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났다. 아직 오후 다섯시밖에 안되었는데. 평소 다른 날보다 해야할 일이 빠르게 끝난 크리스가 시계를 보고 빙긋빙긋 미소를 지었다. 이곳저곳에서 취직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크리스는 매일 자기소개서를 썼는데 오늘은 무려 세개의 자기소개서를 쓴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혹시 오탈자가 없는지 그리고 앞뒤문맥이 없는지 천천히 확인해보았다. 없어. 완벽해. 진짜로 쉴 수 있어. 크리스가 저장버튼을 누른 다음에 쭈욱 기지개를 폈다. 아침에는 뉴욕잡스에서 일자리 및 구인광고를 살펴보았고 점심쯤에는 경제신문을 읽으며 면접을 대비해 사회현상등을 요약하고 자신의 의견을 정리하였다.그리고 오후 두세시쯤 되어서야 구인광고에서 찾은 회사에 맞춰 자기소개서를 썼는데 예상했던것보다 훨씬 일찍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최근 조용해진 옆집 덕분에 스트레스 받지 않고 푹 잠을 잘자서인것 같았다.


아직 저녁을 먹기에는 이른것 같아 크리스가 커피 한잔을 타고서는 침대에 앉았다. 그러고서는 슬금슬금 뒤로 가 콩 하고 살며시 벽에 기대었다. 이 벽 너머에 세바스찬이 있겠지. 그렇게 생각이 들자 기분이 묘했다. 그의 집에서 연인행세를 했던 것이 일주일 전이었는데... 지금은 그의 모습은 커녕 밤마다 들려왔던 소음소리도 듣기 힘들었다. 크리스가 들고있넌 커피를 후륵- 하고 마셨다.


오늘로 일주일 째, 크리스는 세바스찬을 만나지 못했다.



-



크리스는 그 날 세바스찬의 본가에 하룻밤을 머물러야 했다. 시간이 늦은것도 늦은것이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크리스가 어머니에게 이끌려 술을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신 것이 원인이었다. 이미 술로 이성이 날아간 크리스는 디즈니의 곰돌이 푸우 노래를 흥얼 거리면서 어른들 앞에서 장기자랑을 하고 있었다. 저 상태로 오피스텔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자신의 집 비밀번호도 두드리지 못할것이 뻔했다. 그렇게 된다면 그를 좁은 자신의 방 안에서 재워야 했다. 멀쩡한 알파와 자신을 제어할 줄 모르는 오메가가 한방이라니... 그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었다. 까딱하여 크리스가 페로몬을 방출한다면 둘은 손을 잡고 본능이라는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침대 위에서 뒹굴어야 할 지 몰랐다. 


"크리스 어디서 재우죠?"

"어디서 재우긴. 니 남자친구인데 니방에서 재워야지"

"그럼 저는요?"

"......니방에서 자야지???"


당연한 걸 묻는다듯이 어머니의 말에 세바스찬이 "그렇죠" 하고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진지한 관계까지 생각하고 있는 애인과는 잠자리를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그의 어머니 입장에서는 둘이 침대에서 같이 잠을 자든 다른 의미에서 잠을 자든 전혀 문제 없는 일이었다. 아직 순결을 지키고 있는 커플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당연히 조금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아들 세바스찬인걸. 어머니와 가족들의 생각이 어떤지 뻔히 아는 세바스찬이 이제와서 우리 둘은 아직 같은 침대를 쓸 만한 사이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것은 웃기는 일이었다. 


세바스찬이 몸을 못 가누는 크리스를 등에 업고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아직도 술에 취해있는지 그는 이제 인어공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방에 올라와 그를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오메가 이기는 하지만 자신 못지 않게 키와 덩치가 큰 크리스를 업고 올라온것은 자존심 상한 말이지만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세바스찬이 자신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고서는 옷장을 뒤졌다. 크리스가 침대를 차지하였기 때문에 바닥에 자신의 잠자리를 마련해야했다. '아, 그러고보니..' 휙 하고 뒤를 돌아 침대에 누워있는 크리스를 보니 이불이나 담요하나 없이 그냥 누워 자고있었다. 여름이라 춥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저렇게 자다가는 감기에 걸릴지 몰랐다. 세바스찬이 자신의 침대보를 찾기 전에 크리스에게 덮어줄 만한 담요를 먼저 찾았다. 다행히, 오늘 낮에 그에게 덮어주었던 담요가 있었다. 세바스찬이 노란 담요를 들고서는 크리스의 곁으로 갔다.


"크리스, 담요 덮엇.."


그러다 순간 갑작스레 팔을 붙잡는 힘에 의해 기우뚱 하고 침대쪽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헤헤. 세바스찬 뭐어해애요?" 자신을 잡아 이끈것은 술에 취한 크리스였다. "담요 덮어주려고요. 그보다 크리스 안자고 있었어요?" 크리스에 의해 바로 그의 옆자리에 눕게 된 세바스찬이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너무 가까워. 바로 코 앞, 누워있는 크리스가 보였다. 괜시리 눈을 마주치기 민망해 세바스찬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갔다. "자~상~도~하~셔~라~아~"  술에 취해 크리스가 느릿느릿하게 발음을 하였다. 아, 위험해. 여러가지 의미로 위험해. 술에 취해서 그런가 속도 너무 울렁 거렸고 바로 앞에 보기 좋은 오메가가 때문에 열도 올랐다.


"저리 비켜요. 전 바닥에서 잘꺼예요"

"바닥? 왜에? 아직 여름이어도 바닥에서 차면 입돌아가요 입입입"

"그러면 전 어디서 자요? 크리스랑 같이 침대에 누워잘까요?"

"그러면 되죠"

"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다 큰 알파와 다 큰 오메가가 서로 아무짓도 안하고 한 침대에서 뒹굴다니. 아니 그보다 나랑 침대에서 잠을 자도 된다고? 세바스찬이 더위가 아니라 당혹스러움에 땀을 흘렸다.


"아니..아니 그건 아니죠..어..저기..크리스"

"왜요? 제가 매력 없어요?"


크리스가 삐쳤다듯이 볼을 부풀리고 얼굴을 더욱 가까이 했다. 아. 이 남자는 취하면 많이 위험해 진다. 세바스찬이 가까이 오는 크리스를 피하기 위해 목을 뒤로 뺐다. 몸도 뺄 수 있으면 좋으려만 크리스가 세바스찬을 안듯이 가까이 팔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어려웠다.버둥거리면서 한 번 빠져나가보려했지만 술에 취한 사람이 뭐 이리 기운이 좋은지 꿈쩍도 하지 못했다. 오메가여도 세바스찬 보다 몸이 좋은 크리스의 위력은 장난이 아니었다. "왜 대답 안해요? 제가 매력이 그렇게 없어요?" 크리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계속 칭얼 거렸다. 아뇨, 매력 많죠. 당근빳따죠 쉬바. 넘쳐서 문제죠. 라고 당장 말하고 싶었지만 세바스찬이 어쩐 일인지 얼굴만 뻘개지고 말 한마디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말을 못하게 된 사람 마냥 입만 뻥긋뻥긋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였다. 아니, 근데 나한테 이런걸 왜 묻지? 뭐지? 나 유혹하는건가? 아냐 취한 사람이잖아. 혼란스러운 머릿속 세바스찬이 술에 취해 아무생각이 없는 크리스를 상대로 혼자서 세바스찬 세계의 백분 토론을 진행하였다. 크리스는 대답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세바스찬을 노려보더니 "에잇" 하고서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순간 세바스찬의 심장이 쿵 하게 내려앉은 듯했다. 아예 몸이 맞닿자 크리스의 달달한 체취가 확 하고 올라왔다. 오메가의 페로몬에 세바스찬의 머리가 아찔해졌다. 아...안돼. 술에 취한 사람을 상대로 이러면 안돼, 잃어가려는 정신을 붙잡기 위해 세바스찬이 혼자서 기도를 하고있었다. 그 때


"악!!"


갑작스러운 어깨의 통증에 세바스찬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고서는 양 손으로 크리스의 어깨를 밀쳐 떼어놓았다. 크리스가 히히히 하면서 혼자 실실 웃고있었다. "뭐한거예요?!" 세바스찬이 자신의 어깨를 살펴보자 커다란 이빨자국이 나있었다. "지금 물었어요?!" 당황스러운 행동에 세바스찬이 신경질을 냈다. 크리스는 그것도 상관하지 않은체 또 웃더니 단번에 다가가 세바스찬의 반대편 어깨를 물었다. 


"악..! 이 사람이 왜이래!"

"오늘..저..힘들어 죽을꺼같았는데..막..세바스찬은..조엘이랑 놀구..얄밉고..물어주고싶어요..얄미우니까"

"그건..그건 따로 사정이 있어서. 아니 얄밉다고 무는게 어딨어요"

"여깄어요"


크리스가 그 말을 마치고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고 있는 세바스찬의 손을 잡아 낼름 손가락을 물었다. "아파요! 진짜 아파요!" 세바스찬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크리스를 밀쳐내려했지만 역시 무리였다. 세바스찬이 이렇게 아프다고 외쳤지만 자신의 비명소리에 달려오는 가족은 한명도 없었다.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둘째 손가락을 입에 물고 질겅질겅 이빨로 긁었다. 아픔도 아픔이었지만 이 상황 엄청 묘하게. 내 손가락을 물고있는 크리스가. 아. 근데 진짜 아프긴 아픈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세바스찬이 침대아래 바닥에서 아무것도 덮지 않고 혼자 누워있었다. 아니...뭐라도 깔고 눕지, 왜 이러고 자고있지? 크리스가 침대위에서 바닥에 누워있는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조금 쳐다보고 있자 세바스찬이 충혈되어 시뻘개진 눈을 떴다. "헉, 세바스찬 잠 못잤어요? 눈이.." 술에 취하면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크리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다크서클이 밑까지 내려온 세바스찬이 자신의 눈을 비비고서는 천천히 일어났다. 자세히 보니 그의 몸 여기저기에 빨간 자국이 잔뜩 있었다. "모기라도 물린거예요?" 여름이라 밤 사이에 세바스찬이 잔뜩 시달렸나보다 라고 막연히 생각이 들었다. 모기가 좋아하는 타입이있고, 안 좋아하는 타입이 있다던데 세바스찬이 딱 좋아하는 타입인가보구나 싶었다. 


"네..아주..아주 큰 모기한테..잔뜩 물렸어요"


세바스찬이 무서운 기억을 떠올렸다듯이 자신의 몸을 부여잡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이 재미도 없고 영양가도 없는 대화가 둘의 공식적인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몰랐었다.





-



세바스찬과의 약속은 그 날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본가에 다녀온 뒤로 끝이 날 터였을 것이다. 크리스는 멜리사에게 세바스찬이 남자친구라고 속였고, 세바스찬은 자신의 가족들에게 크리스가 남자친구라고 속였다. 이제 서로 쌤쌤이 되었기에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눈치를 볼 일도 없어졌고 세바스찬도 크리스의 눈치를 볼 일이 없어졌다. 그래서 크리스는 막연히, 이제 세바스찬 떡방아집이 다시 문을 열겠구나. 라고 생각을했다. 그런 생각을 할때 화도 나면서 뭔가 기분이 싱숭생숭 하였지만 뭐 어쩌겠느냐. 섹스킹 세바스찬이거늘. 그런데 이상한것이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삼일이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세바스찬의 집에서 소리가 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존이 옆집에 살았을때보다 훨씬 조용했다. 덕분에 크리스의 공부와 취업준비는 순조롭게 되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세바스찬의 안부가 걱정 되었다. 그렇게 몇달을 너죽고나죽고 하는 사이었는데 데이트 한번 하고 본가 한번 다녀왔다고 마음이 이렇게 바뀐것도 웃겼지만, 크리스는 원래 남들에게 정을 잘 붙이는 성격이었다. 뭐지? 이제는 진짜 모텔에 가는건가. 근데 아무런 소리도 안들리는데. 혹시 이사라도 한건가? 아냐..이삿짐 옮기는 소리도 안들렸는걸. 그럼 어디 아픈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결과적으로 크리스는 세바스찬이 아프다 라고 결론을 내렸다. 아프다. 수면 아래로 잠잠했던 걱정이 순식간에 올라왔다. 크리스는 침대에 벌떡 일어나 자신의 방을 빙빙 돌아다녔다. 많이 아픈건가? 어쩐지 너무 조용하다 했어. 침대에 이불 보를 뒤집어 쓰고 끙끙 거리며 아파할 세바스찬을 떠올리자 괜시리 가슴이 아려왔다. 혼자 살때 아픈것 만큼 서러운건 없는데... 크리스가 우왕좌왕 몇번 더 좁은 방안을 돌아다니다가 결심을 했다듯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래, 먼 친적보다는 가까운 이웃이 이럴때 챙겨줘야지.





"저기요, 세바스찬. 저예요 크리스"


문을 두번 두드렸다. 금방 반응도 없기에 정말 집에 없는건가 싶어 걱정했지만 다행히 조금있자 끼이익 하고 문이 열렸다. 일주일 만에 보는 세바스찬의 얼굴이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반가운 마음도 잠시 세바스찬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보였다. "...무슨일이예요?" 아픈게 정말 맞는 것인지 세바스찬의 모습은 그 어느때보다 수척해보였다. 항상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을 약올렸던 모습은 어디가고 지금은 다크서클과 함께 푹하고 죽어있는 표정이 정말 병자의 모습이었다. 


"혹시 아프신거아니예요? 제가 스프좀 끓여왔는데" 

"네? 아프다뇨....아니 그보다 이거 저 먹으라고 갖고온거예요?"

"혼자 살때 아픈것만큼 서러운건 없잖아요"   


냄비를 들고 서있는 크리스를 세바스찬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말도 안한 세바스찬에 민망해 크리스가 자신의 냄비를 들어보았다. 그러고서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어깨를 으쓱해보았다. 스프를 만들고 끓일때는 몰랐지만 생각해보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웬수지간이었던 사이에서 웬수를 위해서 스프를 끓여오다니. 마치 사이좋은 이웃지간 같지 않은가. 아니 보통의 이웃지간도 이정도는 하지 않았을터였다. 민망한 정적의 시간이 일분정도 흘렀다. "..크리스는 점심 먹었어요?" 연인행세에 서로의 이름을 친밀하게 부르게 된 둘이었다.


"아뇨... 저는 세바스찬한테 주고 따로 먹으려고했죠"

"..그냥 같이 먹어요. 혼자 먹기도 그런데"


세바스찬 또한 크리스 처럼 민망한지 한손으로 뒷목을 긁고서는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크리스가 어쩌지 싶다가 걱정되서 스프도 끓여준 마당에 같이 점심먹자는 제안을 거절하기도 뭐해 실례하겠다는 말 한마디를 하고 성큼 그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망나니라고 생각했던 세바스찬 이기에 그의 방도 매우 지저분하고 더러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의 방은 깨끗한 편이었다. 오히려 크리스의 방보다 깔끔하였고 인테리어에도 신경을 쓴 것인지 벽지와 가구부터 달랐다. 분명 오피스텔에는 제공되는 가구들이 있었을 터였는데. 값비싸보이는 가구들이 공용의 제품이 아니라 세바스찬이 스스로 사온 제품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렇게 오피스텔의 상태를 마구 바꾸어도 되는건가?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대공사를 한 것을 보면 주인의 허락을 구하고 갈았겠지 싶었다. 크리스가 두리번 거리면서 냄비를 들고 있자 세바스찬이 오라며 손짓을 했다. 크리스의 방과 달리 식탁엔 의자가 두개 있었다. 오는 사람이 항상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살짝 데울까요?"

"아뇨 방금 끓여서 따뜻할꺼예요"


크리스가 의자에 앉자 세바스찬이 국자와 그릇 수저등을 갖고왔다. 국자로 스프를 떠서 서로 나누고 수저를 드는 동안에도 둘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처음 세바스찬과 억지로 햄버거 집에서 합석을 했을때와 같은 의미의 정적은 아니었다. 그 때 처럼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미워서 짜증나서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것이 아니라 무슨 대화를 해야할지 몰라서 나누지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무슨 대화를 해야하는 걸까. 아니 왜 내가 이사람과의 대화주제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하는 거야? 뇌가 아랫도리에 달린 소음공해 남자한테. 크리스가 괜히 들뜨려고 하는 저의 기분을 죽이면서 자책을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세바스찬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깔끔하게 이뻐보였다라는 변명이라도 있지, 지금은 적지 않지만 그래도 털도 있고 전처럼 깔끔한 상태도 아니었는데 괜시리 세바스찬을 긴장하게 만들고 그랬다. 


"어.흠..저기..요즘은 조용하시네요"

"네?"

"그거..안하셔서..조용하시다고요"


그냥 조용하다는 얘기를 하려고했는데 갑작스레 섹슈얼한 이야기가 나왔다. 크리스가 자기가 말을 내뱉고도 살짝 민망하였다. "....취업 준비하신다면서요" 세바스찬이 계속 수저를 뜨면서 말했다.


"그때 울면서 그랬잖아요. 열심히 준비하신다고..그래서..뭐"

"어..그러니까 저때문에 조용히 지내시고있는거예요?"

"아니..뭐.."


이건 또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세바스찬이 자신때문에 자제를 하면서 조용히 지내다니. 섹스킹의 말로에 웃음이 나올것 같으면서도 작은 배려에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크리스가 웃음을 꾹 참고 짓궃게 말을 던졌다.


"제가 처음에도 말했는데 왜 이제와서 배려하는척해요"

"아..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고요. 그래서 뭐 싫어요? 또 난잡하게 놀아볼까요?"

"아뇨아뇨 싫은건 아니고요. 그냥 왜 그렇게 마음이 바뀌었나 싶어서요"

"기억안나요? 그때 크리스 제앞에서 펑펑 울었거든요? 펑펑 울면서 그러는데 저도 인간인지라 동정심이 조금 들더라구요"


세바스찬 또한 지지않게 짓궃게 대답하였다. 대답에 전부 거짓말만이 있는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세바스찬은 크리스의 눈물에 약했다. 이 남자는 냉정하고 딱딱해보이면서도 눈물을 펑펑 잘 쏟아내곤 하였다. 지금까지 세바스찬의 자신의 집에서 잠자리를 가진 이유는 단순하게 별 거 없었다. 내 집에서 내가 성생활을 즐기겠다는데 뭐가 문제냐? 딱 이 태도였다. 그러나 둘의 약속이 끝나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세바스찬은 이 태도를 계속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코를 훌쩍거리며 펑펑 울고있는 크리스의 모습이 계속 아련하게 떠올려서 였다. 그 마음에는 죄책감도 섞여있었으면서 세바스찬도 자각하지 못한 무언가도 같이 섞여있었다. 자신의 집에서 연인 행세를 하던 크리스, 코를 훌쩍 거리며 펑펑 우는 크리스, 같이 침대에 누워서 세바스찬의 손가락을 물고 잠들었던 크리스. 떠올리기만 해도 갑작스러운 열과 활력에 세바스찬이 침대를 마구 뒹굴다 침대에 떨어지는 일도 다반수였다. "제..제가 울었다구요?" 크리스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네. 그것도 펑펑 울었어요. 기억 안나세요?"

"..하..하나도 기억 안나요"

"그러면 저 깨물었던 것도 기억 안나겠네요"


세바스찬이 자신의 티셔츠를 늘어당겨 어깨죽지를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크리스가 맨 처음 가장 세게 물어 남긴 자국과 멍이 아직 남아있었다. 다른 부분은 세바스찬이 크리스를 밀쳐내었기에 자잘한 자국 뿐이어 하루가 지나 사라졌지만 어깨에 남긴 것은 아직까지도 남아있었다. 크리스가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짓말..! 다른 사람한테 물고 저한테 덤탱이 씌우는거아니예요?!"

"아니거든요! 제가 최근에 누구 집에 데려온거 봤어요? 그때 크리스가 침대위에서 얼마나 난동을 부렸는데요"


크리스가 못 믿기겠다듯이 계속 눈을 꿈뻑 거렸다. 술에 취하면 기억이 날아가 주변 친구들에게 술을 자제하라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지만 설마 세바스찬이 앞에서까지 추태를 벌였을 줄은 몰랐다. 부끄러운 크리스가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세바스찬은 그런 크리스가 조금 보기 좋아 계속 말을 이었다. 


"얼마나 아팠는데요, 제가 바닥에서 자겠다고 했는데도 막 저 안 놔주고 깨물고 진짜" 

"미..미안해요.."

"아아..사실 온 몸 구석구석에 있었는데 사진이라도 찍어놓을껄 그랬나봐요"


세바스찬이 자신의 티셔츠를 늘려 어깨를 보인체 계속 떠들었다. 이제 그에 대한 안좋은 감정이 거의 완전히 사라진 크리스는 미안함만이 가득 하였다. 설마 내가 물어서 아픈걸까? 라는 과도한 상상이 섞인 생각마저 들었다. 앞에서 뭐라 떠드는 세바스찬의 이야기를 경건히 기울인 체, 크리스가 자신의 셔츠를 늘여뜨려 어깨와 가슴 부분을 보이게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세바스찬이 저도 모르게 말을 하다 혀를 깨물었다.


"뭐..뭐하는거예요!"

"대신 세바스찬도 물으세요..! 미안해요!"

"무..물으라고요? 가슴..아니 어깨를요?"

"네..."


크리스가 아픔을 참겠다듯이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옷을 더욱 늘렸다. 옆으로 늘여 어깨만 보여도 되는 것을, 옷을 앞으로 늘려 어깨를 비롯해 풍만한 가슴까지 보였다. 근육으로 다져진 그의 하얀 몸은 부드러워 보였다.특히 보일듯말듯해서 더욱 야릇한 느낌을 주는 핑크색으로 된 유두는 매우 자극적이었다. 세바스찬이 놀라 자신의 두 손으로 눈을 가린뒤 "뭐하는거예요! 가려요!" 라고 외쳤다. 미쳤어, 세바스찬. 니가 본 오메가의 몸이 백명을 넘을텐데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수십명의 어쩌면 백명이 넘는 단위의 오메가와 잠자리를 가졌으면서도 크리스의 몸에 왜 부끄러움을 느꼈는지는 세바스찬도 몰랐다. 일단은 저 민망한 모습부터 가리는게 먼저였다. 크리스가 그치만..하고 말을 흐렸지만 당황한 세바스찬이 "빨리가려요! 진짜!" 하면서 큰소리를 냈다. 기껏 깨물려주겠다는데..그러면 쌤쌤일텐데..아쉬운 크리스가 시무룩해하면서 당겼던 옷을 놓았다. 티셔츠의 목이 제자리에 가서야 세바스찬이 천천히 눈을 떴다.


"다..다음부터는 그런짓 하지 마세요"

"같은 남자끼린데 뭐 어때요"

"아..안돼요! 그래도 크리스는 오메가고 저는 알파잖아요! 여튼 진짜..."


오메가라면 사족을 못쓸것 같은 세바스찬이 저렇게 눈을 감고 얼굴까지 찡그리니 괜히 마음이 시무룩해졌다. 최근 관리를 안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 인기있는 몸이었는데. 그렇게 보기 싫었나. 자신감이 떨어진 크리스에게서 세바스찬이 부끄러워서 그랬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멋쩍은 크리스가 자신의 볼을 긁었다. 세바스찬은 그런 크리스의 모습을 보다가 욱..하고서는 자신의 입을 막았다.


"왜그래요? 진짜 어디 많이아파요?"

"..요즘 이상해요. 몸에서 막 열이나고 속이 울렁거려요"

"병원 가봐야하는거아니예요? 저도 저번에 부정맥 검사 받고왔는데 제가 갔던 병원 소개시켜줄까요?"

"그래야겠어요..몸에 열도 나는거같아요"

"어디 봐봐요"


크리스가 손을 뻗어 세바스찬의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서는 자신의 다른 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세바스찬의 몸에 열이 살짝 있기는 하였지만 아프다고 할 정도의 큰 열은 아닌것 같았다. 세바스찬은 크리스의 행동을 살펴보다가 욱.. 하고서는 자신의 이마에 있는 크리스의 손을 빼었다. 


"크리스가 오면 더 울렁거리는거같아요" 

"..지금 제가 역겹다 이거예요?"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울렁거린다니까요?"


그게 역겹다는 거잖아. 크리스가 분노와 짜증과 뭔가의 섭섭함이 섞긴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저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렇지, 역겹다는 말을 이렇게 바로 앞에서 할 수 있을까. 걱정되서 수프까지 끓여다 줬는데 괜히 서러웠다. 뭐, 세바스찬과 같이 잘생긴 알파 남성이다. 자신같은 것이 눈에 찰리는 없겠지. 그래도..그래도 역겹다는 좀 아니잖아. 역시 잘해줄 필요가 없는 남자였다. 애초에 잘못은 저사람이 먼저 저질렀는데..괜히 걱정해서 수프를 끓여준 자신이 우스운 꼴이 된 것 같았다. 크리스가 자신의 그릇을 들고 벌컥벌컥 스프를 삼켰다. 그러고서는 탁! 하고 책상 위에 빈 그릇을 놓았다. "그러면 속 안울렁거리게 먼저 가볼게요" 이미 덜어 내용물이 없어진 냄비를 들었다. 세바스찬은 크리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지만 간다는 이를 붙잡을 만한 이유도 없었다.

"어어- 잠시만요. 크리스" 세바스찬이 이미 뒤돌아서 가려는 크리스를 불러세웠다. 크리스가 새침하게 입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돌아보았다.


"갔다는 병원이 어디예요? 저도 오늘 다녀오게요"

"....이 근처에 허니종합병원센터있어요. 인터넷 검색하면 나와요"


크리스가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러고서는 방 문을 열고 쾅 소리와 함께 문을 닫아버렸다. 

나 뭐한거니 진짜.






뇌가 아랫도리에 달린 새끼. 오메가가 없으면 못사는 새끼. 섹스중독증에 걸린 새끼. 못된 새끼. 나쁜 새끼. 빌어쳐먹을 새끼!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욕을 하면서 공원을 달렸다. 오늘분의 진도도 다 나갔고, 더 한다 해도 집중도 되지 않을 것 같아 밖으로 나와 오랜만에 운동을 했다. 몇 바퀴를 전력질주 하였을까 온 몸은 땀으로 젖어있었고 숨은 가빠졌다. 그나마 뛰니 몸이 힘들어 아무생각도 나지 않았다. 크리스가 헉헉 거리며 가져온 물통을 들어 목을 축였다. 인간은 참으로 신기하단 말이지. 이렇게 조금 운동한걸로 엔돌핀이라는 것이 돌아서 기분이 조금 좋아지니까. 대충 손으로 땀을 닦은 크리스가 물통을 쥐고 공원 밖으로 나섰다. 그래, 내가 그런 씹새끼때문에 시간을 잡아먹는게 아깝지. 지금이 어떤때인데. 정신차리자 크리스 에반스. 저놈이 조용해질때가 기회란 말야. 응? 이제 아무것에도 휘둘리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크리스가 자신의 마음을 다 잡으며 걸었다. 이렇게 상쾌한 기분이 되고나니 방금전에 우울했던 것이 거짓말이 된 것 같았다. 앞으로는 매주 저녁에 조깅을 해야겠어, 상쾌하고 기분 좋네. 그렇게 세바스찬의 생각을 저 멀리 우주로 날려버린 크리스가 휘파람을 불며 오피스텔로 향했다. 





아무에게도 휘둘리지 말아야하는데, 왜 신은 그를 돕지 않는걸까?





"크리스. 오랜만이야"

".......진짜 오늘 재수 더럽게 좋네"


세바스찬에 휘둘리는것도 모자라, 이새끼 얼굴까지 봐야하다니. 아직 엔돌핀빨이 남은 크리스가 피식 하고 웃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최악의 상황이다. 면도도 제대로 하지 않은 얼굴에 뜀박질을 해서 온 몸은 땀범벆이, 그에 비해 톰은 늘,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정갈한 정장에 차분하게 뒤로 넘긴 머리까지 완벽한 상태였다. "왜 여기있어?" 크리스가 바로 감정적인 태도가 나오지 않은 것은 그나마 저번에 톰과 마주쳤었기 때문이다. 그 때, 크리스는 톰을 보고 바로 도망을 쳤지만 그 눈치좋은 톰이 자신을 못봤다는 생각은 하지않았다. 이미 최악의 상황을 한번 보여줬으니, 두번째 최악의 상황은 조금은 대처가 가능했던 것이다. "전화했는데 안받더라. 그래서 메세지 남겼는데 대답이 없어서 기다리고 있었어" 크리스가 자신의 주머니속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오늘 저녁 세바스찬과의 일이 있으 후 기분이 나빠 진동상태로 돌려놓고서는 재운듯이 놓았던 핸드폰이었다. 핸드폰에는 톰의 말대로 부재중 통화와 함께 메세지가 남겨져있었다. "내가 미리 메세지를 봤으면 오지 말라고 했을텐데, 아쉽게 됐네. 그냥 가지 그랬어?" 크리스가 다시 핸드폰을 닫고 날카롭게 얘기했다. 감정적이게 되면 안돼, 크리스. 그러면 니가 지는거야.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하는 크리스와 달리 톰은 늘 똑같이 차분하고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니가 오지말라고 했어도 여기서 기다렸을꺼야"

"..왜?"

"아직 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남아있지 않아?"

"우리사이에 할 얘기? 난 없는데? 반년 전에 끝난거 아니었어?"

"반년 전에 뭐? 니가 헤어지자고 소리 지르고 나 무시하고 다니다가 일방적으로 회사 그만두고 나가버린거?"


톰이 오히려 어이가 없다듯이 말했다. 그 때 크리스는 일방적으로 사직서를 썼다. 결혼 못하겠다고 한 이유가 일 때문이라고 말했으면서 크리스는 사직서를 쓰고 톰의 곁을 떠나버린것이었다. 어떤 메커니즘으로 크리스가 그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못하는것은 아니었다. 분명 자신이 위에 있는 회사에서는, 소문에 휩싸인 회사에서는 자신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여서 떠난거겠지.


"....그래. 난 더이상 할 얘기 없어. 그냥 가"


크리스가 톰을 노려보고서는 몸을 돌려 오피스텔의 입구로 들어가려했다. 톰은 무작정 도망가려는 크리스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앞으로 이끌었다. "이거 놔!" 크리스가 빽 소리를 질렀다. "넌 할얘기 없지만, 난 할얘기 많아. 너무하다고 생각한거아냐?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4년이야, 4년. 그런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끝내고 가도 되는거야?" 늘 냉정하던 톰이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그때를 떠올리면 톰도 할 말이 많았다. 


"이제와서 무슨할말? 반년이나 지났는데. 반년동안 가만히 있다 왜 이러는건데"

"연락? 연락했으면 니가 받아줬을꺼같아? 난 기다린거야 크리스 에반스. 니가 그나마 덜 감정적일때를. 말이라도 걸려고 하면 도망부터 치려했으니까 시간을 준거라고"

"웃기지마. 기다리긴 뭘 기다려. 우린 그때 끝났어"

"그때 끝났으면 왜 레스토랑에서 날 보고 도망쳤어?"


톰이 숨기고 싶었던 크리스의 이야기를 들추었다. 패배해서 진 개처럼 꼬리를 내밀고 후다닥 도망갔던 그 모습을.


"그만 이기적으로 굴어. 내가 널 모른다고 생각해? 니가 무슨 생각으로 그 자리에서 그렇게 도망쳤는지 모른다고 생각해?"

"닥쳐"


일때문에 결혼 못한다고 거절하였고, 이 회사 아니면 일할 곳 없냐 말하며 그만두었다. 자신도 안다 얼마나 일방적으로 굴었는지. 톰만이 이기적인게 아니었다, 자신도 같이 이기적이었다. 그러니까 더 잘난 모습을 보여줬어야했다. 적어도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그 선택에 얼마나 값진 것이 있는지. 혼자서 성공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줘야했다. 적어도 톰 히들스턴에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그런데, 그게 무슨 모습이냔 말인가. 취직자리 하나 구하지 못하고 부끄러움 차림새로 마주쳐야 하다니. 감정이 북받쳐 오를것 같았다. 정말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멀쩡한 취직자리를 얻어 멀쩡한 차림새로 자신의 쪽에서 먼저 만나자고 하고 싶었다. 고질병처럼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울지마 크리스. 지금 난 널 달래줄 수 없어" 톰이 혼내듯이 크리스에게 말했다. "안 울거든, 병신아" 지고 싶지 않아 말을 험하게 내뱉었다.


도망치고 싶다, 더이상 톰이랑 대화하고 싶지 않다. 작아지고 싶지 않다.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 크리스가 톰에게 잡힌 손을 흔들어 털어내려 했지만 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여긴 사람이 많아, 어디 가서 얘기해" 톰이 크리스의 손목을 잡고 어딘가로 이끌려고 했다. "거기, 잠시만요. 지금 뭐히시는거예요?" 그 때 기적처럼 세바스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크리스 손목 잡고 뭐하는거냐고요. 모르시나 본데 요즘 그렇게 강제로 손목잡는거 성추행 성희롱입니다.한국드라마도 아니고 뭐하는거예요?"

"뭐라고?"

"제가 성평등주의자거든요. 아니 그 전에 크리스한테 뭐하는거냐고 묻잖아요"


한 손에 슈퍼마켓 봉투를 들고,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던 세바스찬이 천천히 걸어왔다. 톰이 방해물을 본 듯이 인상을 찌푸리고 크리스의 손을 놓아주었다. 억센 손아귀에 잡혀 새빨간 손자국이 크리스의 팔목에 남아있었다. 톰이 주머니에 자신의 손을 넣고서는 고압적인 자세로 세바스찬을 내리 깔아보았다. 


"제가 크리스랑 할 얘기가 있어요" 

"얘기할때 꼭 손잡고 해야되요? 애예요? 저랑도 손잡을래요? 얘기해야하니까"


저번에 봤던 그 어린 알파놈이다. 유치하게 말 싸움을 거는 꼴이 우스워 톰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쪽은 누구신데 대화하는데 끼어드시는 거죠? 대화예절교육 안받으셨어요?" 자신을 얕보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깨달은 세바스찬이 봉투와 담배를 땅에 버리고 성큼 걸어와 크리스와 톰의 가운데에 끼어들었다. 그러러고서는 움츠러들어있는 크리스의 어깨를 안았다. "크리스 애인이요. 제가 대화예절교육은 잘받았는데, 갑자기 누가 우리자기를 건드려서 좀 당황해서요." 세바스찬의 돌발행동에 당황한것은 크리스였다. 톰은 세바스찬의 행동을 그저 지켜보았다. 그러고서는 크리스의 어깨를 안듯이 잡은 세바스찬의 손을 노려보았다. "진짜야 크리스?" 톰이 세바스찬을 무시한 체 크리스에게 물었다.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몰라 크리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럼 진짜지 가짜겠어?" 세바스찬이 크리스를 두둔한다듯이 아프지 않을정도로 힘을 주었다. 크리스가 멍 하니 있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야, 내 남자친구야. 그러니까 더이상 너랑 할 얘기 없어" 말은 떨림없이 잘했지만 문제는 시선이었다. 크리스가 톰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랜기간 사귀었던 경험으로 크리스보다 크리스를 더 알고 있는 남자가 톰이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니면 진실을 말하는지 정도는 대화만 하고 있어도 알 수 있었다. 톰이 고개를 올려 자신을 노려보는 세바스찬을 쳐다보았다. 그러고서는 웃기다듯이 피식 웃었다. "지금 웃어? 웃었어?" 톰의 비웃음에 도발당한 세바스찬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톰은 그런 세바스찬을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숙여, 다시 크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방해물이 없을때" 그러고서는 몸을 돌렸다.


완전히 무시당한 세바스찬이 뒤돌아 걷는 톰을 향해 "다시 연락하긴 뭘 다시 연락해!! 연락하기만해봐!!" 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고 톰의 보폭이 느려지거나 빨라지진 않았다. 그저 변함없이 톰의 페이스 대로 걸어갔다. 완전히 졌다. 거짓말이 통하지 않았다. 세바스찬이 욕 한바가지를 꺼내줄까 하려다가 자신의 옷깃이 당겨져 말을 멈추었다. "그만해요, 세바스찬"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크리스였다. 세바스찬은 어..하면서 지금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생각해보니 계속 크리스를 안고있다시피 있었다. 화들짝 놀란 세바스찬이 뛰듯이 그의 몸에서 떨어졌다. "미..미안해요. 갑자기 안아서" 저 시꺼먼 놈에게 손목을 잡는건 성희롱이니 뭐니 외쳤으면서 자신은 그의 허락없이 어깨를 부여잡고 있었다. "괜찮아요.." 크리스가 기운빠진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안 괜찮아 보이는 웃음이었다.




-



오피스텔, 5층의 옥상공원에서 둘이 벤치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대로 크리스를 혼자 두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세바스찬이 잠깐 경치좀 보자고 권유를 하였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의 그는 바람빠진 풍선처럼 모든것에 의지를 잃은 사람 같았다. 다행히도 옥상공원에는 크리스와 저 둘밖에 없었다. 크리스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올려 밤하늘만을 쳐다보았다. 세바스찬이 방금 전 들고있던 봉투에서 맥주 두캔을 꺼냈다. "마실래요?" 한 캔을 건내주자 크리스가 말없이 잡았다. 딱- 하며 캔이 따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바스찬이 다시 부시럭 거리면서 봉투에서 안주가 될만한 것을 찾았다. 


"젤리빈 좋아해요? 이거라도 먹을래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거예요. 고마워요"

"아 진짜요? 다행이네요"


세바스찬이 봉투에서 젤리빈을 꺼내 뜯었다. 그러고서는 크리스의 작고 통통한 손에다가 털털털하고 젤리를 털어주었다. 크리스는 그냥 아무말 없이 세바스찬이 주는것을 받고 있었다. 분명, 그놈은 레스토랑에서 봤던 그놈이었다. 크리스가 보자마자 도망친 인물. 그리고 아마 추측하자면 그 놈은 크리스가 말한 팀장이라는 놈일것이었다. 그러니까....크리스의 전 남자친구. 아니 근데 헤어졌으면 헤어졌지 왜 찾아오고 난리야? 세바스찬도 맥주캔을 딴뒤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마셨다. 


"아까, 크리스가 말해준 허니종합벼원다녀왔어요. 다 정상이라고 하더라구요. 내시경도 받아봤는데"

"다행이네요"

"그러다가 슈퍼마켓좀 들렸죠 냉장고좀 채울려고. 아 근데, 그냥 들리지 말껄 그랬어요. 슈퍼마켓 봉투를 들고 그러는건 좀 안멋있잖아요"

"그래도 덕분에 이렇게 맥주마시고 젤리빈 먹을 수 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요, 뭐."


크리스는 방금 전의 남자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전 남자친구의 일이니, 이야기 주제로 꺼내는것은 당연히 싫은 일이겠지만 세바스찬은 계속 신경이 쓰였다. 그러니까, 왜인지 모르겠지만 크리스에게 고맙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 남자한테서 꺼내줘서 고맙다고. 세바스찬이 둘의 사이를 방해한게 아니라고. 그런 확인이 듣고 싶었다. 제가 방해한건 아니죠? 라고 물어보려다가 크리스의 표정이 좋지 않아 세바스찬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마음만 생각해서 크리스에게 몹쓸짓을 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크리스는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려운 남자인거같아요" 조용한 공간속 세바스찬이 중얼 거리듯이 말했다. 


"저요? 단순하다는 얘기 많이 듣는데"

"단순하긴 한데. 뭐랄까 공같아요. 아, 이건 노란색 공이야 라고 단번에 알 순 있지만. 어디로 튈 지 모른다고해야하나요"

"그게 뭐예요"

"그러니까... 너무 어려워요. 제가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닌데, 크리스는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어요"


처음 옆집에 살았을때는 각양각색의 방법을 펼쳐 세바스찬을 공격했다. 그러고서는 세바스찬의 집 앞에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도주하였고, 바로 본인 앞에서 뇌가 아랫도리에 달렸냐는 말을 서슴치 않게 내뱉었다. 그렇게 세바스찬 하면 질색을 하더니 나중에는 어떤 여성에게 자신을 남자친구라고 속이기도 하였고, 데이트를 하다가 생각지도 못하게 멜로영화에 펑펑 울기도 하였다. 또 그 뒤에 하는 짓을 어떻단 말인가. 레스토랑에서 갑작스럽게 뛰쳐나가 울고, 갑자기 면도를 하고 옷을 빼입어 잘난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의 부모님 앞에서는 이상적인 남자친구의 모습을 하고. 침대위에서는 자신을 깨물고. 갑자기 아픈게 아니냐며 음식을 만들어오고. 울보이면서 자신의 전 남자친구 앞에서는 눈물한방울 안보이고. 정말 어렵다. 패턴을 알 수가 없다.


"크리스르 보면 울렁거리는건 크리스가 너무 어려워서 일꺼예요. 수포자들은 어려운 수학문제를 보면 속이 막 울렁거리거든요"

"제가 어려운 수학문제고, 세바스찬은 수포자예요?"

"비유하자면 그렇죠. 너무 어렵잖아요. 저는 어려운건 질색이거든요"


세바스찬이 남아있는 자신의 맥주를 단숨에 입에 털어버렸다. 크리스는 전과 같이 무표정하게 세바스찬을 보다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요? 세바스찬은 어려운거 좋아할꺼같은데요" 맥주를 다 마신 세바스찬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크리스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아, 울렁거려. 것봐. 또 이렇게 알 수 없는 얘기를 하니까 어지럽잖아. 해바라기를 담은 눈동자, 오똑한 코, 하얀피부와 상기된 볼, 오동통통한 입술. 전과 다르게 털이 나있는 상태인데 왜 이뻐보이는거야. 세바스찬이 홀린듯이 계속 크리스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왜 어려운걸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요?" 크리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계속 하늘만을 쳐다보았다.


"세바스찬은 싫증을 잘내잖아요. 어렸을때부터 그랬다면서요, 어머님이 그러시더라구요"

"아.....그랬죠. 뭐. 근데 그거랑 어려운거랑은 무슨 상관이예요"

"그러니까 세바스찬은 뻔하고 단순한걸 싫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금방 싫증을 내는거구요. 정을 붙이기도 전에 싫증을 내시니 좋아하는게 별로 없을꺼예요. 그러니까 매일 오메가를 갈아치우시는거구요. 매일 다른 사람이면은 싫증 낼 수 없으니까요"


예상치 못한 예리한 관찰력에 세바스찬이 놀랐다. 그건 세바스찬 스스로도 떠올려본적 없는 생각이었다. 확실히, 싫증을 잘내서 한 사람과를 오래 사귀지 못한것은 정답이었다. 왜냐면 너무 뻔한걸, 뻔한건 재미없는걸. 항상 같은사람, 항상 같은 패턴의 데이트, 항상 같은 패턴의 잠자리. 하지만 스스로가 싫증을 잘 내는 타입인것은 알았지만, 싫증을 잘 내기에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런 사람은 없었으니까.


"세바스찬은 정없는 사람은 아니예요. 정이 없었으면 가족들한테 그렇게 대하지도 못하겠죠. 그때 세바스찬의 어머님의 얘기를 듣고 생각했어요. 세바스찬이 제대로 된 연인을 만나지 못한 것은, 세바스찬이 정을 붙이기 전에 싫증을 안 낼 수 있는사람, 그러니까 세바스찬이 말한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을 못만난게 아닐까 하고요"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 대답을 듣고있는 기분이었다. 세바스찬의 동공이 확대되면서 숨소리가 가빠졌다. 뚫어져라 크리스의 옆모습을 살펴보았지만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아, 이렇게 말하니까. 제가 엄청 세바스찬이 찾고있던 이상형 같네요. 싫증 안나는 어려운 사람. 아 아직 정을 안붙였으니까 탈락인가?" 그제서야 크리스가 배시시 웃으면서 세바스찬을 쳐다보았다. 아, 그러니까. 너무 갑작스럽게 정답을 알아버렸지만 그러니까. 세바스찬이 아무말도 못하고 껌뻑껌뻑 자신을 쳐다보자 크리스가 민망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바스찬의 속이 뒤틀리듯이 울렁거렸다.아니 울렁거렸다는 잘못된 표현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세바스찬은 지금 크리스를 보면서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있었던 것이었다. 온 몸에 열기가 쏟아 뇌가 어지러웠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세바스찬이 고개를 푹 하고 숙이고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그러니까 나, 크리스한테 반한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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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존나 급전개...사실 마음만 같아서는 좀더 늘려트려서 화를 두개로 나누고 싶었는데.....

그러면 제가 이 연성을 중도포기할꺼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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