은 아니었다. 소문을 몰고 다니는 그녀는 소문에 너무 살을 붙여 거의 이야기를 만든다는 수준으로 과장을 한 것이 많았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였고. 크리스가 그렇게 빨리, 자신을 잊고 새 남자친구를 사귀었을리가 없다는 것이 두번째 이유였다. 그는 지금까지 크리스의 소문을 아마 곤란한 상황에서 멜리사를 만난 크리스가 그냥 옆에있던 친구를 남자친구라고 소개했겠구나 라고 거의 단정에 가까운 예상을 하고있었다. 일을 계획적으로 잘 하는 크리스는 이상하리만큼 사저인 부분에서 욱하고 감정적이었고, 또 자존심이 강했으니까. 그래서 별로 믿지 않고 근거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저번 저녁. 우연히 보고 말았다. 크리스가 알파로 추정되는 남자와 저들이 자주가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진짜예요! 제가 봤거든요"

"어떻게 보셨는데요?"

"제가 자주가는 수제버거집이 있거든요. 그, 회사 주변에있어요. 여튼 거기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남자친구라고 소개해주더라구요!"

"그래요?"

"네. 그리고 저번에 또 마주쳤는데, 아 그땐 크리스가 없었어요 남자친구분 밖에 없었는데. 저는 크리스의 친구이기도 하니까 반갑게 인사를 건냈죠! 워낙 잘생겨서 잊기 힘든 얼굴이어서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딱 알아봤다니까요? 그래서 저 기억하세요~ 크리스 친구예요~ 하니까 기억한다면서 인사를 받아주더라구요. 그리고 제가 워낙 사람에게 관심이 많잖아요. 그래서 크리스랑 어떻게 만났냐, 잘 지냈냐 물어보는데. 진짜 자상한 남자친구의 모습 그 자체였다니까요? 아직 사귄지 얼마 안되어서 깨가 쏟아진다나?"

"그렇게 말했어요? 그사람이?"

"네! 아 참, 그리고.."


멜리사가 말을 더 하려다가 팀장의 얼굴이 굳어진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팀장은 크리스와 사귄다고 소문이 나있던 사람이었다. "어..음..저기..팀장님?" 멜리사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 고마워요. 그냥 잠깐 확인하고싶어서요. 이제 퇴근하세요 "멜리사는 팀장님에게 크리스와 관련된 것을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눈치없이 떠들어대는 그녀이긴 하지만 눈치라는것이 '아예' 없는것은 아니었다. "어..저 그러면 먼저 가볼게요" 멜리사가 꼬리를 내리듯이 인사를 하고 허겁지겁 팀장의 반대편으로 가기 시작했다.



다시 하여금 그때의 도망치듯 나가는 크리스의 뒷모습과 자신을 노려보는 치기어린 알파의 눈빛이 떠올랐다. 크리스의 남자친구라. 어쩌면 멜리사가 떠든 소문이 전부 거짓말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 참.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이 튀어나왔다. 크리스가 빠르게 다시 새 남자친구를 사귀어서 나온 허탈한 웃음은 아니었다. 웃음은 어디까지 비웃음 이었다. 자신의 것을 넘보려고 했던 그 어린 알파의 눈빛에서 나오는 비웃음. 감히 누굴. 소문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어디까지 거짓인지는 몰랐지만 확실한것은 이젠  크리스를 다시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의 주변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알파놈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니까. 




톰 히들스턴이 주머니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열은 뒤, 크리스를 향해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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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짧은 (4)편보다 이 (5)편을 쓴게 더 시간이 적었을것입니다 껄껄껄. 정말 쓰고싶었던 장면이어서요. 너무 기니까 퇴고는 없는걸로..<<

아 히들이도 나왔고 저는 만족스럽습니다.그리고 저는 셉이 연성속에서 비쥬얼깡패인게 너무 좋아요...


(4)



두 번째는 코스는 영화였다. 세바스찬이 점심을 샀기에, 그러면 영화는 저가 산다고 하자 "이미 예매했어요. 설마 정없게 돈주려는건 아니죠?" 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영화까지 미리 예매해놓다니. 뭐야, 이 정상인은. 그러니까 누구냐고. 언제 친구가 이런말을 한 적이 있다. 어릴적 뚱보가 미래의 훈남이 될 지 모르니 뚱보에게 잘하라고 - 반 농담이었다 - 그 말에 한줄을 더 붙여놔야겠다. 우리집 옆집 미친놈이 누군가에게는 벤츠일지 모르니까 잘해줘야한다고. 아니아니, 옆집 미친놈한테 잘해주긴 뭘 잘해줘. 크리스가 머리를 붕붕 털면서 마음속으로 또 다른 크리스를 부정하였다. 그러고보니 지금까지는 까먹고 있었던 사실이 다시 되새겨졌다. 맞다, 세바스찬은 잘생겼지. 지금 둘이 손을 마주잡고 길을 걷는 와중에도 지나가는 행인 들이 힐끔힐끔 세바스찬을 살펴보고 있었다. 몇몇이는 확인을 하듯이 다시 뒤를 돌아서 세바스찬의 모습을 멍하니 보기도 하였다. 대부분 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얼굴을 붉히는것이 세바스찬의 외모에 감탄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자하니 저도 세바스찬의 외모에 홀려 얼굴을 붉혔던 기억이 났다. 그러고보니 나도 세바스찬의 외모만 보고 가슴설렌적이 있었지. 크리스가 마음을 가다듬고 냉정하게 옆의 세바스찬을 쳐다보았다. 잘생겼다. 인정하기 싫지만 진짜 잘생겼다. 그래 이러니까 매일 오메가가 끊이질 않지. 다시금 세바스찬의 외모에 감탄을 하던 크리스가 머릿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면도라도 하고 올껄 그랬나. 어차피 가짜 데이트라면서 신경도 안쓰며 미적 거리던것이 살짝 후회했다. 이 셔츠...엄청 별로란 소리 많이 듣긴했지. 아 근데 다려진 옷이 이거밖에 없었다고. 크리스가 혼자 들리지 않은 불평과 변명을 마음속으로 해대기 바빴다.


"딱 영화시간에 맞췄네요. 콜라랑 팝콘 없으셔도 되죠?"

"...."

"크리스?"

"아, 네. 음. 잠깐 생각할 거리가 좀 있어서. 가요"



아직도 저와의 데이트가 불편한 것인지 계속 딴 생각을 하는 크리스에 세바스찬의 자존심이 살짝 상했지만, 뭐 어쩌겠어 악연으로 만난 사이인데 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합리화 시켰다. 그때쯤 크리스는 잊지말자. 저새끼는 매일 상대방 바꿔가며 떡을 치는 섹스킹이다. 아크로바틱 섹스를 했다. 개망나니다. 뇌가 아랫도리에 달려있다. 멜리사에게 고자질하겠다고 협박한 애다. 잊지말자. 잊지말자. 라는 긴 말을 마음속으로 되새기면서 세바스찬에 대한 혐오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영화는 고리타분할정도로 뻔한 멜로영화였다. 차라리 로맨스 코미디 영화를 골랐으면 재미라도 있었을텐데, 영화는 거의 신파극에 가까웠다. 중반부부터 여자주인공은 눈물이 멈추지 않는 병이라도 걸렸는지 계속 울고 있었고 사건은 허무맹랑하게 진행되는것이 슬프기만을 위한 영화같았다. 영화를 싫어하는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멜로는 쥐약이었다. 뭔가 '사랑'을 인질로 삼아 관객들에게 '슬프지?! 울어! 울어!' 라고 외치는 것 같아 별로였다. 세바스찬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하품을 가리기위해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리고 너무 '사랑때문에 '사랑이기에' 라며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주인공들에 그다지 공감을 가기 어려웠다. 도대체 애정이 뭐라고, 어차피 연인이라고 해봤자 남이잖아. 이제 영화는 10분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예상컨데 남자주인공의 죽음을 안 여자주인공이 만나기로 한 장소에 가서 슬피 울며 안녕 내사랑~ 뭐 이런멘트를 말하고 끝이 나겠지. 한번도 보지 않았던 영화이지만 이미 내용이 머릿속에 척척 진행되었다. 그래도 가장 데이트에 어울릴만한 영화라고 생각해서 선택했는데...이렇게 재미 없을 줄이야. 영화가 끝이 나면서 관에 천천히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 점심 분위기는 진짜 좋았는데, 나름 로맨틱한 발언도 해서 호감좀 얻은것 같은데 영화는 실팬가? 데이트 등에 능수능란한 세바스찬이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였다.  아무리 자신에 대한 호감도가 밑바닥을 뚫어 마이너스의 내핵까지 간 크리스를 상대로라도 데이트는 완벽하게 끝내고 싶었다. '어떤이라하여도 데이트 상대방에게는 매너있게 그리고 만족스럽게'가 세바스찬의 철학 중 하나였다.   "영화 별로 재미 없었.." 세바스찬이 실패를 무마하기 위해 너스레를 떨면서 크리스를 향했다. 아니 근데, 세상에. 취미가 일이라고 말한 자가, 자신이 무릎을 꿇었을때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사진을 찍어대던 자가. 지금 코를 훌쩍거리면서 펑펑 울고 있었다 조용히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눈물을 쏟아내는 크리스는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눈물을 어찌나 흘리는지 그의 풍성한 수염이 젖기까지 하였다. 설마...지금 이 뻔한 멜로영화를 보고 우는건가? 에이 아니겠지. 세바스찬이 당황하여 무어라 말을 못하며 입만 뻐끔거렸다. 하지만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크리스가 "여자..여자주니고 너무 부샤하지아나여?(여자주인공 너무 불쌍하지 않아요?)" 라며 목멘 목소리로 말을 하였다. 아, 진짜 영화보고 운거구나. 세바스찬이 허둥지둥 자신의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건내 주었다. 슬픈것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이렇게 펑펑 울줄이야.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손수겁을 낚아챈 뒤 자신의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크흡..세..세바스찬은..아..안슬퍼요..?"

"네..아니..슬프죠.."

"그렇..흐으..죠? 힝.."


사실 조금도 안슬픈 세바스찬이 크리스가 민망하지 않도록 동조해 주었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동의에 힘을 얻었는지 계속 눈물을 닦으며 여주인공이 이래서 불쌍했다, 남주인공이 이래서 불쌍했다 하며 조잘조잘 감상을 널어놓기 시작했다. 세바스찬은 그의 어깨를 조금 두드려주며 "네, 그렇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네" 하면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예상못한일이 적잖이 당황하였지만 표를 내지 않기 위해 세바스찬이 열심히 얼굴 근육에 힘을 썼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상태에 별 생각이 없는것인지 계속 코를 훌쩍이며 영화의 감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말 어른스러운 사람인지, 애같은 사람인지, 냉랭한 사람인지, 감정적인 사람인지. 파악을 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 인생이 자신의 뜻대로 굴러가는 세바스찬에게 예샹치 못한 돌발상황 같은것은 늘 힘겨웠다.  그런의미로 이런 크리스는 정말 세바스찬이 대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영화를 보고 카페에 갈 생각이었지만 울음을 그치지 않은 크리스 덕에 둘은 근처 공원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이곳저곳에는 피크닉을 온 가족들이 있었고 둘이 앉은 벤치 외의 다른 벤치에는 커플들이 있었다. 현재 크리스는 언제 울었냐는 듯 눈물을 뚝 그치고서는 얼궁를 붉히고 있었다. 아마 방금전 엉엉 운것이 이제와서 창피했던 것이리라. 평소의 둘 사이라면은 세바스찬이 이 건수로 크리스의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올정도로 놀리거나 깐죽거렸겠지만 '매너있는' 세바스찬은 자신의 '데이트 상대방'에게 그러지 않았다. 세바스찬은 오히려 그가 민망하지 않도록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는 꺼내지 않고 그냥 일상적인 날씨 이야기등을 꺼내며 대화를 주도하였다. 방금 전, 당황했던 사람이 세바스찬이라면 이번에 당황스러운 것은 크리스 였다. 크리스는 눈치없는 성격이긴 하였지만 지금 세바스찬이 자신을 배려해준다는 것을 모를정도의 천지는 아니었다. 초원위에 노는 어린아이를 보며 어린아이를 좋아하냐는 둥, 날씨가 좋다는 둥 세바스찬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계속 이었다. 크리스는 자신을 배려해주는 세바스찬의 모습이 어딘가 떨떠름 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옆집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민망함에 크리스가 괜시리 "오메가라고 다 아이를 좋아하는건 아니예요" "글쎄요. 날씨가 다 똑같죠" 등의 퉁명스러운 말만 내뱉었다. 아 진짜, 심장 왜이래. 크리스가 답단하다듯이 한쪽 손으로 자신의 심장께를 쿵쿵 쳤다.


"아직 많이 아파요?"

"..진짜 병원 가봐야하나봐요"


울상이 된 크리스가 "보험처리 되려나.." 라고 중얼 거렸다. 

한 낮의 공원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둘은 '연인사이니까' 라는 이유로 한번도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역시 데이트의 피날레는 디너죠"

"어디서 먹을까요?"

"아, 디너는 데이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까. 제가 미리 예약했어요"

"디너가 왜 가장 중요해요?"

"몰라서 묻는거예요 아니면 확인하는거예요?"


세바스찬이 짓궃게 그리고 음흉하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무생각이 없던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눈빛에 그제서야 얼굴을 발그레 붉혔다. 아, 그래. 런치보다 디너가 밤이랑 더 깊게 관련이 있지. 좋은 런치가 잠자리로 이어주지는 않지만, 좋은 디너가 잠자리로 이어주는 경우는 많으니까. 그래. 가끔식 이래주라고! 이렇게 해야 내가 니가 옆집 섹스킹이라는걸 안잊지! 그동안 자주 접해왔던 세바스찬의 모습을 보고 크리스가 안심하듯이 웃었다. 그에게는 역시 배려심 깊은 잘생긴 알파남자보다는 옆집의 철딱서니 없는 알파의 모습이 더 익숙했다.  오늘 내내 세바스찬에게 티를 안내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크리스는 하루종일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죽이고 싶을 정도로 짜증나는 놈인데 그가 정상인의 탈을 쓰고 너무나도 완벽한 데이트를 보여주자 마음이 심란했다. 내가 욕하던 애가 맞나 싶으면서도 내가 이 사람을 이렇게 욕해도 되는걸까? 싶기도 하였고 못났다 라고 생각한 그가 거리에서 빛을 내는 것을 보니 정말 못난 사람일까? 사실 못난것은 내가 아닐까? 와 같은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사람 마음은 정말 간사하다. 크리스가 괜시리 자신의 마음을 인류공통의 탓으로 돌렸다. "크리스, 여기예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벌써 장소에 도착했나보다. 장소에 자신이 있는것인지 세바스찬이 위풍당당한 미소를 지었다. 어, 근데 여긴.


"어.....여긴..."

"사실 예약잡기 좀 힘들었어요. 그래도 첫 데이트이자 마지막 데이트일지 모르니까 좀 욕심이 나더라구요"

"...꼬..꼭 여기로 가야되요?"


크리스가 표정을 굳히고 세바스찬의 손을 꽉 잡고 물었다. 


"어..저..옷차림도 이렇고.."

"드레스코드가 있을 정도로 까다로운 곳은 아니에요. 음..그래도 혹시 많이 싫으시면 예약취소하고 다른 곳으로 갈까요?"


세바스찬이 크리스를 배려하여 말을 해주었지만 크리스가 알고있는 한 이 레스토랑은 예약을 취소해도 금액을 돌려주지 않았다. 몇번이나 와봤으니 알고 있었다. 돈을 따지는것이 째째하게 보일 수 있지만 이미 모든 금액을 세바스찬이 지불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이유도 제대로 말하지 않고 가기 싫다고 하여 그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가 목울대가 울릴정도로 침을 한번 꿀꺽 하고 삼켰다. 그래, 설마 무슨일 있겠어. "아니예요, 괜찮아요. 그냥 들어가요" 이번엔 크리스가 앞장서서 세바스찬을 당겨 앞으로 나아갔다. 세바스찬은 살짝 창백해진 크리스가 신경쓰였지만 옷차림때문에 많이 신경쓰였나? 정도로만 생각하였다. 



"잘 몰라서 코스요리를 주문했는데 괜찮죠?" 세바스찬이 물었다. "여기 코스요리 맛있어요, 특히 마지막에 나오는 디저트가요" 몇 번 와봤던 크리스가 여유를 담아 이야기했다. 내심 이곳에 한번도 와보지 않았을거라고 생각했던 크리스가 와본듯한 말을 해서 세바스찬은 깜짝놀랐다. 


"여기 방문한적 있으셨어요?" 

"네..뭐..회사 다녔을때 몇번"


크리스가 괜한 말을 했다듯 말을 흐리게 하기위해 어눌하게 이야기하였다. 아, 괜히 얘기했다. 딱히 세바스찬에게 숨겨야 할 비밀은 아니지만 괜히 껄끄러운 크리스가 입을 우물거렸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크리스가 "와인 마셔요, 와인" 하면서 부산을 떨었다. 세바스찬은 약간 미심쩍은 눈으로 크리스를 바라보다가 이내 관심이 떨어진 것인지 "그래요" 하고서는 냉큼 크리스의 이야기에 올라탔다. 크리스는 따라진 와인을 한잔 들이키며 한번 주의를 살펴보았다. 그래, 괜히 걱정한거야. 설마 그 많은 날 중에 오늘 만나겠어? 속으로는 자신을 타일렀지만 그래도 내심 걱정이 되었던 크리스가 고개와 눈을 이리저리 돌려 주의를 살펴보았다. 그래, 없어. 없을꺼야. 없네. 확실해. 그제서야 안심이 된 크리스가 세바스찬에게 시선을 돌렸다. "기대되네요" 처음으로 크리스의 입에서 기대 라는 말을 들은 세바스찬이 미소를 지었다. "저도요"



적당한 취기 덕분인가, 둘은 오늘 데이트 중에 가장 진심으로 즐거워 보이는 듯 웃었다. 세바스찬은 크리스를 챙기기 위해 과하게 배려하지 않고 적당히 짓궃은 농담을 던졌으며 크리스도 혼자 이래저래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집어 던지고  세바스찬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요? 진자 먼지가 폴폴 날정도로 맞았죠. 저희 아버지 성격이 진짜..크..장난 아니예요" 세바스찬이 과장되게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크리스가 은근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좋은 부모님 밑에서 어떻게 세바스찬씨가 나왔을까요?" 라며 짓궃게 말했다. 


"제가 왜요? 뭐요?" 

"몰라서 물어요?"

"전혀 모르겠는데요"


둘이 동시에 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알코올의 힘은 대단하다. 적당한 알코올은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들고 판단력을 흐리게 하였다. 이미 어느정도 판단력을 잃은 크리스는 세바스찬을 옆집 섹스킹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잘생긴 알파남으로 인식했고, 세바스찬 또한 예행연습을 위한 데이트가 아니라 그냥 데이트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깔깔 웃으며 기분이 좋아보이는 둘은 모로봐도 연인사이로 보였다. "아, 너무 웃겨. 그런데 디저트는 왜이렇게 안나오죠? 빨리 먹고싶은데" 크리스가 자신의 가슴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세바스찬은 오늘 크리스에 대해서 여러모로 다시 생각하게 점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크리스의 저 자세가 매우 매혹적이라는 것이었다. 뭐지, 왜 가슴을 잡고 웃지? 가슴 크다고 자랑하는건가? 라고 처음엔 이상하게 생각하였지만 지금에와서는 그것이 매우 색정적으로 보였다. 세바스찬이 푸흐흐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며칠 사이 오메가를 안만났다고 내가 미쳤구나.  이 남자에게 '색정적'으로 보인다는 말까지 하다니. 괜시리 스스로가 부끄러워진 세바스찬이 자신의 뺨을 긁었다. "그러게요. 왜이렇게 안나...크리스?" 방금전까지 얼굴을 붉히며 웃고있던 크리스가 갑작스레 얼굴을 굳혔다. 아, 또다. 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오늘 하루내내 세바스찬을 흔들었던 그가 다시하여금 세바스찬을 당황하게만들었다.


"크리스, 무슨일이있ㅇ"

"..나가요. 세바스찬"

"네?"


크리스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말하였다. 갑작스러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세바스찬이 "네? 왜그래요?" 라고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어디아프세요? 물 한잔 더달라고 할까요?" 얼굴을 가려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손이 새하얗다못해 피리한것이 보였다. 분명 지금 그의 얼굴은 창백하리라. 세바스찬이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부르려 하자 "하지마요!" 라는 작지만 단호한 소리가 들렸다. "그..그냥 나가요. 빨리.." 방금전까지 디저트가 안 온다고 투정을 부리던 크리스가 더더욱 몸을 숙이고서는 중얼 거렸다. "나가야해요. 지금..지금...저먼저 나갈게요" 아직 세바스찬의 대답도 듣지 않은 체 크리스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서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허겁지겁 출입문으로 향했다. 무언가에 쫓기듯 도망치듯이 나가는 크리스를 향해 세바스찬이 "크리스!" 하고 외쳤다. 하지만 이미 레스토랑을 나간 크리스에게 그 외침은 닿지 않았다. 텅 비어버린 앞자리를 한번 바라보고 세바스찬이 다시한번 레스토랑의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뭐지? 도대체 뭐야! 당황스럽기도 하였지만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기도 어려운 세바스찬이 계산서를 집어들고 일어났다. 도대체 뭘 보고 놀란거야? 이미 작은 소동으로 자신을 쳐다보고있는 군중속에서 세바스찬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보고 수근거리며 쳐다보는 사람들 중 어떤 한 남자가 유독 눈에 띄었다. 


수트를 입고있는 그 남자는,그리 멀지 않고 몇 테이블 뒤 정도에있는 그 남자는, 소동의 주연인물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신을 쳐다보지 않고 출입문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였다. 마치 크리스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것처럼. "...도대체 뭐야" 머릿속에 뱅뱅돌던 생각을 세바스찬이 입밖으로 내뱉었다. 세바스찬이 허망하게 계속 그 남자를 쳐다보고있자, 남자가 출입문에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리다 세바스찬과 시선이 마주쳤다. 분명 시선을 피해야하는데, 모르는 사람을 이렇게 보는것은 실례인데. 어쩐지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서로를 모르는 두 사람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고 스파크가 튈 정도로 둘다 눈이 강렬하였다. 내가 지금 뭐하는거지, 모르는 사람이랑. 하다보니 어이가 없어진 세바스찬이 먼저 눈길을 거두었다. 지금은 일단 나가서 크리스를 찾아야했다. 왜 갑작스럽게 나갔는지는 몰랐지만 데이트상대방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것이 세바스찬의 매너였다.




멀티플렉스의 지하주차장,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차 옆에 쭈그리고 앉아 훌쩍이고 있었다. 눈물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 감정이 울컥울컥 하는 것이 곧 쏟아질 것 같았다. 크리스와 같이 큰 덩치의 남자가 차 옆에 쭈그려 앉아있자 지나가는 이들이 수상한 사람을 보는것처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 자리에서 당장 빠져나온것은 좋았지만 갈 곳이 없던 크리스는 그나마 세바스찬과 마주치기 쉬운 주차장으로 왔다. 계획이다뭐다로 프로필도 교환하고 예행연습차 데이트도 한 사이였지만 바보같이 둘은 아직 서로의 핸드폰 번호도 몰랐다. 레스토랑의 앞에 있으면 세바스찬이 아닌 '그'가 나올지 몰랐고, 그렇다고 정처없이 떠돌기에는 마주칠 확률이 낮았다. 언제 오는거야. 크리스가 자신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 최악이었다. 이런 모습으로 마주하다니. 크리스가 자신의 손으로 머리까지 쥐어 뜯었다. 너무 상한 자존심 때문에 육체의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마주친다고 해도 적어도 이 모습은 아니었어야 했다. 이런 한심한 모습은 아니었어야 했다. 크리스가 뜯던 머리를 풀고 이제는 자신의 머리를 쾅쾅하고 주먹으로 쳐댔다. 젠장, 젠장, 젠장! 그렇게 한참 자기학대를 하고 있자, 누군가 크리스의 앞에 우뚝 섰다. "여기서 뭐해요, 찾아다녔잖아요" 예상했던대로 세바스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세바스찬 탓이예요"

차 안에 들어가자마자 크리스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바로 차를 출발시키려고 했던 세바스찬이 크리스를 쳐다보고 시동을 껐다. "미리..미리 알려줬으면 좋았잖아요. 저런 레스토랑 갈꺼라고. 그럼..그럼 제가 준비라도 했을꺼아니예요" 목이 멘 크리스가 꾸역꾸역 눈물을 참고 원망을 내뱉었다. 세바스찬은 그런 크리스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면도..면도라도 하고왔을텐데" 조금 안 있어 크리스가 결국 눈물을 주륵주륵 터뜨렸다. 그러고서는 씨이.. 하고 불평의 소리를 내더니 손으로 벅벅 눈 주의를 닦았다. 또 터진 크리스의 울음에 조금 당황한 세바스찬이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찾았다. 아, 손수건 오늘 낮에 크리스가 썼지. 영화를 보고 한바탕 울어서 저의 손수건을 크리스에게 빌려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세바스찬은 자신의 소매를 길게 빼어 손 등을 덮을정도로 만들었다. 그 다음 울고있는 크리스에게 가까이가 자신의 셔츠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렇게 세게 닦으면 흉져요" 크리스가 하지 말라는 듯 세바스찬의 손을 밀어내었지만 세바스찬의 버티는 힘이 더 강하였다. "진짜..진짜...당신 때문에 제가" 다정스레 위로해주는 말에 크리스가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세바스찬은 자신의 소매가 흠뻑 젖는것도 신경쓰지 않고 계속 그의 뺨과 눈가를 매만지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미리 알렸어야 했는데 깜빡했어요. 그러니까 그만 울어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이런 모습 보여주기 싫었단 말이예요..진짜.. 흐으.." 자세한 사연을 몰라 세바스찬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크리스가 서럽게 내뱉었다. 어설픈 위로와 대답은 오히려 크리스를 자극 시킬꺼같아 세바스찬은 그저 축축한 크리스의 뺨을 매만지기만 하였다. "울지마요, 뚝" 사실 크리스도 알았다. 잘못한것은 세바스찬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이라는 것을. 원래 첫 데이트라는 것에 어느정도 공을 들이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아무생각없이 집앞편의점에 갈 차림으로 나온것은 크리스였다. 세바스찬은 잘못이 없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크리스를 배려하여 모든것이 자기탓이라고 말하였다. 아닌거 알면서, 나도 안다고. 내가 잘못한거. "제가 말 안했으니까 잘못이죠. 크리스는 잘못없어요" 세바스찬이 또 달콤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 말이 너무 와닿아서, 그 말이 너무 좋아서 크리스는 몸을 옆으로 돌려 세바스찬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흐으..진짜..." 세바스찬은 갑작스러운 크리스의 스킨십이 놀라웠지만 이내 진정하고 서럽게 우는 크리스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자장가와 같은 위로가 들렸다.






"오늘 못볼꼴을 너무 많이 보여줬네요"

"알긴 아시는군요"

오피스텔의 주차장에 도착하면서 둘의 데이트가 끝이 났다.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크리스가 괜히 쪽이 팔려 자신의 눈을 비비며 걸었다. 세바스찬은 그런 크리스의 옆에 보폭을 맞춰 걸어 가며 자신의 앞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방금 전에 너무 울어서 였을까 크리스의 심장이 쿵쿵쿵쿵 하고 계속 뛰기 시작했다. 알코올을 먹어서 쇼크가 온건가, 아니면 정말 부정맥이 아픈건가. 온 몸이 긴장한듯이 움츠러들고있었고 울어서 기력이 빠져야할 몸에는 묘하게 생기가 넘쳤다.크리스가 힐끔힐끔 세바스찬을 쳐다보았다. 이 쪽을 쳐다보지 않고 그냥 앞만 보고 있는 세바스찬의 모습은 방금 전 데이트할때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그러니까, 옆집 세바스찬의 모습이었다. "...저한테 왜케 잘해주셨어요?" 그 모습에 묘하게 불만이 생긴 크리스가 꿍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원래 데이트할때 매너있거든요" 세바스찬이 자랑거리를 이야기한다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데이트 할때 매너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었다.


"아 근데 아까 왜울었어요? 누구 보고 운거 맞죠?"

".......그걸 왜 이제와서 물어요?"

"방금전엔 데이트 중이었잖아요"


아, 그러니까. 지금은 데이트가 아니니까 매너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묻겠다? 크리스의 몸이 빠르게 식는것이 느껴졌다. 역시 기분나쁜 남자였다. 오늘 보여준 모습은 그러니까 이 남자의 치즈 같았던 것이었다. 쥐가 함정에 빠질 수 있게 유혹하는 치즈.  그 치즈를 덥썩 물면은 침대라는 트랩에 걸리는 거겠지. 세바스찬에게 있어 데이트는 치즈인더트랩인것이었다. 이 치인트 같은 새끼... 이미 이 남자가 망나니 인것을 알았는데 나는 왜 실망한거지? 잠깐 실망? 내가 실망했다고. 도대체 뭐에! "알거없어요" 크리스가 어느때보다 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데이트가 아닌 저한테는 이제 그렇게 안해주시겠네요?" 그러고서는 확인하듯이 질문을 하였다. 나는 뭘 확인하고 싶은걸까, '그렇게'란 무엇일까. 데이트할때 보여준 매너? 배려? 위로? 어쩌면 셋 다 일지도 몰랐다.세바스찬이 엘레베이터의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피며 "저희사이에 당연한거 아니예요?" 라고 말했다. 촥. 찬물이 온 몸에 뿌려진 기분이었다. 세바스찬의 말은 틀린것이 없는데. 크리스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엄청나게 화가 나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혹시 위로가 필요하시면 오늘 제 침대에 오실래요?" 세바스찬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하-..진짜.. 띵- 하고 엘레베이터가 5층에 도착하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와 함께 크리스가 자신의 다리를 올려 세바스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아픔에 세바스찬이 자신의 다리를 움켜쥐며 쭈그려 앉았다. 크리스는 그런 세바스찬을 뒤로 하고 먼저 엘레베이터에 나와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저기요! 크리스! 크리스!" 그러자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왜요!!" 라고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저희 부모님 댁 가는거 삼일 뒤예요! 삼일뒤 아침 7시에 주차장에서 보는거 잊지말아요!!" 딱히 작별인사 같은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 생각밖에 모르는 세바스찬의 말에 크리스의 분노가 더 치밀어 올랐다.

크리스는 자신의 집 문을 열고 "알아요!!" 라고 소리를 지른 다음 꽝 소리가 날 정도로 문을 세게 닫았다. 시발, 내가 저딴새끼한테 뭘 기대한게 바보지. 크리스는 신발만 벗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푹신한 침대에 뛰어 들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자 억울한 기분이 몰려들어왔다. 아니 애초에 원흉은 저새끼 아니야? 그러니까 왜 그렇게 시끄럽게 떡을쳐. 떡만 안쳤으면 내가 미워할 일도 없을테고, 멜리사에게 구라깔일도 없을테고, 세바스찬의 어머니앞에서 생쇼를 버릴일도 없었을텐데! 크리스가 주먹으로 자신의 침대를 쾅쾅하고 쳐 내렸다. 진짜..진짜 억울해..진짜.......나쁜새끼... 오랜만의 데이트여서 기운이 많이 빠졌을만한 크리스가 침대에 누워서

세바스찬에 관한 온갖 욕을 하였다. 


둔한 크리스는 아직 몰랐다. 그가 레스토랑에 마주친 그보다 데이트가 끝나고 난 후의 세바스찬의 말에 더 열을 내고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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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제 연성을 항상 제가 보고싶은것만 써서 보는 저의 입장에서는 재밌었는데(당당) 이번 편은 노잼인거같아요(웃음)

이런..뭐랄까...분위기 좋은....? 훈훈한 분위기의 연성은 그다지 하지 않는편이어서. 앵슷으로 가든가 개그로 가든가 떡으로 가든가 뭐 그중 하나인데.

이렇게 데이트만 하는건 솔직히 처음 써봤습니다. 그래도 꼭 필요한 장면이라서 써야하는데..분량은 이게 제일 짧은거같은데 시간은 제일 오래 걸렸네요.

연성 모토가 제 이름 처럼 정크푸드처럼 빠른 시간 내에 (취향이 맞다면) 맛있는 하지만 영양가없는(웃음) 이고 그냥 웹에다 올리는거니까 퇴고는 없이~ 이런 간단항 생각만 했는데 이번껀 진짜 어떻게하냐!! 란 느낌이었습니다. 이렇게 사족이 긴 이유는 그만큼 자신이 없어서...(웃음) 힘든 연성은 안하는 스타일 이어서 그냥 하지말까 생각도했지만 이 뒷부분이 너무 쓰고싶어서....하하.

"한 여름인데 왜 뜨거운 음료를 주문하셨어요?"

"드라마에서 보면은 왜, 가끔식 그런 장면 있잖아요. 상대방한테 화가나서 찬물뿌리는거요. 전 항상 그 장면을 볼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요.

왜 뜨거운 음료를 안시켰을까? 기왕 뿌릴꺼면 뜨거운 음료를 부어버려서 상대방한테 제대로 엿먹이지. 안그래요? 찬물뿌려봤자 아파봤자 얼마나 아프고 기분 나빠 봤자 얼마나 기분나쁘겠어요?"


크리스가 무서운 소리를 하면서 저혼자 낄낄거리며 웃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이 남자는 자길 화나게 하면은 뜨거운 음료를 뿌려버리겠다 이거야? 너무나도 무서운 소리를 태연하게 하는 크리스를 보며세바스찬이 살짝 몸을 오른쪽으로 움직인 다음에 뒤로뺐다. 만약의 순간을 대비해 뜨거운 음료를 피하기 위해서 말이다. 오피스텔 근처의 한 카페의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은 둘은 서로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주하고 있었다.멀리서 보면은 편하게 차려입고 푹신한 소파에 기대며 마주보고있는 둘이 연인 혹은 친한친구로 보일 수 있었지만, 둘은 단순히 목적과 이해관계를 위해 시간을 낸 것 뿐이었다. 주문한 메뉴가 테이블 위에 올라오고 세바스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 부터 이야기할게요. 괜찮죠?"

"네. 마음대로 하세요"


크리스가 자기 앞으로 나온 뜨거운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아, 진짜 뜨겁다. 그냥 차가운거 시킬껄. 혀가 얼얼할정도로 뜨거운 액체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세바스찬은 저의 이야기에 집중도 하지 않으며 혼자 인상을 폈다 꾸겼다 하는 크리스를 바라보고는 맥이빠진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제 이름은 세바스찬 스탠이예요. 세바스찬이 이름인건 아셨죠? 다들 그냥 셉이라고 부르고요" 벽을 통해 들은 세바스찬 이라는 이름은 알았지만 성까지는 몰랐던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탠이라, 뭔가 고귀해보이는 성이네. 크리스가 별 말없이 이해했다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바스찬이 마저 자신의 프로필을 이야기하였다. 나이는 크리스보다 한살 어린 27살 이었고 대학은 망나니답지 않게 꽤 좋은 학교를 나왔었다. 과는 크리스와 똑같은 경영학을 전공하였으며 본가, 즉 지금 세바스찬의 부모님이 사시고 있는 곳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하였다. 그다지 어렵지도 그렇다고 특이하지도 않은 프로필을 멍하니 들으며 크리스가 머릿속에 프로필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세바스찬은 프로필 설명을 끝내었다. "질문 있어요?" 누가 보면은 면접을 보는것 같은 말이 들려왔다. "취미는 뭐예요?" 크리스가 세바스찬이 말해주지 않은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하였다.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질문에 어려운 이야기를 들었다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취미라는 것은 웬만한 사람이면은 대부분 있는 것인데 고민을 하는것이 오히려 이상해보였다. 그의 버릇인지, 그는 또 자신의 앞머리를 연신 매만지면서 "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취미라는 것이 이렇게 고민해서 말하는건 아니지 않나? 

오히려 질문을 한 크리스가 당황해하며 세바스찬의 대답을 기다렸다.


"글쎄요....영화감상?"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은?"

"영화감독 이름을 왜 봐요"


별로 취미라고 할 것도 아니고 그냥 한 말이군. 크리스가 머릿속 세바스찬의 프로필의 취미란에 없음 이라고 표시를 하고 외웠다. "그럼 직업은 뭐예요?" 세바스찬이 알려주지 않은 또 가장 기본적인 질문 두번째를 물었다.


"백수요"

"...네?"

"백수요"

"...왜 그렇게 당당해요?"

"백수가 뭐 죄졌어요? 당당하지 않을건 뭔데요"


그건 그렇지만. 그 나이를 먹고도 직업하나 없는것이 자랑은 아닐텐데. 오히려 자신이 백수인것이 자랑스럽다듯이 세바스찬이 가슴을 올리고서는 양 손을 들어 "WHAT?" 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정말 알면 알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옆집에 살아 민폐만 끼쳤을때는 개자식소자식뇌가아랫도리에달린놈이었는데 지금보니 그냥 또라이 같았다. 보아하니 자신처럼 어디 취업준비를 하는것도 아닌것 같았는데 백수를 탈출할 생각은 없는건가?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불안도 없는건가? 하고싶은 꿈과 야망도 없는건가? 이러니까 제대로 된 연인이 없지. 누가 이런 알파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겠어. 아, 내가 이제부터 그 역할을 연기해야하는구나 하하하 미친. 세바스찬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크리스는 자신이 연기를 잘 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걱정이 되었다. 냉정하게 생각하고 그가 크리스에게 끼쳤던 민폐를 제외하고도 세바스찬은 크리스에게 있어 남자친구로 삼을만한 매력을 전혀갖고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너무 인생을 감정적으로 살아서 이런 놈팽이의 남자친구 연기를 해야한다니, 크리스는 속으로 앞으로는 조금 이성적으로 살것 이라고 명심하였다.

혼자 숙연해진 분위기로 입을 다물고 있는 크리스를 보며 세바스찬이 음료 외에 주문한 피자 한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다른 질문은 없어요?" 라고 물었다. 이제 대강의 프로필도 알았고 또 더 이야기 듣는다고 해도 환멸감 밖에 없고, 차라리 정보를 덜 알고가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한 크리스가 "없어요" 라고 말을 끊었다.



"그러면 이제 그쪽 이야기좀 해보세요"

"아, 저는 미리 준비해놨어요. 이거봐요"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앞으로 이력서 같은것을 한장 내밀었다. 세바스찬이 한 손으로는 피자를 들고, 기름이 묻지 않은 깨끗한 손으로 크리스의 이력서를 집어들었다. 이력서에는 나이부터 가족사항, 고향, 학교 등등이 적혀있었다. 확실히 이렇게 종이한장을 내미는 것이 간편하고 빠르기는 할것이었다. 그러나 그냥 대화로 하면 되는 것을 꼭 이렇게 종이 한장에 써서 보여줘야 했던걸까? 세바스찬이 속으로 정말 정떨어지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였다.  크리스와 마찬가지로 세바스찬도 그가 영 마음에 드는 상대는 아니었다. 세바스찬은 입으로 질겅질겅 피자를 씹으며 이력서를 보았다. 회사에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세바스찬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성한 것인것 같았다.  나이는 어..나보다 한살 많네. 연하일줄 알았는데. 아아..그래 좋은대학에 나올것 같았어. 보스턴? 보스턴이면 여기서 꽤 멀지 않나. 음..편모가정에서 자랐군. 어쩐지 어제 어머니한테 잘하더라. 자신에게 보인 태도와는 다르게 공손하고 예의바르며

은은한 미소가 탑재된 저번의 크리스를 떠올렸다. 그래도 그때는 엄청 착해보이고 그랬는데. 이력소를 보며 피자를 다 먹은 세바스찬이 종이를 내리고 자신의 손을 탁탁하고 털었다.


"그쪽은 취미가 뭐예요? 안적혀있던데"

"취미요? 음..일이예요"

"....네? 뭐라구요? 취미가 일이라구요?"

"네. 저 일하는거 엄청 좋아하는데요"


세바스찬이 저도 모르게 입을 떡 하고 벌렸다. 너무 놀라웠다. 아니 세상에 일 하는걸 좋아하는 사람이 정말 존재한단말이야? 태생적으로 일하는것을 싫어하는 자유분방한 세바스찬의 사고방식에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와 점점 대화를 하면 할수록 알게된 것은 자신과 정말 맞지 않는 상대라는 것이었다. 사고방식도 달랐고, 가치관도 안 맞았다. 조금도 맞는것이 없었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연인을 만들어 본 적 없는 세바스찬이었지만만약 '제대로 된'연인을 만든다면 크리스는 무조건 제외가 될 것이 분명했다. 정말 따분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다. 자유분방하고 쾌락을 즐기는 세바스찬에게 있어 크리스 에반스는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면 지금 심심해서 죽겠네요? 그 좋아하는 일을 못하고 있으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빨리 직장을 찾아야죠"


대화를 진행하다보니 문득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겼다. 크리스 에반스는, 그러니까 크리스는 일이 취미라고 할 정도로 고리타분한 남자이다. 그런 그가 왜 지금 취업 준비를 하고있지? 취업에 정해진 나이같은것은 없겠지만 크리스와 같은 남자면 대학을 빠르게 졸업하고 바로 취업전선에 뛰어들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지금 직장인인이게 당연할 정도의 사람인 것 같았다. 만약 이직을 위해서 회사를 나온것이라고 해도 이상했다. 보통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직을 한다 결심하여도, 이직이 결정되고 회사를 퇴사하지 절대 이직이 결정되지 않고 퇴사를 할 것 같진 않았다. 그러고보니 저번에 가게에서 만난 전 직장동료. 그 직장동료를 보고 자신의 눈치를 보며 꽤 당황해하는것 처럼보였다. 전 회사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짤린건가? 작았던 호기심이 서서히 풍선처럼 부풀어 지기 시작했다. 세바스찬이 물어볼까 말까 힐끔힐끔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민감한 이야기일것같아서 물어보면 안되는것 같지만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었다. 크리스는 자신을 힐끔 쳐다보는 세바스찬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뭐예요. 궁금한거 있으면 말해요" 라고 말했다. 에이씨, 그래 그냥 물어보자. 세바스찬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


"전 회사에서 왜 나온거예요?"

"프라이버시, 노 코멘트"


기껏 용기있게 물어봤는데! 크리스가 자기가 물어보라고 해놓고 확답으로 말을 잘라버렸다. 노 코멘트 라고 말하는 그의 입에서는 단호함 까지 묻어있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은 세바스찬이 또 한번 물어보려고 입을 떼었다, 크리스가 아직 뜨거워서 김이 모락모락 보이는 자신의 음료를 세바스찬의 앞에서 찰랑거리며 흔들었다. 아, 진짜 얄미워 죽겠네. 뜨거운 음료의 공포에 벗어나지 못한 세바스찬이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래 알아서 뭐하냐. 어차피 그때한번 보고 안볼사람. 포기를 한 세바스찬이 소파에 자신의 몸을 크게 묻었다. 이제 더이상 궁금한것도 없었고 할말도 없었다.


"또 질문 없어요?"

"딱히 없네요"

"그래요?"


둘의 정보 주고받기는 이렇게 간단히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 끝이 나고 말았다. 보통 남이 서로를 만나서 서로에 대해 묻는다 해도 두시간은 걸리는 것을. 서로에게 흥미라고는 앤트맨,아니 개미만큼도 없는 둘에게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 둘은 서로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록 서로 똑같이 호감도가 마이너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크리스가 마지막으로 일어나기 전에 음료를 다 마시기 위해 잔을 들고 입안에 다 털었다. 아직 뜨겁기는 했지만 남기기는 아까웠다.


"이제 끝난거죠? 그러면 우리 내일 데이트나 합시다"


크리스에 대한 오해가 있기 전에 설명하겠다. 크리스는 절대로 오버하거나 과장을 하는 성격이 아니다. 물론 단순하고 감정적이어서 깨발랄한 부분도 있지만, 절대 오버액션을 하는 성격은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크리스가 '푸학-!!" 하고 입안에 가듬 담겨있던 액체를 세바스찬을 향해 내뱉은 것은 과장된 행동이 아니라 진심으로 놀라워서 그런것이었다. "아뜨거!!!!!!"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자신의 얼굴에 쏟아지자 세바스찬은 기분나쁨이 아니라 정말 뜨거워서 소리를 빽 하고 내질렀다. 쿨럭쿨럭, 세바스찬이 얼굴을 감싸며 괴로워하든 말든 크리스도 목 뒤로 넘어간 음료때문에 괴로워 연신 기침을 하며 티슈를 뽑아 자신의 입을 닦았다.



"이사람이 진짜?! 진짜로 나한테 음료를 뿌려?! 그걸 진짜로 실행해요?!"

"아..아니 진짜로 할 생각은 없었는데...너무 놀라서..아니 그보다 제가 왜 댁이랑 데이트를 합니까?!"


세바스찬이 크리스가 써버려서 얼마없는 티슈로 자신의 얼굴과 셔츠를 닦았다. 이미 뜨거움의 기운은 가셨지만, 입으로 분비되어 튀어버린 액체때문에 기분은 나빴다.



"예행연습이죠! 그쪽은 이따위 정보만 듣고 저희 가족들 다 속일정도로 연기 잘할 자신 있어요? 한번정도는 연습해야하는 거 아닙니까"


세바스찬의 논리가 옳았다. 그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오스카상을 뺏을 정도로 크리스가 연기를 기깔나게 잘한것은 맞지만 그건 오로지! 세바스찬을 엿먹이기 위한 집념으로 생긴 결과였다. 그런 크리스가 세바스찬을 위해서 세바스찬을 사랑하는 연기를 연습없이 할 수 있다? 말도안되는 이야기였다.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정론에 할말을 잃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저 말이 맞긴 맞는데 죽어도 하기 싫었다. "그걸 한다고 달라질까요?" 한번 발악을 시도해보았다. "그래도 안 한것보다는 괜찮겠죠" 통하지 않았다. 크리스가 이미 꾸긴 미간을 더더꾸겼다. 세바스찬과 함께있을때는 항상 이마에 내 천(川)자를 만들고 다닌 크리스가, 이번에는 내 천(川)자를 2개 만들어 보았다. 그의 표정으로 생각을 다 읽을 수 있는 세바스찬이 어쩔 수 없이 히든카드를 꺼내었다.


"저 어제 점심시간에 멜리사씨 마주쳤습니다"

"네!? 걔를요!?"

"그 햄버거집 엄청 좋아하나봐요? 가니까 저한테 먼저 인사하던데요. 크리스씨 친구라고. 명함도 줬어요"


여기. 세바스찬이 거짓이 아니라는듯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서 흔들었다. 크리스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명함을 낚아채려고 하였지만 세바스찬이 더 빨랐다. 명함을 크리스가 닿지 않게 올리고서는 살랑살랑 흔들면서 "저희 약속 잊으신거아니죠?" 라고 반 협박성 멘트를 날렸다. 오, 멜리사. 빌어먹을 멜리사. 크리스는 보지 않았지만 멜리사가 호들갑을 떨면서 세바스찬에게 인사를 하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올려졌다. 안봐도 비디오였다. 결국 크리스는 "내일 몇시요.." 라고 패배선언을 하였다. 


내가 이새끼 엿먹이고 난 다음에 멜리사도 가만 안둘꺼야. 





오전 11시, 날씨 화창. 세바스찬은 한껏 멋을 부린 상대로 오피스텔 앞에서 크리스를 기다렸다. 원래 이 시간이라면 아직 침대위에서 원나잇 상대방을 끌어안고 늦잠을 퍼질러 자는것이 보통이었지만 최대한 긴 데이트를 위해서는 아침일찍 만나는 것이 좋았다. 아직 나오지 않은 그를 기다리며 세바스찬이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한 손으로는 자신의 앞머리를 매만지며 콧노래를 불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자신을 쳐다보는것이 느껴졌다. 이미 익숙해질대로 익숙해진 시선들에 세바스찬이 여유롭게 행인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세바스찬과 눈이 마주친 행인이 얼굴을 붉히고서는 뺨에 손을대고 빠르게 사라졌다. 그 귀여운 여성 - 오메가로 추정된다 - 모습에 피식 웃고 스마트폰을 꺼내어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보았다. 아, 평소에도 늘 잘난 얼굴이었지만 오늘은 더 잘난것 같단말야. 오늘 자신과 데이트를 하는 크리스는 땡을 잡은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날엔 클럽에서 더 빛을 냈을텐데 아쉽다 아쉬워. 세바스찬이 혼자 자화자찬과 자아도취에 빠져있을때쯤 옆에서 "기다렸어요?" 라는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의 목소리였다.  데이트 상대방의 목소리에 세바스찬이 슬쩍, 고양이같이 입꼬리를 말아올린 미소를 짓고서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런데, 아니. 세상에.


세바스찬이 알고있는 크리스의 모습은 단 하나였다. 얼굴의 발을 덮어 생김새 조차 알 수 없게 만드는 덮수룩한 수염, 매번 정리되지 않아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는 머리카락. 몇번이나 빨아서 목 주변이 늘어난 티셔츠. 그리고 매우 편리해보이는 트레이닝 바지. 지금까지 몇번이나 마주쳤을때, 그는 항상 그런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럴수가, 오늘 세바스찬의 앞에 서있는 크리스의 모습은, 정말 놀랍게도. 그 전과 하나도 틀림없는 모습이었다!!! 맙소사. 세상에. 아니 똑같은게 훨씬 나은것 같았다. 차라리 그 전처럼 목 주변이 늘어난 흰 티셔츠를 입었으면 적어도 그의 훌륭한 몸매가 돋보였을텐데. 지금은 나름 데이트를 한다고 옷을 바꿔 입은것인지 옷 수거함에서 주울것 같은 뻐킹셔츠를 입고 있었다. 옷에서 풍기는 냄새가 세바스찬이 학교 다녔을 적, 친한척좀 해보겠다고 밥버거를 사주려고 했던 선배와 흡사했다. 바지는..바지는 그냥 검정색 바지여서 그나마 나은 편이었지만, 레드벨트! 오 쉣 레드벨트!!! 도대체 뭐 강조할게있다고 벨트를 레드벨트로 차고 온거야! 수염과 머리카락은.....오...우... 경악스러워서 아무말도 못하고 입을 떡 하고 벌린 상태로 세바스찬이 크리스를 계속 쳐다보았다. 아무리 목적을 위해서 하는 데이트이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첫 데이트' 인데 어떻게 이렇게 준비를 안하고 올 수 있찌? 수염깎는건 안 바래도, 적어도 어떻게 단정하게 하고 왔어야 할꺼아냐. 세바스찬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거나 차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첫 데이트에는 용모를 단정하게 오는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가시게요?" 딱히 크리스의 꾸민 모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모습일줄을 몰랐다 세바스찬이 크리스에게 물었다. 크리스는 오히려 경악하는 세바스찬이 이상하다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어차피 가짜로 하는건데 신경쓸 필요가 있나요?" 아무리..아무리 가짜여도 그렇지. 세바스찬이 뭔가 더 하고싶은 말이 있어 입을 열었지만, 데이트 상대방의 모습에 핀잔을 주는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입을 닫았다.


"그래요..갑시다...근데.....저..크리스..눈에"

"아 눈꼽있어요? 이상하네 세수하고왔는데"



현기증이 날것같은 머리를 세바스찬이 부여잡았다.








"..도대체 백수이신 분이 차는 왜이렇게 좋은 차를 갖고있는거예요"

"프라이버시 문제로 노 코멘트입니다. 다 도착했어요. 내려요"


세바스찬의 차를 타고 내린 곳은 오피스텔과 멀리 떨어진 멀티플렉스였다. 두 사람이 살고있는 오피스텔의 가까이에 있는 시내가 회사건물과 상점이 많았다면, 이곳은 영화관과 수족관 까지 있어 데이트하기에 안성맞춤인곳이었다. 예상외로 평범한 곳에 데려왔구나 싶어 크리스가 창 밖을 힐끔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온 멀티플렉스는 예상외로 많이 달라져있지 않았다. 요즘 상가들은 쉽게 가게를 빼고들어오고빼고들어오고 한다는데 왜 여기는 그대로인거야. 크리스가 괜한것에 심통이 나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왜 인상을 찌푸리고있어요. 내려요 크리스" 지하주차장에 파킹을 완료한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 이곳을 설마 옆집 망나니와 같이 오게 될 줄이야, 크리스가 세바스찬을 따라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나갔다. "첫번째 코스는 어디예요?" 크리스가 심드렁 하게 묻자, 세바스찬이 그전에 할게 있어요 라고 말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구요?"

"아니요, 손잡자구요"

"...손을 왜요?"

"명색이 데이트인데, 손 정도는 잡아야죠. 이것도 예행연습이라 생각해요. 부모님 앞에서는 적어도 최소한의 스킨십은 보여줘야하잖아요. 정 싫으면 어쩔 수 없고, 강요는 안해요"

'

크리스가 고민을 하면서 세바스찬의 두꺼운 손을 쳐다보았다. 그리고서는 세바스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팔떨어지겠어요" 세바스찬이 재촉하는 듯한 말을 하였다. 어제부터 세바스찬의 이론에는 하나도 틀린것이 없었다. 이 놈팽이는 자기 불릴할때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지, 어제부터 척척박사 논리왕이었다. 크리스가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세바스찬의 손을 잡았다. "그러면 갈까요?" 세바스찬이 크리스가 손을 주자마자 세바스찬이 그의 손을 꽉, 하고 힘있게 잡은 다음 앞장을 서기 시작했다. 크리스는 그런 세바스찬에 의해 질질 끌려가듯이 저벅저벅 걸었다. 오랜만에 나눈 사람과의 스킨십이라 그런가 기분이 묘했다. 맞 잡은 두 손 덕분에, 두 사람은 호로몬에 인한 영향으로 심장이 조금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일단 점심을 먹자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크리스가 무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몰라 딱히 메뉴와 가게는 정하지 않았으므로 멀티플렉스를 돌면서 괜찮은 가게에 들어가자고 하였다. 흥미가 없고, 흥미가 있어보이는 척 하기도 싫었던 크리스가 "그럼 그래요" 하고 심드렁 하게 대답했다. "어디가 좋을까" 차를 타기 이전에 자신을 보고 경악을 하던 그는, 데이트가 시작되자마자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그에게는 망나니모드와 데이트모드 이렇게 따로 있나보다. 가게를 쭉 돌고 있던 도중 갑자기 세바스찬이 우뚝 멈춰섰다. 그러더니 둘이 맞 잡은 손을 올리고서는 "그런데 크리스. 예상외로 손이 귀엽네요?"라는 말을 지껄였다. 덩치에 비해 크리스는 손이 참 잡았다. 보스턴의 친구들은 크리스의 손을 애기손이라고 놀려대곤 하였다. 알파 다운것을 동경하던 크리스에게는 콤플렉스 중 하나였다. 크리스도 올려진 맞잡은 두사람의 손을 보았다. 세바스찬은 생긴것은 오메가뺨후려치게 이쁜 주제에 손 만큼은 두껍고 참 남자 다웠다. "놀리지마요" 크리스가 기분이 나쁘다듯 궁시렁 거렸다. "놀린거 아닌데" 세바스찬이 변명하듯이 말했지만 크리스는 귓등으로 듣지 않았다. 이미 저의 이야기라면은 모든것을 곡해하는 크리스인것을 알기에 세바스찬은 그냥 변명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멀티플렉스의 한복판에 괜찮은 가게를 발견하였다. 이탈리식의 레스토랑으로 분위기도 괜찮고 가격도 괜찮았다. 크리스에게 파스타 괜찮냐 묻자 상관없다기에 냉큼 들어왔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궁금한 것이 없다는 점은 전과 같았으나 그래도 '데이트 예행연습'이니까 그들은 서로에게 관심있는 척을 하기로 했다. 먼저 분위기를 풀기위해 입을 연것은 세바스찬이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예쁘장했던 외모덕분에 모두 오메가로 발현될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세바스찬은 꽤 이른 나이에 알파로 발현되었다. 모두가 당황하였을때 세바스찬은 내심 난 알파로 발현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때문에 썩 당황하거나 놀랍지는 않았닥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사춘기가 지날때쯤, 알파로 발현한 이들이 세바스찬의 외모만 보고 오메가로 착각하여 추파를 던지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서로 페로몬을 개방하지 않는것이 매너인 사회에서 세바스찬이 참 곤란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는줄 알아요? [나는 알파다] 라는 티셔츠를 입고 다니기 시작했지요. 적어도 영어를 읽을 줄 아는 알파는 저에게 추파를 던지지 않을테니까요"

"푸흡, 진짜요?"

"네. 진짜요. 근데 나중에 알파라고 유세떠는거냐고 부모님한테 혼났어요. 뭐, 그래도 그 덕분에 꽤 유명한 알파가 되었지만 말이요. 또라이라는 별명도 붙고"

"하하하. 진짜 웃기네"


최악이었던 지난 날들에 비해 둘은 의외로 정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웃고 떠들고 있었다. 대부분은 분위기를 좀 더 부드럽게 하기위해 노력한 세바스찬 덕분이었다. 자신을 우스꽝스럽게 이야기하여 크리스를 웃게하는것이 첫번째 목표요, 은근슬쩍 자신의 과거사를 그의 머릿속에 집어넣게 하는것이 두번째 목표였다. 이제 둘은 멀리서 보면은 연애 초반의 연인, 적어도 소개팅에 나온 사람들로 보일 것이었다.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상대방이 예상외로 좋은 모습을 보이자 당황한 크리스는 잠시 손좀 씼겠다며 화장실로 갔다. 손을 씻으며, 뭐지? 왜 지금 조금 재밌지? 하면서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 물은 그는 답이 나오지 않자 티슈로 물기를 닦았다.  화장실에서 나와 테이블을 보니 세바스찬의 주변에 몇몇 오메가들이 보였다. 아마도 세바스찬의 번호를 따려는게 아닐까 싶었다. 크리스는 화장실 입구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며 고민하였다. 보통 이럴때 어떻게 하지? 질투 해야하나? 음..질투..질투..질투해야되는데 안돼네. 이대로 가기도 애매하고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하던도중 어차피 진짜 애인도 아닌데, 그냥 친구인척 앞에 있으면 되지 싶어서 자리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크리스가 성큼성큼 걸어 자리에 도착하자. 오메가 무리들이 힐끔 크리스를 한번 쳐다보았다. 꽤, 아니 많이 이쁘게 생긴 여자 오메가였다. 그녀는 테이블에 다가온 크리스를 위에서아래 훑듣이 쳐다보았다. 뭔가 평가 당하는것같아 기분이 나빠졌지만 딱히 뭐라 할 수준은 아니어서 크리스가 입을 다물고 자리에 앉았다. "허니 왔어?" 허..허니? 허니? 꿀? 갑작스러운 세바스찬의 호칭에 당황한 크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시다시피 제가 지금 남자친구랑 데이트 중이어서요. 번호는 못 드리겠네요" 역시 헌팅을 당하고 있었구나. 여성이 세바스찬의 말에 "남자친구요?" 라고 되물었다. 그러고 그녀는 다시 크리스를 쳐다보더니, 피식 하고 혼자 코웃음을 쳤다. "취향이 많이 독특하신가봐요?" 독특. 딱 봐도 크리스를 깔보는 말투였다. 발끈한 크리스가 화가나 입을 열어 뭐라고 하고싶었지만 방금 전 거울을 보고와서 할 말이 없었다. 얼굴의 반을 덮은 수염과 정리되지 않은 머리. 그리고 솔직히 좋지 않은 패션센스. 확실히 세바스찬의 옆에 있을만한 용모는 아니었다. 크리스가 아무말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세바스찬이 그 모습을 인상을 찌푸리면서 바라보더니, 다시 오메가여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 취향이 어디가어때서요? 제가보기엔 제 남자친구가 제일잘생긴거같은데. 그보다 너무 무례하신거아니예요? 제가 당신한테 못생겼네요 하면 좋아요?" 예상외의 두둔하는 말에 크리스가 깜짝 놀라 세바스찬을 쳐다보았다. 그는 놀라 자신을 쳐다보는 크리스에게 눈길 한번 안주고, 짐짓 화난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만을 노려보았다. "아..아니..그냥 객관적으로봐서" 세바스찬의 공격적인 어투에 당황하였는지 그녀가 말을 더듬으며 변명을 하였다.세바스찬이 그 말에 피식 하고 웃었다. 그리고서는 예전 크리스에게 보였던 것처럼 눈을 울망울망하게 만들고서는, 이쁘게 미소짓고 이렇게 말했다. "객관적으로 당신은 저보다 못생겼어요. 그런데 어떻게 제 번호를 딸 생각을 하셨어요?" 말을 듣던 여자가 얼굴을 시뻘겋게 달구었다. 아무리 그래도 저건 심하지 않았나.. 괜히 눈치가 보인 크리스가 안절부절해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야, 가자. 진짜 별꼴이야" 그녀가 자신의 친구에게 명하듯이 말하고서는 재빠르게 출입구 반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도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세바스찬의 얼굴에다가 반박하기 힘들었겠지. 음. 그 심정 조금 알지. 세바스찬은 사라져가는 그녀들을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냥 번호 따여도 되는데, 어차피 진짜도 아니고"

"그래도 지금은 크리스가 제 남자친구잖아요. 그럴 순 없죠"


뭐야 이 정상적인 반응은, 일반인 코스프레? 너무나도 바람직한 남자친구로 둔갑한 세바스찬의 모습에 크리스가 살짜쿵 심장이 뛰었다. 심장, 심장이 왜뛰지? 왜? 세바스찬이 굳어진 크리스의 표정을 보고서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방금 그녀가 한 말은 잊으세요 크리스. 당신은 그 누구보다 매력적이니까요. 그녀가 너무 예의없었죠. 주관적,객관적 따질 필요없어요. 당신은 정말 매력적인 오메가예요. 예뻐요" 정말 단 한번도 흔들리지 않은 눈동자가 크리스를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뭐야, 우리사이에 왜이래. 너 누구야. 옆집 섹스킹 어디갔어? 옆집의 섹스킹은 사라지고 갑자기 잘생긴 알파남자가 바로 앞에 앉아있는 느낌이 들었다. "알아요, 그리고 저 이쁜게 아니라 잘생긴거거든요?" 괜히 민망한 크리스가 뚱하게 대답을 하였다.그 말에 세바스찬이 하하 그렇죠? 하고 미소를 짓고서는 자리에 일어났다. 


"가요, 크리스. 그리고 손. 다시 잡아야죠"

"아...음..네..뭐"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손을 다시 잡기전에 한번 다리에 문질러 땀을 닦았다. 손이 다시 맞닿자, 뭔가 가슴께가 뻐근한게 간질간질했다.


"세바스찬...저 지금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거같아요. 왜이럴까요?"

"..혹시 부정맥이 안좋으신거아니예요?"

"그런가봐요. 병원에 가봐야겠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호감이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한 둘이 헛다리를 동시에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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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데이트 장면으로 한 화를 하려고했는데 데이트 장면이 넘 길어서 반 잘라버렸습니다...

빨리 얘네가 데이트도 하고 세바스찬네 댁도 가고 뻔하게 연애하고 이어져야하는데...


(2)


"저 같은 알파는 쳐다도 안보신다던 분이.."

"...."

"그렇게 말하시던 분이. 저를. 남자친구로. 우와. 이거 영광으로 생각해야되나?"


식당에서 나온 이후 세바스찬은 계속 크리스의 옆에 달라붙어서 깐죽 거리고 있었다. 너무 부끄럽고 창피해서 이 세상에서 소멸되고 싶은 크리스는 아무말도 못하고 죄인처럼 묵묵히 걷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입을 꽉 다물고 조용히 있는 크리스를 보고 세바스찬은 더 신이나서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이웃사촌이래도 그렇죠. 네? 갑자기 남의 알파를 막 남자친구로 가져다 쓰면되나? 네?"

".....미.."

"아니 근데 괜찮아요? 뇌가 아랫도리에 달린 남자인데? 허참- 햄버거 먹다가 누구 남자친구 되는건 처음이네"

"미..미안해요.."


크리스가 모기만한 소리로 중얼 거렸다. "네? 뭐라구요? 잘 안드려요"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옆에 착 달라붙어 두 손으로 귀를 모으며 말했다. 그 제스처에 더욱 민망해진 크리스가 자신의 티셔츠를 주욱 잡아댕기고 새빨간 고개를 푹 숙였다. "미..미안하다고!..요..." 고개를 너무 숙이고 있어서 턱이 안보일 지경이 된 크리스를 보고 세바스찬이 다시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미안하다고 하면 다 되나, 사과 한마디로 일이 다 해결되면 경찰이 왜있겠습니까."


세바스찬이 큰 소리를 내면서 말을 해 주변 사람들이 힐끗힐끗 둘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인지라 크리스는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아무도 둘의 이야기를 모를텐데 사람들이 모두 '저 꾀죄죄한 오메가가 잘생긴 알파청년에게 뭔가 잘못했나보군! 그래 예를들면 전 동료회사에게 남자친구라고 뻥을 쳤다니까! 라고 생각하는것 같았다.' 크리스가 고개를 숙인 상태로 연신 마른세수를 하는척하며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세바스찬은 아직도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하며 크게 입을 놀리고 있었다. 얄미운새끼...


"아..미안하다고 했잖아요!"

"아니, 지금 저한테 큰소리를 내신거예요?"

"아..아뇨..그게아니라...제가 죄송하다구요...제..제가 뭐 해드릴까요?"

"뭐 해주신다구요? 진짜요?"


가시밭길 같은 길이 어느새 끝나 둘은 오피스텔의 입구에 도착하게 되었다.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아 바로 저들의 방으로 들어갈 수 없는 둘은 대치를 하듯이 입구앞에 서있었다. 죄인인 크리스는 태양빛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서있었고 세바스찬은 고개를 숙여 자신을 바라보지도 못하는 오메가를 보며 자신의 앞머리를 만져댔다. "으음~ 뭘 해주신다라~" 세바스찬이 손으로 턱을 집고서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민을 하는척 음음-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아오- 저 뺨에 주먹 한번 갈기면 소원이 없을텐데. 세바스찬이 눈을 감은 상황을 틈타, 크리스가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세바스찬을 올려다 보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세바스찬이 결심을 했다듯이 눈을 딱 떴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이 눈을 뜨자마자 올려보았던 시선을 다시 내렸다. 세바스찬은 이미 크리스의 행동을 다 알고 있다듯이 푸흐흐 하고 웃었다. "제가 크리스 씨에게 부탁하고 싶은건요" 세바스찬이 눈을 둥글게 말고, 양쪽 입꼬리를 동시에 올리며 천사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딱히 없네요"


사람을 이렇게 기다리게 해놓고 하는 말이 딱히 없다니...! 긴장감이 팽팽하게 돌고있던 크리스의 신경이 퓌시식 하고 식었다. 아니 그래도 다행인가? 아무것도 안해줘도 되니까. 본심으로 개자식, 아니 세바스찬에게 아무것도 해주기 싫었던 크리스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세바스찬은 뻔히 속이 다 보이는 크리스의 행동을 보고 혼자 비죽비죽 웃더니 뒤를 돌아 정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디가세요? 집에안가세요?"

"우와- 지금 남자친구라고 제 스케쥴 관리하는거예요?"

"아..아니..그러니까...그냥..궁금해서"

"저는 지금부터 청춘을 불태우러 가려구요"


세바스찬이 싱글벙글 웃으며 크리스를 향해 당돌하게 말했다. 청춘을 불태운다고? 안좋은 생각이 들었다. 


"설마 오늘도 다른 오메가를 집에!?"

"네. 그럴생각인데 왜요?"


싱글벙글,싱글벙글. 세바스찬의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원래라면 이 상황에서 세바스찬에게 지랄이란 지랄은 다 할 수 있었지만 상황이 바뀌어버린 크리스는 세바스찬에게 그럴 수 없었다. 철저하게 을이 되어버린 크리스가 인상을 꾸기고 세바스찬을 쳐다보았다. 세바스찬은 이제 울기 직전인 크리스를 향해 "그러면 이만 갈게요 허니" 라는 달콤한 말을 내뱉고 윙크를 찡긋 보내었다. 크리스를 뒤 돌아서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세바스찬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휘파람 소리가 들려오는것이 기분이 참 좋은 모양이었다. 이씨..개자식... 크리스가 원망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그의 뒷통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변하는것은 없었다.




갑을 관계가 정해진 뒤에도 크리스는 변함없이 매일매일 이웃집의 소음에 시달렸다.  문제는 저 미친새끼가 이제 고삐가 풀린것인지 정도를 넘어섰다는 것이었다. 어느때는 자기방에서 3P도하고 - 목소리가 세명이었다 - 어떨때는 찰싹찰싹 둔부를 내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사이코같은것은 찰싹 소리와 함께 아프다고 훌쩍이는 소리가 오메가로 추정되는 사람일때도 있었지만 가끔은 세바스찬일때도 있었다. 가장 최악인것은 어제였다. 도대체 섹스를 어떻게 하는것인지, 무슨 아크로바틱 섹스라도 하는것인지 벽이고 바닥이고 쿵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깁미댓 골드라니, 설마 저 골드가 자신의 상징을 뜻하는건 아니겠지? 크리스는 가끔 야동을 볼때도 노말한 그러니까 담백한 야동을 보는 스타일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강제로 하드하고 취향타는 야동을 매일 밤 들어야하니 공부가 안되는것도 공부가 안되는 거였지만 스트레스지수가 올라는것도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전에는 미친새끼라고 욕을 하면서 벽을 쾅쾅 두드릴수야 있었지. 지금은 그것도 불가능 했다. 그저 조용히 옆집의 광란의 섹스파티가 일찍 끝나기를 빌면서 기도를 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것은 오메가 커뮤니티의 댓글들이었다. 자세한 상황은 쪽이 팔려 쓰지 못한 크리스는 약점이 잡혀서 옆집남자에게 항의를 못하게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이것이 마지막 글일것이라고, 사이다를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게시글을 올렸다. 욕이 들려올것이라는 반응과 다르게 인터넷친구들은 냉정한 현실에서도 볼 수 없는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내주었다. 역시 세상은 아직 살만하구나. 그래, 이씨 나는 잘못한것도 없는데. 크리스가 코를 훌쩍이면서 결국 눈물을 흘렸다. 타인의 위로를 받으니 더더욱 슬퍼졌다. 원래 눈물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울지마 하면서 위로를 받는 순간 더 북받쳐오르는 것이었다. 집중이 안되는 상황이어도 눈물이 나는 상황이어도 오늘 해야할 스터디를 못마치고 잠들 순 없었다. 크리스는 눈물을 질질 짜면서 면접질의응답과 관련된 서류를 펼쳤다. 전 직장에서 그렇게 나온것도 서러웠지만 지금 가장 서러운것은 이렇게 슬픔에 빠져있는데도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것은 간호사와 환자 롤플레이를 하는 떡치는 소리인것이었다.



이 생활이 몇주 정도 지나자 크리스는 이제 완전히 이성을 놓게 되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반 정도 이성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세바스찬 집 앞에 음식물쓰레기 버리기 정도의 유치한 행동만 했었지, 칼부림을 하지 않았다. 비록 분함을 못이겨 책상을 20분동안 쾅쾅 쳐대며 울분을 토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감정적이고 욱하는 성질을 가진 크리스에게 아직 세바스찬에게 죽빵을 날리지 않은 것은 어찌보면 기적적인 일이었다. 보스턴의 친구들이라면 사회생활이 너를 어른으로 만들었구나 라며 감탄할지 몰랐다. 하지만 이것도 어제까지의 일이었다. 크리스는 자신의 이성을 놓았다. 겨우겨우 잡고있는 이성의 끈을 그냥 놓기로 결정했다는 말이다. 이제는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세바스찬의 행동을 참았던 이유는 그때 자기가 잘못했던것도 있긴 있던것과 쪽팔려서 세바스찬의 앞에 나서기 싫었던 마음 복합적인게 섞여서 였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몇 주 내내 벽이 날아갈 정도로 떡방아를 찧었어야 했을까? 아무리 내가 잘못한게 있어도! 이건 그가 너무했다. 크리스는 단언코 그렇게 생각하였다. 이렇게 된 이상 끝을 봐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있으면 크리스가 스트레스로 죽거나 아니면은 미쳐서 세바스찬을 죽이거나 둘중 하나였다. 크리스는 침대에 앉아 조용히 세바스찬을 기다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바스찬이 오메가를 끌고올때를 기다렸다. 


시간이 어느정도 흐르고 나자, 역시나 역시나 우리 망나니 세바스찬은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또 집에 오메가를 끌고왔다. 그래..이 순간을 기다렸어. 세바스찬. 크리스가 속으로 세바스찬에게 인사를 건내고 무게있게 침대에 일어섰다.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둘은 행위를 시작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은 판이 달라질지도 몰랐다. 옆 방에서 두런두런 뭐라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크리스는 듣지 않고 바로 방문을 나섰다. 지금이 최고의 절호조였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집 문앞에 섰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었다. 잘할수있어. 크리스. 넌 할 수 있어. 마음으로 다시한번 자신을 북돋아세웠다. 그리고서는 세바스찬의 집 문앞에 서서 쾅쾅쾅하고 문을 두드리며 바닥에 쓰러져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셉..!! 세비!!! 문열어!!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있어!! 나 말고 다른 오메가를 집에 끌어들이다니!!! 어..어떻게 나한테 이럴수가있어? 난 너 하나뿐인데..셉!! 문열어봐!!"


이정도면은 민간인의 연기수준이 아니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기깔나게 오열 연기를 잘했다. 심리학에는 이런것이있다, 거짓말을 할때 스스로가 그 거짓말에 몰입하게 되면 그 거짓말이 진실인것처럼 몰입할 수 있게 된다고. 지금 크리스가 그랬다. 크리스에게 있어 세바스찬은 뇌가 아랫도리에 달린 발정난 개새끼,소새끼 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을 두고 바람을 피는 못된 연인이었다. 크리스가 이 정도로 몰입을 할 수 있는것은 어떻게 해서든 세바스찬을 엿먹이기 위한 집념 덕분이었다. 방안에서 뭔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당황했겠지. 크리스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다시 소리쳤다


"흐으..어떻게..!셉..니가..니가나한테..흐으...흑...흐윽윽.."


와, 나 진짜로 눈물 흘리는거야? 대박. 크리스의 눈에서 자연스레 눈물이 흘러나왔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아니라 내가 상 받아야 하는거아니냐. 머릿속은 이렇게 깔끔한데 겉으로 오열연기가 가능하다니. 사실 연기에 재능이있는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몇 분을 땅바닥에 주저 앉아서 흐느끼듯이 오열을 하였다. 이제 안에있던 오메가는 기분이 잡쳤네 뭐네 하면서 세바스찬과 실랑이를 벌이테고, 잘한다면 세바스찬의 뺨을 때릴수도있다. 그 오메가의 성향은 잘 모르지만, 원나잇 상대방이 알고보니 연인이 있었다는 것은 그 오메가가 원하지 않은 상황일테니까. 그것도 이렇게 자기자신을 나쁜 오메가로 만들법한 상황은 더더욱 기분이 나쁘겠지. 뭐 적어도 높은 확률로 세바스찬은 오늘 오메가를 놓치고 그 좋아하는 섹스를 못하는게 틀림 없었다. 크리스가 웃음 대신에 울음을 땅바닥에 가득 쏟아보내었다. 그 와중에 "이 나쁜자식..흐윽..개새끼..흐윽..소새끼..흐윽..뇌가 아랫도리에 달린새끼..흐윽.." 하며 본심이 담긴 욕을 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오 분 정도 지났을까, 크리스가 혼자 복도에서 신파극을 벌이면서 생쇼를 부리고 있을때 끼익- 하고 방문이 열렸다. 넌 좆댔다. 크리스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눈물로 젖어 엉망이 된 얼굴을 들었다. 빨개진 눈으로 문을 열어주는 이를 쳐다보았다. 문을 열어준 여자는 크리스의 생각처럼 화내거나,어이가없거나,당황해하는 표정을 짓지 않고 뭔가..매우 기묘한 표정으로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이 여자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여기서 만약 그냥 크리스에게 꺼지라고 말을 하는 세바스찬과 비슷할정도의 또라이라면 크리스는 자신은 세바스찬의 약혼자라고 도대체 당신이야말로 뭐냐면서 더 쇼를 칠 작정이었다. 크리스가 매우 불쌍한 표정을 짓고서 상대방을 쳐다보았다. 여성은 울고있는 크리스에게 어쩔줄 몰라하는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한데? 크리스가 살짝 의심을 하려는 순간 여성이 크리스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우리 셉의 애인 되시는 분인가요?" 우리........? 우리.......................................? 크리스가 그 단어에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여성은 옆에있는 세바스찬을 불러세웠다 "셉, 설명좀 해보거라" 크리스에게 말을 걸던 목소리와는 현저히 다른, 그러니까 분노가 깃든 목소리였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대답에 졸도할뻔했다. 


"아..아니 어머니..그게아니라.."






"아..아니요..그러니까요 어머니..사실 제가..세바스찬이랑 연인사이가 아니예요"

"연인 사이도 아닌데 왜 그렇게 울면서 난리를 피웠어요?"

"저..그게..."


차마 당신의 아들이 매일밤 광란의 섹스파티를 벌여서 스트레스가 치솟아서 엿먹어 보라 그랬어요. 라고 크리스는 말하지 못했다. 아무리 세바스찬이 죽일놈 미울놈 개새끼 소새끼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죄없는 어머니에게  당신아들의 미친짓을 알려주고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건 어머니가 있는 '자식'으로서의 세바스찬에 대한 어느정도의 배려심이 있는것도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머니는 건드리는게 아니지...음음. 크리스가 고개를 푹 숙이고서는 힐끔 세바스찬의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처음 본 이 어머니가 너무 불쌍하였다. 이렇게 품위있어보이고 고귀한 여성이 어떻게 매일밤 오메가를 바꿔가면서 떡을 치는 망나니 같은 자식을 낳았을까.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까. 편모가정에 자라서 어머니들에 대한 마음이 깊은 크리스가 아직 자세한 이야기도 모르면서 벌써부터 세바스찬의 어머니를 마음속으로 안타깝게 여겼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다른건 다른거였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해야할지 몰랐다. 크리스와 세바스찬이 악연 아닌 악연으로 엮어 몇달동안 서로에게 깊은 인상을 주긴 하였지만 대화 자체는 몇번 나눠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서로의 눈동자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크리스가 흔들리는 동공으로 세바스찬을 향해 "어떻게 해요?" 라고 물었다. 세바스찬은 제법 진지한 눈빛으로 크리스에게 "조용히 있어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라고 쏘아 보내었다.


"사실, 어머니한테 말하지 못했는데... 제 애인이 맞아요. 좀 진지하게 만나고 있는 사이예요"


세바스찬이 고개를 올려 어머니를 향해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 이게 무슨소리? 크리스가 놀란 토끼눈으로 세바스찬을 쳐다보려다가, 등 뒤로 저의 등을 꼬집는 세바스찬의 손에 의해 저지되었다. 아픔에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아마도 계속 조용히 있으라는 뜻 같았다. 두 남자의 정좌를 받고있는 세바스찬의 어머니는 둘의 사인을 전혀 모르는 것인지 세바스찬의 대답을 듣고 놀라울정도로 환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귀여우시게도, 두 손을 모아 짝짝- 작게 박수를 치시더니 "잘됐구나 잘됐어! 너도 드디어 정상적인 연인관계를 만들었구나!" 하고 좋아하시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연인관계... 라니... 어머님이 하시는 말과 정말 눈물이 나올정도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저 개자식이 그동안 얼마나 부모속을 썩였는지 대략적으로 짐작이 되었다. 세바스찬은 짜게 식은 크리스의 마음도 모르고 방금과 같이 넉살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저도 이제 슬슬 진지한 만남을 가져봐야죠"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동시에 크리스의 허리에 손을 두르면서, 자신을 향해 밀착을 하기 시작했다. 오소소소소소- 닭살이 돋는것 같았다. 크리스의 세바스찬의 행동에 단번에 인상을 찡그러트리고, 으웨웩- 하는 듯한 입모양을 취했지만 세바스찬의 어머니는 기쁨에 눈이 멀어 그런것도 보이지 않은것 같았다."아이참...이게..뭐라고..눈물이.." 세바스찬의 어머니가 정말로 눈물이 흘러나올것 같은지, 손으로 눈가를 훔치셨다. 그리고 그 모습은 크리스의 마음을 찡하게 울렸다. 그리고 괜히 저와 동생 두명을 홀로 키우신 보스턴에 계신 어머니가 생각 났다.  그런 생각이 들자 크리스는 더더욱 앞에있는 중년의 여성이 실망하는것을 보고싶지 않았다. 옆에있는 세바스찬은 얄미웠지만, 크리스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장단에 맞춰주기 시작했다.


 

그 뒤 셋은 오랜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부분이 크리스의 칭찬이자 세바스찬의 구박이었다. 다른건 몰라도 세바스찬의 구박하는것에 신이 났던 크리스는 저도 모르게 싱글벙글웃으며 어머님의 말에 맞아요!맞아! 헉! 그랬어요!? 하면서 맞장구를 치기 바빴다. 누군가 보면은 정말 사이가 좋은 모자지간으로 보일정도로 환상의 짝짜궁이었다. 세바스찬은 자신의 흉을 보는 알파여성과 오메가남성을 바라보며 아주그래 '신이났구나 신이났어' 라고 속으로만 불평을 하였다. 무릎을 꿇은 상태로 오랫동안 있어 다리가 저린 세바스찬이 다리를 풀으려고 하자, 크리스와 하하호호 웃고있던 세바스찬의 어머니가 웃는 상태로 바로 그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빠르게 갈겼다. 그 통쾌한 모습에 크리스가 저도 모르게 푸핫- 하고 크게 웃고 말았다. 그 웃음에 세바스찬의 어머니가 바로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아, 그래도 여기서 웃으면 안되는구나. 그래도 자기자식인데... 이거 큰일난건가? 싶어서 크리스가 눈치를 보았다. 실제로 세바스찬의 연인이 된것도 아닌데 분위기상 저도 모르게 그랬다. 그러나 세바스찬의 어머니는 크리스를 향해 너그럽게 웃으며 "크리스는 편하게 앉거라, 다리가 저리지 않니?" 라는 상냥한 말을 건내주었다. 세바스찬의 연인 이라는 타이틀로 대놓고 크리스를 이뻐하는 어머니에게 죄송하여 양심이 콕콕찔렸지만, 여기서 어떻게 할 수 없는 크리스난 감사하다며 다리를 편하게 풀었다. 그렇게 또 한참동안 이야기 보따리를 풀더니 어머니께서 "어머! 약속시간이 늦어버렸네!" 하면서 부랴부랴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어휴..더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셉이 진.작.에 말.했.으.면 시간 잡고 오는거였는데"

"아니예요. 다음에 얘기하면 되죠"


크리스가 예의치레로 말한 이야기에 세바스찬의 어머니가 눈을 빛내며 크리스의 양 손을 꽉 잡았다. "다음? 다음이요? 그렇지요? 다음이 있겠죠? 호호 다음에 보면 되는거겠죠?" 너무 적극적으로 다음을 원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크리스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현관을 나설때, 손가락으로 크리스를 한번 가리키고, 우는 동작을 하고, 다시 세바스찬을 가리킨뒤,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누가봐도 쟬 울리면 넌 죽는다 라는 뜻이었다. 어찌보면 내새끼가 최고요, 내새끼 울린 저새끼가 나쁜놈이요 라는 것이 부모 마음인데...그녀가 이정도로까지 하는걸 보면은 "세바스찬의 정상적인 연인관계"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는 자신이 참으로 소중했나보다.  얼마나 개망나니였으면...이로써 크리스 안에있는 세바스찬의 이미지는 더더욱 나빠졌다. 둘은 서로 어색하게 서로의 허리를 잡고 웃으며 그녀를 배웅했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 누가 질세라 둘은 몸을 떨어트리고 동시에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저번엔 절 강제로 남자친구로 만드시더니, 이제는 진짜로 애인행세까지 하시려고 하네요?"

"아..씨..어머님일줄 몰랐죠. 전 그냥..당신이 맨날 데려오는 그런 사람들인줄 알고 골탕좀 먹일려고...아니 그보다 도대체 맨날 무슨짓거리를 하길래 어머니가 저런 반응을 보여요?"

"허, 참. 알거없어요"


세바스찬이 오히려 어이가 없다듯이 고개를 젓고서는 뒤를 돌았다. 한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서있는것이 이제는 잘생긴 알파남성보다는 그냥 철딱서니 없는 애로 보였다. 크리스가 눈을 갸름하게 뜨고 세바스찬의 모습을 다시한번 스캔하였다. 생긴건 정상적으로 생겨서 하는짓이라고는..에잉 쯔쯔.. 속으로 혀를 몇번 차고 크리스는 이제 또 현관으로 나섰다. 이제 볼일도 없는 불쾌한 알파와 같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맙시다"


등 뒤로 세바스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허!참! 누가 할소리를! 크리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운데 손가락만을 세워 등 뒤로 향해 날려주었다. 그러고서는 집 문을 쾅 하고 세게 닫고서는 바로 옆인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 나도 너 다시는 보기 싫어 이 개자식아. 이씨벌놈이.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앞에서 하지 못했던 욕을 입 밖으로 내세우며 벽을 향해 또 주먹질을 하였다. 아, 정말 이대로 다시 안만나면 좋을텐데. 젠장. 


그러나 크리스의 바램에도 하느님은 어찌나 무심한지, 다음날 둘은 아침댓바람 부터 마주하게 되었다. 그것도 세바스찬이 무릎을 꿇고 비는 형태로.





"제발.. 제발 같이 가주세요! 이웃사촌님!! 아니, 크리스님!! 크리스님!!!"

"싫어요!! 제가 거길 왜가요!! 그냥 바빠서 못간다고해요!"

"안돼요. 무조건 데려오래요. 크리스가 안되는 날이면 아예 일정자체를 바꿔버리겠데요. 무조건 당신이 되는 날짜와 시간으로 바꾼다고 하셨어요. 제발요!"

"그러면 그 수많은 오메가 친구들 중에 한명 데리고 가면 되잖아요!"

"어머니가 크리스랑 진지한 관계인줄 안단말이예요. 또 애인 바뀌면 화낼꺼예요!"


크리스가 방금 전 일어나 돌아가지 않은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하였다. 새벽부터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싶어 긴장을 하며 살펴보니 세바스찬이 우뚝 서있었다. 이 새벽에 갑자기 왜? 설마 어제일로 보복을 하려고? 세바스찬 하면은 안좋은 생각부터 떠오르는 크리스가 긴장을 하였다. "새..새벽 부터 뭐예요!" 세바스찬과 힘싸움으로는 질 자신이 없는 크리스 였지만 알파와의 싸움은 오메가가 당연히 불리 하였다. 저 미친새끼가 무슨 또라이같은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크리스가 일단 체인을 걸어두었다. "크리스..부..부탁이 있어요..잠시 문좀 열어주세요" 어제 어머님에게한 통성명 덕분에 알게된 크리스의 이름을 알게된 세바스찬이 매달리는 듯이 불렀다. 크리스가 문을 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체인을 걸었다는 나름의 방어막을 생각하고 살며시 문을 열었다. 문이 끼릭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세바스찬이 "크리스!!" 하고 큰소리르 이름을 부더니 털썩 하고 무릎을 꿇었다. "뭐..뭐하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퍼포먼스에 놀란 크리스가 체인을 풀고, 문을 활짝 열었다. 무릎을 꿇은 세바스찬이 고개를 돌려 울망울망한 눈으로 크리스에게 무언가 호소하는듯이 쳐다보았다. "부탁이..있어요..."  거의 크리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얘기를 한 세바스찬의 말을 축약하자면, 어젯밤 집에 돌아간 세바스찬의 어머니께서 친척들에게 전화를 돌려가며 세바스찬의 애인에 대해서 - 크리스에 대해서 - 떠들었다는 것이었다. 평소의 세바스찬의 망나니짓을 다들 알고 그것을 또 염려하고 있었던 세바스찬의 온 가족들은 그 소식에 정말이냐며 의심 반, 그리고 드디어 세바스찬이 정신을 차렸구나! 하는 기쁨 반으로 다같이 축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특히 세바스찬의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듣고 당장 가족모임을 열어야겠다며 친척들을 초대하였고 의기투합된 친척들 또한 무슨일이있어도 모임에 참석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 놀랍고도 광활한 이야기가 단 어젯밤 사이에만 일어졌다니, 세바스찬의 가족들이 대단한 것인지 그들을 그렇게 만든 세바스찬이 대단한것인지.


"제발! 제발! 같이가주세요! 지금 가족 전체들이 기대에 부풀어있다고요! 크리스 못데려가면 호적에서 파일지몰라요!"

"아, 그냥 가족모임은 부담스러워서 싫다고 해요!!"

"지금 다들 이성을 잃었단말이예요! 제발, 앞으로 일주일, 아니 한달동안 방에서 섹스 안할게요!"

"그건 당연한거고요!! 그게 매너에요!"


어이가 없는 제안에 크리스도 허리에 양손을 짚고 소리를 빽 질렀다. 크리스가 단호하게 대처하자, 세바스찬도 적반하장의 기분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럼 내가 내방에서 섹스하지 어디서 섹스하냐!! 내가 내 집에서 섹스도 못하냐!!"

"모텔에 가라고!! 모텔에!! 모텔이 뭔지 몰라!?"

"돈없어!! 백수한테 무슨 돈이 있어!! 돈이 있었으면 나가서 했겠지!! 그냥 좀 같이 가줘라!"

"안돼! 싫어! 가줄생각없어! 돌아가!"


크리스는 완고했다. 지금까지 몇달 특히 이번 몇주를 아주 생 지옥으로 만든 놈의 부탁을 들어줄 리 없었다. 애초에 어제 크리스가 그렇게 작정하고 나선것도 세바스찬을 엿먹이려고 그랬던 거였는데 이런식으로 후폭풍이 와서 세바스찬에게 제대로 엿을 먹일 수 있다니. 오히려 앗싸! 땡잡았다! 란 기분이었다. 무릎을 꿇은 세바스찬이 이 방법도 틀린건가 싶어서 다시 눈동자를 울망울망스럽게 바꿔놓았다.저 눈동자 그냥 휙휙 바뀌는 거였구나. "제가..큰소리를..내서..죄송해요..제발..같이..가주세요..부탁입니다..!" 이제 무릎을 꿇은 상태로있는 세바스찬이 상반신까지 납작 엎드려 크리스에게 절을 하는 듯한 모습을 취했다."어제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한 사람이 누구였죠?" 처음으로 세바스찬에게 갑이 된 기분을 느낀 크리스가 낄낄 거렸다. 보통 상대방이 무릎을 꿇고, 절까지 하면은 조금은 마음이 흔들릴법도 했는데 이미 정신을 놓아서 탈인간 상태인 크리스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이 방법도 안통하자 세바스찬은 숙인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최후의 수단을 쓰는 방법밖에 없지. 비록 무릎을 꿇은 상태였지만 지금 세바스찬의 표정만큼은 적장의 목을 따러가는 장군과 비슷했다.


"..말해버릴꺼예요"

"네?"

"그 여자한테 말해버릴꺼예요. 나 사실 당신 애인 아니라구요"

"지금 뭐라구요?"

"보니까 그 여자 그 식당에 자주 오는거 같던데, 만나면 바로 말해버릴꺼야. 그때 당신이 구라 깐거라고. 사실 나는 그냥 옆집사람이라고. 갑자기 왜 저 오메가가 왜 자기남자친구라고 말했는지 모른다고"


그러면 꽤 곤란해질만한 상황이 될꺼같은데? 세바스찬이 형형하게 눈을 빛내며 크리스를 노려보았다. 그 때,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크리스가 그 여자에게 매우 쩔쩔매는것은 알고 있었다. 전 직장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는 몰랐지만 확실한것은 이것은 크리스의 약점이었다. 크리스는 자신을 노려보는 세바스찬을 똑같이 고깝게 노려보았다. 아, 진짜 치사하게...! 하지만 만약 거짓말이 들통나면 곤란한것은 확실했다. 여우를 피하려다 곰을 맞나는 격이 아닌가, 멜리사는 세바스찬의 말을 들으면 또 쪼르르르 회사에 가서 "어머어머- 글쎄 그때 크리스씨 남자친구. 사실 크리스씨의 남자친구가 아니라옆집 남자였다네요. 왜 그런 거짓말을 했을까요? 그 남자분도 황당했겠다!" 라는 식으로 말을 할 것이 분명했다. 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쪽팔리는 일인가. 회사에 그렇게 나와 취직도 못하고 수염을 덮수룩 하게 기르면서 츄리닝에 티셔츠를 입고 이웃남자를 자기 남자친구라고 뻥을 치는 사람이라니. 아 안돼, 이건 들키면 안돼. 진짜 부끄러워서 자살할지도 몰라.


그렇게 둘은 서로의 사정만을 생각하면서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세바스찬은 만약 크리스를 못 데려가서, 사실 진지하게 만나는 연인관계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어머니에게 맞는 매질, 호적에서 파버리겠다는 아버지의 외침, 제발 정신좀 차리라고 하는 친척들의 말들이 무서웠고, 크리스는 회사 사람들에 대한 부끄러움도 부끄러움이었지만 역시 가장 싫었던 것은 멜리사의 그 말을 팀장이 듣게 된다는 것이었다. 전 회사동료들에게 사실이 알려지는것은 그냥 쪽이 팔리는 거였지만 팀장에게 알려지는것은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좋아요, 대신 한가지 조건이있어요"

"...뭔데요"

"그대로 가만히 있어봐요. 사진 한장만 찍고 제대로 이야기해봅시다"

"아..씨..정말"



세바스찬은 자신의 목숨을 위해, 크리스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 다른 목적을 위해 둘이 해야하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세바스찬의 가족 모임에 크리스가 연인행세를 하여 참가하기.



이미 계약은 성립되었으며, 갑과 을은 일시적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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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가벼운 로코물 쓰는거 의외로 재밌잖아...? 15편 정도 나올꺼같은데 내가 할수있으려나 




(1)


"흐읏..응....으응..흣.."


이제는 익숙해진, 아니 진절머리가 나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크리스는 들리는 소리를 막기 위해 자신의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이미 귓바퀴에 끼어진 싸구려 귀마개는 성능이 좋지 않아 소음을 완벽하게 차단해 주지 못했다. 크리스가 귀를 꾸욱 누르자 귀마개가 귀 안쪽으로 파고 들었다. 귀 안이 귀마개로 꽉차 아프기까지 하였지만 아직까지도 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저 소리는 진공을 통해서 들어오는건가? 아직까지도 들려오는 소리에 크리스가 몸부림을 치며 책상에서 일어나 침대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베개 아래에 얼굴을 넣은뒤, 베개로 자신으 머리를 누르고 이불을 덮었다. 소음이 지난 시간을 보니 이제 슬슬 클라이막스로 향하는 단계일 것이다. 지난 세달동안 크리스가 겪은 바에 의하면 이때 즘 허릿짓이 가장 빨라졌다. 


"흣..아아아..앗..너..너무좋아..하아"


역시 크리스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제 여자는 애교소리를 섞어가며, 방금전보다 명확하게 더 크고 헐떡거리는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래, 너네가 삼십분을 저렇게 붙어있었는데 이때 사정을 안하면 지루새끼지. 크리스가 마음속으로 투박한 욕을 하였다. 이제 곧, 크리스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이름이 나올것이다. 이를 악물고 베개에 힘을 주었다. 제발 들리지말아라, 아 제발.


"아아..!!셉..세비..! 안에다싸줘..!아..!!"


씨발! 역시나! 크리스의 예상은 안타깝게 틀리지 않았고 오늘도 저번 날들과 다르지 않게 역시나 그의 이름이 들려왔다. 크리스는 항상 이 때가 제일 짜증났다. 내가 너네들의 섹스소리도 듣는것도 짜증나는데 너네가 가버린 순간까지 알아야하냐?! 결국 참지 못한 크리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서는 벽을 향해 주먹질을 하기 시작했다.


"야이 개새끼들아!!! 떡치려면 조용히 좀 쳐라!!!!!!"


크리스 에반스, 28세. 그는 몇 달째 이웃의 소음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몇달째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집을 옮기지 않은 이유는 이 정도의 집을 구하기 쉽지 않아서 였다. 시내와 가깝지, 사람 많은 주택가여서 치안 좋지, 건물 내 방범 시스템도 좋지. 결정적으로 이 삼박자를 골고루 갖추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격이 비싸지 않고 합리적것이 큰 이유였다. 만약 반년 전 직장인 이었던 크리스라면은 그냥 좀 더 비싼곳을 가고 말지 하고 뛰쳐나갔겠지만 현재 취업준비생인 크리스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오피스텔은 크리스가 대학생 시절, 뉴욕상경과 동시에 입주한곳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보스턴뜨내기가 그냥 카테고리에서 low price를 누른 다음에 가장 위에 있는 것을 선택한 것 치고는 운이 좋았다. 대학생 시절에는 몇몇 친구들이 어떻게 이런 집을 얻었냐고, 대단하다고 부산을 떨었을때는 저도모르게 어깨를 으쓱할때도 있었다. 역시 나는 운이 좋다니까


오피스텔은 보통 다른 집들과 똑같이 네모난 사각모양이었지만, 층마다 방의 개수가 달랐다. 5층으로 된 오피스텔로 크리스는 맨 꼭대기층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층에는 방이 3개 밖에 없었고 다른 공간은 옥상으로 대체되어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옆집에 살고 있던 남자는 존이라는 남자로 크리스와 또래 정도로 되어보이는 깔끔한 인상을 가진 오메가였다. 서로 많이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마주치면 인사정도는 하고 서로 소모품을 빌릴정도의 좋은 이웃사촌지간이었다. 그도 이 집이 마음에 든 것인지, 몇년이 지나도 이사를 가는일이 없었고 그로 인해 크리스의 주거환경은 완벽한 편이었다. 

그래, 존이 이사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사가는 거예요?"

"아,크리스 오랜만이예요. 네 그렇게 됐네요.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오래된 좋은 이웃의 이사는 퍽 아쉬웠다. "직장이라도 옮기신거예요?" 크리스가 가장 먼저 떠올린것은 그것이었다. 존은 크리스의 말에 푸흐흐 하고 웃더니, 부끄러운듯 살짝 홍조를 띄우고서는 자신의 뺨을 긁었다.


"아니요, 그..저 결혼하기로 했어요. 식은 아직인데 일단 새 집으로 미리 옮기려구요"

"아, 몰랐어요! 축하해요 존"

"고마워요 크리스. 아참, 제방 내일 바로 누가 입주한다고 그러더라구요. 저번에 보니까 알파인것 같던데요? 알파남성이요. 굉장히 잘생겼어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니까요? 호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너무 잘생겨서요!"

"음..그래도 요즘 같이 위험한 세상에 저로써는 알파 이웃보다 오메가 이웃이 더 좋은데 말이죠. 아쉽게 되었어요"


"그렇긴그렇죠" 존이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마지막으로 옥상을 거닐며 대화를 하였고 마지막엔 서로 악수를 하며 헤어졌다. 그보다 잘생긴 알파 남성이라...존과 같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좋을텐데. 크리스가 멍하게 의미없이 생각하던 그 바램이 설마 신에게 간절하게 기도를 할 정도가 될 정도가 될줄은 그때는 몰랐다.


처음 만난, 이웃집의 알파남자의 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존이 말했던대로 정말 잘생겨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자신이 잘 모르는 연예인이 이웃집으로 입주한 줄 알았다. 짐꾼을 고용하여, 복도에서 지시를 하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크리스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고, 남자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여 반응해주었다. 사랑과 연애에 크게 관심이 없던 크리스의 가슴 조차 조금 두근 거리게 할 만큼의 매력적인 미소였다. 어제 존의 말이 딱 맞았다. 크리스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살짝 붉히고 말았다. 정말 잘생겼다. 크리스가 순간 자신의 마음속 말을 내뱉을뻔했다. 괜히 쑥스러워진 크리스는 볼을 긁적이고서는 저의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크리스는 강한 알파, 알파다운 알파를 선호하는 편이었는데 세바스찬은 그런 타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너무 매력적이었다. 저런게 취향을 무시하는 외모라는걸까. 모성애를 자극하는 듯한 순한 얼굴에 울망울망 강아지와 같은 큰눈과 굵은 선을 가진 외모는 언밸런스 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저의 방 안에 들어온 크리스는 집중되지 않은 머리로 책상에 앉아 면접질문지를 보고 있었다. 아..공부해야하는데. 근데 진짜 잘생겼다. 마치 고교시절, 잘생긴 알파를 보고서 괜히 설레였던 기분을 다시금 느낀 순간이었다.




옆집 남성에 대한 인상이 달라진 것은 그날 밤이었다. 이사온 첫날, 그러니까 크리스가 그의 외모에 대해 살짝 설렜던 그날 당일. 밤 열시쯤에서 성행위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생생하게 들리는 소리에 크리스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존이 옆집에 살았을때 가끔식 통화하는 소리가 들리기는 하였지만 이런 소리가 들린적은 없었다. 그래도 뭐..입주 첫날이니까. 애인한테 집들이를 시키면서 불이 붙었나보지. 어느정도 이해가 가능한 선이었다. 이해가 불가능하게 된것은 이 기행이 일주일 내내 지속되면서였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그 다음날도, 그그그 다음날도! 옆집 남자는 집에서 성행위를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듣다보니, 목소리로 추측한 결과 상대방은 매일 달랐다. 설마 매일 다른 오메가를 끌어들이는거야? 크리스는 당황을 넘어 이제 황당이 되는 수준이었다. 강아지 같이 생긴 얼굴이 강아지가 아니라 발정난 개새끼였나보다. 광란의 섹스파티는 불행히도 일주일을 넘어서 한달이 지나도 계속 되었다. 도대체 매일 무엇을 먹고 살아서 정력이 어찌나 좋은지. 소음이 들리는 것도 불편한것도 불편한것이었지만 가장 난감한것은 크리스의 몸이 그의 흥분여부와는 다르게 신음소리를 듣고 반응을 하는것이었다. 호로몬에 의해 착실하게 반응하는 몸은 애액을 분비하였고, 덕분에 크리스는 매일 밤 강제적을 뒤를 축축히 젖혀야했다. 그렇게 된다면 공부는 물건너 간거였다. 축축히 젖은 바지와 속옷을 갈아입어야했고, 샤워를 해서 호로몬의 여파를 날려야 했었다. 그렇게 하다보면은 시간은 자연스레 몇시간정도가 흘러 새벽이 되었고 강제적으로 잠을 청해야했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시기인 크리스에게 있어 시간을 이렇게 날리자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처음에는 예의바르게 항의하였다. 그래도 민감한 문제니까.


"안녕하세요, 저 이웃집 크리스 에반스입니다"

"아, 이웃사촌. 무슨일이죠?"

"저기..매일 밤마다 소음이 너무 크게 들려서요. 제가 지금 취직 준비를 하느라 민감한 시기여서 그러는데 조금 조용히 해주실 수 있나요?"

"아아..그러시구나. 네, 뭐 알았어요"


그래도 말귀가 안통하는 상대는 아니었나보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답에 크리스가 살짝 웃으며 죄송하다고 말하자, 그도 예의 전에 보여줬던 미소를 지으며 "아니, 뭘요. 이웃사촌끼리 돕고 살아야지요" 라는 말을 해주었다. 그의 말에 크리스는 안심을 하고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방 안으로 돌아갔다. 아, 그래도 오늘부터는 조용히 살겠구나. 이제는 맘 편히 공부할 수 있겠구나. 크리스는 룰루랄라 혼자 콧노래를 부르며 책을 펼쳤다.




"아..!아..! 세바스찬..흐..아아..!"

"자기야, 쉿. 옆집 지금 공부한데"

"흐..흐읏..하지만 소리를 어떻게참아..아!!"

"그렇지? 어쩔 수 없는 본능인데"

"그것보다 설마 지금 엿듣고 있는거야? 흐으..! 더 흥분 돼"


뽀각. 크리스가 자연스레 들려오는 소리에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샤프를 반으로 부숴버렸다. 뭐?? 엿들어?? 엿듣는다고?? 더 흥분돼? 아 저 변태새끼들이..! 둘은 정말 말 그대로 더 흥분이 되었는지 더 큰소리를 내면서 떡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그래, 저자식은 개자식이면서 소자식이구나. 소 처럼 말귀를 못 알아 듣는구나. 화가난 크리스가 어떻게 할 줄 몰라 허공에다가 주먹질을 하였다.  크리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 문을 열고 그의 집 대문을 쿵쿵 거리면서 두드렸다. "이봐요!! 이봐요!!!" 그들이 크리스를 무시하면서 계속 떡방아를 찧었다. "야!! 세바스찬!!!!!!!!!" 한번도 통성명을 안한 크리스가 신음소리 덕분에 알게 된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렇게 씩씩 거리면서 대문을 두드리자, 그들도 흥이 꺼졌는지 - 아니면 사정을 했는지 - 신음소리가 멈춰 들었다. 그러고 잠시 뒤, 그의 집 문이 드디어 열렸다.


"저기요 세바스..헉"


그가 급하게 부랴부랴 문을 열었는지, 상체를 탈의한 상태로 청바지만 입고 있었다. 방금 전 까지 행위를 했던 증거라는 듯, 그의 몸에는 땀이 베어있었고, 목 주편에는 립스틱 자국이 묻어있었고, 알파향이 아주 짙게 흐르고있었다. 순간적인 알파향과 시각적인 테러에 크리스가 얼굴을 붉히며 할말을 잃었다. 세바스찬이 땀으로 젖은 머리를 한번 쓱 올렸다. 그러고서는 당황스러워서 아무말도 못하는 크리스를 위 아래로 빠르게 훝더니 "당신도 같이 할래요?" 라고 물었다. 당혹스러운 크리스가 "네?! 뭐라구요?" 라고 목소리를 높이자 그가 살짝 웃으며 크리스의 볼을 귀엽다듯이 톡톡 쳤다. "싫음 말고요" 그러고서는 다시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았다. 벙찐 크리스가 입을 바보처럼 벌리고 세바스찬의 대문 앞에 서있었다. 몇분 정도 돌처럼 굳은 상태로 서있자, 다시 방 안에서 앙앙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새끼였어. 내 이웃집으로 미친새끼가 들어온거였어.



세바스찬과의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크리스는 충격과 공포의 밤을 지낸 이후로 저 멈추지 않는 떡방아집을 망하게 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기 시작했다. 이직준비다, 취업준비다로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일시단절시킨 크리스가 의지할만한 곳은 인터넷 밖에 없었다. 크리스는 그나마 자주 가던 오메가 커뮤니티에 들어가서 [이웃집이 매일매일 떡을 칩니다. 너무 시끄러워요 어떻게하죠?] 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자세한 사연을 적어넣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크리스가 글을 올리자마자 층간 소음에 괴로워 하는 많은 이들이 순식간에 댓글을 달아주었고 그 안에는 공감과 위로와 그리고 대처방법이 모두 들어 있었다. 크리스는 수십개나 되는 댓글들을 꼼꼼히, 천천히 읽으며 자신이 가장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을 실행하기로 했다.


크리스가 가장 먼저 한 방법은 와이파이 이름 바꾸기였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빠른 시간안에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누군가가 추천해주었다. [502호매일밤섹스파티] 크리스가 자신의 집 와이파이 이름을 이렇게 바꾸어 놓았다. 댓글을 달아주는 이들은 이렇게 해놓으면 저 떡방아남 - 그들이 붙여준 별명 - 의 행동을 다른 오피스텔 사람도 알 수 있을테고, 그러면 부끄러워져 그가 행위를 멈추고 와이파이 이름을 바꾸어 달라고 크리스에게 빌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예상이었다. 크리스는 자신이 한 일이지만

정말 사악한 짓이라면서 혼자 큭큭 웃었다. 그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혐오에는 혐오다! 크리스는 실행 후, 후기를 알려준다고 마지막 댓글을 달고서는 인터넷을 껐다. 이제 자신에게 와이파이 이름좀 바꿔달라며 비는 세바스찬을 생각하며.


다음 날, 와이파이를 살펴보니 누군가가 [I'mSexKing]이라고 와이파이 이름을 달아놓은것을 발견하였다. 방금 일어나 머리가 돌아가지 않은 크리스가 멍하니 스마트폰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아니야, 아닐꺼야 하면서 상황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약 5분정도 스마트폰을 살펴보며 머리가 맑아진 크리스는 이렇게 생각했다. 진짜진짜진짜진짜진짜 미친새끼구나. 설마 이새끼 지금 자기 자신을 섹스킹이라고 칭한거야? 얜 부끄러움이라는게 없나? 이제는 너무 황당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설마했던 일이 맞았는지, 와이파이의 이름을 바꾸어도 광란의 섹스파티가 멈추어 지지 않았다. 그리고 섹스킹이라는 와이파이 이름도 사라지지 않았다. 크리스는 바로 오메가 커뮤니티 게시판에 달려갔다. 이미 베스트게시글이 된 크리스의 글에서는 후기간증을 원하는 댓글들이 잔뜩 달려있었다. 크리스는 분노로 키보드를 부숴져가랴 두들겨대며 상황을 전달하였다. 이미 크리스와 한 마음이 된 그들은 세바스찬을 떡방아남에서 섹스킹으로 별명을 바꾸고 온갖 욕을 하기 시작했다. 남들의 욕으로 살짝 대리만족한 크리스가 이제 자신은 어떻게 해야하냐고 우는 소리를 했다.

[불교 음악을 트세요. 천년의 발정도 확 식을껄요?] 


크리스는 불교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아! 불교음악,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크리스는 단번에 어떤 음악인지 대강 감을 잡았다. 그래, 마음을 맑고 청아하게 해주는 좋은 울림이지. 그걸 들으면 어떤 짐승이라도 발정이 식을꺼야. 크리스는 고맙다며, 지금 당장 음악플레이어에 다운을 받아놓고  오늘 밤에 틀어놓겠다고 글을 올렸다. 많은 이들이 크리스의 행보에 응원댓글을 달아주며, 마찬가지로 후기댓글을 부탁하였다. 



[Sex! Sex! Sex On The BEACH!!!!!!!!!!!!!!!!!!]


귀를 울릴 정도의 클럽음악이 들리기 시작했다. 크리스가 자신의 컴퓨터 볼륨을 올려보긴 하였지만, 세바스찬은 오디오를 사용하는 것인지 볼륨의 크기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사람의 마음을 청아하고 맑게 해주는 불교 음악이 색정적인 클럽 음악에 묻히기 시작했다. "안돼..안돼..이럴 순 없어" 크리스가 컴퓨터를 붙잡고 오열을 하였지만 기기간의 차이는 이길 수 없었다 결국 크리스는 그날 새벽 내내, 신음소리가 섞인 Sex On The Beach를 들어야만 했고 잠들지 못했다. 크리스가 이 방법도 실패했다며 댓글을 달자, 사람들은 이제 세바스찬에 대해서 욕을 하기보다는 저새끼 저정도면은 인정해줘야하는거 아니냐며, 대단한 섹스킹이라며 반 웃음 섞인 댓글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인터넷친구들이 세바스찬의 편이 된것 같아 크리스가 내심 서러웠다.  결국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행동을 멈출 수 없었고 그를 막을 수 없어 생긴 분노는 세바스찬 쌓여만 갔다. 크리스는 이 쌓인 분노를 소소하게 해결하기 위해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몇달 내내 세바스찬의 집 대문앞에 버리고 갔다. 세바스찬은 범인이 크리스인것을 아는 눈치였지만 그걸로 인해 크리스에게 찾아오거나 왜 이러냐고 항의를 한 적은 없었다.


그렇게 서로 이웃이 된지 몇달이 지났다.





답답한 방안에서 벗어날겸 배도 채울겸 점심을 밖에서 사먹기로 결정하였다. 늘 항상 쪼달리는 돈 덕분에 집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는것이 대부분의 식사였지만 오늘은 스트레스로 쇠약해진 자신에게 스스로에게 상을 주기로했다. 대충 세수를 하고 츄리닝에 티셔츠를 입은 뒤 유유히 엘레베이터를 탔다. 일층을 누르고 문이 닫히는것을 기다리자 저 멀리서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 층에는 크리스를 포함해 단 세 사람만이 살고 있었다. 약 50%의 확률로 저 발걸음의 소리는 세바스찬일게 틀림없었다. 크리스는 빠르게 닫기 버튼을 연타하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엘레베이터를 멈춰 세우려는 세바스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크리스는 빨리 닫히지 않는 문을 쳐다보면서, 더 빠르게 닫기 버튼을 눌렀다. 문이 거의 닫혀질 때 쯤, 문 사이로 손 하나가 쑥 들어왔다. 닫혀질뻔한 문은 하나의 손 때문에 다시 열렸다.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거 참, 성질도 급하시긴"

"못들었어요"


문 닫는것을 실패한 크리스가 인상을 꾸기고서는 새침하게 대답하였다.


"귀도 어두우셔라"

"저도 제 귀가 좀 어두웠으면 좋겠네요. 요즘 매일 시끄러워서 잠을 못자거든요"

"그래요? 안됐네요"


세바스찬이 뻔뻔하게도 표정하나 안 바뀌고 크리스의 말에 대답하였다. 뭐라고 더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소 귀에 경읽기라는 것을 깨달은 크리스가 입술을 물었다. 크리스가 그런 마음을 갖고 있는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세바스찬은 엘레베이테어 있는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저거저거, 또 오메가 꼬시러 가는구만. 크리스가 짜증이 담긴 표정으로 세바스찬을 노려보았다. 거울을 통해 둘의 눈이 마주쳤다. 세바스찬이 인상을 팍 구기고 있는 크리스를 향해 깜찍하게 윙크를 하였다. 와, 저자식 진짜 죽여버릴까. 크리스가 살며시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엘레베이터가 1층도착이라는 표시를 내면서 문을 열었다. 크리스는 후다닥 엘레베이터를 나왔다. 점심 먹기 전에 재수없는 놈을 만나 밥맛이 다 떨어졌다. 속으로 그를 향해 몇번 욕을 하고서는 목표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크리스의 오피스텔 주변에는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좋은 수제버거 집이 있었다. 오랜만에 그곳에 가 영양보충을 할 생각에 세바스찬을 만나 나빳던 기분이 다시금 좋아지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자신의 방향으로 걸어오는 세바스찬의 걸음거리가 느껴지기만 했지만 같은 방향이거나 싶어서 그냥 무시하고 걸었다.

익숙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비록 햄버거이긴 하지만 수제집이었고 큰 고기와 신선한 야채가 가득 담겨있는 이 곳의 햄버거는 직장인 사이에도 인기가 많았었다. 직장을 다녔을때도 종종 왔었던 곳이다. 크리스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종업원이 "어서오세요" 라고 그를 반겼다.


"손님 두분이세요? 이쪽 자리로 안내해드릴게요"

"네? 두명이요?"


크리스가 놀라 뒤를 쳐다보자 그곳에 세바스찬이 서있었다. 당황한 크리스가 종업원을 쳐다보면서 아니라고 말했다. 그냥 부정하기에 다소 급박하고 큰 소리여서 종업원이 조금 당황해하였다


"네? 그런데 두분이 같이 들어오셔서..어쩌죠 지금 자리가 한테이블 밖에없는데"

"그냥 같이 먹어요. 이웃사촌끼리. 그냥 같은 자리주세요"

"제가 왜 그쪽이랑 같이 밥을 먹어요?"

"누군 좋아서 먹는건줄알아요? 자리가 없다잖아요. 자자자, 들어갑시다."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동의도 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종업원은 합의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는지, 다시 영업용 미소로 돌아와 세바스찬에게 자리를 안내해주기 시작했다. 내가먼저들어왔잖아! 니가 기다리던가! 목으로 저 말이 솟구쳐 올랐지만 사람 많은 가게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던 크리스는 결국 조용히 따라가기로 했다. 


테이블에 앉은 세바스찬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꼴도 보기 싫은 상대랑 마주 앉아서 점심을 먹어야 하다니, 아니 애초에 세바스찬 때문에 피곤해진 크리스가 영양분을 보충하기 위해서 가게에 온것이었는데. 크리스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참을 수 없어 결국 세바스찬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쪽은 직장도 없어요? 이 시간에 왜 집에있어요?"

"그쪽도 지금 집에있잖아요"

"..전..전 취업 준비생이예요"

"그럼 저도 취업준비생 하죠"


한번도 크리스에게 시선을 주지않고 폰만을 조물조물 만져대던 세바스찬이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을 했다. 너무 척척 맞아떨어지게 말해서 크리스는 뭐라 대꾸할 것도 사라졌다. 그냥 이 기분나쁜 식사를 최대한 빨리 끝내고 가야겠다 라고 생각하였다. 서로 대화 한마디 없이 스마트폰만 만져대던 둘은 테이블에 음식이 나와서야 서로 폰을 놓았다. 떠들석한 가게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테이블의 정적을 더욱 부각 시켜주었다. 접시에 코를 박을듯이 햄버거를 썰고있는 세바스찬을 크리스가 힐끔 보았다. 잘생긴 얼굴의 콧대가 보였다."그쪽은 뇌가 아랫도리에 달려있어요?" 쿨럭, 세바스찬이 갑작스러운 크리스의 공격에 입안에 씹고 있던 음식을 주르륵 뱉었다. 아, 더럽게. 크리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쳐다보았다. 이미 몇번 씹혀서 모양이란것이 사라진 음식물이 탁자위에 떨어져 있었다. 세바스찬이 테이블 옆에있는 냅킨을 몇개 꺼내고서는 먼저 입 주위를 닦은 다음에 탁자에있는 오물을 닦았다. 일련의 행동이 너무 우아하여 크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앞에있는 놈이 개쌍놈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뻔했다


"그런건 아닌데, 제가 너무 인기가 많아서요. 오메가들이 저를 가만히 안냅두네요"

"그래요? 저라면 당신같은 알파 쳐다도 안볼텐데. 취향들이 참 이상한가봐요"


이미 세바스찬에게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크리스가 분풀이가 담긴 인신공격적인 말을 내뱉었다.한달 동안 고음질의 라이브 야동소리를 듣게하여 하루에 몇시간이나 뺏기게 한 장본인이다. 매너와 예의를 지키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신도 똑같이 한다는것이 몇달 전에 만들어진 크리스의 신조였다. 세바스찬은 크리스의 말에 퍽이나 어이가 없어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자기 잘난걸 아는 사람이어서 그의 말이 그냥 분풀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리고 그 미소는 크리스의 분노는 더더욱 커졌다. 자길 엿먹이는 사람에게 엿 하나 먹일 수 없으니 부들부들 떠는것은 어찌보면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애초에 잘못한 사람이 너무나도 뻔뻔한 태도를 갖고있던 것부터가 짜증났다.


"지금 웃었어요? 이봐ㅇ"

"어머! 크리스씨! 여기서 뵙네요!"



크리스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하면서 세바스찬에게 삿대질 하면서 화를 내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크리스의 뒤에서 들려왔다. 세바스찬에게 화를 내는것을 멈추고 뒤를 보니, 세상에. 전 직장의 동료였던 멜리사가 서있었다. 멜리사가 반가운듯이 손을 좌우로 흔드며 오도방정을 떨면서 다가왔다 "크리스 크리스! 오랜만이예요! 이게 얼마만이죠? 반년만인가요?" 당황한 크리스는 멀뚱한 표정을 짓고있는 세바스찬을 한번 바라보고,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멜리사를 한번 쳐다보았다. 이 상황은 좋지 않다. 매우 좋지 않다. 빠르게 상황파악을 마친 크리스는 "이따 얘기해요" 라고 세바스찬에게 협박조로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다가오는 멜리사를 향해 걸어갔다. "멜리사, 나가서얘기해요. 나가서" 뒤에 앉아있는 세바스찬의 시선이 신경쓰였던 크리스는 멜리사의 등을 밀치면서 밖으로 유도했다. 멜리사는 크리스가 지금 급박한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머어머- 크리스 하나도 안변한것 같아요" 하는 눈치없는 소리만 내뱉었다. 세바스찬의 앞에서 멜리사와 대화하는것은 적에게 자신의 약점을 다 내보이는 것과 같았다.


딸랑, 하고 가게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는 멜리사 말고 다른 아는이가 없는지 좌우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한번 유리창 너머 가게도 살펴보았다. 다행히 아는이는 없어보였다. 세바스찬은 그냥 앉아서 자신의 음식에 손을 대고 있었다. 계속 어머어머 소리를 내는 멜리사를 붙잡고 크리스는 가게 옆 골목으로 살짝 들어갔다.


"멜리사! 여기엔 어쩐일이예요"

"어쩐일이긴요 점심 먹으러왔죠 글쎄 오늘 사내식당 점심 메뉴가 뭔지알아요? 치즈 마카로니래요 치즈마카로니! 제가 치즈 마카로니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는 알죠? 끔찍해요. 그래서 마리아랑 같이 나가서 먹자고 했는데, 글쎄 냉정하게 거절한거있죠? 아참참 마리아는 새로 들어온 신입이예요. 그 크리스가 회사 그만둔뒤로"


우다다다 말을 쏟아내는 멜리사를 진정시키는 것은 크리스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내에서도 머릿속이 꽃밭이라고 유명한 멜리사는 눈치 없는것으로도 유명하였지만, 그녀의 입에서 필터링없이 거쳐지는 수다는 회장님도 알고있을거라는 우스갯 소리도 있을 정도였다. 나쁜 성격은 아니었지만, 소문을 듣고 아무생각없이 말을 해대는 통에 모두의 골칫거리중 하나였다. 그래도 멜리사의 대화 덕분에 한가지의 사실을 알자 크리스는 내심 속이 쓰렸다. 그래 나 나가자마자  바로 신입을 뽑았구나. 뭐, 그렇지. 내가 뭐 대수라고. 흔히들 회사원들은 기계의 나사라고는 하지만, 자신이 나간것에 별 타격없이 굴러가는것이 당연했지만, 그 당연한 소식을 알자 속이 조금 씁쓰름하였다.


"그런데 크리스. 아직 직장 못찾으셨나봐요...수염은 기르시는거예요? 사실 멀리서봤을땐 크리스인줄 몰랐다니까요?"

"네? 아..네..그렇죠..뭐"


생각해보니 크리스는 최근 취업준비다 뭐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 밖에 잘 나갈일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관리도 안하게 되었고, 지금은 털이 북슬북슬 자라 얼굴의 반정도 덮고 있었다. 게다가 옷차림은 이게 뭐란말인가. 후줄근한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라니. 평소 회사를 다닐때 깔끔하게 다녔던 크리스의 시절을 생각하면은 꿈에도 상상못할 모습이었다. 멜리사는 왜 쓸데없이 눈썰미가 좋아서 알아본거야, 아, 면도라도 하고 올껄. 도망치듯이 나온 회사의 전 직장동료와 이런 몰골로 조우라니. 드라마에서나 나올만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쪽팔리기도 하였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하지만 부끄러워하는것도 한순간, 생각해보니 멜리사가 회사에가서 저 입을 가만히있을리 없다. 분명 크리스씨를 만났는데 아직 취직이 안된거같다, 걱정이 된다. 하면서 떠들어댈것이 분명했다. 크리스는 이제 멜리사가 하는말에 대충 네..네..네..하면서 대답하고 어떻게 하면 멜리사가 회사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않고 조용히 있을까에 대해서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크리스 그게 정말이예요? 팀장님한테 차여서 쫓겨났다는말"

"네..네..네?! 무슨 말이예요 그게?"

"네? 아니 회사에 소문이 자자해요...팀장님한테 차여서 눈치보여서 나갔다고.."

"와 어이없네? 팀장님이 그래요? 자기가 찼다고???"

"아..아뇨..다들 그냥 그렇게 수근대죠"


네..네..거리며 기계태엽처럼 대답하던 크리스의 정신이 순간 다시 확 다른쪽으로 쏠렸다. 차여서 눈치보여서 나갔다니!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찬건대! 억울함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이 몰골로 멜리사에게 사실 자기가 찬거라고  설득을 해도 구질구질해보이고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다시 멜리사로 정신을 쏟으니 생각해보니 멜리사가 회사에 가서 입을 열면 회사 동료들 뿐만 아니라 팀장님한테도 이야기가 들릴것이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했다.  회사에 쫓기듯이 나가서 이런 몰골을 한 상태로 취직 준비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아직 대기업에서 떵떵거리며 팀장자리에 있는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가 어떻게 해야하지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도 멜리사는 뭐그리 화제거리가 넘치는것인지 또다른 주제로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근데 지금 같이 앉아있는 분 누구예요? 우와 진짜 잘생겼다! 저는 연예인인줄알았어요!! 알파맞죠?"

"아..세바스찬이요? 네 알파예요"

"정말요! 와 너무 이쁘게 생기셔서 오메가인가 싶었는데, 뭔가 알파 분위기도 난다했는데 역시나! 무슨사이예요? 친구예요? 옷도 엄청 귀티나게 입었네요, 어디 직장 다녀요? 저좀 소개시켜줘요!"


멜리사가 이제는 세바스찬의 칭찬을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하기 시작했다. 얼굴에 홍조까지 띄면서 세바스찬의 칭찬을 하는 멜리사를 보자 크리스의 머릿속에서 번뜩, 섬광같이 한 생각이 스쳤다. 그래...그러면 되겠어...


"어...소개는 안될꺼같아요. 사실 제 남자친구거든요"

"네!? 정말요?!!"



멜리사가 정말 놀란듯이 소리를 높혔다. 그러더니 혼자서 박수를 치면서 웃기 시작했다. "세상에세상에-크리스 정말 능력있네요! 어디서 저런 알파를" 크리스가 제대로 대답을 안하고 그냥 하하 웃자,생각대로 멜리사는 척척 혼자서 스토리를만들기 시작했다. "직장을 그만둔게 사실 결혼준비때문아니예요?" 부터 시작해서 "팀장님이랑 사귀었다는 말은 그냥 루머였군요!" 까지 너무 생각대로 말해줘서 기쁘기까지했다. 설마 세바스찬이 쓸모가 있어지는 순간이 있다니. 멜리사한테 그냥 웃으며 "에이~ 그런거아니예요." 라고 말하였지만 강한 부정을 하지 않는 크리스를 멜리사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멜리사는 한창이나 크리스와 세바스찬의 연애담을 혼자 만들더니 시계를 보고서는 슬슬 점심시간이 끝날 시간이라고 했다. "그러면 크리스 나중에 만나서 꼭 얘기 들려줘야해요?" 멜리사가 크리스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고서는 사라졌다. 이제 멜리사는 혼자 만들어진, 과대하게 부풀어진 엄친아 세바스찬과 크리스의 연애담 이야기를 동료들에게 떠들어 댈것이다. 그러면 후줄근하게 취업을 준비하는 크리스가 아닌 왕자님 같은 남자랑 연애하고있는 크리스가 될 터였다. 이로써 팀장새끼한테 쪽은 안팔리겠군. 만족한 크리스가 혼자 수염을 쓰다듬고 웃으면서 골목을 나왔다. 



"제가 그쪽 남자친구였어요?"



골목안에 나오려고 하자 햇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햇빛방향을 보자 웃고있는 세바스찬이 보였다. 햇빛때문인가 세바스찬의 그림자가 크리스를 담그고 있었다. 아, 좆됐다. 순간 마션의 첫 대사가 떠올랐다. 너무놀라 숨을 삼키고 있는 크리스의 앞에있는 세바스찬의 표정은 그 어느때보다 오만하고 당당하고 그리고 가장 빛나고 있었다. 골목 안에 있어 어두운 크리스와 태양의 가호를 받는 듯이 빛나는 세바스찬.


갑과 을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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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슷 좋아해서 지금까지 앵슷물만 썼는데..유일하게 코믹 했던게 히반 단편이었던거같은데...

요즘 달달한 로코가 너무 보고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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