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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모든것은 호기심이 문제다. 세바스찬은 요 삼일 내내, 예행연습인 데이트가 끝나고 한번도 보지 못한 크리스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자꾸 펑펑 우는것이 생각이 나 마음을 참 심란하였다. 세바스찬은 이 현상의 이유가 크리스가 울었던 이유를 몰라서, 그게 궁금해서, 그래서 계속 생각나는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렇지않다면 이렇게 떠올릴 이유가 없었으니까. 세바스찬이 베개를 안고 침대를 왼쪽으로 떼구르르 오른쪽을 떼구르르 구르면서온 몸으로 자신의 심란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아 도대체 뭐야 뭐냐고 왜 운건데, 왜" 닿지 않는 질문을 세바스찬이 멍하니 중얼 거렸다. 이 질문의 대답을 듣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세바스찬이 그런 생각을 하다가 침대위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알아야지!! 내가 누구 명예를 위해서 남자친구 행세까지 해주는데!" 크리스가 자신의 남자친구 행세를 해서 집에 방문해준다는 사실을 지워버리고 세바스찬이 저좋을 생각만 하였다. 그래도 어쩌면 오늘 들을수 있을지 모른다. 세바스찬이 힐끔 탁자위의 시계를 보았다. 새벽 5시 50분, 약 한시간 뒤면은 그는 자신의 고민거리의 장본인을 만날 수 있었다. 


항상 약속시간 10분전에 나오는 것이 습관이 된 세바스찬이 주차된 차에 기대어 담배를 피며 크리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 놀러가는것도 아니고 부모님 댁에 가는것이니 세바스찬의 차림새는 그 어떤때보다 간편하고 가벼워 보였다. 남색 반팔 티셔츠에 검정색 스키니진. 그래봤자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그가 못나보이거나 그런것은 아니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어느새 7시가 되었다. 데이트때 거의 정각에 도착하는 크리스를 생각하면 이제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올 것 같았다.세바스찬이 담배를 땅에 떨어트리고 발로 몇번 지져서 담뱃불을 껐다. "담배도 피셨어요?" 아, 역시. 약속시간에 맞춰서 도착했네. 크리스의 목소리에 세바스찬이 고개를 올렸다. "뭐 가끔식 폈어요"  그다지 흥미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세바스찬의 대답에 크리스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갈까요? 조수석에 타실꺼죠?"

"남자친구니까 조수석에 타야겠죠"


"잘 아시네" 훌륭한 크리스의 모범대답과 행동에 세바스찬이 피식 웃으면서 차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크리스도 반대편의 조수석 부분의 문을 열고 탑승하였다. "그렇게 멀진 않지만 그래도 두시간정도 걸릴꺼예요. 안전벨트 매세요" 세바스찬이 차에 시동을 걸면서 얘기했다. "안전운전이나 잘하세요" 크리스가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하여튼 뻣뻣하기는... 이래갖고 가족들 앞에서 잘할 수 있을련지. 악연으로 뭉친 사이지만 그래도 한번 데이트 했다고 크리스에게 어느정도 친밀감을 갖고있는 세바스찬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 남자는 자신의 과거때문에 내가 삼일동안 고생한것은 알기나 할까? 괜시리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크리스. 좀 부드럽게말해줄수없......"


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없...!?!?


"누구세요?!!"

".........뭐라구요?"


세바스찬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좁은 차 안에 세바스찬의 비명과 같은 목소리가 울렸고 그 소리에 크리스가 저도 모르게 양 귀를 틀어막았다. "누..누구세요? 뭐예요? 크리스 에반스씨는요?" 과장된 연기를 하는 배우 처럼 세바스찬이 온몸을 파드득 떨면서 소리를 꽥꽥 높였다.


"아 시끄러워요. 왜이렇게 오바예요. 방금 눈 마주치고 인사 다하다가 왜 차안에서 이래요"

"아니, 그. 어. 음. 아? 면..면도했어요?"


분명 차 밖에서 크리스의 모습을 보긴 보았다. 그런데 세바스찬은 순식간에 크리스의 모습을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그것은 세바스찬의 잘못이 아니라 뇌의 잘못이었다. 너무 당황한 인간의 뇌가 저도 모르게 크리스의 모습을 인식시키지 못하고 '우우움. 뇌는 저런사람 모르게쬬요. 아마도 크리스에반스씨인가봐요' 라고 인지시켜버렸고 덕분에 세바스찬은 차 밖에서태연하게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래도 똑똑한 뇌가 '아! 저 모습 많이 달라진 크리스의 모습이잖아!' 라고 인식을 해버렸고, 그제서야 세바스찬이 현재의 크리스의 모습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깔끔하게 수염을 면도하여 드디어 보인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 미남이었다. 모든 시선이 그 풍성한 수염으로 가서 알지 못했던긴 속눈썹, 해바라기를 담은 듯한 눈동자, 날렵한 얼굴선, 립스틱을 바르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빛을 내고있는 통통한 분홍색 입술. 남을 잘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저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한 세바스찬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미남이었다. 게다가 깔끔하게 단정한 저 머리는 뭐란말인가. 그의 모습은 더이상 옆집 취업울 준비하는 백수가 아니라 대기업 회사에 근무하고있는 훈남 대리와 같은 모습이었다. 세바스찬이 어버버하며 입을 떡 벌리고 크리스의 몸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몸과 맞는 새하연 셔츠는 크리스의 떡 벌어진 어깨와 큰 가슴을 눈에띄게 해주었고, 바로 얄쌍하게 들어나는 허리라인 또한 아낌없이 빛이났다. 그리고..그리고.. 세바스찬이 슬쩍 눈을 내리깔아 크리스의 바지 부분을 쳐다보았다.지금은 잘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 얼핏 봤을때 분명..분명......."스몰애스..." 세바스찬이 저도 모르게 중얼 거렸다. 


"지금 성희롱 하신거예요? 맞을래요?"

"아..아니..죄송합니다. 저도모르게 그만..아니...엄..엄청 잘생겼네요. 크리스"


그의 미모에 공격을 당한 세바스찬이 멍청이처럼 말을 더듬었다. 평소에도 이쁜 오메가와 잘생긴 오메가와 잠자리를 함께한 세바스찬의 태도 답지 않았다. 크리스가 다른 오메가들 보다 빼어나게 잘생긴 편이긴 하였지만 그래도 맨날 자기 얼굴을 보고 사는 - 세바스찬은 그래도 자기가 크리스보다 잘생겼다고 생각한다 - 세바스찬이 이렇게 당황할 정도는 아니었단 말이다.이건 갭(GAP)때문 일 것이다. 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니는 크리스와 지금 이 잘생기고 끝내주는 오메가와의 차이 때문에 시너지 효과로 더 흥분한것이다. 크리스는 오히려 놀라는 세바스찬이 이상하다듯이 미간을 찌푸리고 손을 들어 벌린 세바스찬의 턱을 살며시 닫아주었다."세바스찬. 이제 그만 출발해요. 괜히 그러니까 민망하잖아요" 전혀 민망해 보이지 않는, 그저 무표정인 크리스가 덤덤하게 말하였다. 그의 정적인 태도에 드디어 어느정도 정신이 돌아온 세바스찬이 "앗,네.네." 하고서는 핸들을 잡았다.  "어...? 이거..왜 갑자기 안움직이지..? 고장났나?" 급하게 차를 밟았으나 차도 세바스찬처럼 당황을 한 것이지 움직이지 않았다.뭐야, 비싼 차인데. 벌써 고장났나? 세바스찬이 기어를 올리면서 허둥지둥 차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의 모습을 크리스가 '정말 극혐이다' 라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보았다.


".......시동을 안거셨잖아요"

"..아.."


민망한 정적이 흘렀다.





"다왔어요, 내려요" 원래 운전을 하면 조수석에있는 사람이 매너있게 대화상대를 해줘야 하는게 아닌가? 차가 움직이자마자 10분도 안되서 잠이 든 크리스가 미워서 세바스찬이 조금 거칠게 어깨를 흔들며 그를 깨웠다. "으음..벌써요?" 살짝 침을 흘린것인지 그의 입술주의가 반짝반짝 빛을 내고있었다."차 막혀서 30분이나 더 걸렸거든요? 일어나요. 그리고 침좀 닦아요" 세바스찬이 툴툴 되면서 자신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크리스는 백미러를 보면서 자신의 입 주의를 닦고서는 조금 흐틀어진 자신의 머리를 탈탈 털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랑 데이트할땐 신경도 안쓰더니.... 자존심이 상한것인가 뭔가 울컥울컥 치솟는 화에 세바스찬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정원도 있고, 엄청 좋은 집이네요. 집이 잘 사나봐요?" 따라 내린 크리스가 바로 앞의 집을 보면서 감탄을 하였다. 이 근교는 대부분 주택가로 되어있는 곳으로 미국인들의 이상적인 집 모양새를 유지 하고 있었다. 큰 정원과 차고, 외관이 훌륭한 이층집. 이 일대의 집이 다 이렇게 생겨 개성이 없고 딱딱하다고 생각했던 세바스찬과 달리 크리스는 연신집이 좋다고 부산을 떨었다. "대출받아서 산거예요. 그냥 평범하게 살아요. 다행히 마당에 누가 나와있진 않네요. 준비는 되셨어요?" 세바스찬이 크리스에게 손을 건내며 물었다. "당연하죠" 크리스가 밍기적 자신의 바지에 손을 한번 닦고서는 세바스찬의 손을 잡았다. 이제부터는 개인 플레이가 아닌 협동 플레이였다.


"저왔어요" 세바스찬이 초인종을 누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미 30분정도 시간이 늦은 탓에 부모님이나 친척들이 집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조금 있자 쿵쿵쿵- 하고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오랜만......." 문이 벌컥 열리자마자 세바스찬과 크리스는 압도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놀람을 뛰어넘어 압도였다. 그러니까, 저 조그만한 문 사이로. 그냥 세바스찬의 어머님이나 아버님이 문을 열어주신것이 아니라. 족히 10명을 되어보이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서있었기 때문이다. "아..안녕하세요" 크리스가 겁에 질리듯이 인사를 하였다. 뒤에있는 친척들은 크리스의 모습이 안보여서 인지 폴짝폴짝 점프를 해면서까지 그의 모습을 보려고 안달을 내고 있었다. 스탠가의 사람들은 크리스의 말에 바로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들의 눈은 오로지 서로 잡고있는 세바스찬의 손과 크리스의 손에 집중되어있었다.그 시선에 민망한 크리스가 슬쩍 손을 빼려고 하였지만 세바스찬이 손을 강하게 잡아 실패로 끝이났다. "크리스! 어서오렴!" 그나마 얼굴을 뵈었던 세바스찬의 어머니가 혼자 문에서 폴짝 뛰어나왔다. 그러고서는 자신의 아들인 세바스찬을 옆으로 밀치고서는 와락 크리스에게 격한 포옹을 했다. "저기...아들한테 해줄 포옹은 없는겁니까?" 밀쳐진 세바스찬이 조금은 섭섭하다듯이 - 사실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다 - 말을 하였지만 그의 어머니는 세바스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 같았다. "어서오렴! 어서오렴! 다시 만날 줄 알았단다!!" 크리스는 격하게 자신을 안고 콩콩 뛰고있는 어머니에게 어떻게 할 줄몰라 자신도 살짝 콩콩 뛰면서 "저도 다시 만나서 기뻐요" 라며 만든 멘트를 날렸다."진짜다..진짜 세바스찬의 남자친구가왔어" 그의 친척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서야 웅성웅성 거리며 중얼 거렸다. 그러더니 "진짜다!!!!!! 진짜다 나타났다!!!!" 라고 환호성을 지르고 다같이 손을 흔들면서 "예!!!!!!" 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식구들의 민망한 행동에 세바스찬이 마른 세수를 하면서 크리스의 시선을 피했다. 크리스의 눈빛에는 '아오..저 망나니새끼' 라고 써있었기에 안본것이 다행일지도 몰랐다.



격한 환호성 속에서 크리스는 가족들 하나하나와 인사를 나누며 악수 및 포옹을 나누기 바빴다. 이미 찬밥신세가 된 세바스찬은 소파에 멀거니 앉아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크리스를 도와주기 위해 세바스찬이 그의 옆에 뻐팅겨서서 친척들을 제지해보았으나 이미 '진짜 세바스찬의 남자친구'인 크리스에 눈이 먼 친척들은 방해가 된다며 세바스찬을 이리저리 밀고더니 나중에서는소 파에 앉혀놓고 말았다. '크리스..힘내요...' 어쩔줄 몰라하면서 고개를 이리돌렸다 저리 돌렸다 하면서 대답을 하고 있는 크리스를 향해 세바스찬이 살짝 응원구를 던져주었다. "와아- 형. 난 솔직히 안믿었는데 진짜였다니" 크리스와 인사가 끝난 친척동생 조엘이 와서 세바스찬의 소파에 앉아 말했다. 남들보다 일찍 발현이 된 조엘은 이제 막 알파가 된 혈기왕성한 남동생이었다. "그러면 진짜지, 가짜냐? 왜들 이렇게 못믿는거야" 친한동생에게 세바스찬이 불만을 담아 투덜거렸다.


"못믿을 만도하지. 형이 맨날 오메가 갈아치우는걸 누가 몰라? 9살이었던 나도 알았는데"

".......그렇게 심했나"

"응..내가 알파로 발현되자마자 엄마랑 아빠가 절대 세바스찬형 처럼 되지 말라고 한시간 동안 설교했어"

"야..내가 잘나서 그런거야. 잘나서. 안 잘났으면은 어?"

"나는 형이 뻥친줄알았어. 그냥 원나잇 상대인데 고모한테 안 맞을려고 진지한 남자친구라고 입턴거라고 생각했어"


조엘이 세바스찬의 자화자찬적인 말을 자르고 냉철하게 아픈 부분을 찔렀다. 윽. 이자식 예리한걸. 방심하면 안되겠어. 세바스찬이 괜시리 조엘의 머리를 헝크러트리듯이 쓰다듬었다. 그의 집중을 분산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임마, 형을, 못믿어서, 되겠냐, 어, 좀 믿으라고"

"아 하지마! 하지마!!"


조엘이 웃으면서 세바스찬의 쓰다듬 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양 손을 머리위에 올렸고, 세바스찬은 자신의 작전이 성공한것이 기뻐 따라 웃으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편 크리스는 친척들에게 둘러쌓여 이곳저곳에서 질문 공격과 칭찬공격을 받으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씨.....좀 도와주지. 지는 친척동생이랑 놀기도 하고. 새가슴이었던 크리스는 들키지 않을까 무서워 온몸이 긴장되는데 여유롭게 놀기만한 세바스찬이 얄미웠다. 


'아..진짜...못참겠으면 나 그냥 확 말해버릴꺼야! 정말!'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세바스찬의 어머니는 이 날을 위해 만찬을 준비했다며 긴 테이블로 식구들을 불렀다. "크리스는 내 옆에 앉지 않을련?" 처음부터 크리스를 이뻐하던 그의 어머니가 세바스찬의 옆자리가 아닌 자신의 옆자리에 톡톡 하고 쳤다."아..네!" 세바스찬의 옆에 앉아 시선을 받는것보다는 차라리 어머니의 옆에 앉아 시선을 받는것이 덜 부끄럽겠다고 생각한 크리스가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에는 정말 만찬이라는 이름답게 로스트 치킨 부터 시작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자까지, 각양각색의 음식들이 펼쳐져있었다. "우와..너무 맛있겠어요"크리스가 저도 모르게 칭찬을 내뱉었다. 그러자 "허허허!! 애가 말도 참 이쁘게 하는구려!!!" "어휴!! 싹싹한것이 참 보기좋네요!!" "그래그래! 많이 먹을렴! 뭘 좋아하니! 여보! 거기 피자한조각좀 여기 줘봐" 라며 이곳저곳에서 크리스에 대한 칭찬을 쏟아 내고 있었다. 아 민망해, 민망해. 크리스가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세바스찬을 쳐다보았다. 세바스찬도 자신의 친척들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였고 너무 부끄러웠다. "거..그냥 먹어요...애 부끄러워 하잖아요" 세바스찬이 크리스를 도와주기 위해 중얼 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역효과였다. "아하하하하!! 벌써부터 자기 애인 챙기는 것봐! 어! 아주 그냥 잉꼬부부가 따로없네 잉꼬부부가 따로없어!!""애 부끄러워 하잖아요 라니 세바스찬!! 이녀석... 이녀석...!!"  이미 내 가족들은 미쳤다. 세바스찬이 쪽팔려 얼굴을 붉히고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이미 한층 울상을 진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시선을 응시하였다. '미안해요 크리스. 무리예요' 세바스찬이 친척들이 흥분한 틈을 타 입모양을 뻐끔 거리며 메세지를 전했다. '아니예요..괜찮아요...' 크리스 또한 입모양을 뻐끔 거리며 세바스찬에게 대답을 하였다.



"우리셉이랑은 어떻게 만났어요?" 점심 식사의 주제는 당연스럽게도 크리스와 세바스찬의 연애담이었다. 적응력이 빠른 크리스는 이미 어느정도 그의 가족에 익숙해졌고 이제 슬슬 연기에 물이 올랐다. 많은 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크리스가 수줍게 "사실 제가 세바스찬옆집에살아요. 그냥 자주부딪치다가 이렇게됐네요" 라고말했다.가족들은 크리스의 말한마디에 맞장구를치며 대화하기바빴다. "그래 원래 가까이살고자주보는 남자친구가 최고지"부터시작해서 "이건인연이아니라운명이다"까지. 진짜 세바스찬이랑 연관시킬 수 있는 말은 어떤 말이라도 다 뱉는 것 같았다.세바스찬은 초조하게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분위기를 살폈다. 가족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크리스에게 부담을주는것같아 신경이쓰였다. 하지만 크리스는 정말 훌륭한 연기자인지 아니면 정말로 부담스러운 것이 아닌지 세바스찬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가족들과 하하호호웃으며 말을 잘 이어나갔다. 어른들은 깊게 둘의 관계 - 그러니까 연애담 - 을 묻지 않고 이제 크리스에 집중되는 질문을 하였다. 나이는 몇살인지, 어디 출신인지 -  이미 그들이 방금 전 개개인적으로 다 들은 내용이었다 -아마도 나이먹은 어른들이 젊은 애들의 사랑이야기에 관심을 갖는것이 주책맞아 보일까 몸을 사리는 듯 했다. 복병은 따로있었다. "셉 형의 어디가좋아요?" 아직 어린 나이의 조엘이 맹랑하게 치고 들어왔다. 당황한 세바스찬이 자신의 발로 옆자리에 앉은 조엘의 왼쪽발을 꾸욱 하고 밟았다. 그딴걸 왜 묻냐는 뜻이었다. 조엘은 발의 아픔을 무시한채 생글생글 웃으며 "궁금해요. 크리스형!" 하며 미소를 지으며 물어보았다. 이새끼, 분명 저번에내가 게임세이브데이터를 덮어서 엿먹이려는 걸꺼야. 사실은 둘의 연애담이 궁금했던 나이 든 친척들이 입을 다물고 눈만 크리스 쪽으로 돌렸다. 그들의 머릿속을 상상해보자면 "나이스 조엘!"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세바스찬은 불안에 떨며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안돼 여기서 욕하면 게임 끝나는 거예요 크리스. 아무리 제게 좋은점을 찾을 수 없었더라도 지어내서 얘기해야해요! 크리스!


세바스찬의 걱정과 달리 예상외로 크리스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살짝 살짝 홍조를 띄더니 "난감한데"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이 정말 자신의 귀여운 연인과 같은 행동이어서 세바스찬이 살짝 당황하였다. "음..다정해서..? 세바스찬이 진짜 다정하거든요" 뻔한말이지만 그의 부모님을 울릴만한 말이나왔다. 세바스찬도 그의 입에서 다정하다라는 칭찬이나와 조금 얼떨떨했다. 대답을 들은 아버지는 "맞아맞아 우리세바스찬이 다정하긴하지. 애가 너무다정해서 자꾸 오메가가꼬이는것뿐이지. 사실애자체는 그냥 다정하고착한애야! 암 그럼!" 그의 아버지가 눈에띄게기뻐하며 혼자 세바스찬의 칭찬을 하기시작했다. 크리스가 그말에웃으며 맞다고맞장구를치자 기분이좋은지 껄껄껄껄껄 하고식탁을 울릴정도로 웃었다. 이제 식탁에서는 웃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세바스찬은 여유롭게 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크리스를 보았다. 가슴..또 잡고있네.. 버릇처럼 가슴을 잡고 경쾌하게 웃는것이 왜인지 거짓 웃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식사가 끝난 뒤 어머니가 크리스를 데리고 세바스찬의 어릴적 사진을 보여주겠다며 거실로이끌었다. "우리집은 원래 설거지는 남자몫이거든" 그말은거짓이아니었다. 스탠가는 주로 알파와오메가로 분업을 하기보다는 드물게 여자와남자로 나누어일을하였는데 거의 칼과같이 반을 나눠서 가정일을하였다. 세바스찬이 맞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편히 쉬고있어요 크리스. 설거지 금방 하고 갈게요" 아무리 지금 까지 잘해 왔다 할지라도 세바스찬과 막상 떨어져 혼자가 되려니 크리스가 불안해하는것같았다. 그러나 가족의 룰까지 깨버려 세바스찬과 함께 있겠다고 말할 수 없는 크리스는 "알겠어요 일찍 끝내고 와줘야해요?" 라며 세바스찬의 소매를 잡고 말했다. 뭐야, 뭐야. 왜 소..소매를. 세바스찬의 속이 갑작스레 울렁울렁했다. 이러니까 기분이 정말 묘하잖아, 진짜..진짜 연인 사이 같잖아. 얼굴이 붉어지려는 세바스찬이 괜히 흠흠 헛기침을 하고 "알겠어요" 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러고서는 바로 뒤를 돌아 성큼성큼 부엌을 향했다. 연기를 얼마나 잘하는거야. 애꿎은 앞머리를 잡아당기며 세바스찬이 혼란스러운 자신의 정신에게 소리를 쳤다. 


"이열 형 좋나봐?"


부엌에 도착하자 이미 장소에 있었던 조엘이 깐죽거리며 말했다. "너 이자식! 잘만났다!" 세바스찬은 조엘이 도망가기 전에 그를 붙잡아 헤드락을 걸었다."야 거기서 그런걸물어보면어떻게해! 부담되잖아!" 조엘이 목이 조인상태로 깔깔웃으며 "내가뭘?!내가뭘?!"하며 더더욱깐죽거렸다. "이자식이" 세바스찬이 더욱 힘을주어 목을조르자 항복항복 하며 조엘의 웃음섞인소리가 들렸다."조엘! 세바스찬! 놀지말고 빨리뒷정리해!"고무장갑을 끼면서 설거지를 하고있는 아버지가둘을 나무랐다. 세바스찬이 조엘의 헤드락을 풀고 아버지에게도 입을 삐쭉 내밀며 항의하였다. 


"아버지도 그래요! 거기서오메가가 잘꼬인달얘길하면어떻게해요! 크리스가 절 뭘로보겠요!"

"아니 내가뭘그랬다고..그리고 걔도어느정도알고있지않니?"

"아 ..알긴아는데 그래도 쫌..! 절 망나니같은사람으로볼거아니예요"


세바스찬의 그동안 저의 행동을 신경쓰지도않고 괜히 아버지에게투정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물론 그동안 자기가한짓이있어서 크리스가 자길이상하게보는것은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확인사살까지 할 필요가있나? 싶었다.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더 엉망이될꺼같아 마음이 편치않았다. 조엘과 아버지는 괜시리 저들에게화풀이하는 세바스찬을 보면서 어이가 없으면서도 신기하여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삐쭉 내민 세바스찬을 쳐다보았다. 저 마이웨이 세바스찬이 누구 눈치를 보고있다니. 지금까지 오메가 라고는 일주일은 넘게 사귀지 못하며 제멋대로 굴던 그 세바스찬이 한 오메가에게 저러다니!  조엘은 놀라움이 컸고 아버지는 기쁨이 컸다. 세바스찬이 혼자 씩씩 거리며 고무장갑을 끼우면서 "다음부터는 조심히 해주세요. 진짜.." 라는 철딱서니 없는 말을 내뱉었다. "이게 어디다대고 화풀이야 응?" 그러던 중 뒤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들렸다. 부엌이시끄러워서 와보니 세바스찬이 말도 안되는걸로 투정을 부려 야단을 치러 온것이었다.  하지만 그를 야단치는 목소리엔 엄숙함보다는 어딘가 기쁨이 깃들어져있는것같았다. 그를 낳고 27년간을 키운 그녀였지만 세바스찬이 한 상대방에게 이렇게 목 을 메는걸 본건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자신과 똑같이 얼떨떨해하는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끄덕였다. 절대 저 크리스라는 남자를 놓치면안되겠다는 둘만의 신호였다. 


"그보다 세바스찬 넌 이제니방으로올라가라" 

"왜요.아직 설거지 안 끝났는데"

"지금 크리스 니 방에혼자있어.  여기와서 부담되었을텐데 가서 좀풀어주고와"


크리스가 내방에 혼자 있다고? 세바스찬이 냉큼 자신의 고무장갑을 풀었다. 


"..내방에들어오지마요"

"그정도로 눈치없진않다"

"몰래엿듣지도마요"

"....아쉽구나"


그말을 마지막으로 세바스찬이 뛰듯이 계단을 올라갔다. 폭풍같이사라지는 그를 보고 어머니가 피식 웃으며 자신의 남편의 옆으로가 어깨를 기대었다.


"아까 크리스가 뭐라고했는지 알아요? 제가 세바스찬이직업도 없는데 괜찮냐니까 사랑하니까 상관없다고한거있죠?"

"아니 우리 아가가 그런말을했어?"


이미 크리스를 자신의 사위라고 인정한 아버지가 그가없을때를틈타 -부담이될까봐 눈치를 보고있었다- 아가라는호칭을사용하였다. 그말에 어머니가 호호웃으며 "그랬다니까요" 하며 맞장구를쳤다.


"뭐 크리스도 직업이없다지만 둘이사랑만하면되죠. 애가어쩜 그렇게 예의가바른지. 얼굴고이쁘고 성격도좋고 세바스찬이 어떻게저런애를데려왔나몰라요 호호호"

"거 들어보니 예전에 좋은 회사에서 일했다던데? 지금은 이직 준비고. 애가 똑부러졌어! 아주 그냥, 우리 세바스찬과 달리"

"원래 한쪽이 어물쩡 하면 한명이 똑부러져야지 잘맞는 환상이야 환상의 짝궁. 이거 금방 손주얼굴 보겠어!!"


조엘이 서로 하하호호 웃으며 미래를 꿈꾸는 그들의 고모와 고모부를 못말리겠다듯이 쳐다보았다.






"크리스, 여기서 뭐해요"

독립을 하기전까지 자신의 방이었던 다락방에 올라가자, 크리스가 자신의 침대위에 누워있었다. "너무 피곤해요......" 크리스가 베개에 얼굴을 묻어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나왔다.세바스찬은 살며시 그의 옆에 앉았다. 정말 피곤한 것인지, 상태가 어떤 것인지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뒤돌아 있었기 때문에 살펴볼 수 없었다.  세바스찬이 살며시 고민 하다가 손을 올려 크리스의 뒷 머리를 쓰다듬었다.혹시 바로 내치지 않을까 걱정하였는데 피곤해서인지 크리스가 그냥 가만히 세바스찬의 손을 냅두었다. "저희 가족들이..좀..많이 피곤하긴하죠? 제가..좀 속썩인게 많아서" 부들부들한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왔다.쓰다듬 받는 것도 아니고 쓰다듬는것 뿐인데 어쩐지 세바스찬의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들 좋으신 분이예요..." 또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음이 뭉쳐지는 것이 뭔가 어린아이가 말한 것 같아 귀여웠다.


"다들 좋으신 분이죠"

"...그러니까 그만 속 썩이세요"


크리스가 결국 세바스찬을 향해 한마디를 내뱉었다. 지금까지 개새끼니소새끼니뇌가아랫도리에 달렸다느니 험한 말은 다 들었지만 그 어떤 욕보다 가장 세바스찬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예전과 같았으면 제가뭐요!? 뭐요?! 하면서 소리를 높였을텐데 세바스찬은 지금의 크리스에게는 왜인지 그렇게 하지 못했었다. 계속 크리스의 뒷 머리를 쓰다듬으며 세바스찬이 물었다. "...아까 다정하다고 한거 뭐였어요?" 점심식사때 세바스찬의 어디가 좋냐는 질문에 크리스가 한 대답이었다. "아 그거야?" 크리스가 웃기다듯이 웃었다. 뒷머리가 살짝 떨리는것이 세바스찬의 손에 느껴졌다. "사실 할 말 없어서 말한건데, 너무 식상했나?" 할말 없어서 말한건데. 세바스찬이 쓰다듬는 손길을 멈추었다. 아, 뭐지. 이 기분. 왜 섭섭하지. 


몇 달을 걸쳐 방 하나를 두고 전쟁을 하는 저와 크리스의 사이다. 크리스가 저를 안좋게 보는것도 뻔히 알고 있었고 당연했다. 비록 삼일 전, 데이트를 하고 그를 위로해주긴 하였지만. 하긴, 크리스가 자신한테서 다정함을 느낄 리 없지. 아니 그런 순간도 내가 보여준 적이 없었지.세바스찬은 왜인지 아픈 가슴을 꾹 참고 다시 손을 움직여 크리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것 같았어요" 크리스가 자신의 표정을 못봐서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바스찬은 지금 그 어느때보다 표정관리가 힘들었다. 그렇게 둘이 아무말 하지 않는 조용한 시간이 흘렀다.어쩌면 크리스는 이 상태로 잠이 들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바스찬은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었다. 그러고서는 살며시 크리스의 어깨를 잡아 크리스를 돌렸다. 이대로 베개에 코를 박고자면은 숨이 막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바스찬이 예상했던 대로 뒤집으니 크리스가 눈을 감고 색색 숨을 고르고 있었다.가족에게 그렇게 시달렸으니 피곤할만도 했다. 세바스찬이 자신의 옷장을 열어 얇은 이블울 꺼내 그의 몸에 덮어주었다. 어깨까지 잘 덮어질 수 있게 세바스찬이 몸을 숙여 크리스의 어깨주변까지 이불을 올렸다. "...갑자기 왜 잘해줘요?" 자고있을꺼라 생각했던 크리스의 몽롱한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올리니 바로 눈앞에 크리스의 얼굴이 보였다. 눈에 졸음끼가 있어보이는 것이 잠이 들다 세바스찬의 행동에 깬 것 같았다. 


"제가요?"

"..왜 쓰다듬고 이불 덮어줘요"


크리스는 몽롱한 정신이어서 할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세바스찬이 그 자세에서 움직이지 않고 크리스를 응시하였다. 크리스가 숨을 내뱉자 뜨거운 김이 세바스찬의 입술을 간질였다. "크리스는 제 남자친구잖아요" 세바스찬이 전과 같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목소리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고 한치의 거짓말도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말에 크리스가 푸흐..하고 작게 웃었다. "....데이트때 처럼 말이죠." 크리스가 입을 움직일때마다 살짝 올라가는 입술이 세바스찬의 입술과 닿을 것 같았다.아...크리스의 향이 맡아진다. 세바스찬이 침대에 손을 올리고 크리스를 가두고 있는 형태에서 꼼짝도 안하고 계속 그렇게 크리스를 내려다 보았다. "..저도 그럴 줄 알았어요" 크리스가 나지막히 그렇게 말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금 뒤에 색색- 하고 숨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잠에 든것 같았다. 세바스찬은 잠이 든 크리스를 두고 그 상태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전과 마찬가지로 그냥 평범한 세바스찬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달랐다. 크리스를 쳐다보고 있는 눈동자 그것 하나만이 달랐다. 세바스찬은 크리스가 잠들고 나서도 한동안 계속 그렇게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코가 맞닿을 거리였다.





저녁은 바베큐 파티였다. 오늘 하루를 그냥 기념일로 삼을 작정이었던 친척들은 공원에 바베큐를 구우면서 부어라 마셔라 술을 마시고 있었다. 또 찬밥인 세바스찬은 조금 구석진 곳에 가서 남몰래 조엘에게 술 한잔을 쥐어지고 홀짝이고 있었고 - 조젤은 세바스찬의 이런 면을 대단히 좋아했다 - 크리스는 또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이 고기 저 고기를 입 안에 잔뜩 담아 우물거리고 있었다. "우와....형, 크리스 형좀 구해봐 저러다 죽겠어" 맥주 한잔이 들어가 알딸딸해진 조엘이 혀를 꼬며 말했다. 역시 아직 애여서인가 맥주 한 잔에 벌써 취해있었다. "내가 가봤자 역효과만 날 뿐이야.." 세바스찬이 자신의 맥주를 들이켰다.그래, 자신이 가봤자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이미 알코올이 들어간 친척들은 판단력이 흐려져있을테고 무서운게 없을터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은 '술에 취했으니까' 라는 변명으로 세바스찬과 크리스의 연애담을 듣겠다고 소리를 지를지도 몰랐다. 다가가지 않아도 뻔히 보였다. 세바스찬이 기댄 벽에서 일어났다. 아직 조엘과 술을 기울이기에는 그는 너무 어렸다.


"어디가?"

"잠깐, 담배"


세바스찬이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들고 흔들었다. 순간 조엘은 그 모습이 너무 알파다워서 멋있다고 생각하였다. 역시 비쥬얼이 깡패야...망나니라는 소리를 몇십번이나 들었지만 순간순간 알파로서 세바스찬에게 동경하는 마음이 생기는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다녀와, 괜히 고모나 고모부한테 잡히지말고" 세바스찬이 조엘의 말에 고개를 뒤로 돌리고 빙긋 웃었다. 그러고서는 천천히 집을 돌아 뒷마당을 향했다. 


뒷마당은 아무도 없어 조용하였다. 앞마당에서 파티하는 소리가 들려 떠들석 한 목소리가 들리긴 하였지만 그래도 훨씬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세바스찬이 잔디 위에 풀썩 하고 주저 앉았다. 그리고서는 담배 하나를 물고 불을 붙였다. 세바스찬은 어릴 때부터 종종 이렇게 뒷 마당에 나와서 부모님 몰래 담배를 피우곤 하였다. 등장 밑이 어둡다고, 그들은 세바스찬이 훨씬 외진곳에서 담배를 피면 귀신같이 찾았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뒷마당에서 피는것은 찾지 못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자 수만개의 별이 보였다.괜히 감성적인 기분이 된 세바스찬이 담배를 손에서 빼고 후- 하고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일은 예상외로 척척 진행되었다. 들킬지 모른다 어쩐다 하면서 데이트 했던 것이 바보같았던 것 처럼 크리스는 연기를 훌륭하게 해주었고 가족들도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이제 몇달 뒤에 부모님에게사실 크리스와는 헤어졌다. 며 울적한 전화한통이면은 모든일이 끝날 것이었다.


"....예상외로 싱겁게 끝나네"


끝나는 것이 당연한데 그것이 왜인지 세바스찬의 기분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이게 다 크리스 때문이다. 왜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거야. 세바스찬이 오늘 하루내내 가족들을 대하던 크리스를 생각해보았다. 정말로 그는 자신의 남자친구와 같았다. 한번도 자신의 제대로 된 연인을 만들어 본 적이 없던 세바스찬이 연인을 가족에게 소개하는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세바스찬은 모든게 서툴렀다. 가족들에게 그를 빼낼 방법도 몰랐고 어떻게 소개할 지도 몰랐다. 그런데 크리스는 달랐다. 그는 알아서 척척 가족들을 예의바르게 대했고 어른들에게 쉽게 점수를 따는 방법도 알았다. 문득, 이게 크리스가 훌륭한 연기자가 아니라 어쩌면 정말로 이랬던 적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자신의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의 집에 가서 진짜로 자신을 가족들에게 소개하는 거 말이다.그렇게까지 생각이 나아가자 기분이 더 나빠졌다. 크리스가 정말 자기 남자친구도 아니면서 뺏겼다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뭐해요?" 그렇게 혼자 울적이고 있자, 마음속으로 내내 그려왔던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인가 싶어 고개를 올려보자 크리스가 맥주한캔을 들고 비틀비틀 거리며 서있었다."세바스찬의 비밀 장소같은거예요? 헤헤" 그가 세바스찬의 옆에 풀썩 앉으며 말했다. 술에 취하면 웃음이 헤퍼지는지 계속 빙긋빙긋 웃고있었다.


"많이 취했어요?"

"조금? 조오오오금?"

"조금이 아닌거 같은데요"

"몰라요. 고기랑 술을 너무 많이줬어요. 그래서 잠깐 피했어요"

"어이구, 그 가족들을 어떻게 뚫고 왔어요"

"세바스찬에게 간다고 하니까 순순히 보내줬지롱"


줬지롱.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어린아이와 같은 말투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술에 취하기는 많이 취했나보다. 세바스찬이 자신의 손에 들려있던 담배를 땅에 비벼 껐다. 아직 반 정도 남아있지만, 크리스를 배려해서였다.크리스는 막상 세바스찬의 곁에 오긴 하였지만 딱히 할말은 없는데 앉아서 벌컥벌컥 자신의 맥주를 마셨다. 세바스찬도 딱히 크리스에게 할말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그의 옆에 앉아 조용히 별을 바라보았다. "저기요, 그때 미안했어요" 옆에서 뜬금없는 사과가 들려왔다. "뭐가요?" 세바스찬이 계속 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떼..다 세바스찬 탓이라고 했던거요. 그러면 안되는 거였는데" 크리스는 아마도 그 일이 마음속에 계속 남아있었나보다. 세바스찬이 작게 웃으며 "아니요, 저도 진짜 안말해줬잖아요. 제 잘못도있죠" 라고 말했다.그 말에 크리스가 갑자기 "그만!" 이라고 소리쳤다.


"네?"

"데이트 할때처럼! 그러지마요! 그만!"

"데이트 할때처럼이라뇨?"

"그거 있잖아요. 어울리지도 않게, 막.막. 저 챙겨주는거요. 배려해주는거. 그거. 차라리 맞아요 니탓이예요 라고 말하라구요. 세바스찬 원래 저한테 그랬잖아요"


크리스가 씩씩 거리면서 내뱉었다. 세바스찬도 크리스의 말에 정곡을 찔렸다듯이 몸을 굳혔다. 그러게, 나 왜 지금 크리스한테 저런말을 했지. 데이트 상대방에게만 했던 인위적인 배려와 매너가 저도 모르게 크리스에게 튀어나왔다. 세바스찬이 자신의 앞머리름 만지면서 평정을 가장 하였다. 데이트를 해서 몸에 밴건가? 스스로도 곡할 노릇이었다. 크리스는 씩씩 거려서인지 아니면 술에 취해서인지 얼굴이 붉어져있었다. 그는 세바스찬에게 그렇게 내뱉고서는 다시 술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제가 그때 왜 도망쳤는지 알려줄까요?"

"..진짜로 알려주게요?"

"네. 진짜로요. 그때 궁금해 했잖아요"


세바스찬은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엘레베이터에서 원래대로 행동하겠다고 일부러 크리스를 약올렸던 것이 생각이 났다. 아, 그때 왜그랬지. 세바스찬이 얘기하기 힘들면 안해도 되요. 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그러다간 크리스에게서 또 위선부리지마라며 혼날 꺼 같았다. 하지만 이건..이건 진짜 일부러 그런것이 아니라 진짜였다. 미칠도록 궁금하긴 하였지만 크리스가 힘들다면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다른 사람들은 다 내가 차였다고 생각하니까. 그냥 세바스찬만 알아줘요. 내가 차인게 아니라 찬거라구요"

"....혹시 회사에서 누구랑 사겼어요?"


세바스찬이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사겼어요? 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입안이 까끌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같은 부서 팀장이랑요" 크리스가 그 말을 끝으로 단숨에 자신의 맥주캔을 비웠다. 팀장이랑. 크리스는 몰랐지만 세바스찬도 회사를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도 백수생활을 하기전에 어엿한 직장인 이었고, 그렇기에 사회생활도 잘 알았다. 그래서 '오메가'인 '부하직원' 크리스가 아마도 '알파'인 '팀장'과 사귀었다는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말하지 않아도 잘 알았다. 


"근데요..멜리사도 그렇고, 다른사람도 그렇고 다 제가 차였다고 생각한다니까요? 웃기지 않아요? 아 원래 사귄건 비밀로 사귀었지만, 회사내에 뭐 알음알음 아는게 있어요. 완전한 비밀이라는건 없거든요"


크리스가 맥주캔을 잔디위에 올려놓고, 손으로 공기를 훠이훠이 저으며 열변을 토했다.


"헤어져서 나온거예요?"

".......그렇죠. 뭐. 세바스찬은 직장생활 해본적 있어요? 없어도 뭐 회사를 주제로 한 드라마는 봤죠? 그게 참 그래요. 같은회사에 있기가. 원래 전남친을 보는게 힘들긴 힘들지만. 그거랑은 차원이 달라요. 그러니까 그새끼는 팀장이라구요? 전 대리인데. 팀장에게 밉보이는 거잖아요. 진짜 공기가 완전 달라져요. 물론 그새끼는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알긴 했지만. 이미 알음알음한 사람들이 막-막 저를 힐끔힐끔 쳐다보고.막 저는 이리휩쓸리고 저리휩쓸리고. 소문에 시달리고. 그새끼는 팀장이란 이유로 아무 영향도 안받는데. 배알꼴리게 저만 그러고"


술에 취해서일까 아니면 전남자친구의 이야기여서일까 크리스의 말이 점점 험악해졌다. 사실상, 헤어졌다,차였다의 개념을 잘 모르는 세바스찬에게 있어서는 공감하기 조금 어려운 일이었다. 왜냐면 그에게 헤어진다는 것은 다시는 안본다였고 다시는 생각 안한다였고 우연히 마주쳐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회사생활은 조금 알았기에 크리스가 어떤 부분에 난처해했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알파여서 오메가인 그의 입장을 전부 이해하기 힘든것을 감안해서 생각하면 크리스는 아마도 세바스찬이 생각한 것보다 더한 곤란함을 회사에서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그래서 그냥 확 나와버렸죠. 여기 아니면 내가 일할 곳 없는 줄아냐? 더러워서 안한다!"

"그랬군요"

"근데..근데 좀 이 욱한 성질좀 버려야겠어요. 지금 봐요. 취직 안되서 이러고 있는거. 이직은 결정되고 나오는 건데"

"그래도 그 욱한 성질때문에 지금 제 남자친구 하시잖아요"


세바스찬이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스스로의 발언에 또 한번 스스로가 놀란 세바스찬이 하늘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리고 바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마치 지금의 발언은 크리스의 욱한 성격에 고맙다고 말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크리스는 그 말에 "하하하 그렇네요 하하하 빌어먹을" 하면서 너털웃음을 지었다.다행히 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왜 헤어졌는지 물어봐도 되요?" 요는, 크리스가 그 팀장이라는 남자와 헤어져서 회사에 있기 곤란해져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 빠진것이 있었다. 둘이 헤어진 이유. 무슨 이유로 헤어진지 몰라도 크리스의 주장한 대로라면 "크리스가 찼다" 크리스는 왜 팀장을 찼을까? 그것도 궁금 하였지만 그가 회사애 있기 곤란해질것이 뻔한데, 그러니까 계획적으로 이직을 준비하고 헤어지는 루트를 밟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마 크리스가 그런것을 잘 생각 안하는 성격도 있었지만 아마도 뭔가에 욱해서 헤어지자고 말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크리스를 욱하게 만들었던 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아무리 전 남자친구에게 엉망인 꼴을 보여주기 싫다는 것은 어느정도 이해해도 크리스가 레스토랑에서 그렇게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도망친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차인것도 아니고, 찬 사람이라면 그래도 어느정도 당당한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까지 했던거였을까.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질문에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입을떼었다.


"청혼 받았거든요"

".........네?"

"결혼하자고 그러더라구요"

"..저기,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그러니까 청혼을 받아서 헤어졌다구요?"

"네"


크리스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분명 앞뒤문맥이 맞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이해를 하지 못한 세바스찬이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띄우고 크리스를 쳐다봤다. 어디가 크리스가 욱할 포인트 인지 몰랐다. 


"청혼이..마음에 안들어서 욱 하고 차버린거예요?"

"...아뇨..솔직히 청혼 자체는 기뻤어요"


이건 또 예상외의 말이다. 기뻤다니. 세바스찬의 속이 살짝 뒤틀리는 것 같았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 말을 이었다.


"회사 입사하자마자 사귀었거든요. 뭐 병아리 같은 저를 그새끼가 낚아챈거나 다름없죠. 저 인기 많았거든요? 진짜로요. 여튼 사겼어요. 사겼다구요. 그 레스토랑에도 가고 거기 그새끼 단골집이거든요"

"아하.."


어쩐지 안색을 굳혔다 싶었다.


"사귀는건 나쁘지 않았어요. 아니 좋았어요. 연애 처음은 아니었지만 제일 좋았어요. 아씨. 이미 전 남친이긴한데 진짜 다 좋았었어요. 가치관도 잘 맞고 사고방식도 잘 맞았고. 사실 저희 둘, 둘다 야근하다가 눈맞은거거든요. 그땐 그새끼가 팀장이 아니었는데. 여튼"

"둘다 일 좋아하는 괴짜였군요"

"크큭. 네. 여튼 성격도 잘맞았고 그랬어요. 제가 사실 연륜있는 알파를 좋아하거든요. 그러니까 좀. 좀 어른스러운 알파요. 약간..좀 무서운 알파? 아 이러니까 좀 변태같은데. 전 좀 강압적인 느낌을 좋아해요. 아버지 같다고 하면 다들 대디이슈라고 놀리는데..아 몰라 여튼 진짜 그런 사람한테 끌리던데. 딱 이상형에 들어맞기도 했어요"


크리스와 가치관도 잘맞고 사고방식도 잘 맞고 어른스러운 알파. 세바스찬은 크리스를 정반대의 남자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진짜 정 반대의 남자는 그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은 세바스찬은 크리스의 이상형과 정 반대의 사람이라는 것이었다.크리스는 이제 이래저래 그남자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다. 분명 헤어졌다고 말한 주제에 내용의 절반이상이 칭찬이였다. 주어는 그새끼였지만 키가크다, 머리가 좋다, 예의바르다 등이 딱봐도 칭찬이었다. 왜인지 울화통이 터질것 같은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말을 잘랐다.


"그렇게 좋으면서 왜 헤어졌어요. 결혼하지"


그 말에서야 크리스가 말을 멈추었다. 아, 건드리면 안되는 부분이었나? 세바스찬이 아차 싶었다. 


"..고했거든요"

"..네?"

"저한테 일 그만두라고 했거든요"

"..일을 그만 두라고 했다고요?"


만약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상황이었다면 땡큐! 란 소리와 함께 반지를 덥석 받아 자신의 넷째 손가락에 끼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바스찬과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진 크리스에게서는 그 말은 정말로...기분나쁜 소리였겠지.


"그새끼가. 와. 진짜 다시 생각해도 웃긴새끼네. 여튼. 결혼하자고 했어요. 그때 그새끼 결혼 적령기였거든요? 나이가 딱 알맞았어요. 여튼 집에 압박도 있었고 시기도 알맞고 팀장으로 승진했고 그래서 결혼하자고 한거같아요. 근데 그거까진 좋은데. 진짜 청혼받은것도 좋았는데. 제가 청혼을 거절했어요. 전 더 일하고 싶었거든요. 저 28살이잖아요. 아직 막 막 막 일할 시기잖아요? 자기 캐리어도 쌓고. 그래서 결혼을 좀 미루자고 했거든요? 근데 그새끼가. 막. 어차피 결혼하면 일 그만둬야할텐데 무슨 소리냐는거예요"


크리스가 자신의 빈 맥주캔을 들고 힘을 주어 꾸겼다. 


"그래서 제가. 아니 왜 일을 그만두냐고. 나 일 안그만둘꺼라고. 니가뭔데 내 일을 그만두게하냐고 그랬거든요? 근데. 와 진짜. 걔랑나랑 잘통해서 만난거였다니까요? 저도 걔도 일에대해 프라이드도 있었고. 둘다 더 일하고 싶어했어요.그러니 절 잘 알았을꺼아니예요? 근데 저한테 일을 그만두라는거예요."

"진정해요 크리스"

"진짜.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그래도 헤어질 생각까지는 아니었거든요? 그땐 아직 좋아했으니까. 그러니까. 헤어질 생각까지는 없었단 말이예요. 근데"


크리스가 갑작스레 울먹이기 시작했다. 설마 싶어서 크리스를 바라보자 크리스가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새끼가 저한테. 아 진짜. 어차피 오메가로는 높은 자리까지 못 올라간다고. 안된다고.그러니까 자기랑 결혼하고 일 그만두라고 하더라구요. 와 진짜. 서러워. 내가..내가 얼마나 야망있는지 알면서"

"알았어요. 크리스 뚝해요. 왜 맨날 울어요"


세바스찬이 또 손으로 크리스의 뺨을 문질러 주었다. 축축한 눈물이 세바스찬의 손등을 타고 흘러들었다. 


"진짜..진짜. 그 소리 많이 들었거든요? 어차피 오메가니까. 같은 오메가한테도 들었어요. 오메가는 그렇게까지 못해. 아 근데. 진짜. 내가 그새끼 만큼

열정있는 사람인데. 아니. 어떻게 나한테 그런말을 해요? 그래서 그냥. 헤어지자고. 헤어지자고 소리 질러버렸어요. 근데 아 씨. 그렇게 일 하겠다고 헤어지고 회사도 뛰쳐나왔는데. 그랬는데. 씨. 아직 일도 못찾고 그새끼랑 그런꼴로 마주치고"

"알았어요. 정말 나쁜 사람이네요. 크리스 뚝해요. 네?"


세바스찬이 손에 힘을 주어 크리스의 고개를 자신의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는 크리스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왜이렇게 자주 우세요" 세바스찬이 엄지손가락을 문질렀다. 크리스는 그런 세바스찬의 손을 피하지 않고 킁- 하고 코를 삼켰다. 그의 풍성한 부채꼴 모양의 속눈썹이 부들부들 흔들렸고, 앙 다문 입술을 울음을 참으려는 듯 서로를 꽉 물고 있었다. 아, 예쁘다.세바스찬이 크리스가 슬퍼 우는것을 잠시 잊고 그렇게 생각하였다. 살짝 상기되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하늘위의 별을 쏟는것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이렇게 느끼한 생각을 하려는게 아닌데. 그러니까.너무 예뻤다. 세바스찬이 손짓을 멈추고 우는 크리스의 볼을 그냥 잡기만 하였다. 속이 또 울렁 거렸다. 지금 이렇게 그의 볼을 잡고 마주보고 있으니까, 마치 입맞춤을 하기 전의 모습같았다.


"..크리스..다음부터는 면도하지마요"


이게 다 오늘 너무 이쁘고 잘생기게 온 크리스 탓이었다. 세바스찬은 이제 크리스를 향한 자신의 모든것을 크리스 탓으로 하기 마음 먹었다. 그러니까 세바스찬이 크리스에게 입맞춤을 하고싶은건크리스 에반스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잘생기고 이쁜 오메가에게 입맞춤을 하고 싶은 감정이랑 똑같은거라고. 세바스찬이 천천히 크리스를 향해 얼굴을 가까이했다. 크리스는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것인지 그런 세바스찬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훌쩍이고 있었다.




"고모!!!!!!!!!고모부!!!!!!!!!!!!!!!!!!!!!! 크리스 형 울어요!!!!!!!!!!!!!!!!!!!!!!!!!!!!!!!!!!!!!!!!!!!!!!!!!!"




분위기 좋은 타이밍에 갑작스레 조엘의 목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란 세바스찬이 크리스에게 손을 떼고 오른쪽 방향을 쳐다보았다. 뒷마당을 보고 서있던 조엘이 앞마당에있는 친척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뭐?!?!?!! 세바스찬 너 이노무새끼!!!!!!! 여보!! 야구방망이 어딨어!!!!!!!" 앞마당에서 무서운 소리가 들렸다. 놀란 세바스찬이 벌떡 일어나 상황을 살폈다. "여보!!! 야구뱡망이가 뭐예요!! 여기 골프채!!" 골프채!? 미쳤어?! 세바스찬이 서있자 집의 옆길 쪽에서 정말로 아버지가 골프채를 들고 뛰어오는것이 보였다. 


"잠깐!! 잠깐만요! 오해예요!!"

"오해는 무슨 오해야. 이노무새끼. 내가 잘좀 해보라고 말했는데 또 울려? 오늘 다리몽둥이 한짝 나갈줄알아라"

"아니!! 진짜 제가 울린거 아니라니까요!! 크리스!! 뭐라 말좀 해봐요!!"


세바스찬이 뒷마당을 빙빙 돌아 아버지를 피하면서 크리스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크리스는 그 광경을 보고 푸하하 웃음을 짓기만 할 뿐이었다. 어?!어?! 저사람이!?그러더니 크리스는 도망다니는 세바스찬을 향해 메롱 하고 혀를 한번 내밀고서는 앞마당쪽으로 향해 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당장 크리스에게 달려와서 무슨일이니 크리스 하며 달래주기 시작했다."저기!!저기요!! 저 진짜 맞아죽을지 모르거든요!!" 세바스찬이 마지막 sos를 던졌지만 끝내 크리스는 뭐라 말한마디 해주지 않았다. 아악. 내가 미쳤지. 저런 사람이랑 입맞춤을 하려고 하다니. 세바스찬이 헐레벌떡 도망치면서 속으로 자신을 저주했다. 



스탠가의 집, 앞마당에는 고기굽는 소리와 웃는 소리가 들렸고 뒷마당에는 서로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두 남자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리고 세바스찬의 주머니에는 사실 아직 깨끗한 손수건이 있었다.




-



"멜리사 저랑 잠깐 얘기좀 할 수 있을까요?"


퇴근을 하려던 멜리사가 붙잡는 소리에 바로 뒤를 돌았다. 늘 항상 싱글벙글 웃는 멜리사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서는 살짝 얼굴을 굳혀졌다.


"엇..! 티..팀장님 왜요? 혹시 실수한거라도"

"아니 실수한건 없는데, 확인하고 싶은게 있어서요"

"네? 뭔가요?"

"크리스에 대한 소문 말이예요. 다들 멜리사한테서 들었다는데 사실이예요?"


크리스? 소문? 워낙에 소문을 많이 알고 퍼뜨리는 멜리사가 어떤 소문인지 감을 못잡는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크리스씨가 아주 잘생기고 똑똑하고 돈 많은 남자친구를 사귀었다는거요"

"아! 그거요!"


크리스의 소문을 믿는것은 아니었다. 소문을 몰고 다니는 그녀는 소문에 너무 살을 붙여 거의 이야기를 만든다는 수준으로 과장을 한 것이 많았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였고. 크리스가 그렇게 빨리, 자신을 잊고 새 남자친구를 사귀었을리가 없다는 것이 두번째 이유였다. 그는 지금까지 크리스의 소문을 아마 곤란한 상황에서 멜리사를 만난 크리스가 그냥 옆에있던 친구를 남자친구라고 소개했겠구나 라고 거의 단정에 가까운 예상을 하고있었다. 일을 계획적으로 잘 하는 크리스는 이상하리만큼 사저인 부분에서 욱하고 감정적이었고, 또 자존심이 강했으니까. 그래서 별로 믿지 않고 근거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저번 저녁. 우연히 보고 말았다. 크리스가 알파로 추정되는 남자와 저들이 자주가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


"진짜예요! 제가 봤거든요"

"어떻게 보셨는데요?"

"제가 자주가는 수제버거집이 있거든요. 그, 회사 주변에있어요. 여튼 거기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남자친구라고 소개해주더라구요!"

"그래요?"

"네. 그리고 저번에 또 마주쳤는데, 아 그땐 크리스가 없었어요 남자친구분 밖에 없었는데. 저는 크리스의 친구이기도 하니까 반갑게 인사를 건냈죠! 워낙 잘생겨서 잊기 힘든 얼굴이어서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딱 알아봤다니까요? 그래서 저 기억하세요~ 크리스 친구예요~ 하니까 기억한다면서 인사를 받아주더라구요. 그리고 제가 워낙 사람에게 관심이 많잖아요. 그래서 크리스랑 어떻게 만났냐, 잘 지냈냐 물어보는데. 진짜 자상한 남자친구의 모습 그 자체였다니까요? 아직 사귄지 얼마 안되어서 깨가 쏟아진다나?"

"그렇게 말했어요? 그사람이?"

"네! 아 참, 그리고.."


멜리사가 말을 더 하려다가 팀장의 얼굴이 굳어진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보니 팀장은 크리스와 사귄다고 소문이 나있던 사람이었다. "어..음..저기..팀장님?" 멜리사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 고마워요. 그냥 잠깐 확인하고싶어서요. 이제 퇴근하세요 "멜리사는 팀장님에게 크리스와 관련된 것을 더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눈치없이 떠들어대는 그녀이긴 하지만 눈치라는것이 '아예' 없는것은 아니었다. "어..저 그러면 먼저 가볼게요" 멜리사가 꼬리를 내리듯이 인사를 하고 허겁지겁 팀장의 반대편으로 가기 시작했다.



다시 하여금 그때의 도망치듯 나가는 크리스의 뒷모습과 자신을 노려보는 치기어린 알파의 눈빛이 떠올랐다. 크리스의 남자친구라. 어쩌면 멜리사가 떠든 소문이 전부 거짓말이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 참.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이 튀어나왔다. 크리스가 빠르게 다시 새 남자친구를 사귀어서 나온 허탈한 웃음은 아니었다. 웃음은 어디까지 비웃음 이었다. 자신의 것을 넘보려고 했던 그 어린 알파의 눈빛에서 나오는 비웃음. 감히 누굴. 소문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어디까지 거짓인지는 몰랐지만 확실한것은 이젠  크리스를 다시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의 주변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알파놈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니까. 




톰 히들스턴이 주머니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열은 뒤, 크리스를 향해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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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짧은 (4)편보다 이 (5)편을 쓴게 더 시간이 적었을것입니다 껄껄껄. 정말 쓰고싶었던 장면이어서요. 너무 기니까 퇴고는 없는걸로..<<

아 히들이도 나왔고 저는 만족스럽습니다.그리고 저는 셉이 연성속에서 비쥬얼깡패인게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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