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크리스를 안았다.



***



크리스 에반스는 로봇과 같은 사람이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세바스찬은 그 말 이외에 어떻게 그를 표현해야할지 몰랐다. 눈은 늘 항상 죽은것처럼 내려앉아있고 입은 꾹 다물어져 있었으며 하얀 피부에는 생기조차 없어 보였다. 늘 지루한듯, 무(無)표정으로 지내고 있으며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나 슬픔 심지어는 화 조차 없어보였다. 겨울에는 차가워 보이고 봄에는 나른해보이는 듯한 그 표정은 지금처럼 누군가가 "남창새끼." 라고 키득키득 비웃으며 어깨를 치고 지나갈때도 다름 없었다.


화도 나지 않는건가?


이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그러지도 않았다. 관찰기간이 길어지면서 크리스 에반스에게 그런 행동들은 '평범한 일상' 이었고 대응하지 않는것도 '그' 다운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대놓고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고, 어깨를 밀쳐 캐비넷에 밀치고, 아무도 안보이는 틈에 주먹으로 명치를 세게 박는 일은 일상이었으며 그런 일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훌훌 털고 일어나 아무렇지 않게 어기적 걷는 것이 그의 평범한 행동이었다. 종종 그것이 보기 불편한 것인지 몇몇 학생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쳐다보기는 했었지만 다들 그 뿐, 도움의 손길을 건내거나 괜찮냐며 물어보는 이는 없었다.


도 그렇지만.


나이는 세바스찬보다 한 살 많았다. 유급인가, 학교를 늦게 들어온 것인가. 알길은 없었다. 말수가 적어 입도 열지 않는데 궁금하다고 묻는 이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세히 보면은 브루넷 머리의 깔끔한 미남이었지만 후줄근한 티셔츠와 체크남방에 가려져 그의 진면목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학교에 공인되어있는 '남창'이라는 소문때문에 다들 모른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세바스찬은 같은 클래스가 된 이후로 크리스를 줄곧 관찰해왔다. 스스로에게 왜? 라고 자문해봤자 대답해주는 이는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맞고다니는 것이 불쌍해서 보는거같다 싶었는데 이제와서는 무슨 오기가 생긴 것 같다. 뭐랄까. 저 사람은 언제 쯤 웃을까? 이렇게 쳐다보는데 언제쯤은 그런 모습 한 번은 보지 않을까. 뭐, 그런 오기. 그렇지 않으면 설명하기 힘들었다.


따사로운 봄이었다. 창문을 열어두니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고 구름 사이로 보이는 태양이 알맞게 빛을 내리고 있었다. 창가 옆, 크리스 에반스는 그저 고개에 턱을 괴고 앞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리깔은 풍성한 속눈썹이 팔랑 거리는 것 같았다. 


***


"괜찮으면 이거 먹어."


세바스찬이 처음으로 크리스에게 건낸 말이 었다. 같은 클래스가 된지 3개월, 관찰한지 2개월 반이 될 무렵이었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이 건낸 카스테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서는 덥석 집었다. 도대체 이 현대사회에서 어느누가 이런 식으로 주린 배를 채울까했는데 그게 크리스 에반스라니. 학교의 수돗가에서 물로 빈 배를 채우는 광경은 영화에서 밖에 보지 못했다. 


"너 내이름은 알아?"


꾸역꾸역 조용히 먹성있게 빵을 한 입 베어문 크리스에게 물었다. 그는 여전한 무표정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분명 귀여운 행동인데 경직된 얼굴때문인가 무서워보이기까지 했다. 


"세바스찬 스탠이야."

"...크리스 에반스."


너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어. 그렇게 말을 하려다가 혼자 일방적으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기 겸연쩍어 입을 다물었다. 크리스는 자신의 이름을 말한 것이 하고싶은 말의 전부였는지 마저 빵을 먹기 시작했다. 나름 고심끝에 다가간것이었는지 이정도로 심플하니 허무할 정도였다.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그를 관찰한 적이 있던가. 옆에 앉아 높은 콧대를 바라보며 세바스찬이 멍하게 생각했다. 딱히 그에게서 '왜 갑자기 친한척 다가오냐.' 라던가 '이 빵은 뭐냐. 동정이냐?' 라는 날 선 반응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토록 무심한 반응이 나올줄은 몰랐다. 굶고있는 길고양이한테 먹이를 줘도 이것보다는 더 한 반응이었을터였다. 고요함은 곧 어색함이었다. 날도 화창했고 저 멀리서는 미식축구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열띤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학교 뒷 건물 인적없는 수돗가. 이 흔한 날이 세바스찬이 처음으로 크리스의 세계에 다가간 날이었다. 


***


예전부터 크리스에게 말은 걸고 싶었다. 학교생활의 반,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수업시간의 전부를 그에게 할애하고 있었는데 그가 자신의 존재자체도 모른다면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싶었고 그러기위해서는 자신이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어보이는 그가 먼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질리 없으니까. 가진다해도 그것이 자신일 확률은 극히 낮으니까. 


갑자기 말을 건 것에 대해 무슨 이유를 말해야 할까 등등에 신경을 썼던 처음이 힘들었지 두번부터는 간단했다. 그가 이토록 허무맹랑한 반응만 보일 뿐 그다지 쳐내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나서부터는 세바스찬은 그에게 끈덕지게 말을 걸었다. "오늘 뭐해?" "이거 먹을래?" "내가 도와줄까?" 한 번에 들어도 호의일정도의 말을 크리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것도." "응." "고마워." 라는 짧은 답변을 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크리스에게 "세바스찬." 이라고 불렸을 때, 드디어 그의 세계에 더 한 발자국 다가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불려졌을때 저도모르게 느껴지는 기쁨과 긴장감에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는 것을 꾹 참느라 힘이 들었다. 도서관에서 당번일을 하고 있는 그를 도와주며 생긴 일이었다. 세바스찬은 이제 어느정도 크리스에게 자신이 인지되었다고 느꼈고 그의 세계에 더 한 발자국 가기 위해서는 대담한 행동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았다. 


"크리스, 궁금한게 있는데 물어봐도 돼?"

"...뭔데?"


방과 후의 도서관은 운동장과 반대로 서늘하고 조용했다. 지하에 만들어져서일까 여름에 에어컨조차 틀지 않아도 이 곳은 늘 서늘했다. 창문이 없어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전구로만 운행이 되고 있기에 낮에도 어두컴컴했으며 이용하는 사람 수에 비해 지독히도 넓었다. 점심시간에만 잠깐 소란스러울 뿐, 이렇게 방과 후가 조금 지나면. 노을이 질 저녁시간이 될 무렵이면 늘 조용했다.


덥지도 않은데 땀은 왜 흐르는지. 세바스찬이 바짓단에 손바닥을 몇 번 비벼 땀을 닦은 후, 침을 꿀꺽 한번 삼키고서는 물어봤다. "...너한테 떠도는 소문 진짜야?" 눈을 마주치며 물어야 할까, 아니면 피해야 할까. 고민을 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 멍청이. 이렇게 고민을 하는게 눈을 피하는 거잖아. 


어떤 표정을 짓고있는지 몰랐다. 그러고보니 오늘 크리스는 그를 유독 심하게 괴롭히는 케빈에게 어깨가 밀쳐져 얼굴이 크게 캐비넷에 박혀 푸르덩한 멍이 생겼었다. 최근 세바스찬이 크리스에게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점차 그를 향한 폭력이 줄어들고 있었는데, 오늘 마침 눈을 뗀 사이에 그런 일이 발생했었다.  눈을 옆으로 살짝 돌려 크리스의 옆모습을 살펴보았다. 눈썹 아래로 생긴 푸르딩딩한 멍이 하얀 피부에 맞춰 아이러니하게 아름답게 그려져있었다. "가끔." 크리스가 작게 중얼거렸다.


"가끔. 호기심인지 동정인지 다가오는 사람들이 몇몇 있어. 그러다가 금방 떠나곤 하지만."


그 전과 다름없이, 삼개월 전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와 다름없는 덤덤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크리스가 말했다. 


"...난...난 그런거 아니야."


하지만 그 덤덤한 말과 표정은 세바스찬에게 큰 비수가 되었다. 자신딴에서는 그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오기가 생겨서, 수지에 맞기 위해 들어가고자 노력을 한 것이었는데. 그러니까 자신에게 그가 어느 의미로 특별하게 되었으니 자신도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는데. 그의 말을 들어보면 자신은 그에게 다가오는 이들 중 하나인 뻔한 존재였던 것이었다. 이게 아닌데. 난... 난 그런게 아닌데.


세바스찬의 말에 크리스가 상관없다듯이 어깨를 으쓱 한번 올리고서는 다시 반납된 책을 차례차례 책꽂이에 꽂기 시작했다. 크리스의 말이 망치가 되어 뒷통수를 맞은듯한 세바스찬이 입을 뻐금뻐금 거리면서 땅 아래를 쳐다보았다. 무언가 지금까지 노력한 것이 다 무산이 된 듯한 허탈한 기분이었다. 그에게 나머지와 다른 사람이 되겠다고 다가간것이었는데 이 노력조차 뻔한 것이었다니.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자 웬일인지 크리스가 먼저 더 입을 나불거렸다.


"뭐가 궁금해서 온건지, 뭐가 불쌍해서 온건지,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크리스. 그게아니라."

"아니야. 세바스찬."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말을 끊고 마지막 책을 책꽂이에 꽂으며 말을 했다.


"나 남창 아니라고."


마지막으로 꽂은 책의 이름은 데미안이었다.

그 말에 놀라 고개를 들어 쳐다본 그 아이의 눈동자에는 해바라기가 담겨져 있었다.


***


그 날 밤 하루종일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뛰었다. 운동을 한것도 아닌데, 술을 훔쳐마신것도 아닌데, 대마를 피운것도 아니었는데. 이유모를 쿵쾅거림이었다. 크리스를 이제는 4개월 째, 관찰하긴 했었지만 그를 보면서 이렇게 심장이 뛴 적은 없었다. 애초에 세바스찬은 크리스를 막연히 쳐다보고 관찰한것은 쓸데없는 오기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있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까치집같은 브루넷 머리, 푸른 멍 혹은 붉은 혈흔이 묻어있는 새하얀 피부, 꾹 다물고 있는 통통한 입술. 그 의 것들이 종종 떠올라 머릿속을 뒤덮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학교의 유명인사였고 특이한 인물이다. 그런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이 뭐 그리 특별하고 큰일인가. 


그에게 다가오는 사람 중 한명, 뻔하고 흔한 인물이 되었다고 느꼈을때 마음속으로 절망했다.

그러다 그에게 고해성사와 같은 고백을 들었을 때에는 나는 그들 중 하나가 아니구나 싶은 마음에 온 몸이 떨렸다. 


"그런데 왜 그렇게 당하고 사는거야? 케빈에게 말해. 두 눈 똑바로 뜨고. 나는 그런 일 하지 않는다고."

"중요한건 사실이 아니거든."


사실같은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당번의 마지막 활동으로 도서관의 불을 끄자 햇볕하나 들어오지 않은 실내에는 어둠이 잠겼다. 도서관 내의 숙직실에서 들어오는 작은 빛만을 의지하여 걸어 서로의 목소리말고는 닿는 것이 없었다. 못본다해봤자 크리스는 늘 항상 덤덤한 표정이지만.


중요한건 사실이 아니라. 


그 포기하는 듯한 말투가 기분나쁘긴 했지만 세바스찬은 여러의미로 설레고있었다. 자신만 진실을 알고있다는 고양감? 그가 소문과 다른 사람이라는 기쁨? 어둠속이라 표정이 숨겨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지난 도서관의 고백 이후 세바스찬은 더더욱 크리스와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그는 언제나 무덤덤하고 말수가 적고 자신을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비밀을 공유했다는 사실때문이었다. 세바스찬은 그 일이 있은 후에도 여전히 점심시간에 크리스를 챙겼으며 알게모르게 그를 향한 괴롭힘을 막았다. 딱히 크리스로부터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같은것은 오지 않았지만 말은 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 아니면 누가 널 챙겨주겠어."

"응, 고마워."

"말은 잘하지."


벌써 이렇게 점심을 함께한지도 한달이 지나갔다. 슬슬 태양빛도 뜨거워지고 대지에서 열기가 느껴지는 것이 본격적인 여름이 오고있는 느낌이었다. 세바스찬이 왼손으로 이마를 훔쳐 땀을 닦았다. 그의 풍성한 앞머리가 땀대문에 이마에 달라붙어 기분나쁜 촉감이 느껴졌다. 슬슬 장소를 다른 곳으로 바꿔야 할지도.... 인적이 드물어 둘만이 있기는 좋은 곳이었지만 더 이상 이곳에 오래있을 수는 없었다. 


"장소 다른데로 옮겨볼까?"

"...이제 방학인데 뭘."

"그런가."


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구나, 벌써 방학이라니. 세바스찬이 땀으로 흥건한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 보며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눈길이 점점 타고올라가 태양으로 그을러진 자신의 구리빛 피부를 보았다. 원래부터 하얀피부는 아니긴 하였지만 그 사이 해를 받았다고 피부가 조금 타고 말았다. 손을 이리뒤집고 저리뒤집어보며 얼마나 탔는지 확인하던 도중, 크리스의 상태가 신경이 쓰였다. 세바스찬이 고개를 돌려 옆에 앉아 멍하니 있는 크리스의 팔을 쳐다보았다. "너는... 피부가 안타는구나. 빨갛게 익었어." 세바스찬이 신기하다듯 중얼거리자, 크리스가 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 보았다. 


"...어릴때부터 그랬어. 빨갛게 익더라고."  

"흐응."


분명 남자답게 생긴 상인데 어딘가 남자답지 않은 면이 있다. 세바스찬이 신기해 크리스의 팔뚝을 덥썩 만지면서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행동을 저지하지 않고 그냥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이었다. 늘 그랬듯이. 


"여기, 벌써 빨갛게 익었어. 쓰라리지는 않아?"

"별로."

"안되겠다. 내일부터 그늘있는 곳을 찾아야겠어. 너무 쉽게 익어버리잖아."

"괜찮은데."


이게 어디가 괜찮은거야! 세바스찬이 볼멘 목소리를 내며 크리스의 하얀 팔뚝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예상외의 가벼운 몸이 세바스찬쪽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아. 탄성을 속으로만 내뱉었다. 안그래도 서로 가까이 있었던 그들이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밀착되어 코와 코가 맞닿았다. 미안하다고 해야하나 아니면 뭐라고 말을 해야하나. 세바스찬이 고민을 하며 이러저리 눈을 돌렸다. 옆눈으로 새어보니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둘을 비추어주고 있었다. 눈이 부셔 다시 눈동자를 크리스 쪽으로 돌리자 꼼짝 않고 그저 덤덤한 표정을 짓고있는 얼굴이 보였다. 


"...눈부셔."


햇살과 너는 닮았구나. 

세바스찬이 점점 눈을 내리 깔며 고개를 크리스를 향해 다가갔다. 눈을 천천히 감고 있을때에도 크리스는 미동도 하지 않은 체, 눈 한번 깜빡이지 않은 체, 가만히 세바스찬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피하지 않는 다는 것을 허락으로 알아도 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는 이미 입술이 맞닿았을때였다. 생각한것보다 더 보드라운 입술이 느껴졌다. 왜 나는 그를 그렇게 관찰했을까. 그건 그가 궁금해서였다. 그렇다면 나는 왜 크리스 에반스가 궁금했을까.


따뜻한 숨결이 콧잔등을 간지럽혔다. 


***


"언제까지 그 남창놈 뒤를 봐줄꺼야."

"...뭐라고?"


세바스찬을 부른것은 케빈이었다. 그는 학기 초부터 크리스를 괴롭히는데 주동적인 인물이었고 지금 이렇게 세바스찬이 버티고 있는 시기에도 유일하게 괴롭히는 인물이었다. 남창의 소문의 근원지가 그인지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토록 학교내에 넓게 퍼지게 된 원인은 그라고 해도 다름 없었다. 결코 작지 않은 세바스찬보다 한 뼘 큰 키에 럭비운동으로 다져진 우락부락한 몸통. 딱봐도 나 하이스쿨에서 좀 놀아요. 라는 인상을 가진 놈이었다. 


"왜? 그새끼가 너한테 뒤라도 공짜로 대줬어? 그래서 그래?"

"헛소리하지마. 케빈."

"뭐, 가난한 남창새끼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그것 뿐이겠지."

"그 입 닥치는게 좋을텐데?"


친구사이는 아니다. 그저 학교의 큰 주축인 둘이었기에 서로를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라이벌이라는 거창한 관계는 아니고. 뭐라고 해야할까. 자신과 비슷한 놈이면 맞부딪칠만한데 둘은 서로를 인정하는 편이었다. 인사도 하지 않고 대화도 하지 않고 심지어 서로 소개를 하지도 않았지만. 하지만 평화로웠던 관계도 크리스를 통해 유리에 금이 간 듯 깨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티도 안났던 금이 이제는 쩌저적 소리를 내면서 갈라지고 있었고 몇 초만있으면 부숴질 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두 사람의 입에서 원흉인 주제가 입 밖으로 나왔다.


"안그래도 너랑 이 이야기로 한 번 말하려고 했어. 이제 크리스에게 손 떼."

"뭐라고?"

"유치하게 애들처럼 굴지말라고. 건드리지 말라고."

"허, 참. 왜 그렇게 크리스 에반스한테 관심이 많지? 뭐야? 진짜 뒤라도 대줬어? 거기에 넘어간거야? 그렇다면 좀 실망인데?"


케빈이 어이가 없다듯이 웃으며 비스듬이 자신의 몸을 캐비넷에 기대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지. 너야말로 크리스 에반스한테 왜이렇게 관심이 많지? 좋아해? 좋아해서 괴롭히고 싶어하는 뭐 그런 심리야? 동성애자인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애꿎게 좋아하는 애를 괴롭히는 10대 미국 드라마 청소년 같은 심리야?"

"잠깐, 내가 왜 크리스 에반스한테 관심이 많은게 되는거지? 난 그저 학교에 남창새끼가 있어서 거스릴 뿐이었고 그래서 교육시키는건데?"

"아니거든."

"뭐가?"

"크리스는 남창이 아니라고. 믿진 않겠지만."


세바스찬이 또박또박 말에 힘을 주면서 말했다. 진작에 처리해야 할 문제였는데 너무 늦어졌을 뿐이다. 그래, 크리스는 남창이 아니다. 많은 오해를 받고 있지만. 그 동안엔 그에게 관심이 집중되어있어서 그와 자신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어서 바깥이야기를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다. 더이상은 그가 학교에 이런 불명예스러운 주목을 받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되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사람이니까. 


"그래, 안 믿지."


케빈이 실실 쪼개듯이 웃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어찌 할 수 없다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 불량스러운 자태가 보기 싫어 세바스찬이 인상을 찡그렸다. 어차피 말로 통하는 놈이었다면 지금까지 그런 고생을하지 않았겠지.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세바스찬이 두 주먹을 꾹 쥐고서는 자신의 앞에 서있는 케빈을 노려보았다. 그때였다. 그가 웃음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내가 직접 봤으니까. 남창짓 하는걸."


-


3월에 쓴 글을 재업한겁니다.

미완의 글인데 이러다가 평생 완결 안날 것 같아서 일단 반 잘라서 (上)으로 올렸습니다.

당시 빨리 여름이 오길 바라면서 꿉꿉한 느낌으로 쓴 글이었는데...

지금도 바랍니다. 빨리 여름이 와주세요. 겨울은 싫어요...

처음 시작은 당신 때문이었다. 


무대 위에서 빛나는 당신이 좋아서, 더 가까워 지고 싶어서, 더 알고 싶어서, 같은 것을 하면 옆에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시작한거였다. 지금은 피아노 그 자체에 즐거움과 만족을 얻고있긴하지만 분명 시작은 당신 때문이었다. 


***


피아노 연습을 게을리 하였다고 이사장실에 불려가 혼이 났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대회에서 입상을 한걸로 자만에 빠진거냐고 자신을 닦달하는 이사장의 모습에 이제 전처럼 초조해지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이제 어찌되었든 좋았으니까. 다 끝났으니까. 


고개를 한번 꾸벅이고서는 이사장실에 나와 문을 닫았다. 닫히는 순간에 큰 한숨소리가 들렸지만 그것 또한 아무런 상관 없었다. 이제 다 끝났다. 나는 피아노 연습을 게을리 하는것이 아니라, 이제 아예 피아노를 포기했고. 피아노를 치지 않으니 이사장은 날 후원할 이유가 없을테고 그러면 사립학교를 다닐 돈이 없으니 이 학교를 나가야 할 게 분명했다. 그러면 공립으로 전학을 가게 되는걸까. 그 정도의 돈이 우리집에 있을까. 일을 시작해야하는 걸까. 내가 피아노 말고 할 수 있는게 있을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 우뚝 복도에서 멈춰섰다. 아니, 방금 전 말은 취소. 피아노를 포함해서 할 줄 아는게 뭘까.


세바스찬과의 피아노 연습 후, 크리스는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이제 더이상 대회도중 세바스찬이 한 실수가 일부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세바스찬이 일부러 져준거든, 아니든 어쩌란말인가. 자신은 세바스찬의 발끝도 못따라가는 실력인데. 


세바스찬과의 대결 이후, 그 다음날은 수업도 빠지고 하루종일 피아노만 쳤다. 학교의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수위 아저씨를 관객 삼아 계속 피아노를 쳤다. 미친듯이 치면서 느끼는 감정은 불안감과 공포였다. 아무리쳐도 따라갈 수 없는 실력차와 알기 싫어도 자신의 귀로 들리는 재능차이. 치면칠수록 비교가되었고 연주는 우울함만을 낳았다. 


계속 치다보니 알 수 있었다. 자신은 그의 발끝에도 따라갈 수 없다고. 그와 자신의 재능은 확연하다고. 만약 자신이 그보다 더 노력한다해도 탄생으로 주어진 이 차이는 따라잡을 수 없다고. 재능이 왜 재능(gift)인가, 말 그대로 하늘의 선물이기 때문 아닌가. 하늘의 선물을 고작 인간따위가 어찌 따라가겠는가.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에 매달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포기하면 편하다, 계속 부딪치니 괴롭고 힘든 거다. 잊으면 된다. 어쩔 수 없는건 어쩔 수 없다. 




크리스는 오늘도 여러명의 이들과 몸을 섞었다. 원래부터 이렇게 방탕하게 굴었던건 아니다. 피아노에 몰두하고 있을 때는 다른 것에 몰두할 시간이 없어 이러지 않았다. 


다수의 인원과 몸을 섞으면 정신없이 뒤로 몰려오는 쾌감을 느낄 수 있었고 그렇게 하여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어서 좋았다. 아니, 때때로 자신과 몸을 섞는 이들에게 자신을 좀 더 모질게굴어달라고 애원한적도 있으니 자기파괴적인 행위로 이런 일탈을 즐기는 걸지도 몰랐다. 돈으로 자신의 뺨을 쳐달라하고, 창녀라고 욕을 해달라하고, 묶어 놓고 방치해달라고도 했다. 뭐가 되었든 자신을 파괴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장소도 구하기 쉬웠다. 이 연주실은 세바스찬과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세바스찬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자신만의 공간이 된 셈이었다. 


'그래봤자... 얼마 안있으면 나도 없어지지만.'


피아노 위에 납작 엎드려 박힐때는 흔들려 삐걱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어줄 돈도 없으면서 이대로 피아노가 부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피아노를 치지 않으니 시간은 남아돌았다. 아무리 남자들이랑 몸을 섞는다해도 하루종일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럴때면 집에 돌아가 침대에 박혀 하루종일 잠을 자거나, 아니면 영화를 다운 받아 보곤했다. 집중할만한 것이 필요했고 또 시간을 허비할 만한 일도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잠을 자도, 영화를 봐도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무엇을 해도 활기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저 이 무료한 시간이 얼른 흘러가길 바랬다. 


이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내일이 되면, 모레가 되면, 일 년이 지나면 뭐가 달라질까. 나는 뭘 원해서 시간이 이렇게 흐르길 원하는 걸까.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를 바라보며 크리스가 멍하니 생각했다. 아무것도 달라지는게 없다. 자신의 삶은 이제 늘 이렇게 무료하게 흘러갈 것이었다. 피아노 하나만 사라졌을 뿐인데 크리스의 세상은 빛을 잃고 허무해졌다. 피아노, 아 피아노. 다시 한번 생각을 떠오리니 울컥 무언가 솟아 올랐다. 


내가 왜 그렇게 피아노에 죽자살자 매달렸을까. 도대체 언제부터 쳤을까. 나는 치면서 즐거웠던 걸까.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 무엇이. 


눈을 감으면 피아노의 소리가 들렸고, 아직 딱딱하게 굳은 손은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분명 즐거웠다. 피아노를 치는거. 어머니가 일하는 카페에서 마감시간에 퇴근을 기다리면서 처음 쳤던게 시작이었다. 손님이 없는 시간이니 마음대로 갖고 놀아도 된다는 주인의 말에 처음 생긴 장난감처럼 갖고 놀았다. 그 때가 다섯살이었을까, 여섯살이었을까. 질리지 않고 계속 치고 있자 아르바이트 누나가 체르니이니 뭐니 교본을 가져다 주고 가볍게 읽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처음 시작은 분명 순수했다.


그저 치는것이 즐거워서,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야만 하는 무료한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는게 즐거워서. 저의 손가락에 만들어지는 음악이 아름다워서 가끔 저의 연주를 들으며 박수를 쳐주는 점장님이 좋아서. 즐거우니까 더 치고 싶어서, 더 잘하고 싶어서. 분명 그래서 시작했던 거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재능을 주지 않은 것일까.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까, 재능이라도 주었어야 하는게 아닌가. 세바스찬 스탠은 다 가졌는데, 하나도 아쉬울 게 없는 놈인데. 왜 그 개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나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은 것일까. 노력을 해서 따라잡을 수 있다면 노력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저의 수준차이는 그 정도가 아니다.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장벽, 철저한 재능 차이. 그 모든것이 크리스를 괴롭히고 허탈하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정말 재능의 차이는 불공평하다. 너무 불공평하다, 어쩔 수 없는 불공평함이다.

어떻게 해서도 센스는, 재능은 따라갈 수 없다.

매달리면 매달릴 수록 무력감과 허탈감 그리고 열등감에 자기 자신만 죽어갈 뿐이다.

자신은 이미 재능 차이 하나만으로 남에게 악담을 퍼붓는 최악의 인간이 되었다. 이제 그만 인정하고, 포기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자꾸 피아노 생각이 나는 것이란말인가.




이사장은 예상 외로 너그러운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아도 대회에 참가하지 않아도 크리스를 향한 장학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크리스를 불러 피아노를 하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데려온 학생이니 끝까지 책임을 질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사장의 마음을 대충 깨달은 크리스는 이대로 퇴학을 기다리는 것보다 자퇴를 하는 것이 더 빠르다 생각하여 학교를 무단결근 하기 시작했다. 다시 이사장의 얼굴을 보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아 자퇴서는 우편으로 보냈다. 아무말 없이 처리해줄 것이라 믿었다. 


학교를 나가지 않는 크리스에게 가족이 염려와 분노를 동시에 보냈다. 왜 갑자기 피아노를 관둔거냐는 어머니의 말에 교육비도 안대주면서 무슨 말이냐고 꽥 소리를 질렀다. 그것이 어머니의 아픈 손가락이란것은 알았지만 그리 말하지 않으면 계속 캐물을 것 같아서였다. 차마 가족에게 자신의 추악한 질투와 열등감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어머니는 그 뒤로 크리스에게 피아노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어떻게 할 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정하라고만 하였다. 어떻게 해야할까, 누군가 정해줬으면 좋겠는데. 삶의 목표도 이유도 잃은 크리스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유가 속박이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리고 있다 라는 표현이 맞을정도로 지내고 있을때, 뜬금없이 세바스찬에게 메세지가 왔다. 만날 수 있냐 라는 말 부터 시작해서 요즘 학교에 왜 안보이냐 등등. 그와 '그날'이후 학교를 다니고 있을 적에도 마주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자신이 '요즘' 학교에 없다는 것을 알고있는 것일까. 답장은 보내지 않고 메세지는 오는족족 지웠다. 꼴도 보기 싫었다. 그만 보면 자신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살리에르가 되었다. 분명 나중에는 미칠것이었다. 


지워도 지워도 오는 메세지에 익숙해질 무렵, 느닷없이 늦은 밤에 전화가 왔다. 한 통을 받지 않고 그냥 보내자, 받지 않으면 집으로 전화를 건다는 메세지에 어쩔 수 없이 다음 전화를 받았다. "...선배예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지금 어디 있어요?"

"집. 왜 전화했어. 나한테 무슨 볼 일 있어?"

"...선배 잠깐만 나와요, 할... 할 얘기가 있어요."

"전화로 해. 꼭 만나서 해야하는 이야... 잠깐만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만나서, 만나서 해요. 선배."

"너 울어? 지금?"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는 갈라지고 쇠어있었다. 늘 덤덤한 목소리만을 기억하고 있던 크리스에게는 예상치 못한 소리였다. 침대에 누워서 통화를 받고 있던 크리스는 들리지 않게, 작게 허어 하고 한숨을 내뱉고서는 머리를 긁었다. 도대체 얘는 뭐가 문제여서, 이렇게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지 몰랐다. 왜 이렇게 자신에게 참견을 하는지. 크리스는 지금까지 줄곧 세바스찬에 대해서 생각은 했어도, 세바스찬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가져본적이 없었다.


"오기...오기 싫으면, 제가 찾아갈게요."

"잠깐만, 찾아온다고? 우리집에? 너 우리집 주소는 어떻게 알아?"

"그냥...그냥 얘기하고싶은게 있어요. 선배. 여기 선배네 동네 근처 공원인데... 귀찮으시면."

"니가 우리집에 오면 뭐라고 설명해!"


그냥 학교의 친한 후배라고 얼버무릴 수 있지만 크리스는 세바스찬을 그런식으로 소개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세바스찬의 존재 자체가 크리스의 열등감이었으니 자신의 가족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강제적으로 치부가 드러나는 느낌일게 분명했다. "내가 갈게.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 세바스찬을 다시 보고싶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크리스가 전화를 바로 끊고서는 침대 위에있는 남방을 걸쳤다. 


***


도대체 우리집 주소는 어떻게 알고, 여긴 어떻게 찾아왔는지. 주 타겟이 아이들인 공원은 밤이 되자 텅 비어있었고 세바스찬만이 주인인 것처럼 혼자 있었다. 그네 위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인영은 그 어느때보다 작고 왜소해보였다. 끼익끼익- 들리는 철의 울음소리만이 공원을 채우고 있었다. 크리스는 벌써부터 피곤함이 들었다. "헤이." 그에게 다가가면서 작게 불러보자 숙여있던 고개가 번쩍 하고 들렸다.


"...선배."

"도대체 너 여기서 뭐하냐?"


지금까지 줄곧 세바스찬의 피아노에 대해서는 신경을 써왔지만 정작 그 본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기행들이 모두 이해가 가지 않았고 또 왜 이러는지 추측도 되지 않았다. 그저 그만 보면 좋지않은 것들만 생각이 나니 피하고만 싶었다. 더이상 자신의 열등감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한숨을 깊게 내쉬자하얀김이 모락모락 나왔다. 침대 밖에 나오는게 추워졌다 싶었더니 훌쩍 겨울이 오고있었나 보다. 추워 빨갛게 부은 코로 훌쩍이며 양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대화는 없었다. 할말이 있다고 해서 날 부른건 이새끼인데 정작 친히 납셔줬는데도 아무말도 없었다. 


"...할 얘기 있다면서. 빨리 말해, 아니면 나 그냥 갈꺼..."

"중학교때 선배가 피아노 치는 걸 봤어요."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학교 때? 피아노? 언제 본거지? 근데 갑자기 그 이야기를 왜 해? 그때면 더 못쳤을 땐데? 정말 좆구렸다고 얘기하고싶은건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세바스찬의 말에 크리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네위에 앉아있는 세바스찬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눈물을 그친 상태였지만 빙금 전 통화를 하고 있었을 때 울어서 그런가 젖어있던 볼과 빨갛게 부어오른 눈이 신경쓰였다.


"처음엔 피아노에 관심도 없었어요. 그러다가 선배가 연주하는 걸 보고 관심을 갖게 된거예요. 진짜예요. 그 때는 아버지때문에 억지로 연주회에 끌려가서... 저 그 때 선배랑 얘기도 했어요. 기억 안나시는 것 같지만. 그 때 모차르트 이야기도 했었어요. 저는 잘 몰라서 알아듣진 못했지만...선배가 연주한거 보고 선배랑 대화해보고 관심이 생겼어요. 피아노에. 그냥 나도 선배처럼 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그 날 바로 피아노를 시작했어요."


세바스찬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점점 치는 것이 재미있어졌어요. 그리고 점점 치면 칠 수록 선배랑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냥... 절 이 세계로 이끌어 준 분이니까. 그 뒤로도 계속 생각났거든요. 그래서 보스턴으로 오게 되었어요. 선배가 여기에 다니고 있으니까. 같은 학교에 다니면 좋을 것 같아서. 같이 이야기도 하고 연주도 하고... 그러면 더 좋을 것 같아서. 항상 생각했어요. 연주회도 가고... 어떻게 말을 걸어야할지 몰랐지만."

"...말하고 싶다는게 그거였어?"

"아니요, 이게 아니라. 그러니까. 아, 저 그 때 일부러 의도해서 실수한거아니예요. 진짜로 그냥 실수한거였어요. 절대 선배가 생각하는 그런게 아니예요. 제가 왜 그랬겠어요, 선배.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진짜...!"

"그만! 그만말해! 됐어! 됐다고! 도대체 뭘 얘기하고싶은거야?"


가만히 있던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이야기를 듣다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이야기에 크리스가 어떤 반응을 줄지는 예상을 하지 못했지만 이런 반응은 범위 밖이었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뜬금없는 과거의 이야기에 황당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세바스찬이 얘기하고자 하는게 무엇인가? 그토록 싫어하던 세바스찬이, 존재 자체가 싫은 세바스찬이. 도대체 왜 보스턴까지 와서 나를 위협하냐고 마음속으로 백번 소리를 지르게 만든 세바스찬이. 자기 자신때문에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왔다? 자신을 열등감의 구렁텅이에 빠트리던 놈이 자기 자신때문에 피아노를 시작했다? 정말 듣자듣자하니 기가 차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이 자신이라는 것 아닌가? 


세바스찬이 싫어서, 왜 도대체 너는 여기에 왔냐고. 나를 이런 괴물로 만드냐고 외쳤는데.

그를 만든것 자체가 자신이었다니. 

이런 코미디도 따로 없었다. 그 연주회가 어떤 연주회인지는 몰라도 당장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뒷통수를 세게 때려 못나가게 해주고 싶었다. 


"진짜... 진짜 어이없다. 그게 하고싶은얘기야?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 참. 진짜..."


이제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너는 왜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거야. 겨우겨우, 다 네탓이라면서 눈을 감고 귀를 막았는데. 그런 너를 탄생한게 과거의 나라니. 그러면 난 누구에게 이 감정을 맡기면 돼? 누구 잘못이라고 떠밀면 돼? 모든게 내가 나쁜거야? 그냥 재능있는 니가 나쁘면 안돼? 왜 재능 없는 내가 또 나빠야해? 넌 다 가졌잖아. 그냥 니가 잘못한거면 안되냐고. 


왜 이렇게 불공평해야해? 


꼴사납게 그의 앞에서 울고싶지는 않았다. 이제 정말 끝이다. 집에 가서 수면제를 찾아보고 한통을 전부 다 먹고 자살하고 싶었다. 아니, 수면제로 자살 안된다고 했던가. 모르겠다. 목 멜 자신은 없으니 미친척 그러고 잊고 싶었다. 아니, 그냥 여기서 벗어나야겠다. 더이상 세바스찬과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가 다시 코를 훌쩍이며 뒤를 돌렸다. 그러자 "선배... 잠깐만요, 제발!" 하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자신의 손을 붙잡는 감촉이 느껴졌다. 이게 뭐냐고 놓으라고 신경질을 내려했지만 자신의 손을 잡는 촉감이 이상했다. 크리스가 고개를 아래로 내려보았다.


자신의 손을 잡고있는 손은 칭칭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너...이게 뭐..."

"좋아해요. 크리스 선배."


손이 왜이렇게 되었냐고 물으려는 순간 망치로 뒷통수를 때리는 것과 같은 말이 들려왔다. 세바스찬은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제가...제가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게... 그게 말하고 싶었어요. 좋아한다고..."


그게 말하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어쩌면 중학교때 그 첫만남에서부터 반했던걸지도 모른다. 첫 만남 이후부터 단 하루도 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모차르트가 좋다던 그의 말이 떠올라 항상 모차르트 곡만을 고집했었다. 같은 학교에 오게 된 이후, 마음은 점점 더 커져갔다. 같이 있으면 좋고 이야기 하고 싶고 연습을 하고 싶고. 아직 사랑을 몰랐던 저이기에 이 모든 감정이 '동경' 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그 날'에 알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이 동경이 아님을. 동경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몸을 섞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을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그 모습을 잠들기 직전에 계속 생각할리 없으니까. 그게 나였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안할테니까. 


감정을 뒤늦게 알아차렸을 때, 크리스는 피아노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자체가 싫다고 했다. 자신의 마음에도 둔한 자신은 타인의 감정에도 둔했다.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은 슬프지만 알고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싫어하는 지는 몰랐다. 왜 크리스는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왜 자신때문에 피아노를 그만 둔다고 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자신이 싫다기에 그의 앞에 나타날 순 없었지만 보는 것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래서 몰래몰래 말 없이 그의 반을 창문 너머로 보거나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늘 눈으로 쫓았다. 하지만 고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크리스가 학교에서 종적을 감췄다. 듣자하니 자퇴를 할 생각 인 것 같았다.


피아노 때문이다. 세바스찬은 그제서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미워하는 이유. 대회와 그의 자존심. 자신때문에 그만두겠다는 말. 그리고 끝내 알아버린 그의 열등감. 


자신이 그를 파괴하고 있었다. 

나의 손이.

나의 연주가.


고민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깊게 고민한 것도 아니었다.

세바스찬에게 우선순위는 늘 피아노가 아니라 크리스였다.


나의 손과 연주가 그를 망치는 거라면 부수면 되었다. 


"다시는...다시는 피아노 안 칠게요. 선배. 이런게... 이런게 선배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진 모르지만. 저... 저 진짜 안쳐도 괜찮아요... 진짜."


"선배... 학교 그만 두지 마요. 선배, 저 때문에 그러는 거면 그러지마요. 제가... 제가 전학 갈게요."


"저 진짜... 진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선배. 저는 진짜 선배랑 가까워 지려고 그런건데. 그런데. 진짜..."


아직 피가 멈추지 않던 손을 남들 눈에 띌까 대충 붕대로 감고 온 것이었다. 통증 때문인가 감각이 없어 자신이 제대로 크리스의 손을 잡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잡아야 했다. 지금 놓치면 더욱 영영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세바스찬은 감정이라는 것이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감정은 오로지 쌍방향인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일방적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감정이라는 것은 이유도 없이 생기기도 했다. 불공평하게 자신만 바라보고 자신만 애타고 자신만 매달리고. 그런데... 그런데 어쩔 수가 없었다. 상대방에게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억지로 만들어 낼 수 있는것도 아닌데. 불공평하게도 둘 중 우위는 언제나 크리스였다. 세바스찬은 늘 질 수 밖에 없었다.


가끔은 이런 자신만 매달리는 불공평한 상황에 분통이 터질때도 있었다. 그 때가 언제였던가. 크리스가 일방적으로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3시간 정도 바람을 맞을 때였다. 많이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도 없이 나타나지 않아 화가 잔뜩 났었지만, 나중에 자신에게 잘 웃지 않던 그 얼굴이 미안함을 잔뜩 묻고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 순간 사르륵 하고 풀렸었다.


이건 진짜 불공평하잖아.


재능이 신이 내린 선물이라면 감정은 누구의 탓을 하면 좋을까. 오로지 저의 마음에서 태어난 이 산물을 어찌하면 좋을까. 왜 자신에게 저렇게 못되게 구는 사람이 좋아서.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아는데도 그런데도 너무 좋아서. 세바스찬이 다시 한번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비명을 질렀고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제발... 다른 사람이랑 자지마요. 그러지마요."


결국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이거였을까. 그러면 나 진짜 최악인데.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손을 잡아 당겼다. 말없이 끌리는 그의 손에 자신의 얼굴을 부볐다. 





세바스찬의 예상치 못한 고백에 크리스가 하하, 하고 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마른웃음은 점차 활력을 띄우더니 미치광이처럼 하하하하! 하고 큰 웃음소리로 번졌다. 이건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아까부터 세바스찬의 이야기는 전부 상상도 하지 못했었지만... 자신 때문에 피아노를 시작했다는 것도 놀랄 노자였는데. 이제는 나를 좋아한다고 절절하게 고백한다. 이건 정말.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보통 고백을 받을 때 웃는다곤 했지만... 아마 이런 감정때문에 웃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저의 손을 잡아당겨 얼굴을 비비고 있던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웃음에 놀랐는지 고개를 올리고서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잘 따른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런 이유로 따르는 건 줄은 몰랐다. 크리스가 혼자 킥킥 거리며 웃으며 돌린 몸을 다시 바로잡았다. 세바스찬과 마주하고서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듯이 앉았다. 그네에 앉아있어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있던 세바스찬이 이제는 자신보다 높은 시야를 차지했다. "선배...?" 이제 알 수 없다듯이 표정을 짓는 건 세바스찬 쪽이었다. 크리스는 주저앉은 그대로에서 대답하지 않고 세바스찬의 다친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리고서는 살살, 다치지 않게 붕대를 풀어주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것인지, 손에는 피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손가락을 살짝 건드리자 움찔 하며 세바스찬의 몸이 떨렸다. 아마도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많이 아파?" 크리스가 한번도 세바스찬에게 들려준 적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배?" 얼떨떨한 세바스찬은 그저 크리스만을 부를 뿐이었다. 크리스도 세바스찬의 부름에 답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할 일만을 했다. 자신은 의사가 아니라서 그가 얼마나 다쳤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뼈 자체가 아작이 난 건 아닌 것 같았다. 크리스가 호오- 하고 입으로 불어주었다. 그리고서는 "많이 아파?" 하고 물었다. 세바스찬은 창백하게 얼굴만 굳히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바스찬. 방금 전 말을 듣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네."

"역시 너는 피아노를 계속 쭉 쳐야할 것 같아."

"...네?"


세바스찬이 놀란 눈으로 크리스를 쳐다보았지만 오로지 정수리만 보일 뿐이었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손만 보면서 말을 이었다.


"네가 피아노를 계속 치면... 다른 사람이랑 자거나 그러지 않을 게. 원한다면 너랑 자줄 수도 있어. 학교도 다니라면 다닐게. 이사장이 허락할 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무슨..."

"대신 있잖아. 나는 너를 평생 좋아하지 않을꺼야."


그제서야 크리스가 고개를 올려 세바스찬을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울음을 멈추지 못했던 세바스찬이 지금에서야 놀라 눈물을 멈췄다. 


"평생 네 옆에 있으면서 너를 싫어할꺼야."


이게 공평하잖아. 나도 내가 갖고싶은 걸 못가지고, 너도 니가 갖고 싶은것 못가지고. 의외로 신은 공정한 것 같아. 이래야 수지가 맞지. 그치? 

크리스의 말도안되는 제안에 세바스찬이 아연실색을 하며 쳐다보았다. 그와의 해피엔딩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식의 전개는 더더욱 바라지도 않았다.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크리스는 그러건말건 실실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니가 날 좋아해서 다행이야."


니가 나에게 열등감이라는 불행을 선물한 것 처럼, 나도 너에게 불행을 선물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크리스가 그 말과 함께 세바스찬의 피묻은 손에 쪽 하고 입술을 부비었다.




이미 모든게 뒤늦은 상태였다.


***


"...왜 이렇게 저장했어요?"

"뭐가?"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물음에 쥐고있던 스마트폰을 옆으로 건네주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두 몸은 하얀 시트 위에 겹쳐져 있었다. 크리스는 푹신한 베개에 묻고있던 얼굴을 세바스찬쪽으로 돌렸다. 그리고서는 눈썹을 한 번 까딱 올리고서는 건네 쥔 스마트폰을 보았다. 모차르트. 크리스는 세바스찬을 그렇게 저장해놓았다. 아- 이거? 크리스가 베시시 웃으면서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푹식한 촉감이 마음에 들어 자주 이런짓을 하였다. 세바스찬은 자신의 얼굴을 가린 크리스를 보고 그의 어깨를 잡고 자신의 쪽으로 좀 더 당겼다. 그리고서는 보채지않고 천천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넌 나에게 있어 천재 모차르트거든. 그래서. 그리고 나는 너를 질투한 살리에르."

"...제가 모차르트고 선배가 살리에르예요?"

"응. 딱 맞지?"


다시 크크큭 하고 자조적인 웃음이 들려왔다. 

세바스찬은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거 알아요? 모차르트의 재능에 질투해 미쳐버린 살리에르 이야기는 <아마데우스>에서 만들어진거고 실제로는 오랜시간 동안 평안하게 왕궁에서 궁정음악가로 지냈데요."

"아, 진짜? 영화가 날 속였네."

"네. 그러니까 그런식으로 비유하지마요."


세바스찬이 다시 크리스의 스마트폰을 뺏고서는 꾹꾹 눌러 연락처에 있는 자신의 이름을 바꿨다. 크리스의 제지는 없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르. 실제의 역사를 따지면 두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점접도 시기도 열망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싫다, 그런식으로의 비유는. 결국 자신과 크리스와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것 처럼 들려서.


이제 더이상 두사람간의 대화는 없었다. 크리스는 다시 잠이 든 것인지 조용히 숨소리만을 들려주었고 세바스찬은 한쪽 팔로 자신의 머리를 기대고서는 크리스의 뒷통수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심심해서 나머지 한쪽 손을 들고 크리스의 새하얀 등을 만졌다. 오늘은 화창한 일요일 오후였고 날씨는 따뜻했으며 들어오는 햇빛이 둘을 축복하듯이 비춰주고 있었다. 크리스의 등을 만질거리고 있던 세바스찬이 이제는 손을 세워 마치 피아노를 치듯이 크리스의 등을 두드렸다.


솔,솔,레,미,미,도,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연주였고 건반은 당연히 소리를 내지 않았다. 


모차르트라. 크리스가 자신을 모차르트라고 비유했다. 세바스찬이 혼자 장난 연주를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실제 모차르트가 어땠더라.




어린 나이에 일찍 병을 앓고 죽지 않았던가?



열어놓은 창문에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침대까지 들어온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릿결을 간질어주었다.



-


감정과 재능은 정말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다는 점이 말입니다.


(1)


"야 이 개자식아!"

 

예고도 없이 열린 문에서 나온 것은 크리스 였다. 조용한 대기실 속에서 혼자 소파에 고개숙이고 앉아있던 세바스찬이 갑작스런 등장인물에 놀라 눈을 껌뻑였다. 그의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과 느릿느릿한 행동 또한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크리스가 문을 쾅하고 세게 닫고서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느닷없이 남의 대기실에 와서 개자식이니 뭐니 욕짓거리를 하는 것은 학교 선배라는 신분으로도 가벼이 할 수 있는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크리스에게는 앞뒤 볼것이 없었다. 이제 바로 세바스찬이 앉아있는 소파의 코앞까지 온 크리스가 바로 세바스찬의 멱살을 잡았다.

 

", 개자식이. 너 방금 꺼 뭐야."

"선배, 크리스 선배. 잠깐만..."

"뭐냐고 했잖아! 그것부터 대답해!"

"손을 놓아주셔야 대답을... . 숨막혀요."

 

표정 변화가 없기로 유명한 세바스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고나서야 크리스가 두 손을 풀어주었다. 크리스에게 멱살이 잡혀 강제적으로 서있었던 세바스찬이 자유롭게 풀리자 다시 떨어지듯이 소파에 앉았다. 곱게 말해서 멱을 잡은 것이었지 거의 목을 조르는 수준이나 다름 없었다. 목을 단단하게 잠그고 있던 나비넥타이를 풀고 목을 더듬어보았다. 그가 너무 세게 잡아당겨 새빨간 자국이 나있었다. 흠흠. 세바스찬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목을 풀고나서 크리스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그런데 죄송한데, 도대체 제가 뭘 했나요? 짐작이 가지 않는데..."

"뭐라고했냐 개새끼야."

 

씨근덕거리며 숨을 내뱉으며 공격적으로 나오는 크리스의 태도에 세바스찬이 다시 두손으로 자신의 목을 잡았다. 또 한번 멱이 잡힐까 취한 방어적인 태도였지만 다행히도 이번엔 크리스가 바로 멱살을 잡지는 않았다. "진짜 짐작이 안가서 그래요. 왜 그렇게 화가 나신거예요?" 세바스찬이 짐짓 억울한 투로 말했지만 포커페이스라는 별명 답게 얼굴에는 어떤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세바스찬 자기 딴에는 그게 나름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진짜 몰라서 묻는거야? 아니면 나 속 답답해 뒤지라고 묻는거야?"

"진짜 몰라서 묻는거예요. 제가 선배한테 왜그러겠어요."

"... 아까, 방금 전 연주. 중간에 느려진 거 왜그런거야."

 

크리스가 지적한 것은 대회 도중에 일어났던 세바스찬의 실수였다. 방금 전, 실수 없이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던 세바스찬의 연주가 단 한순간, 비록 단 한순간이었지만 흐름을 잃고 느려졌다. 일반인이 듣기에는 차이가 없는 연주였을지 모르겠지만, 크리스나 심사위원과 같이 피아노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라면 단번에 알 수 있는 실수였으며 크리스와 같이 대회의 우승후보로 모두의 기대를 받고 있는 세바스찬에게는 결정적인 실수였다. 연주의 잘못된 해석이나 리듬감과 같은 경우가 아닌 그저 단순 미스였으니 우승은 물건너 간게 틀림없다.

 

그리고 크리스가 화가 난 것은 단순이 세바스찬이 실수를 해서가 아니었다.

 

"너 일부러 그랬지."

"? 무슨소리예요."

"니가 다른 것도 아니고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리가 없잖아. 너 일부러 그랬지."

 

크리스가 도끼눈을 뜨고 세바스찬을 노려보았다. 그의 실수때문에 화가난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는 소년만화나 성장만화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정정당당하게, 최고의 상태인 라이벌을 이긴다, 와 같은 정열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건 창작물속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고 현실에서는 그날의 컨디션과 운 또한 실력이다. 만약 자신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던 라이벌이 그날의 컨디션 저하로 자신에게 패배하게 된다면 크리스는 웃을 인물이었다. 저 등신새끼 지 몸관리 못한다고.

 

하지만 세바스찬은 달랐다.

 

"...일부러라니요, 제가 왜 그랬겠"

"그런데 왜 그런 초보적인 미스를 하는건데? 너 내가 우습냐?"

"제가 선배를 왜 우습게 봐요."

"그런데 니미 시팔 왜 일부러 져주냐고!"

 

그가 특별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바스찬 스탠이 특별하니까, 라이벌이니까 최고의 상태로 승부를 보고싶다, 그런 의미도 전혀 아니다. 그저 저 가증스러운 새끼가 일부러 실수를 했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빡친거다. 계속 씨근덕 거리던 크리스의 얼굴이 점점 빨갛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위압적이게 몸을 부풀리며 서있는것은 크리스이고 쭈그려 소파에 앉아있는건 세바스찬이었지만 표정차이때문인가 세바스찬이 크리스를 괴롭히는 걸로 보였다. 세바스찬이 씩식 거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크리스를 보며 입을 살짝 벌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저 멍청한 표정때문에 더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 너 나 불쌍해? 그래서 일부러 져주는거야? 돈 없는 새끼 상금이나 받아서 타먹으라 이거야? 시발 좋겠다? 집에 돈 많아서? 그것도 아니면 뭐야? 내가 우스워? 우스워서 져주는거야? 나같은건 상대도 안된다 이거야? 너 지금 나랑 장난치는거야? 아니면 대회랑 장난치는거야? 대회가 우스워?"

"...선배. 정말 오해하고 있는거예요."

"니미씨팔, 오해라는 개 좆같은 소리 할꺼면 그냥 닥치고나 있어! 내가 불쌍하냐고 묻잖아!"

 

크리스가 바로 앞에 있는 소파의 기둥자리를 뻥 차며 소리를 질렀다. 비교적 가벼운 소파는 크리스의 발차기에 밀려 움직였고 앉아있던 세바스찬도 덩달아 몸이 흔들렸다. 세바스찬은 일방적인 폭력적인 상황속에서도 눈만 느리게 꿈뻑 거렸지, 불평을 하거나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크리스의 윽박때문인가 더이상 아니다, 오해다. 라는 변명같은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크리스의 눈치를 보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방금 전, 폭력으로 인해 긴장감이 팽팽 돌고 있던 대기실에는 적막감만이 감싸져있었고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있었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대답을 요구했고 세바스찬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시팔, 상금이고 트로피고 다 필요없어 개새끼야."

"..."

"안 받는다고 시발놈아."

 

아무말도 하지 않은 세바스찬을 더이상 상대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저 답답하기짝이없는 면상을 보니 화만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크리스가 마지막으로 그 말을 내뱉고 다시 한번 쿵, 하고 소파를 차고 세바스찬의 대기실을 나왔다. 문을 세게 닫고 나오는 그 순간까지도 세바스찬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콩쿨의 우승은 크리스가 차지했다.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세바스찬이 실수를 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세바스찬에게 상금이고 트로피도 받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건 개인적인 크리스의 생각이었고 대회의 심사위원들은 그의 개인적인 생각까지 고려하지 않았다. 크리스는 상금과 트로피를 고스란히 받게 되었고 그리고 그 덕분에 학교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자존심이 세서 세바스찬 앞에서는 그따위로 말했지만 크리스는 그것들을 거절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상금을 받지 않기에는 가정형편이 걱정되었고, 트로피를 받지 않는다면 학교로부터 받는 모든 장학 혜택은 사라질지 몰랐다. 오로지 피아노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크리스다. 크리스는 결국 세바스찬이 '져줘서' 얻게 된 상금과 트로피로 학교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세바스찬이 실수를 했다더라, 중간에. 그 전까지 완벽했는데."

"걔도 실수를 하는 때가 있구나."

", 빌 게이츠도 실수를 하는데 걔라고 못하겠어?"

"그래도... 그리고 잘은 모르겠지만 걔도 빌게이츠랑 같은 급 아니냐? 매스컴에서도 장난아니잖아."

", 그렇긴 하지."

 

학교 내에서는 우승을 차지한 크리스보다 한 순간의 실수로 4위를 한 세바스찬의 이야기가 더 화젯거리였다. 우승은 당연히 세바스찬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놀라움과 안타깝게 실수를 하여 추락한 천재의 이야기에 대한 자극성이 합쳐진 결과였을 것이다. 예술계 고등학교가 아니어서, 피아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일반 학생들은 그저 인터넷에 의존하여 세바스찬의 이야기를 떠들어대었다. 피아노 천재로 화제를 받고 있는 세바스찬이니 국제적인 콩쿨도 아닌, 지역규모로 열리는 콩쿨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것이 꽤 충격이었는지 여기저기서 기사가 나왔다. 그 안에 크리스의 이야기도 섞여있었지만 좋은 수식어는 붙지 못했다. <운이 좋아> <천재의 실수로 탄생한> 등등.. 크리스는 모든 이야기가 듣기 싫어 수업시간을 제외한 때에는 항상 이어폰을 끼고 책상에 엎드려있었다.

"크리스. 정말 훌륭한 연주였어. 앞으로도 좋은 소리 들려주게."

"감사합니다."

이사장이 인자한 미소로 하며 크리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 손길이 황송스러워 크리스가 자신의 몸을 살짝 베베꼬았다. 이 분 덕분에 크리스는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재능이 있어도 터무니 없는 교육비와 악기의 비용 등으로 포기해야했던 피아노의 길을, 집안 살림과 어린 동생을 위해 포기해야할지도 몰랐던 학생의 삶을. 작은 지역 콩쿨에서 우승을 한 크리스를 보고 그저 재능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낌없이 지원을 해주었다. 크리스는 이 만남을 있게 해준 그 지역 콩쿨에 나간 것을 인생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의 이사장님을 진심으로 구세주라고 생각했다.

 

세바스찬, .. 이번에 안타까웠어.”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필요가 있나! 다음에 더 잘하면 되는거지.음음.늘 기대하고있네.”

 

이사장이 안타까운 얼굴로 세바스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모습에는 실망스럽다거나, 자신의 기대를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등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말 그대로 단순히 실수를 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지, 그의 재능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사장이 어깨를 두드려줬을 때 지었던 웃는 표정은 어디로 가고 크리스는 입술을 깨물고 앙칼진 눈으로 옆의 세바스찬을 노려보았다. 세바스찬은 전과 다름없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눈을 느리게 꿈뻑 거리며 미소 한번 짓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저 여유로운 표정도 재수 없다. 자신처럼 웃음을 팔며 꼬리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싫다.

 

세바스찬은 알까, 저의 존재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위협인지.

아마 모를 것이다.

 

 

“...선배. 요즘 몇 시에 연습하세요?”

“...”

그냥... 안보여서요.”

 

이사장실에서 같이 나온 둘은 조용한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수업 도중에 불려진 것이니 학생이 아무도 없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이 곳은 이사장실과 가까운 곳. CEO를 두려워하는 직장인의 특성 때문에 선생들도 없었다. 크리스는 이 불편한 공간에 입을 꾹 다물고 빠르게 걸었다. 조금이라도 저 재수 없는 놈과 같이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세바스찬의 발걸음도 크리스와 비슷하게 빨랐다. 평소에는 둔탱이처럼 느려터진 놈이 오늘은 왜이렇게 빠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세바스찬은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계속 뭐라 조잘조잘 말을 걸었다. 목소리에 생기가 없고 무뚝뚝하기 그지 없는 말투였지만 내용은 꽤 집요했다. 도대체 내 연습시간을 알아서 뭘 하려는 건지. 마주치기 싫어서 일부러 세바스찬이 없을 듯한 시간에만 가는 건데. 도대체 내가 점심을 먹든, 안먹든 무슨 상관인가. 너 때문에 밥맛 없어서 안먹는 건데. 크리스가 입술을 꾹 물고 걷다 나중에 같이 연습해요, 라는 소리에 참지 못해 고개를 훽 하고 돌렸다. 갑작스러운 방향전환에 세바스찬이 당황한것인지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학교의 왕자님이라고, 잘생겼다고 자자한 얼굴은 크리스가 보기엔 그저 얼빵한 만두 같았다.

 

나는 아직도 널 보면 존나 빡이쳐. 알아? 그래서 너 꼴보기 싫어서 일부러 안 마주치게 노력한거야. 근데 같이 연습?”

“...선배.”

너 내가 얼마나 우스운 꼴이 된지 모르지? 모르겠지. 니가 의도한게 이거냐? 다들 뭐라고 하는지 알아? 세바스찬의 실수로 운 좋게 우승한 크리스 에반스라고해. 다들 나만 보면 세바스찬의 실수부터 생각해. 그거 알아?”

“...죄송해요.”

그래, 알아. 너 피아노 존나게 잘치는거. 그리고 나보다 더 잘치는 거. 근데 그거 알아?”

 

어금니를 꽉 쥐고 말하는 크리스의 목에는 울긋불긋 힘줄이 돋아나있었다.

 

내가 시팔. 아무리 너보다 못치긴 해도. 졸라, 사람들한테 운 좋은 소리만 들을 정도로 못치는 건 아니거든?”

 

본교는 예술고등학교가 아니다. 지역명문사립학교로 공부벌레들이나 지역의 명문가 자제들만 오는 곳이다. 이 곳에서 예술형 장학제도를 받고 있는 사람은 크리스 단 한명밖에 없었다. 이는 학교의 방침이 아니라 이사장의 개인적인 자선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리스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피아노 솜씨로 인해 얻어진 것이라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피아노는 크리스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자존심이었으며, 자존감이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피아노 자체가 크리스의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크리스는 확실히 잘쳤다. 재능이 있냐, 없냐를 따지면 재능이 있었다. 그러니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고 동네 카페에서 혼자 피아노를 연주한 경험만으로 지역 콩쿨의 우승을 차지할 수 있던거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크리스는 길이 열렸고, 자신의 삶과 실력에 나름대로의 만족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건 세바스찬의 등장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모든 것이 싫었다. 자신 보다 어린 것도 싫었고, 자신처럼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되는 부잣집 도련님 인것도 싫었고, 또 자신보다 피아노를 늦게 시작했다는 점도 싫었다. 짧뚱하고 못생긴 손에 비해 잘생기고 두꺼운 손을 가졌다는 사소한 것부터 항상 치는곡이 자신이 잘 치는 곡이라는 점이라는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싫었다. 아니 역시, 그냥 존재자체가 싫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많은 이유 중, 세바스찬이 가장 싫은 점은 자신을 음습하고 비열한 인간으로 만들어서였다. 크리스는 선배선배하고 자신을 따르는 어린 후배의 연주를 듣고 어떻게 하면 그를 깎아내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 밖에 생각하지 않았고 그런 자신의 생각에 크게 좌절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마음은 변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심화되어 이제는 대놓고 그를 싫어한다고 내비치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나는 나를 이렇게 만든 니가 너무 싫어. 세바스찬.

 

세바스찬에게 가장 원망하는 점은 왜 하필 우리 학교로 진학을 했냐는 점이다. 크리스가 알기로 세바스찬은 보스턴 사람이 아니다. 뉴욕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굳이 뉴욕에서 이쪽까지 와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는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보스턴이지만 뉴욕보다 나은게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주민들의 텃세도 센 편이고 심지어 이 학교는 예술계고등학교도 아닌 그냥 지역사립학교일 뿐이다. 명문이라고는 해도 지역의 안에서일 뿐, 뉴욕에는 더 만은 명문학교들이 있을터였다. 그런데 왜 이곳에 와서 자신이 독차지하고 있던 이사장의 사랑을 위협하는 지, 자신의 재능으로 만들어낸 특별한 공간을 위협하는지, 자신을 이런사람으로 만드는지.

 

도대체 왜 너는 이곳에 와서.

 

선배, 근데 진짜 이거 하나만 알아주세요.”

뭔데.”

저 진짜 일부러 그런거 아니예요.”

“...”

왜 안믿으시는지, 제가 고의적으로 실수 했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진짜로, 일부러 그런거 아니예요.”

 

세바스찬이 무기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표정과 목소리도 존나게 싫다. 나 따위는 상대하지도 않는다는 듯한 여유로운 모습. 자신은 이렇게 열과 성을 내고있는데 그의 목소리에는 힘 하나 들어가있지 않았다.

 

세바스찬의 말에 크리스가 벅벅 뒷머리를 손으로 긁었다. 그렇게 조금 긁고서는 결심했다듯이 고개와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서있는 세바스찬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다시 한번 놀란 만두 같은 얼굴이 보여졌다. 애들은 이새끼를 포커페이스라고 부르지만 크리스가 보기에는 얼굴에 드러난 표정이 작아서 일 뿐, 포커페이스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앞에서 세바스찬은 항상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크리스는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손목을 붙잡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 나랑 일대 일로 피아노 대결해.”

?”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면 되는 거잖아. 니가 고르는 곡, 내가 고르는 곡. 두가지로 대결해.”

잠깐만요, 선배. 수업은...”

제발!”

 

니가 날 우습게 보는게 아니라면, 제발 닥치고 피아노 대결해.

목이 갈라 비명처럼 들리는 크리스의 목소리는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세바스찬은 그 소리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애절한 목소리에 뭐라 변명을 하며 안된다고 할까. 크리스에게 잡힌 손목이 뜨거웠다. 세바스찬은 그저 그것만을 생각하며 걸었다. 다행인 점은 연주실까지 가는 길은 꽤 멀었다.

 

 

 

대회 전 날, 크리스는 이사장실에 인사를 드리고 조금 늦게 집으로 귀가하게 되었다. 이사장은 크리스에게 기대한다고 말하였지만 내심 속으로 세바스찬의 우승을 확정하고 있었고 크리스의 눈에도 그게 다 보였다.

 

절대 안질 거야. 질 수 없어.

 

크리스에게 피아노란 살아갈 방법과 수단이자 자존심과 자존감이었다. 그걸 빼면 시체나 다름 없다. 아무리 천재니 뭐니 해도 대회에는 컨디션과 심사위원의 취향 등의 변수가 있다. 결과는 당일 날이 되어야 알 수 있는것이며, 세바스찬의 승리를 확신하는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두드려주겠다는 긍정적인 생각마저 했었다.

 

뭐야? 이시간에. 누가 연습하나?”

 

복도를 거닐던 중, 피아노의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어 확실하게 연주가 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피아노 소리였다. 이 시간에 누구인가. 대회 전날이니 세바스찬은 집에 일찍 돌아가 자신의 피아노로 연습할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학생이 장난 삼아 피아노를 두드리는게 틀림없었다. 크리스는 피아노가 망가질까 걱정되어 치고 있는 학생을 쫓아내기로 마음먹었고 걸음을 재촉하여 연주실로 다가갔다.

 

그리고 다가가면서 쫓아내야겠다는 가벼운 마음이 점점 두려움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가까이 가면서 정확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연주자의 실력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듣질 말았으면 좋았겠거늘, 그냥 몸을 돌리고 집으로 달려갔으면 좋았겠거늘. 크리스는 멈추지 못하고 걸어 결국 연주실의 문 앞까지 서게 되었다.

 

감히, 음악에 완벽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만약 붙인다면 이 연주에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는 아름다운 음악이 무서워 그대로 주저앉아 몸을 덜덜 떨며 웅크려 앉았다. 틀림없이 세바스찬이 연주하는게 분명했다. 일반학생이 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다. 아니, 크리스 자신도 이정도로 칠 수 없었다.

 

아름다운 선율이 크리스의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몸을 웅크리고 뒤늦게 귀를 막아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음악은 자비없이 크리스의 귀를 뚫고 들어왔다. 압도적인 재능 차이에 크리스가 몸이 덜덜 떨렸다. 세바스찬과 같이 합동 연습을 한 적은 있었지만 이 정도의 완벽함은 처음 들었다. 일부러 숨긴것인가.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왜? 숨길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방금 전, 세바스찬의 우승을 확신하는 이들의 코를 납작시켜주겠다는 생각은 이미 부서져 사라진지 오래였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 조차 가소롭다는 것을 알려주는 연주였다.

 

곡의 연주가 끝나고 드디어 소리가 멈춰졌다. 그제서야 쭈그리고 앉아 웅크린 몸을 펼칠 수 있던 크리스의 손과 등에는 식은땀이 잔뜩 묻어나있었다.

“...도망쳐야해.”

크리스가 혼자 작게 중얼거리고 자리에 일어났다. 다음 곡이 시작되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복도를 뜀박질 하는 내내 여러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생각은 세바스찬에 대한 저주였다. 왜 모든 것을 갖고 있으면서, 나보다 많은 것을 갖고 있으면서 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거야. 지금까지 저렇게까지는 아니었잖아.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다시 돌아가서 피아노를 부수고 세바스찬의 얼굴을 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대로 벽에 자신의 머리를 박고 싶었다.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살리에르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의 재능이 무섭고 열등감에 몸이 뒤덮혀 미칠것만 같았다.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왜 너는 보스턴까지 와서 나의 앞에 선거야.

 

미친 듯이 뛰어 집에 도착한 크리스는 화장실로 바로 달려가 속에 있던 것을 게워냈다.

세바스찬이 싫은 진짜 이유. 인정하기 싫은 진짜 이유.

그를 싫어할만한 이유는 자신의 재능이 그보다 부족하다는 것 밖에 없어서. 그가 싫은데 원인 제공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어서. 그러니까 아무 이유없이 상대방을 증오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줘서.

세바스찬 스탠이라는 인간이 자신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죽일 정도로 싫어하는 자신의 됨됨이를 알려줘서.

 

그래서 싫은거다.

 

 

세바스찬의 손목을 붙잡고 크리스는 지난 범, 온 몸을 웅크리고 앉아 덜덜 떨었던 연주실의 앞에 도착했다. 세바스찬은 진정으로 실수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크리스는 믿지 않았다. 세바스찬은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수 없다.

천재 모차르트니까.

 

들어가자. 준비 할 시간 필요해?”

“...아니요.”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손목을 놓아주고, 연주실의 문을 열었다. 연주실에는 크리스와 세바스찬의 몫으로 두 개의 피아노가 있었다.

 

세바스찬이 모차르트라면 자신은 살리에르일까.

끝내 그를 이기지 못해 재능을 질투해서 미쳐버린.

 

크리스가 시덥잖은 생각을 하고서는 의자에 앉았다.

어찌되었든 방금 전까지 세바스찬은 자신에게 실수가 아니라고 진심어린 눈빛으로 거짓을 토했다. 나를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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쩜오어워드에서 후기글에서 말한 외전 두개 쓰다가 문득 떠올라서...

근데 분명 개그로 쓰려고 했는데 요즘 우울한 일 있어서 그런가 우중충한 글이 나와버림 

[세즈반스 소장본/뻔뻔한 로맨스/본편290page/외전(30pag)+(후일담64page)]


현재 인쇄소에 작업을 넘겼습니다.


공지도 없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제가 어떤 변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외전을 쓰고 난 뒤, 후일담을 시작하게 되었고 퇴고를 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마음에 들지 않아 고치고 늘여트리며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변명일 뿐이며, 공지를 미리 하지 않은 점과 양해를 부탁드리지 않은 점은 오로지 저의 잘못입니다.

 

쩜오온과 관련된 일로 걱정을 해주시는 분들이 있었는데 쩜오온의 통판 및 환불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습니다.

세즈반스 소장본이 한 주 늦춰진것은 통판 및 환불의 문제였지만 그 뒤에 다시 한 주 늦어진 것은 순전히 제 잘못입니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뒤 늦게 찾아와 공지를 드리게 된 점 또한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쩜오온과 관련된 이후로 약간 심신이 지쳐 이 계정과 블로그에 찾아오는 것을 꺼려하였습니다. 

무의식적으로 행사장에서 겪었던 일등이 떠올랐고 JunkFood라는 닉네임 자체가 있는 것이 불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냥 잘못되었을 상황을 생각하며 고소나 벌금 등을 검색하며 더더욱 불안감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한번이라도 들렸던 곳에 오지 않아 이런 불상사가 벌어졌습니다.


그래도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것 또한 저 스스로의 개인적인 문제이며 절대 책을 구입해주시는 분들에게 할 수 있는 변명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일이 있어도 약속을 한 사람이라면 힘들어도 찾아와 양해를 부탁드려야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모든 것은 그냥 저의 잘못입니다. 

잘못에는 어떤 변명도 이유도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사과를 원하시는 분들에게는 사과를 드리겠으며, 환불을 원하시는 분들에게는 환불을 해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늦어진 점도 이렇게 뒤늦게 공지를 내린 점도 사과드립니다.



현재 인쇄소에 넘긴 상태이며 책은 인쇄소에 나오는 즉시 보내드릴 예정입니다.

혹시 인쇄소에서 배송이 늦어진다면 제가 직접 서울로 올라가 책을 받고 꼭 이번주 안에 배송을 넣어드리겠습니다.



이것만큼은 꼭 약속드리겠습니다.



오래 기다려주셔서 감사드리고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JunkFood입니다.

세즈반스 소장본의 경우 다음주로 배송으로 지연이 되었습니다. 오래기다리게 해서 정말 죄송하게 생각드립니다.


행사 이전에 책을 만들려 계획을 하였지만 표지 커미션이 많은 행사로 인해 대기를 하게 되어 원활히 진행되지못했습니다.

이것은 전부 제 무지의 탓입니다. 


행사가 끝난 후, 행사의 물품들과 함께 배송을 하려했지만

행사에서 몰카를 찍히는 불미스러운일이 일어나 잠시 그쪽일부터 해결해야할 것 같아 세즈반스의 소장본이 지연될 것 같습니다.

(몰카를 통해 저에게 아직까지는 해가 되는 일은 없었습니다만 행사의 통판을 중지해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물론 행사와 세즈반스 책을 별개의 문제이며 저는 그냥 책을 보내드리면 되는 것이지만

상황이 심각하여 그쪽일에만 몰두하고 싶어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시한번 2주가 넘게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상황에 대해 설명이 부족하다고 생각되시는 분들은 댓글을 달아주시면 더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삼년의 시간이 흘렀다. 라고 말하는거 진짜 해보고싶었어. 왜 맨날 드라마 같은거의 마지막 회에서 이런말 하잖아? 아니면 로맨틱코미디 영화의 마지막 5분 정도는 이런 시점으로 흐르잖아. 너무 뻔하잖아.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니. 좀 더 참신한 거 없나? 아, 그런데 내가 저번에 봤던 한국의 어떤 드라마는 갑자기 몇십년의 시간이 흘렀더라. 근데 거기에서도 할머니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어. 그 드라마 제목이 뭐였더라. 왕자네였나...여튼 뭐 클리셰에는 클리셰의 이유가 있겠지.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클리셰가 된거아니겠어? 이게 아니라 그래. 크리스와 사귀게 된지 벌써 삼년이 흘렀네. 정말 꿈과 같은 시간들이었지. 이게 아니라, 크흠. 마이크 테스트. 카메라 잘 돌아가나? 안녕 나의 사랑 크리스 에반스. 나의 천사. 이 영상은 우리가 만난지 삼년째를 기념해 내가 만드는 사랑의 영상편지야. 기념일 챙기는거 귀찮다고 말하는 자기지만 사실 난 알고있거든. 자기는 이벤트를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오늘은 우리가 삼년째를 기념하는 것과 동시에 의미있는 승리가 생기는 날이잖아? 그걸 기념해서 찍어보려고해. 대부분 내 사랑고백이 끝이겠지만. 



크리스는 재취직을 성공적으로 끝내었다. 세바스찬의 허니비 회사에 지원하라는 정보를 듣고 크리스는 바로 자기소개서를 작성하여 지원서를 넣었다. 피터의 정보가 틀린 정보는 아니었는지 크리스는 처음으로 서류면접을 통과하였고 바로 면접준비를 하였다. 면접준비를 하는 크리스를 도울 방법은 세바스찬에게 없었다. 이것은 크리스 혼자만의 싸움이었고 세바스찬이 건드려야 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대신 세바스찬은 최대한 크리스를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에게 압박이 가지 않도록 혼자 낮에는 놀려다녔고 저녁은 늘 손수 만든 요리를 먹여주었다. 크리스는 신기한 사람이었다. 어느면에서는 매우 겁쟁이었지만 어느 면에서는 그 어떤 사람보다 강인 하였다. 면접을 준비하는 크리스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불안정하지도 않았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자신을 할 수 있다 라는 믿음이 강했고 집념도 강했다. 역시 무언가에 열중하는 남자는 멋있어..! 세바스찬이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크리스를 보며 불타올랐지만 그를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혼자 허벅지를 콕콕 찍어야 했다. 면접은 훌륭하게 끝났고 크리스는 9월부터 근무하라는 메일을 받았다. 그날 밤, 세바스찬은 크리스와 처음으로 불타는 밤을 보낼 수 있었다. 축하의 의미로 사온 케이크는 크리스가 아니라 세바스찬의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자기 몸에 묻은걸 먹을 수 없으니까. 


9월까지 한달이라는 시간이 남았다. 크리스와 세바스찬은 그 한달동안 염원하던 데이트를 매일매일 하게 되었다. 매일매일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데이트를 하였다. 세바스찬은 첫 연애나 다름없으니 20살과 같은 지치지 않은 열정을 갖고 있었고 그동안 세바스찬에게 미안한점이 많았던 크리스는 세바스찬을 거부할 수 없었다. 데이트는 주로 세바스찬이 원하는것 위주였다. 놀이동산, 영화관, 스케이트장, 귀신의 집 등등. 그렇게 낮에 신명나게 밖에서 놀고 저녁에서는 침대에 끌어들이는것이 일상이었다. 어느날은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불평을 하였다. 


"어떻게하죠..저 크리스가 너무 좋아서.."  

"뭐 문제있어요?"

"너무 좋아요. 보고있어도 보고싶고, 안고있어도 안아주고싶어요"

"그게 뭐예요"

"이렇게 막 심장 쿵쾅거리다가 저 제명에 못살면 어떻게하죠?"

"음...걱정 말아요. 원래 첫 연애는 그러니까. 곧 있으면 편해질꺼예요. 권태기도 올지 모르고..."

"으으으음... 모르겠어요"


크리스는 내심 속으로 세바스찬의 열정이 식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세바스찬이 싫증을 잘내는 성향이라는 것을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이 남자가 언제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돌릴지 몰랐다. 직접적인 경험은 아니어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 크리스는 그것이 항상 걱정이었다. 그리고 그 걱정은 2년이 흐른 시기에 사라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세바스찬은 꾸준히 크리스를 열정적으로 사랑했기때문이다.


"크리스는 거짓말쟁이야"

"흐...아.."

"나쁜 아이한테는 벌이 필요하지? 응?"


세바스찬은 가끔 그 일에 대해서 거짓말을 쳤다면서 침대위에서 장난을 쳤다. 거짓말, 시간이 조금 흐르면 식는다면서. 근데 안식잖아. 거짓말쟁이. 세바스찬은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한번 사랑한 것이 질린적은 단한번도 없었다. 크리스는 이제 매일매일 주어지는 사랑에 감사하며 자신도 지지않는 사랑을 보내었다.


시간이 흐르며 크리스에게는 새로운 고민들이 생겼다. 먼저 하나는 세바스찬이 밤의 황제라는 점이었다. 잊고 있었다. 세바스찬이 매일 밤 떡방아집을 돌려 소음을 제공했다는 것을. 세바스찬은 정말......정말..........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냥 한마디로 하자면 대단했다. 크기도 힘도 기술도.................... 문제는 정력도 대단하여 크리스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이 문제였다. 크리스는 꿈의 한달 동안 매일 밤 죽는 줄 알았다. 가끔 알파들을 대상으로 한 야한 소설에서 "허미,,, 붕붕씨,,, 저 죽어요,,,," 하던 대사가 순 거짓말은 아니었다. 크리스는 밤이면 세바스찬에게 매달려 엉엉 울다가 간혹 죽겠다며 몸부림을 치곤했다. 끈질기게 자신의 몸을 탐하는 세바스찬과 짙은 그의 페로몬 향에 몇번 정신을 놓고 흔들린 적도 있었다. 


회사를 다니게 된 후로부터는 행위는 금요일, 토요일만. 이라고 정했다. 세바스찬은 크리스의 규칙에 크게 항의를 하였지만 크리스도 물러서지 않았다. 세바스찬과 밤일을 치루고 나면 다음날 녹초가 되어 오전에는 제대로된 업무가 불가능 하였다. 어렵게 다시 들어간 회사다. 그러다 짤리면 어쩌려고! 세바스찬은 크리스의 제안에 입을 불을 부루퉁하게 부풀리며 거부했지만 대신 금,토일은 세바스찬 마음대로. 라는 타협안이 제시되어서 마지못해 승낙을 했다.


다른 고민 하나는 자신의 가슴이었다. 자신이 붑그랩을 좋아한다면 세바스찬은 가슴성애자였다. 늘 항상 크리스의 가슴을 못만져 안달을 내곤 했다. 행위 도중에 가슴만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것은 기본이었고 침대에 잠들때에도 크리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들고 싶어했고 틈만 나면 티셔츠 안쪽에 손을 넣고 가슴을 매만졌다. 단순히 가슴만을 만지는 것이었기에 성적인 느낌은 적어 흥분하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세바스찬이 항상 가슴을 만져서 그런가 가슴이 커진것이었다. 안그래도 남자치고 큰 가슴이었기에 나름의 고민을 갖고 있었는데 세바스찬과 연인이 된 이후로는 가슴이 더 커져 티셔츠나 맨투맨, 셔츠 어떤 옷을 입어도 가슴이 끼기 시작했다. 덩치를 커보이게 하기 위해 원래 옷을 살짝 끼게 입는 크리스이긴 하였지만 즐겨입는 셔츠의 단추가 가슴부분이 튕겨져 나갈때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바스찬에게 가슴좀 그만 만지라고 말을 하긴 하였지만 금방 눈을 울망울망하게 띄고 "가슴..." 이라고 말하는 연하남을 바로 내치기는 어려웠다.


크리스는 이 고민을 누구에게 말하기도 민망하여 전에 세바스찬과의 고민을 털어놓았던 오메가 커뮤니티에 들어가 고민글을 작성하였다. 이럴때 믿을건 랜선친구들 뿐이었다. 그러나 이게 웬걸인가, 크리스가 세바스찬과 자신의 대략적인 정보를 이야기하자 어느 댓글러가 "잠깐 얘 섹스킹 고민 쌌던 애 아님?" 이라고 크리스를 발견하였다. 크리스가 당황하여 벙쪄있는 순간 댓글은 수십개, 아니 수백개가 쌓이기 시작했다.


"헐 대박. 섹스킹이랑 담판 짓네 어쩌네 하다가 둘이 눈맞은가?"

"아니~~ 쉬이퍼어어어얼ㅋㅋㅋㅋㅋㅋㅋ섹스킹이 맨날 섹스한다고 고민 털어놓을땐 언제고 이제는 지가 섹스하고 자빠졌어!!"

"하 미친...그래도 이제 소음은 안들리겠네...소음을 내겠지만...^^"

"나 캡쳐찍음 너 박제 ㅅㄱ"

"아미친ㅋㅋㅋㅋ개웃ㅋㅋㅋ야 얘는 별명 뭐라고 지어줘야하냐"

"ㄴ 섹스킹 애인이니까 섹스퀸 어떠냐"

"ㄴㄴ 통수퀸. 새끼 고민 들어달랄땐 언제고 지는 연애하고 있어 쒸익쒸익"

"ㄴㄴㄴ통수퀸 ㅇㅈ"

"ㄴㄴㄴㄴ레알 통수퀸ㅋㅋㅋㅋㅋㅋ"

"ㄴㄴㄴㄴㄴ미친놈들아 남자면 어쩌려구 퀸이래 ㅋㅋㅋ 근데 시벌 커플한테 뭔 상관이조. 통수퀸 ㅇㅈ"


크리스는 부끄러움에 미쳐 당장 그 오메가 커뮤니티를 탈퇴하였다. 후에 일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한번 가입하여 들어갔을때 크리는 이미 커뮤니티의 네임드가 되어 '통수퀸'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각 종 고민상담에 "얘 이러다 통수퀸 되는거아님?" 이라는 말이 나올정도로...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가슴앓이 고민은 그냥 품고 가기로 했다....


제임스도 새 직장을 구했다. 전문직종을 종사하였던 그였기에 크리스보다 짧은 기간에 재취직을 할 수 있었다. 제임스는 크리스에게 은혜를 갚았다며 콧노래를 불렀지만 크리스는 방법이 너무 과했다며 제임스를 나무랐다. "제 방법은 굵고 짧게 효과가 있죠. 답답한건 질색이란 말이예요" 역시나 화끈한 제임스의 말에 크리스는 벙찔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저 잊지 않았어요. 제임스가 세바스찬 노린거..."

"네? 제가 세바스찬을 노렸다구요? 언제요?"

"막 세바스찬에 관한 정보 물어보고 그랬잖아요. 저랑 무슨사이인지 물어보고"

"아... 세바스찬과 크리스의 사이가 어떤사이인지는 확실히 궁금했는데..제가 세바스찬을 노려서 물어본거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뭐죠?"

"..........네?"

"오메가가 알파만 좋아하라는 법 있어요?"


제임스의 마음에 드는 상대방이 크리스 였다는 점과 또다른 커밍아웃. 크리스는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처음 사귈때는 서로의 스케쥴과 원하는 방향이 잡히지 않아 우왕좌왕하며 싸우는 날들이 간혹 있었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이제 서로가 익숙해진 그들은 평탄한 나날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먼저 크리스는 이제 세바스찬의 침대에서 생활을 했다. 크리스의 방은 건재하였지만 그곳은 이제 다른 '집'이라기보다는 크리스의 '방'이 되어 크리스가 업무를 처리할때만 사용되었다. 세바스찬의 집도 원룸이기에 그리 넓은 편은 아니어서 이사를 갈까 생각도 했었지만 새로 '이사한 집의 비용은 반' 이라고 주장하는 크리스 덕분에 그가 돈을 모을때까지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아침에는 세바스찬이 먼저 눈을 떴다. 새근새근 숨소리른 내뱉으며 자는 크리스의 이마에 입술로 한번 찍고서는 침대에서 살짝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식사는 크리스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 항상 크리스의 방으로 넘어가 하였다. 아침이기에 간단한 음식이지만 그래도 계란프라이를 하는 소리가 날 지 모르니까. 베이컨과 계란프라이, 그리고 버터바른 식빵과 미리 만들어 놓은 샐러드를 꺼내 식탁에 차리면 금세 까치발 머리를 한 크리스가 방으로 넘어왔다. 


"굿모닝 허니"  

"굿..모닝..."


크리스는 유독 아침에 약했다. 주말에는 늘어지게 늦잠을 자는것을 보아 확실히 아침형 인간은 아니었다. 그렇게 크리스에게 아침을 먹이고 세바스찬은 크리스의 출근을 배웅하는것이 순서였다. 크리스와 어울리는 빨간색 넥타이를 메어주면서 짧은 입맞춤으로 배웅을 하면 각자의 시간이었다. 스티브는 회사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세바스찬은 다시 침대에 누워 짧은 낮잠을 자고 일상을 시작했다. 


보통 다시 일어날때면 시계는 11시를 가리킨다. 세바스찬은 쭈욱 기지개를 피고 욕실에 들어가 씻기 시작한다. 씻고 난 다음 패턴은 세가지로 나뉘어져있다. 원 패턴. 세바스찬은 최근 요리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일을 하는 크리스를 배려해 세바스찬이 대부분의 집안일을 하게 되었는데 청소와 세탁은 둘째치고 '요리'는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었다. 크리스가 딱히 요리에 불만을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잘먹는 크리스를 보면서 새끼새를 키우는 어미새가 된 기분이 느껴지면서 점점 맛있는것을, 손수 만든 것을 먹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다행히 크리스와 세바스찬의 건물은 도심지에 있었다. 세바스찬은 걸어서 십분거리에 요리학원을 발견할 수 있었고 매주 월,화,수는 강의를 듣기 위해 꼬박꼬박 나갔다. 요리학원의 학생은 대부분 오메가들 뿐이었다. 알파라고는 세바스찬을 포함해 세명밖에 없었다. 


'요리를 배우는 알파 남자' 라는 타이틀은 오메가들에게 매력적이었다. 그들중 몇명은 세바스찬이 남자친구를 위해 요리를 배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바스찬에게 추근거렸고 - 그 점이 더욱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 결국 세바스찬은 그들의 손길을 벗어나기 위해 크리스의 얼굴이 크게 박혀져있는 티셔츠를 손수 제작해 요리학원의 화장실에서 갈아입고 다녔다. 다들 그런 티셔츠를 입고있는 알파에게는 추근거리기 힘들었다. 참고로 뒤에는 "나는 내 남자친구를 존나게 사랑한다" 라고 적혀있었다.


투 패턴. 요리클래스에 가지 않는 날에는 집안에서 밀린 집안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쓰리 패턴으로는 종종 영업직인 맥키와 만나 점심을 함께하는 일도 있었다. 크리스에 대한 오해는 금방 풀렸지만 그래도 흔들렸다는 것 자체가 조금... 이라며 맥키는 아직도 크리스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도 요즘은 가끔 셋이서 만남을 가진적도 있는것이 맥키도 점점 크리스에 대한 방어막이 없어지고 있는듯 했다. 맥키와 만나지 못하는 날에는 세바스찬은 요리클래스에서 새로사귄 두 알파친구와 시간을 보냈다. 두 알파는 보기드문 전업주부 알파였다. 


저녁이 되면 저녁식사를 차리기 위해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클래스에서 배운 요리를 시험삼아 할 때도 있었고 가끔은 크리스의 요구를 저녁식사에 반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크리스와 이렇게 동거형태가 되자 세바스찬의 집에서는 또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이제 동거를 했으니 결혼은 순식간이겠구나 라는 생각이 있는것이 틀림없었다. 결혼이라, 세바스찬은 결혼은 하고 싶었다. 세바스찬 개인적인 생각으로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니까. 물론 크리스에게 압박을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의사는 밝혔다. 크리스는 결혼은 둘째치고 놀랍게도 아이를 갖고 싶어했다. 자신의 2세가 보고싶다는 이유였다. 다르지만 또 이해관계가 얼추 비슷한 두사람은 이번에도 충돌없이 무사히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언젠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로. 세바스찬의 집은 이 소식을 듣고 2차 파티가 열렸다.


요리를 마치고 조금 기다리면 크리스가 돌아왔다. 세바스찬은 크리스를 맞이하며 짧게 입맞춤을 하고 얼른 그의 손을 이끌고 식탁에 앉혔다. "오늘은 라쟈나야" 자신작이기에 얼른 먹여주고 싶었다. "돈많은 백수가 꿈인데 이거 가정주부가 되어서 어떻게하나" 크리스가 쿡쿡 웃으며 수저를 들었다. "가정주부인가....음..... 그런데 뭐 상관업어" 세바스찬의 가치관은 확고하지만 유도리 있었다. 저녁을 먹으면 보통 크리스가 설거지를 하였다. 이정도의 집안일을 거두어달라는 뜻이었다. 


서로 샤워를 마치고 오후 8시쯤이 되면 둘만의 시간이었다. 둘은 침대위에서 서로 얽히며 누워 얕은 스킨십을 나누기도 하였고 vod시스템을 통해 영화를 보기도 하였고 옥상정원을 거닐며 수다를 떨기도 하였다. 


"피터가 또 만나자고 하던데"

"정말? 근데 그분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셔"

"그냥 주는대로 안마셔도 돼"

"그래도....아 저번에 조엘한테 메세지 왔더라"

"그놈이?! 왜 달링한테 왔어?!"

"아니....18세의 오메가남자는 뭘 좋아하냐고 묻던데"


세바스찬의 사촌 동생 조엘은 짝사랑 중이었다. 세바스찬과 제발 닮지 말아달라는 부모님의 소원은 이루어졌지만 세바스찬과 달리 너무 한사람에게 목메어 골치인모양이었다. 


둘 만의 시간이 끝나면 둘은 보통 함께 침대에 들어갔다. 서로 마주보는 상태로 누운 둘의 눈에는 서로밖에 담겨져 있지 않았다. 불 꺼진 방안에도 별빛은 들어왔고 낮은 채도로 둘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굿나잇"

"굿나잇"


바로 색색 하고 숨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시트를 뒤척이는 소리와 쪽쪽 거리는 소리가 한참 들리고 난 다음에야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





정말 아직도 믿기지 않아. 이렇게 우리가 삼년씩이나 함께하다니. 물론 나는 너무 좋지. 아직도 너무 좋지. 그리고 계속 좋을꺼고. 그건 크리스 달링도 그렇게 생각할꺼라 믿어. 우리의 인연을 누구한테 고마워해야할까. 우리둘을 처음으로 이어준 멜리사? 그보다 멜리사는 요즘 잘 지내나. 결혼하고 일 그만둔건 들었는데. 아니 이게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삼년의 시간을 함께 지냈어. 사실 정확히 삼년은 아니지 1000일이니까 삼년 조금 안되었나? 크리스는 몰라도 나는 기념일 어플을 깔아서 오늘이 천일이라는걸 알았거든. 와 나 정말 로맨틱 가이야 그렇지? 


이제 조금 있으면 저 문을 통해 달링이 들어올꺼고, 짜잔. 오늘의 요리는 로스트치킨과 미트볼 스파게티야. 자기 미트볼 좋아하잖아. 그리고 오늘은 작은 케이크와 와인도 준비되어있어. 천일이 금요일이라 참 다행이야. 침대를 내가 풍선으로 꾸며놓았거든. 


오늘은 천일이자 크리스가 톰과의 승부에서 승리하는 날이잖아. 와우. 진짜 우연이라는건 참 신기해. 어떻게 천일되는 날, 톰의 프로젝트와 크리스의 프로젝트의 경쟁결과가 나오는 거지? 비록 자기는 톰은 프로젝트의 팀장이고 스스로는 말단이라며 정면승부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대결은 대결이잖아? 이걸로 그사람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는거야!


오, 방금 똑똑 소리가 들렸어. 이제 크리스 자기가 들어오려나봐. 이제 카메라를 끌게, 어차피 이 카메라의 내용은 조금 있다 같이 볼꺼지만. 영원히 사랑해. 나의 사랑 크리스. 평생 함께 하자. 



세바스찬이 카메라를 끄고 식탁위에 올려 놓았다. 크리스는 열쇠가 있었지만 늘 항상 문을 두드렸고 세바스찬이 문을 열어주었다. 오늘은 천일이자 기념적인 승리가 있을 날이다. 우연히도 크리스의 프로젝트의 경쟁상대가 톰의 프로젝트 팀이었고, 두 팀의 경쟁물을 해외기업이 프레젠테이션을 보고 결정하는 날이 오늘이었다. 크리스는 자신은 비록 말단이고 톰은 우두머리여서 정면대결은 아니지만 꼭 이기겠다며 한동안 일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세바스찬은 크리스가 이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냥 크리스를 믿는 것 뿐이었다. 세바스찬은 문으로 다가가 천천히 잠금장치를 돌렸다. 




그곳에는 활짝 웃으며 자신을 향해 점프하듯이 날아오르는 크리스가 있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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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습니다. 휴. 장편연재는 사실 처음이어서 어찌 될까 싶었지만 끝냈습니다!

이렇게 달달한(?) 이야기를 제가 쓸 줄은 몰랐습니다. 앵슷 성애자인데 말이죠. 게다가 중간에 야한 장면이 없는것도 처음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올린게 4월 9일이니 3달 조금 지났네요. 도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길게 썼는지.. 중간에 제가 딴길로 새면 안되었었는데 홀홀홀....


세즈반스 로코물을 원고의 형태로 만드니 323page정도 나오네요. 외전이 2개정도 들어갈 것 같네요. 외전은 따로 웹에 올리지 않을꺼예요!


생각해놓은 외전은 일순위는 톰의 뒷 이야기입니다. 톰의 뒷 이야기가 나오고 페이지수가 괜찮다 싶으면 둘의 후일담 -연애 이야기-를 넣을 예정이예요.

완전히 실연을 당한 톰이 후에 어떻게 사는지 간단하게 쓰는건 무조건 들어갈것같고 후일담 연애 이야기는 페이지 수를 고려해서 넣을 예정이예요.


사실 정확한 페이지 수를 고려하지 않고 인쇄비를 매긴 것이기 때문에 지금 어떻게 나올지 불안합니다(대책없는 인간) 

가능한 플러스가 남기지 않는 선으로 가려고 노력합니다. 만원 이상의 흑자가 나온다면 표지 커미션을 맡길거예요. 적자가 된다면..... 가능성은 생각해두지 않기로 합니다(찡긋). 다른 이유는 없고 '소장본'이니 수익을 남기고 싶지는 않아요. 회지는 글을 판다라는 느낌이지만 소장본은 즐거움을 나눈다는 느낌입니다.


로코물을 쓰면서 의도한것은

이기적인 주인공이 자신을 뒤에서 몰래 도와준 키다리 아저씨, 왕자님 같은 사람을 차고 친근한 이웃집 사람을 선택한다. 라는 것이었는데. 세바스찬이 너무 하이스펙이 되어버렸네요(웃음)


크리스는 이기적이고, 나를 우선시 생각하는 캐릭터로 묘사하고싶었고 (나쁜캐릭터아니예요! 나를 우선시하는게 뭐가나빠!) 톰은 크리스와 비슷하게 스스로를 우선시 하는 캐릭터입니다. 다만 크리스를 아끼는 마음에 그를 뒤에서 몰래 도와주고 있었지요. 문제는 >>크리스는 그것이 싫었다<< 입니다. 톰을 섭남처럼 표현하기 위해 강압적이다 등의 표현으로 나쁘게 보이게 하였지만 실상 톰의 행동을 보면 그는 왕자님 같은 캐릭터죠. 남몰래 뒤에서 도와주고 으스대지 않는 사람이라니. 하지만 크리스는 왕자님을 거부하는 사람이기에 둘이 안된거죠.


세바스찬이 너무 하이스펙이어서 와닿지는 않지만 세바스찬은 최대한 이웃집 토토로..가 아니라 이웃집의 친근한 남자로 묘사하려고했어요. 근데 뭐 하이스펙이어도 이웃집의 친근한 남자일수도있죠! 세바스찬은 가능한 크리스에게 무언가를 강압적으로 하지않기위해 노력했어요.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손목 휘어잡기, 강제로 잡기 등등은 톰은 하고 세바스찬은 안하죠. 


아니 너무 잡담이 길어졌네요. 자기 연성을 스스로 설명하다니 이 얼마나 자의식 과잉에 우스운 꼴인가(웃음) 비하인드 스토리? 잡담은 잡담게시판에 남기겠습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즈반스 소장본 ▼

http://me2.do/FujaaZMa 





세바스찬은 어린시절부터 가치관이 뚜렷했다. 그리고 그 뚜렷한 가치관 덕분에 인생의 목표와 꿈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덕분에 방황은 짧게 끝마칠 수 있었다. 다들 -세바스찬의 친구와 부모님과 선생님들- 세바스찬의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를 들으면 그게 뭐냐면서 손사래를 치고 농담하지 말라며 웃기 바빴지만 세바스찬은 정말 진지했다. 


4등. 그것은 항상 세바스찬에게 붙은 꼬릿말이었다. 세바스찬은 어릴적부터 열성적인 교육열을 갖고있던 부모님 덕분에 자신이 배우고 싶어했던 것을 전부 배울 수 있었으며 풍요롭지 않지만 그래도 부족하지 않은 집안 덕분에 자신의 길을 직접 선택할수 있었다. 세바스찬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 요령이 좋아 선생님들이 무슨 문제를 낼지도 잘 파악하기도 했으며 빼어난 머리는 그에게 문제해결력이라는 능력을 주어 어렵지 않게 정답을 찾아낼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흥미를 보이는것도 잠시 세바스찬은 공부에 싫증이나 공부하는 것을 금방 지루해하며 포기하였다. 노력하는 것을 그만 두었다. 그나마 가장 오래간 종목이 수학이었다. 다양한 문제들은 푸는 재미가 있었고 공식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맞추는 것이 퍼즐을 푸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난이도의 수학문제에는 길이 막혔으며 노력하는 것을 못하는 세바스찬은 이내 포기하고 수학에도 흥미를 잃었다. 1등이 즐기는 자의 것, 2등이 노력하는 자의 것, 3등이 천성적인 자의 것이었기에 세바스찬은 늘 항상 모든것에 대부분 4등을 차지하였다. 세바스찬은 즐기지도 못했고 노력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있지도 못했다. "4등이라니, 동메달도 3등까지밖에 안준다고" 놀리는 듯한 친구의 말에도 세바스찬은 "그러게" 라는 맥없는 대답만을 들려 줄 뿐이었다. 좀 더 노력을 해보지 그러니? 언제는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한 적이 있었다. 


"노력하는건 재미 없어요"


그것이 23년간 학창시절 내내 들리는 권유에 대한 세바스찬의 대답이었다. 노력하는 것은 재미없다. 어떤 분야든 대부분 쉽게 금방 질린다. 세바스찬은 그 외에 피아노라든가, 운동이라든가 여러가지의 종목과 분야에 도전해보았다. 하지만 열성적인것도 한 순간, 대부분은 시간이 조금 지나 흥미를 잃고 그만두기 일 수 였다. 세바스찬이 대부분의 종목을 못했던 것은 아니다. 우수하다 우수하지못하다 극단적인 것으로 선택하면 얄밉게도 세바스찬은 대부분의 것에 우수한 경우였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힘이 들면 그만 두었고, 힘이 들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쉽게 질려 그만두었다. "끈기가 없다" 세바스찬이 운동종목들을 배울때 코치님들에게 늘 항상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다들 어떻게 노력을 하는거야. 어떻게 다들 그렇게 계속 매달리는거야. 


세바스찬의 이런 싫증은 학습분야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관계에서도 쉽게 나타났다. 친구라는 것은 학교라는 특성상 다행히 사귈 수 있었다. 아무리 질리고 놀기 싫고 같이 있기 싫어도 학교라는 좁은 공간에 부대껴지내야했고 그렇게 일정 '세바스찬의 수치'를 넘은 사람들에게는 싫증을 넘어 정이 붙어 애정이 생겼고 그런 사람들과는 친구라는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너는 학교가 없었으면 친구도 없었을꺼야" 맥키가 언제 그런말을 한 적이 있다. 세바스찬도 그말이 맞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은 누군가가 억지로 붙여지지 않으면 무언가를 오래갈 사람이 아니었다.


문제는 친구가 아니었다. 친구가 아니라 애정을 기반으로한 연인관계였다. 세바스찬은 연애를 좋아했으나 연애에도 쉽게 질렸다. 사랑하는것도 좋고 사랑받는것도 좋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뻔한 패턴에 애인에게 질렸고 금방 싫증이 났다. 친구랑 다른것은 애인은 세바스찬이 싫다,질리다. 라고 생각되는 순간 바로 헤어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몇번 세바스찬도 세간의 소문이 신경쓰여 여자친구와 헤어지지 않고 관계를 유지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노력도 무색하게 대다수는 세바스찬의 마음이 떠나갔다는 것을 눈치를 챘고 그런 세바스찬의 모습을 견딜 수 없어해 이별을 고하고 떠나갔다. 어찌보면 당연했다. 저를 좋아하지 않는 티가 팍팍 나는 애인을 누가 붙잡고 싶어하겠는가.


어린 세바스찬은 태연한척 했지만 사실은 남몰래 걱정이 많았다. 나는 왜 남들처럼 노력을 할 수 없을까, 왜 나는 남들처럼 끈기가 없을까. 


나는 왜 남들처럼 무언가에 집착할 수 없을까.


걱정은 많았고, 그 걱정들은 세바스찬을 방황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다행스러운것은 세바스찬이 고민하는것에 질려서 고민을 그만둔 것이 아니었다.

세바스찬은 쉽게 자신의 해결책을 찾아내었다.


"아, 나는 그런 인간이구나"


그래. 세바스찬은 그런 인간이었다. 무엇이 잘못된것도 아니었고, 무엇이 틀어진것도 아니었고, 무엇이 이상한것도 아니었다. 세바스찬, 저의 형질이 그런 것이었다. 스포츠에 모든 시간을 쏟아부어 매진하는 인간도 있는가 하면은 세바스찬처럼 이렇게 아무것에도 매진하지 못하고 여유를 갖고 살아가는 인간이 있다. 누군가에게 쉽게 정을 주어 인간관계를 넓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은 세바스찬처럼 쉽게 정을 붙이지 못해 협소한 인간관계를 갖고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이 나쁜가. 무엇에 열중하지 못하면 그것은 잘못인가? 포기하지 않는 무언가를 갖고있지 않은 것이 잘못인가? 협소한 인간관계를 갖고 있는것이 잘못인가? 무엇하나 잘못한게 없었고 그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세바스찬은 누구를 따라해 바꿀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되었다.


고민이 끝나고 가치관이 정립되자 세바스찬의 행동에는 막힘이 없었다. 세바스찬은 그 뒤로 원나잇과 같은 방식의 연애관계를 선호했다. 어차피 질리는 것, 어차피 애정을 주지 못하는 것. 상대방에게 희망과 기대를 품어주는 것은 좋지 않았다. 부모님이 자신의 이런 모습에 걱정하는 것을 알고있긴 하였지만 세바스찬의 딴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긴 하였지만 저에게 찾아오기란 힘들다는 것을 이미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그런 세바스찬의 인생목표는 간단했다. '돈 많은 백수' 아, 얼마나 훌륭한 문장이란 말인가! 백수인데 돈이 많다니! 정말 무적과 같은 직업이 아닌가! 맥키는 자신의 인생목표에 보람이 없지 않냐고 물었지만 세바스찬에게 있어 보람은 무가치했다. 세바스찬은 일하는 것이 싫었다. 일하는것에 보람도 찾을 수 없었고 일이라는 것은 그저 행복을 살 수 있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세바스찬의 최종적인 목표는 건물 하나를 짓고서 월세를 받아들이며 탱자탱자 노는것이었다. 


세바스찬은 별다른 노력없이 훌륭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올림픽에서 메달은 3등에게밖에 주어지지 않았지만 대학의 넓은 문은 족히 10등에게도 길을 열어주었다. 과에 대한 선택도 고민이 없었다. 가장 취업하기 쉬운 과.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물론 이과쪽이 좀 더 취업하기 수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바스찬은 수학을 깊게 파고드는 것이 귀찮았다. 문과의 공부란 대충 외우고 문장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끝이 나니까. 노력하는건 질색이었다.


입학 후에도 세바스찬은 적당히 학교를 다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수업을 빼먹지 않은것이 용하다며 맥키가 칭찬을 해주었지만 세바스찬 딴에서는 수업을 빼먹을 이유가 없었다. 수업 지루하면 자면 되고, 필기하는 척 노트북을 갖고와 놀면 끝이었다. 출석점수가 모자르면 그만큼 공부해야한다. 그건 싫었다. 세바스찬이 노는것을 교수님도 알았지만 그에게 쉽게 F를 줄 순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정답지는 우수한 편이었다. 


스트레이트로 졸업한 세바스찬은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다. 인생 쉽게 산다라는 대학친구의 말에 그럴지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보면 세바스찬이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 것은 그의 배경의 덕도 있었을지 몰랐다. 세바스찬은 빼어난 외모를 갖고있어 별 다른 노력이 없어도 사람들에게 쉽게 호감을 얻었으며, 선천적인 운동신경과 머리로 별 다른 노력이 없어도 중간이상정도의 성적을 낼 수 있었으며, 사회적으로 우위인 알파 남성 이었다. 사기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었다.


세바스찬은 회사에 인사관리팀에 들어갔다. 영업처럼 뛰는 일이 아니니 괜찮겠지 싶었지만 여기저기부서에서 오는 클레임과 사람좀 제발 더 넣어달라는 협박과 부탁, 사람을 판단 해야하는 정신적 소모력때문에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세바스찬은 이번에 '열심히' 일했다. 열심히 라는 수식어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는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제 딴에서는 '열심히'했다. 열심히 일을해야한다, 열심히 일을해서, 개같이 돈을 벌어서, 건물을 사야한다!


아무리 대기업의 직원이여도 신입이 벌 수 있는돈은 한정되어있었다. 비록 남들보다 유복한 월급이라하여도 그래봤자 월급쟁이의 돈이었다. 세바스찬은 주식투자에 손을 벌리기 시작했다. 인사관리팀에 소속되어있어 정보를 얻기 쉬웠다. 직장인들의 유입과 퇴직등의 인적흐름, 프로젝트 팀의 인원수를 판단하여 프로젝트의 중요성을 판단하여 세바스찬은 어느 분야의 주가가 오르는지 내리는지를 판단하였다. 그 결과, 세바스찬은 회사 입사 3년이라는 짧은 시간안에 꿈에이르던 저의 건물을 살 수 있었다.


"뭐, 원룸이지만 그래도 먹고사는데는 충분하지"


세바스찬이 콧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원룸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가게를 들이는 상가건물을 사려 하였지만 상가건물은 가게의 흥망여부에 따라 빼고들어가는것이 많았다. 하지만 원룸은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도시로 상경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잘곳이 필요했고 대부분 자신의 집을 구입할 수 없어 원룸을 빌릴게 분명했다. "게다가 원룸이면 내 방세도 안나가고 좋지 뭐" 세바스찬은 자신의 건물 중 하나인 502호에 자신의 둥지를 틀었다.




"저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 그 꿈을 이루러 가겠습니다. 라고 말했지? 니가 사직서 내면서"

"헤헤..네.."

피터는 터질것 같은 자신의 속을 참지 않고 오른손에 들려있던 신문지를 둘둘말아 옆에있던 세바스찬의 어깨를 퍽퍽 내리쳤다."아파요! 아파요! 아파요!" 비록 종이지만 둘둘 말아 몽둥이 형태가 된 신문지는 피터의 악력이 더해져 은근히 아팠다. "꿈이! 있어서! 그냥! 보내! 줬더니! 그! 꿈이! 놀고먹는! 백수!? 백수?!" 피터는 이 웬수같은 후배의 과거를 생각하자 더 열이 뻗쳐오르는것이 느껴졌다.


"백수가 어때서요! 제 평생의 꿈이었다고요!"

"열받으니까 입 닥쳐!"


피터가 세바스찬을 때리던 손을 멈추고 에휴에휴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학교 후배이기도 하고 일도 빠릿빠릿 잘하고 성격도 서글서글 한것이 마음에 들어 키워줬더니 3년채 되지 않아 회사를 나간다고 하였다. 당시 차장직에 있던 피터와 신입사원인 세바스찬의 직급차이는 멀었지만 개인적인 친분이 강한 사이였다. 친분도 친분이지만 피터가 세바스찬의 퇴직을 막고 싶었던 이유는 세바스찬은 부서내에서 훌륭한 직원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피터는 세바스찬의 사직서를 찢고 공중에 흩날리면서 절대 못받아준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세바스찬이 똑바로 눈을 응시하면서 "저는 꿈이 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퇴사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진지하게 말을 하여 붙잡지 못했던 것이었다. 꿈이 있어서 직업을 그만 두겠다. 끈기 없는 세바스찬 치고 얼마나 열정적인 말인가! 피터는 결국 그의 말에 감동을 받아 어쩔 수 없다며 그의 사직서를 받아들였다. 꿈을 쫓는 젊은이라니 요즘 참 보기 드문데..... 


그리고 한달 뒤 그 꿈이라는 것이 돈 많은 백수라는 것을 알게된 피터는 세바스찬의 집에 쫓아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렇게 피터의 속을 다 뒤집어놓고 간 세바스찬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 뻔뻔한놈이 서글서글 웃으며 지 발로 저의 앞으로 기어들어왔다. 이유는 더 복장이 터졌다. 자기 애인좀 도와달라고. 후... 피터가 자신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자꾸 이러면 주름이 더 늘어나는데 진짜 이 미친새끼때문에 제 명에 못살겠다. 그래도 아끼는 후배라고 이야기는 들어주려고 사무실에 들여는 주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이 뻗쳤다. 피터는 다시 신문지를 돌돌 뭉쳐서 세바스찬의 어깨를 강타하였다. 이 머저리같은 놈은 맞으면서도 뭐가 좋다는거지 실실 웃으며 "도와줄꺼젹!악! 도와줄꺼져!악!" 하고 있었다.


"아. 꼴도 보기 싫어 저리꺼져"

"아으아어으아아아앙"

"어디서 애교질이야. 아 몰라 저리가. 얼굴치워"

"아잉"

"아 뭐래, 꺼져"


자신의 욕설에도 헤헤 웃기만 하였다. 아끼는 후배라 매몰차게 내치지는 못하겠고 보면 속은 쓰리고. 피터는 끙 소리를 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뭘 도와달라는건데" 부루퉁한 목소리로 말을 하긴 하였지만 내용은 따뜻하기 그지 없었다. 피터가 이렇게 나올것을 예상이라도한 세바스찬은 크리스의 취직준비현황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세바스찬을 구하겠다는 일념하에 벽을 부순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성을 되찾자 크리스는 자신이 잊고있었던 사실이 몇개씩 차례차례 떠올랐다. '그 맥키라는 남자는 누구인가, 설마 자시한테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고 했던 놈인가' '아니 이 벽은 얇다얇다 생각은 했는데 설마 부숴질정도로 얇을줄이야...이거 공사 잘못한거 아닌가, 신고 넣어야하는거아닌가' '잠깐만 내가 신고당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나 벽을 부쉈잖아. 건물주가 덤탱이를 씌우면 어떻게하지!?' 등등. 혼란스러운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아 세상이 핑글핑글 돌았다. 하지만 세바스찬은 뭐가 좋은지 헤벌쭉 웃으며 옆에서 크리스를 꼬옥 안고 품에 가두고서는 쪽쪽 거리며 연신 입술도장을 찍었다. "잠깐만요, 세바스찬" 부숴진 벽때문에 먼지가 풀풀 나는 장소에서 점점 끈끈해지는 스킨십에 크리스가 손으로 세바스찬의 입술을 막았다. "왜요?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손에 입술을 묻은 채, 물었다. 입이 움직이자 간질간질한 느낌이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저..저희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은데"

"무슨 이야기요?"


다시 시작된 세바스찬의 꿀떨어지는 눈빛에 이어 세바스찬이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크리스의 몸에 밀착하였다. 세바스찬의 입술이 움직일때마다 손바닥이 간질간질한것이 묘한 느낌을 낳았다. 크리스가 으..하고 새빨개진 얼굴로 말문이 막히자 세바스찬이 키득 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장난을 치겠다듯이 살짝 혀를 내밀러 크리스의 손바닥을 핥았다. "하..하지마요" 입을 막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역공격을 받았다. 크리스가 손을 빼려고하자 세바스찬이 살짝 크리스의 손을 움켜쥐어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평소의 양봉업자의 눈빛에 끈적함 것이 담겨져 있었다. 그런 눈으로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얼굴을 핥듯이 훑자 크리스는 단숨에 얼음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세바스찬의 시선은 크리스를 붙잡아 두는 묘한 능력이 있었다. 세바스찬은 계속 크리스의 얼굴을 주시하면서 천천히 얼굴을 들어 크리스의 두번째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앗.." 결코 아픈것은 아니었지만 신경이 온통 손가락에 쏠려 예민하였다. 세바스찬이 살짝 웃고 이번에는 손가락 사이의 골을 혀로 츕 하고 빨았다. 간지러운 느낌에 크리스가 살짝 몸을 떨었다. "간지러워요?"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손바닥에 또 쪽 하고 입술 도장을 찍고 물었다. 이미 온 몸이 삶은 문어처럼 빨개진 크리스가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홱 하고 손을 당겨 뺐다. 


"할..할이야기가 많다니까요! 정말!"

"에이, 아쉽다"


세바스찬이 손으로 턱을 괴고 웃으며 말했다. 아, 정말. 다른건 몰라도 세바스찬은 침대 위에서는 선수다. 지금 생각해보니 위험하게 세바스찬의 침대 위에서 둘이 있었어! 크리스가 옆에있는 베개를 잡고서는 힘껏 던져 세바스찬의 얼굴에 맞췄다. 퍽- 소리와 함께 베개가 세바스찬의 얼굴에 명중되었고 좀있자 주르륵 하고 베개가 흘려내렸다. 그 와중에도 세바스찬이 계속 헤실헤실 웃는 얼굴이었다.


진지한 이야기를 진행하기 원하는 크리스와 뭐든 상관없으니 닿고싶다는 세바스찬의 충돌의 결과,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품속에 안겨 대화를 하는 것이 타협점이 되었다. 분명 자신의 키가 더 컸을텐데 왜 세바스찬의 품속에 꼭 들어가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크리스가 가장 걱정이었던것은 붕괴된 벽이었다. 세바스찬을 구하겠다는 옳은 신념(?)으로 벌인 일이기는 하나..... 그래도 부순건 부순거였다. 나름 자신을 도와주겠다고 일을 벌인 제임스에게 책임을 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세바스찬에게 책임을 물수도 없었다. 그렇다면은 당연히 크리스, 오로지 혼자만의 책임인데... 크리스는 계속 스마트폰으로 "부숴진 벽 공사" "벽 값" "보수공사" 들을 검색하면서 걱정을 하였다. 세바스찬은 그런 크리스를 보며 정말 귀엽다.. 라는 생각과 동시에 내가 건물주인걸 어떻게 말하지..라는 걱정이 함께 있었다. 지금까지 딱히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는 일부러 숨긴것이 있기는 있었다. 건물주가 자신의 옆집 사람이면은 이웃들이 부담이겠고 또 건물이 있는 알파에게 접근하려는 오메가를 내치기위해 숨겼었지만 - 부모님에게도 비밀로 부탁했다 - 크리스에게 반하고 난 뒤에서는 딱히 숨길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크리스가 진지하게 묻지 않았기에 대답하지 않은것 뿐이었고, 크리스가 묻기도전에 그에게 "사실은 말입니다, 제가 이 건물의 건물주입니다 따다-" 라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세바스찬은 계속 크리스의 정수리에 뽀뽀를 하며 어떻게 건밍아웃을 해야할지에 대해 고민을 하였다. 


"으어- 세바스찬. 이거봐요, 보수공사 장난아니게 비싸요...! 아니 근데 벽이 너무 얇으면 오히려 건물주의 책임 아니예요?!"

"거..건물주도 건물을 살때 이렇게 벽이 얇았는지 몰랐을꺼예요"

"건물주가 이 건물을 지었는지 도중에 샀는지 어떻게 알아요..! 이 정도면 제쪽에서 신고를 해도 가능성이..."

"자..잠깐 신고요?! 잠깐만요 크리스!"


제법 진지해보이는 크리스의 목소리에 세바스찬이 그를 등 뒤에서 꽉 안았다. 크리스가 갑작스러운 압박에 "왜요..!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예요!" 라며 열정을 보였다. 결국 세바스찬은 어떻게 말할지에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크리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는 "건물주가 나란말이예요! 신고는 안돼!" 라는 싸디 싼 건밍아웃을 해보였다.


세바스찬과 크리스는 밖으로 나왔다. 계속 안에만 있으니 먼지때문에 기관지가 가려운 탓이었다. "이것이 건물주의 횡포죠" 세바스찬이 옥상정원의 문을 잠그며 웃었다. 크리스는 그런 세바스찬을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흥- 소리를 내었다. 어쩐지... 내가 처음에 건물주한테 계속 세바스찬을 신고했는데 별소리가 없는게 이상했어...도둑한테 저 도둑 잡아달라고 신고한 꼴이었잖아. 묘한 배신감에 살짝 화가난 크리스는 계속 입을 삐죽 내민 상태였다. 그래도 세바스찬의 눈에 크리스는 무엇을 하든 이쁜 천사였다. 살짝 삐진 크리스의 옆에 달라붙어 오구오구 해주는 것도 묘한 쾌감이 있었다. 이제 저녁이 된 하늘은 까맣다기보다는 검파란 느낌이 있었다. 도심지여서 별도 안보이는 것이 정상이거늘 하늘이 맑아서 그런가 오늘은 몇몇개의 별들이 반짝이며 하늘을 빛내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둥근 느낌이 드는 보름달이 바로 옥상의 정면에 보였다. 노란 달빛이 크리스와 세바스찬 두사람을 비추어주어 둘에게는 묘하게 노란색 반사빛이 나는것 같았다. 세바스찬과 크리스는 정원의 의자에 앉아 서로 손을 잡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화나있는 크리스의 입은 나와 들어갈줄 몰랐고 기분이 좋은 세바스찬의 광대는 올라가 내려갈줄몰랐다. 


"맥키가 그랬더구요? 오 마이갓. 맥어택..."

"도대체 왜 그런거예요? 세바스찬 제 욕했어요?"

"아니예요! 그럴리가요! 그러니까....음..저도 크리스한테 묻고싶은게 있는데 상상하기도 싫은 불쾌한 기억이예요"


서로 맞닿은 손에서 서로의 온기가 흘러들어왔다. 분명 불편한 이야기를 하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불안하거나 긴장감이 도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저 서로 맞닿은 온기가 좋아서, 서로 이제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어서, 그냥 지금의 상태가 편하고 좋았다. 세바스찬이 오른손에 쥐어진 크리스의 손을 꽉 하고 잡았다. 톰인지 제리인지와의 일은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크리스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으니 이제 무서울 것이 없었다. 자신의 손을 꽉 쥔 세바스찬에 크리스가 세바스찬을 한번 바라보고서는 몸을 조금 당겨 그의 옆에 달라붙었다. 크리스식의 애정표현이었다. 그 행동에 조금 힘을 얻은 세바스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길에서 그남자랑...입.....하는걸 봤거든요. 저랑 맥키가"

"...오우 하느님 맙소사. 타이밍좀봐"

"맥키는 환승이다 어장관리다 뭐다..뭐 좀 말이 많았죠"

"그때의 행동은 제가 잘못한게 맞지만 확실한건 환승도 어장관리도 아니예요. 진심으로요"

"믿어요 크리스. 여튼 맥키는 당시 그것만 보고 그렇게 얘기했고..저도 뭐 많이 풀이 죽어있었죠. 크리스가 제가 아니라 그자식을 선택한거니까. 그러니까.. 저는 이제 크리스를 포기해야겠구나 싶었어요"


세바스찬의 갑작스럽게 달라진 태도, 태도의 원인은 바로 자신이었다. 크리스는 그것이 밀당이네뭐네 하면서 착각을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정말정말 아니예요. 일단 저 톰이랑 진짜 완전히 끝냈거든요? 아 그러니까 어떻게 설명해야돼" 자유로운 한손으로 격한 액션을 취하면서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오해를 풀기위해 노력을 하였다. 오해고 뭐고, 이미 크리스의 사랑이라는 것으로 게임이 끝난 세바스찬은 여유롭게 크리스의 변명을 듣기만 하였다. 


"제가 그때 살짝 톰한테 흔들리기는 했지만"

"잠깐만요? 흔들렸다구요?!"

"아니, 그러니까"


크리스가 자신의 말실수에 입을 닫았다. 변명을 하려고했는데 하면은 안되는 말까지 나왔다. 크리스가 난처하여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얼굴을 상하좌우로 움직였다. 사실은 아무렇지도 않은 세바스찬이 풀죽은 '척'을 하면서 "흔들렸다니 못됐어요" 라며 볼멘소리를 냈다. 완벽하게 세바스찬의 연기에 속은 크리스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4년이라는 세월은 너무 길었다는 둥, 너무 예고도 없이 만나서 그런거였다는 등등. 병아리가 날개짓을 하는것처럼 손을 파닥거리며 세바스찬을 설득하는 크리스의 모습에 세바스찬이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귀여워도 너무 귀여운거 아닐까, 이건 진짜 핵무기급 귀여움이잖아. 세바스찬이 최대한 입을 낮게 내리고서는 "그러면 또 뽀뽀해줘요" 라고 요구했다.


"네?! 아니 가...갑자기.."

"흔들렸다니. 상처받았어.. 나는 줄곧 일편단심이었는데"

"그..저..미안해요. 아니 그러니까 음. 아니 근데 여기서 뽀뽀가"

"상처받은 내 마음, 뽀뽀 한방이면은 나을꺼같은데...아아..쓰라리다, 상처가 깊어졌나봐.윽"


세바스찬이 장난스레 자신의 왼손으로 심장을 부여잡았다. 지금만큼은 죄인의 기분이 된 크리스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세바스찬은 크리스의 입맞춤을 받기 위해 크리스를 향해 볼을 내밀었다. "아아- 치료가 필요하다. 치료가 필요하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계속 장난을 치는 세바스찬에 크리스가 결심을 하듯이 몸을 가까이 했다.


쪽.


입술이 닿은 곳은 뺨이 아니라 세바스찬의 입술이었다. "아아- 흠흠. 메이데이 메이데이- 상처는 아물었는가?" 크리스가 헛기침을 내면서 귀를 빨갛게 물들이고 세바스찬의 장난을 따라했다. 갑작스러운 기습공격에 세바스찬의 방어벽이 와르르 하고 무너졌다. "아아- 메이데이 메이데이. 큰일이다. 상처가 더 깊어진 것 같다. 응급치료가 필요한 것 같다"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몸을 자신을 향해 돌리게하고 가볍게 키스를 하였다. 


오늘따라 유독 둥근 보름달이 계속 두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벽은 결국 보수를 하였다. 대신 달라진 점이 있다면 벽을 좀더 두껍게 한 것과 벽에 문을 단 것이었다. 세바스찬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동거를...하고 은근슬쩍 의사를 표하였지만 크리스가 "너무 빨라요!" 하고 반대를 했기때문에 그 꿈은 와르르 하고 무너져버렸다. 대신 또 타협점으로 내세운 것이 벽에 문을 달자는 것이었다. 벽의 문은 크리스의 방쪽에서 잠글 수 있게 설치되었다. 그래도 벽에 문이 달려있으니 어찌보면은 각 개체의 방이 연결된 것이니 한 집이나 다름 없었다. 세바스찬은 크리스와의 연애생활이 기대되어 약을 한것처럼 기분이 하늘을 뚫었다. 연인들의 데이트라니.... 놀이공원 데이트, 집에서 같이 영화보기, 손잡고 산책하기, 같이 요리하기, 같이 장보기..! 세바스찬은 사랑하는것을 포기한 사람이기는 하였지만 결코 사랑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다. 처음으로 생긴것이나 다름 없는 연인이었다. 첫 연애라니, 이 얼마나 가슴을 뛰게 만드는 풋풋한 단어인가


하지만 세바스찬의 꿈은 또 한번 크리스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그..저..세바스찬에게...확실히 말해야하는것이 있어요" 들떠있는 세바스찬에게 크리스가 말한것은 현실이라는 벽이었다. "저..취업..이제 1년째..못하고있어요...........취업준비..해야죠..." 아, 맞다. 빌어먹을..! 크리스에게 세바스찬은 결코 "취업하지마요, 제가 먹여살려드릴게요" 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톰과 세바스찬의 헤어진 경우를 알아서라기보다는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가치관 - 돈많은 백수 - 를 이해해준 것처럼 세바스찬도 크리스의 가치관 -평생 일하는 삶- 을 이해해준 것이었다.


둘의 가치관은 정 반대였다. 크리스는 그렇기에 저와 세바스찬이 잘맞는다고 생각하였다. 세바스찬이 자신의 다른 가치관을 이해해주면 둘은 충돌할 일이 없었다. 세바스찬은 크리스에게 결혼을 하고 가정주부를 하라는 압박을 전혀하지 않았고 크리스 또한 세바스찬에게 그래도 사람이 건실하게 일을 해야지 라는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세바스찬은 크리스를 이해했다. 공감을 하지는 못해도 그래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세바스찬은 크리스의 '취직준비선언'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데이트는 일주일에 한번, 일요일에. 평일에는 점심과 저녁만 먹기. 나머지 시간에는 각 자의 시간을 보내기. 중간에 연락할 수 없음. 보통의 연인이 어느정도의 연락빈도를 가지는지 몰랐지만 세바스찬은 크리스의 제안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크리스와 시간을 보낼 수 없는게 안타까워 몸부림을 쳤다. "저..크리스를 압박하려는건 아닌데요..언제쯤...조금 더 자유롭게 만날 수 있을까요" 세바스찬의 물음에 샌드위치를 먹고있던 크리스가 우물 거리며 대답했다. "취직할때까지...?" 참고로 히트사이클, 오메가의 페로몬 방해 등으로 인하여 취직준비에 무리가 있을까 크리스는 세바스찬에게 '진한 스킨십은 당분간 금지' 라는 이야기까지 한 상태였다. 


그냥 가만히 잠잠코 있을 세바스찬은 아니었다. 세바스찬은 뚜렷한 가치관 하에 자신의 원하는것을 모두 얻는 남자였다. 그는 당장에 전 회사에서 친했던 선배에게 연락을 하였다. 비록 자신을 몽둥이로 때릴지언정 자신의 부탁을 거절할 사람은 아니라는것을 알았다.





"취직이 일년동안 안되었다고? 그럴만도 하네"

"왜요? 크리스의 스펙은 나쁘지 않는 편인데. 게다가 경력직이잖아요"

"그래도 대리의 경력은..그렇게 좋은 경력이라고 볼 수 없지"

"신입 보다는 낫지 않은가?"

"잘들어 세바스찬. 보통 경력입사는 말이야, 회사를 이직하는 사람들이 많이 하는거야. 뭐, 퇴사를 해서 재취직 하는 사람도 하지만. 그런데 말이야, 보통 이런 경력직은 능력이 있어 회사를 옮기고 싶어하는 '알파'들이 자주해. 오해하지마, 내가 편견이 있는사람이라는게 아니라 원래 그래. 너임마 인사부서에서 일했는데 왜 이런것도 몰라"

"과거를 뒤돌아보지 않는것이 사나이 아닐까요"

"응, 아냐"


피터가 또한번 신문지 몽둥이로 세바스찬의 머리를 내리쳤다. 


"지금 판이 알파중심으로 만들어져있으니까. 이직도 재취직도 알파가 유리하지. 뭐 물론 '오메가'가 재취직을 못하는건 아니야. 하지만 대부분 오메가들의 재취직은 정말 좋은 경력을 갖고있는 사람중심으로 이루어져. 그런판에 대리경력의 오메가라..."

"많이 힘든가요?"

"많이 힘들지. 첫 취직보다 훨씬 힘들어. 회사를 다니다가 이직을 한게 아니라, 퇴사를 하고 재취직인 점이 더 힘들어. 인사부서라는게 좀 보수적인 사람이 많잖아. '결혼도 안한 오메가가 빠르게 퇴직을 하고 재취직을 하려고 한다.' 이것 자체에 편견을 갖고있을 가능성이 커. 뭐 문제를 일으켰다든가 그런 시선으로 보는거지. 회사에서는 당연히 문제를 일으킨 사람을 뽑고 싶어하지 않고. 그리고 전 회사가 꽤 이름난 대기업 회사였네. 같은 분야에서 알음알음 소문이 났을지도 몰라"

"예상외로 더 큰일이네요"


단순히 빨리 크리스가 빨리 취직해야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던 세바스찬도 나름 진지해졌다. 이러다 내 님이 영원히 취직을 못하면 세바스찬은 강제고자행이었다. 아니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크리스가 풀이 죽은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다. 세바스찬이 어떻게하죠? 하며 피터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인상을 쓰며 크리스의 자기소개서를 살펴보던 피터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뭐 완전히 방법이 없는건 아냐. 그래, 스펙이 나쁘진 않네. 대학도 좋고 자격증도 보유하고 있고 음... 지금까지 어느 회사에 지원했는지도 알아?"

"글세요.. 여러군데 많이 지원했다고 들었어요"

"혹시 허니비회사에는 넣어봤어?"

"허니비 회사요? 잘 모르겠는데..."

"혹시 지원 안했으면 지원해보라고해. 전 회사의 라이벌 회사여서 거부감이 들어서 안했을지도 모르지만. 능력있는 사원이었다면 허니비에서 뽑아갈꺼야. 라이벌 회사의 훌륭한 노동력을 빼기 싫어하는 기업은 없으니까"

"하지만 아까 말했듯이 오메가 차별은..."

"허니비 회사는 유일하게 지원하는 양식에 오메가/알파란이 없는 기업이지. 사실 이것도 올해 시작된거여서 많은 사람들이 모르긴 하지만. 그리고 면접도 블라인드 면접이니 걱정말라고. 그리고 인사부서의 팀장만이 알 수 있는 고급정보 하나만 던져주면"


피터가 장난스렇게 빙긋 웃었다. 세바스찬은 구세주를 보는듯한 눈빛으로 피터를 쳐다보았다.


"그 회사에 이번의 새로운 CEO. 사실은 오메가야"


오메가들에 대한 차별을 점점 없애려고 하는 추세지. 피터가 껄껄 웃으며 자신의 불뚝한 배를 쳤다. 세바스찬은 피터에게 정말 고맙다며 여러번 고개를 숙였다. 이 뺀질뺀질하게 잘생긴 후배가 이렇게 머리를 조아린 적은 처음이었다. 어지간히도 남자친구에게 푹 빠졌나보다. 세바스찬은 잠시 메모를 하겠다며 가져온 종이에다가 피터가 말한 내용을 적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번에 저녁식사라도 제가.."

"됐어. 어린애한테 뭐 얻어먹을 나이는 지났어"

"그래도 너무 고마워서.."

"그러면 거, 니 남자친구 취직하면 걔가 사라고해. 니가 취직하냐, 걔가 취직하지"

"아! 네! 크리스라면 분명 사드리고 싶어할꺼예요! 뭐 빚지고싶어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그러면 나가봐. 나도 이제 일해야돼" 피터가 퉁명스럽게 세바스찬을 내쫓으려고 했다. 생각해보니 지금은 피터가 아직 근무를 하고있던 시간이었다. 세바스차은 조만간 다시 인사하러 오겠다며 계속 인사를 하며 사무실을 나서려했다. 피터는 문의 손잡이를 잡고 나가려는 세바스찬을 보고서는 한번 불러세웠다.


"헤이. 세바스찬. 혹시 그 남자친구 말이야. 허니비에서도 취직이 안되면 우리회사에 불러줄 수 있어. 뭐, 스펙도 나쁘지 않고 지금 안그래도 마케팅영업부에서 인력도 부족하고 그러니까"

"아,음........ 제안은 고맙지만 피터 괜찮아요"


세바스찬이 피터의 제안에 웃으며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건 크리스가 해낸게 아니잖아요" 피터는 세바스찬의 말을 이해 못하겠다듯이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필사적으로 남자친구의 취직은 도와주고 싶은데, 취직을 시켜주고싶은것은 아닌가. 세바스찬은 피터에게 다시한번 인사를 하고 문을 닫고 나섰다. 


세바스찬은 크리스가 잘 해낼거라 믿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크리스가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녁시간이 되자 크리스가 자신의 방문을 열고 세바스찬의 집으로 들어왔다. 직접 파스타를 끓이고 있던 세바스찬이 고개만 뒤로 돌고 크리스를 웃으며 맞이했다. 


"오늘은 여기서 먹어요 크리스"

"우와, 직접 만드는 거예요? 요리 잘해요?"

"아뇨... 그냥 간단한 파스타 정도만. 곧 있으면 되요"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등을 바라보고 웃으며 의자에 걸터 앉았다. 언제봐도 황홀한 등짝이었다. 음. 남자는 등이지. 저 다정하고 잘생긴 알파가 저의 알파라니 아직도 그 사실이 어색하고 서먹했다. 금방 접시에 파스타를 담은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자리에 접시를 올려주었다. 맞은편이 아닌 크리스의 옆자리에 앉은 세바스찬이 의자를 당겨 좀 더 크리스에게 달라 붙었다.


"저 오늘 좋은 정보 알아왔어요"

"무슨 정보요?"

"취직정보요"

"그런건 어디서 알아왔어요?"

"저 인사부서에서 일했거든요. 정말 좋은정보인데 들으실래요?"

"정보를 이용하는건 반칙이 아니겠죠?"

"물론 아니죠. 들으실래요?"

"그럼요. 당연히 들어야죠"

"듣기전에 저 칭찬받고 싶은데.. 상받고 싶은데.."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허리를 당겨 자신의 몸에 밀착 시켰다. 크리스가 꺄르륵 웃으면서 세바스찬의 가슴을 툭 쳤다. 


쪽. 


이번에도 입술에서 소리가 났다. 


 


--



세바스찬 직업 : 백수 -> 건물주


전편에 감동적인 삽질끝내기를 했으니 14편은 당연히 떡이지 하고 떡씬을 쓰려다가 아 맞다 소장본 15세 이용가지...민증 검사 안했지..라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다시 썼습니다. 아아...너네둘이 다정하게 떡을 쳐야하는데....사실 다정떡 몇번 안쓰긴했지만......


다음이 끝입니다!


헉헉 이제 좀 버키스팁,스팁버키 웹 연재좀 해야하는데 원고말고 ㅠㅠㅠㅠㅠ


세즈반스 소장본 ▼

http://me2.do/FujaaZMa 





"헐 대박"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자 제임스는 그의 말버릇을 외쳤다. 이야기를 하던 도중에도 크리스의 눈물은 멈춰지지 않았고 메인 목으로 이야기해 목이 아파왔다. "지금까지 이야기 진짜예요?" 묻는 제임스의 말에 크리스가 고개를 연신 끄덕이기만 하였다. 제임스는 크리스의 대답에 "헐..." 이라며 아직까지도 놀라운 기색을 버리지 못했다. 가벼운듯한 제임스의 대답이 섭섭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크리스 딴에서는 그래도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어서 시원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제임스에게 위로를 요구할 정도의 정신머리도 없었다.


"누가 들으면 어느 사이트의 소설인줄알겠어요..."

"..흡..크흡...저..진짜 망했어요.."


크리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한번 말을 하면서 깨달았다. 정말 세바스찬은 이제 저를 향한 마음이 떠나간게 틀림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다정했던 세바스찬이 갑작스럽게 차가워졌을리가 없다. 마음이 떠나갔다는것 외에 상상할 수도 없었다. 세바스찬은 스스로의 사람에게는 친절하지만 타인에게는 냉정한편이었으니 말이다. 다시 오열을 하는 크리스의 등을 제임스가 오구오구 하며 두드려주었다. 


"세바스찬이랑 얘기는 해봤어요?"

"..크흡...아니요..세바스찬이..피하구..이제..이제..끝났어요"

"확실하게 정면으로 피한건 한번밖에 없잖아요. 다시 한번 말해봐요"

"아니예요..끄흡..이제..이제 끝났어요.."


제임스가 생각하기에는 크리스와 세바스찬 사이에는 단단한 오해가 있는것처럼 보였다. 아직 크리스에 대해서도 자세히 잘 모르고 이웃집의 잘생긴 알파 세바스찬에 대해서도 아는것이 많지 않았지만 이야기 상으로 둘은 이렇게 갑자기 틀어질만한 사이는 아닌 것 처럼 들렸다. 크리스는 자신만의 확고한 생각을 우선시하였지만 세바스찬을 향한 마음도 꽤 깊은 상태인것 같았고 세바스찬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간 크리스를 대하는 태도를 들어서는 아무이유 없이 크리스에 대한 사랑이 식을 것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과 크리스의 식사시간에 난입한 한 남성. 분명 크리스를 향해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고 얘기 했었지. 그 남자를 떠올리면 분명 세바스찬과 크리스 사이에는 깊은 오해가 있는게 분명했다. 크리스에게 들은 이야기의 흐름상 남자가 개입할 만한 사건은 없었다. 그러면 크리스가 모르는 곳에 분명 오해가 있거나 사건이 터졌겠지. 예를들어..음...길 거리의 키스씬을 세바스찬이 목격했다든가.


아, 그건 너무 드라마틱한가? 


제임스는 크리스의 등을 두드리며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제 감으로는 세바스찬이라는 남자는 아직 크리스에게 마음이 있는것같고 크리스는 보시다시피 세바스찬에게 마음이 깊은 편이었다. 둘은 확실히 지금 끝날 사이가 아니었고 분명 깊은 오해가 있다. 하지만 이 오해를 풀어나갈 사람은 두 당사자가 아니면 안된다. 


"다시한번 얘기해봐요, 크리스"

"안돼요..흡..이제..이제 못해요"

"이대로 못하면 정말 끝이예요"


제임스가 다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크리스는 제임스의 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저 '끝'이라는 말에 가슴이 아파 더 크게 엉엉 울기만 할 뿐이었다.

톰에 대한 일은 이미 어느정도 제 안에 결정한 일이 있었기에 데미지가 크지 않았지만 세바스찬에 대한 일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데미지가 적지 않았다.원래 인간은 자신이 방심했던 사람,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자신이 방어막을 내세우지 않은 사람의 일에 더욱 상처를 입는다. 세바스찬의 거절에 인해 멘탈이 너덜너덜해진 크리스는 더이상 세바스찬에게 무언가를 시도 해볼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이미 그는 세바스찬과 끝난 상태였고 만약 진행된다하여도 그건 세바스찬의 변심으로 인해 그가 크리스에게 다가올 때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대로 끝나도 좋아요?"


제임스가 물었다. 이대로 끝나도 좋냐니, 그럴리 없었다. 크리스에게 세바스찬은 새로운 사랑이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겪어본적 없는 타입에다가 첫 만남은 악연이었고 끝에 와서는 완전히 잊지 못한 톰에게 흔들리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세바스찬은 크리스에게 사랑이었다. 세바스찬이 좋다. 강아지 같은 순한 인상도 좋고 저를 향해 입을 활짝 벌리는 미소가 좋고 가벼움에서 태어난 진중함도 좋았다. 단기간에 만난 제대로된 관계를 쌓지도 않은 상대방이 이렇게 좋아진 경우는 처음이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굳이 톰과 헤어져서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비록 톰과의 이별은 세바스찬때문이 아닌 크리스의 개인적 이유로 실행되었지만 그래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톰과 세바스찬 둘중에 한명을 고르라고 한다면 크리스는 세바스찬을 골랐을 것이었다.


제임스의 말에 크리스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끝나고 싶지 않다. 세바스찬과 이대로 그냥 이웃이 되고싶진 않았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이미 세바스찬의 마음은 닫혔고 크리스는 다시 한번 세바스찬에게 다가가기에는 너무나도 겁쟁이었다.


고개만 도리질을 하고있는 크리스를 향해 제임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겁을 잔뜩 집어먹은 이 겁쟁이가 다시 세바스찬을 향해 다가갈 가능성은 낮았다. 아마도 세바스찬쪽에서 연락을 주지 않는다면 높을 확률로 끝날 것이었다. 제임스는 머리를 돌려 생각을 했다.


둘을 도와주는 촉매제역할을 할지.

아니면 노리고 있던 상대방의 새 상대방 역할을 할지에 대해서.





"완전 화가 많이 났더라. 어떻게 이런 사람을 소개시켜줄 수 있냐고"

"..........미안"

"아니야, 내가 무리하게 소개팅 시켰으니까. 뭐. 신경꺼"


아직도 우울함이 날아가지 않은 세바스찬은 맥주를 들이부어마셨다. 이 며칠사이 완전 술꾼이 되어버린 세바스찬은 이렇게 맥키를 만나 앞에두고 저 혼자 술을 들이붓기 일 수 였다. 처음에는 낯선 세바스찬의 모습에 맥키가 말려보았지만 이러지 않으면 크리스에게 연락을 할 것 같다는 세바스찬의 말에 더이상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원래 첫 실연이라는 것은 오래가는 법이다. 맥키도 21살에 연상의 오메가 여자친구로부터 헤어졌을때 그랬다.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을 거라는 둥, 이제 사람을 못믿겠다는 둥 부터 시작해서 많은 친구들에게 폐를 끼쳤다. 세바스찬은 진작에 해야할 일들을 나이가 먹어 뒤늦게 시작한 것이었다. 멕키는 그렇게 세바스찬을 이해했고 저의 경험을 토대로 세바스찬이 마음껏 실연의 아픔을 겪게끔 그를 냅두었다. 원래 이런 아픔은 시간밖에 치유하지 못했었다. 뭐, 중간에 새로운 사랑이라도 만나면 더 빠르게 치유가 되지 않을까 싶어 소개팅을 주선하긴 하였지만.


맥키가 오기전에 이미 술을 대여섯병 마신 세바스찬은 이미 취기가 잔뜩 오른 상태였다. "크리스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 이제는 진절머리가 나도록 들은 이름에 맥키가 끙 소리를 내며 웨이터를 불러 자신의 몫으로 맥주 한병을 시켰다. 오늘도 세바스찬의 상대를 하느라 골머리를 썩을 것 같았다.







"포기할꺼면 제가 들이대도 되는거죠?"


크리스는 어젯밤 제임스가 말한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제가 들이댄다니.. 세바스찬에게 어느정도 호감은 있다고 생각은 하였지만 설마 그렇게 슬퍼하는 자신의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할 줄 몰랐다. 

크리스가 눈물로 새빨개진 눈으로 제임스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렇잖아요. 크리스는 계속 세바스찬과의 사이가 끝났다고 하고 더이상 스스로 다가갈 생각도 없고. 너무 용기가 없으신거 아니예요?"

"그..그렇지만..세바스찬은"

"지금까지 대부분 세바스찬의 주도하에 만난거잖아요. 크리스는 세바스찬에게 확신이 들 정도로 뭔가 해보신적이 있어요?

"그..그건 없지만.."


아직 사귀지도 않는 사이, 썸을 타는 사이라고 스스로 정의한 크리스였다. 취직준비라는 이유로 세바스찬에게 어영부영 확실한 태도를 보여주지 못한것은 맞았다. "그런데 직접적으로 세바스찬이 거절 한번 했다고 이러는거예요? 세바스찬이 아까워요" 직설적인 칼날같은 말이 크리스의 심장을 푹 찔렀다. 하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변명을 시작할 수식어가 입 밖을 자꾸만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크리스는 제임스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꾸욱 하고 참았다. 그래, 제임스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겁쟁이였다.


"그렇게 앉아서, 다시한번 도전하지 않고, 세바스찬을 기다리기만 하는 거면 저한테 안될꺼예요"

"너..너무해요"

"뭐가 너무해요? 제가 임자있는 사람한테 들이대겠다고 했어요, 아니면 양방향인 사람에게 들이대겠다고했어요? 크리스가 용기내서 다가간다면 저도 이러지는 않았을꺼예요. 근데 크리스 포기할거잖아요"

"그..그렇지만"

"원래 사랑은 용기있는 사람이 쟁취하는거예요"


열정적이면서 차가운듯한 제임스의 말에 크리스는 벙찔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위로해주기는 하여도 설마 이런 선전포고와 같은 말을 할 줄은 몰랐다. 크리스는 결국 제임스의 말에 제대로된 반박 한번 못하고 "그러면 라이벌끼리 잘해봐요." 하는 제임스의 강제배웅에 떠밀려 집에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벙찐 마음에 방에 누워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자 새벽에 세바스찬의 방으로부터 큰 소음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왜이렇게 많이 마셨어! 야, 정신차려"

"흐흐흐흐흐..세상이 빙빙 돈다..흐흐흐흐흐흐흐"

"야 조용히해, 너네 방 벽도 얇다면서!"

"응..흐흐흐흐흐크흐흐흐흐흐흐흐흐흐"


세바스찬이 밤 늦게 들어온 모양이었다. 술이라도 많이 마신건가? 소개팅 갔다고 했는데...다른 목소리는 누구지? 대화내용을 봐서는 소개팅의 상대는 아닌 것 같고. 세바스찬의 친구인가. 남의 대화를 엿듣는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듣고싶지 않아도 얇은 벽 때문에 모든 대화소리가 들렸었다. 크리스는 귀를 쫑긋 세우고서는 옆방의 세바스찬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뭔가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취한 세바스찬은 별 말 하지 않고 침대에 누운듯 했고 친구로 추정되는 사람은 혼자 욕을 하고서는 방을 뒤로하고 나간 것 같았다. 크리스는 그것이 못내 아쉬워 한숨을 내뱉었다.


이 얇은 벽으로 통해들어오는 소음이 세바스찬의 인연의 시작이었지.

그때는 소음이 넘어와 스트레스였는데 지금은 그 소음 한번 못들어 아쉬워하는 처지라니.

인생사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 이다.




이제 시계는 오후 1시를 가리켰다. 아직 아침도 점심도 먹지 못한 크리스는 침대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실연에 의한 상처도 컸고 제임스의 도발로 인한 피로도 컸다. 기가 쭉 빨린 사람처럼 아무것도 못한 체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만 할 뿐이었다. 이러면 안되는데, 어서 일어나야 하는데. 톰에게 맞서 싸웠던 열정적인 모습은 어디로 가고 크리스는 이제 전과 같은 겁쟁이가 되었다. 아무래도 톰전용 용기가 있고, 세바스찬 전용의 용기가 있는것 같았다. 크리스의 안에서는. 


이제 틀렸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래 애초에 연애를 다시 시작하려고 했던것도 잘못이었다. 시국이 어떤 판국인데 무슨 연애란 말인가. 처음에 취직을 악착같이 준비했던 이유는 어찌보면 '톰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나 니가 도와주지도 않아도 이렇게 잘났어. 니 도움 없어도 이렇게 해낼 수 있어. 그 모습을 톰에게 보여주고싶었다. 그리고 겉면으로는 그런 생각이었지만 좀 더 깊이 파고들면 내면으로는 '난 이렇게 너의 도움이 없어도 잘 살 수 있어. 이번에는 너의 도움 없는 상태로 둘이 시작해보자' 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동기부여가 저번 톰과의 만남 이후로 사라졌다. 크리스는 이제 톰 앞에 다시 나타날 일이 없었고 나타나고 싶지 않았고 그에게 작아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어찌보면은 지금이 오로지 '스스로'를 위해 준비를 할 수 있는 찬스인데 바보같이 세바스찬에게 막혀있었다. 그렇게 누워서 눈물없는 눈물쇼를 벌이고 잇을때 똑똑- 하고 문앞의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이었다면 세바스찬인가?! 하면서 헐레벌떡 뛰어갔을지 모르지만 크리스는 이제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세바스찬일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바스찬은 이제 크리스의 문 앞에 서지않았고 문을 두드리지도 않았다. 세바스찬은 이제 나한테 질렸으니까.... 크리스가 힘없이 자리에 일어나 "네, 나가요" 라고 말하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누구세.."

"크리스. 기운이 없어보이네요?"

"...제임스씨"


문 앞에는 헤실헤실 웃고있는 제임스가 보였다. 이제 저 매력적인 미소도 라이벌의 무기로 보여 크리스에게 좋지 않은 마음을 일으켰다. "무슨일이예요" 크리스가 기분나쁘다는 말투로 툭툭 내뱉었다. 


"저 지금 세바스찬씨한테 가보려구요"

".....네? 아니 그걸 왜 저한테 말하세요"

"이렇게 행동하면 기분이 조크든요"


기분이 조크든요? 뭐야. 이 미친새끼는.....크리스가 인상을 잔뜩 찡그렸지만 제임스는 실실 웃을뿐이었다. 이 미친새끼는 구해준 은혜도 모르고 저한테 라이벌 선언이나 해놓고 이제와서는 대놓고 세바스찬한테 간다고 자랑이나 하고있다. 벅벅 속이 긁혀 아프기도 하였지만 세바스찬에게 간다는 제임스의 말에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세..세바스찬 어제 소개팅 간다고하던데"

"에이, 어제 소개팅이면뭐. 아직 기회있죠. 소개팅 깨졌을지도모르고"

"제임스씨 세바스찬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모르면 지금부터 알아가면 되죠. 처음부터 잘 아는 사람이 어디있어요"


당당한 제임스의 말에 크리스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제임스는 얄밉게도 요리조리 크리스의 말에 척척 알맞게 반박을 하고있었다. 제임스는 그런 이만. 하고 크리스를 향해 다시한번 싱긋 웃고 등을 돌려 세바스찬의 문앞에 섰다. 크리스의 속에서 열불이 났지만 제임스의 행동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세바스찬의 문 앞에 서있던 제임스가 고개만 돌려 크리스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크리스 이 노래 알아요? 사랑은 열린 문~~~~~" 


또라이 새끼. 크리스는 시뻘개진 얼굴을 하고서 쾅 하고 저의 집 문을 닫았다.


문을 닫고 침대에 앉자, 벽 너머로 제임스와 세바스찬의 말소리가 들렸다. 제임스는 정말로 세바스찬의 집에 입성을 한 것이었다. 세바스찬..저 가벼운 자식! 어떻게 몇번 보지도 않은 오메가를 집으로 끌어들여! 세바스찬의 가벼움에 대해서 잘 알고있는 주제에 크리스가 분이나 씩씩 거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 집은 도대체 시공을 어떻게 한 것인지 벽 너머로 제임스와 세바스찬의 말소리가 또박또박 잘 들렸다. 듣기싫어 귀를 막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의 귀에 들어왔다. 처음이랑 똑같다. 처음에도 세바스찬의 방에서 오는 듣기싫은 소리를 막기 위해 노력을 했었는데 결국 들리고 말았지


"세바스찬네집 엄청 깔끔하네요. 정리 잘하시나봐요?"

"..네..그렇죠..뭐"

"점심 먹었어요? 저 점심 안먹었는데. 뭐 시켜먹을까요?"

"......피자 남은거 있는데 데워드려요?"

"어머나! 그러면 저야 좋죠"


서글서글한 제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리스는 이제 분함에 눈물까지 나올 것 같았다. 세바스찬, 왜 거절 안하는거야. 왜 들여보내주는거야. 너무하잖아. 내가 옆에서 듣고있는거 뻔히 알면서. 들리는거 알면서. 이 집안의 구조가 이런거 알면서. 하지만 크리스가 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저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을 할 주제는 되냔 말인가. 나와 세바스찬은 아무 사이도 아닌데.


제임스는 확실히 매력있는 오메가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귀염성 있는 외모와 매끈한 몸매. 오메가 답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듣는 자신과는 외관부터가 틀렸다. 크리스는 꽉 시트를 움켜쥐며 서글픔에 입을 꽉 물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렇게 엿듣는 것 밖에.


이야기는 계속 진행되었다. 제임스는 쉴 새 없이 떠들기 바빳고 세바스찬도 제임스의 말에 하나하나 대답하며 꽤 시간이 흘렀다. 아무것도 못하는 겁쟁이 크리스는 방 안에서 기다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니 이제 '기다린다'는 설명구도 붙이면 안될지몰랐다. 기다린다는 것은 대상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크리스는 기다릴 대상도 없었다. 이미 빨개진 눈에서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패배감을 맛보면서 정말 이대로 끝이구나 란 생각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저기 제임스씨. 아까 말한 크"

"쉿- 세바스찬. 조용"


제임스가 다가와 세바스찬의 입에 손가락을 붙였다. 조용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세바스찬은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라 몸을 뒤로 뺐다. 다가온 제임스는 서글서글 웃기만 할 뿐 이었다. "다 들린단 말이예요" 제임스가 슬쩍 고개를 돌아 벽을 쳐다보았다. 다 들린다니, 무슨.... 어안이 벙벙한 세바스찬을 두고 제임스가 다시 성큼하고 다가왔다. 


"왜..왜이러세요"

"왜이러긴 정말 몰라서 물어요?"

"그쪽 오메가라면서요. 이러지마세요"


꺅- 이러지말래. 제임스가 푸흐흐 하고 웃었다. 세바스찬은 앞에 있는 남자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크리스에 관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였기에 방에 들인것은 좋았으나, 남자는 바로 본론부터 이야기 하지 않고 계속 말을 돌리기 일 수 였다. 슬슬 시간이 꽤 지나자 세바스찬은 초조해 크리스의 이야기를 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조용히 하라며 세바스찬의 입에 손을 갖다대며 유혹하듯이 다가오는 것 아닌가.


세바스찬의 방은 다른 원룸과 똑같이 좁았다. 그래서 세바스찬은 침대에 걸터 앉아있었고 제임스라는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 자세가 다가온 제임스 덕분에 매우 이상한듯한 모습이 되었다. 제임스가 세바스찬의 다리 사이로 몸통을 들이밀고 들어와서는 세바스찬과 마주보는 형태를 만들었다. 세바스찬은 바로 앞의 오메가의 유혹에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매혹적이어서라기보다는 상황파악이 안되어 긴장을 해서였다. 벌린 다리가 민망하였고 그 안에 들어온 제임스의 몸이 허벅지로 느껴져 기분이 이상했다. 가깝지도 않은 사이의 사람들이 할만한 자세는 아니었다. 세바스찬이 긴장을 해 얼이 빠진 순간 제임스가 세바스찬의 어깨를 붙잡고 확 밀어제꼈다. 위쪽에서 느껴지는 힘에 세바스찬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들어눕게되었다. 순식간에 깔려저버린 세바스찬이 눈을 크게 뜨고 위에 올라탄 제임스를 쳐다보았다.


"이게..이게 뭐하는 짓이예요? 잠깐 떨어져요"

"쉿, 섹스는 조용히"


뭐라고?! 뭐..뭐는 조용히?! 당황한 세바스찬이 몸을 일으키기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위로 오는 압력이 더 세어 일어나기 힘들었다. 힘의 방향은 위가 아래보다 훨씬 유리하였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도대체 뭐 하려는 거예요!" 세바스찬이 소리를 치자 어디선가 달콤한 향이 느껴졌다. 이 향은. 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드는 이 향은.. 오메가 향이었다. 그것도 아주 농밀한. 세바스찬은 믿을 수 없었다. 지금 이 남자는 처음보는 알파에게 자신의 향을 개방한 것이었다.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 성인인 두 남성이 모를리 없었다. 세바스찬은 자신의 코를 부여잡았다. 하지만 코를 부여 잡아도 향은 피부로도 느껴졌고 입 안으로도 느껴졌다. 단순히 얕은 향이면 이 방법이 통할지 몰라도 이런 섹스어필이 심한 농밀한 향에는 불가능 한 일이었다. 


"윽..이게 뭐하는.. 당장 그만둬요!"

"당장 그만두라뇨? 뭘요?"

"지금..지금 향 개방하는 거요! 몰라서 물어요?! 이러다가..이러다가 무슨일을 당할지 모른다고요"


생체적으로 오메가는 알파의 향에 약하고 알파도 오메가의 향에 약했다. 두 종은 다른 성질의 향만을 맡아도 서로 원하지 않아도 사랑하지 않아도 생식욕구를 위해 잠자리를 갖고싶어했고 다른 성질의 향을 많이 맡으면 이성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이성을 유지하지 못한 오메가는 자신의 향으로 알파를 유혹하며 알파의 것을 원했고, 이성을 유지하지 못한 알파는 눈 앞의 오메가를 향으로 제압하여 범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기에 알파향과 오메가향이 개입되어 원치않은 성행위는 강간행위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이 체향이라는것이 어느정도 '일방적'인지 판단하기 어려워 대부분의 사건과 사고들이 무죄처리가 되기 일 수 였다. 


세바스찬은 이성을 잡기 위해 자신의 입안쪽의 볼을 콱 하고 물었다. 그냥 지나치기엔 이 향은 너무나도 자극적이었고 이미 뱃속으로부터 무언가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머리가 핑 하고 돌며 어지러웠고 팔뚝에는 소름이 돋았다.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뇨, 세바스찬. 당신 걱정부터 해야하는 거 아닌가요?" 자신의 몸 위로 올라탄 제임스가 키득 거리며 웃었다. 이대로 만약 세바스찬이 이성을 잃어서 행위가 된다면 이건 제임스의 '강간'이나 다름 없었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었거든요"


제임스가 웃으며 저의 뺨을 쓰다듬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던 세바스찬이 손길을 거부하기 위해 얼굴을 붕붕 털었다. "저리 꺼져! 미친새끼야!" 이쯤 되면 예의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었다. 숨이 가빠졌고 폐까지 가득한 오메가의 향에 질식해 죽을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아래와 배는 딱딱하게 굳었고 세바스찬이 할 수 있는건 남아있는 이성을 유지하는 것 뿐이었다. 제임스는 저를 향해 버럭 소리치는 세바스찬을 향해 웃기만 할 뿐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안오면 그만할꺼예요"


제임스가 세바스찬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크리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저 벽 너머로 들리는 소리가 무엇인가. 설마..설마....정황상 지금 제임스가 세바스찬에게 강간을 시도하려는 것처럼 들려졌다. 처음에는 설마 아니겠지 싶었지만 "저리 꺼져 미친새끼야!" 라는 세바스찬의 고함에 자신이 생각한것이 맞다고 바로 깨달았다. 어떻게하지? 어떻게 해야하지? 크리스가 침대에 일어나 자신의 자리를 빙빙 돌았다. 세바스찬을 구해야한다. 지금 당장 구해야한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구하지? 경찰에 신고해야하나? 늦지 않을 수 있을까? 오메가의 향은 알파에게 치명적이다. 경찰이 오는 것 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이다. 크리스는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기다릴 수 없다. 그건 너무 늦다. 크리스 스스로가 세바스찬에게 다가가 그를 구해야 했다. 하지만 문은 잠겨있을 터였고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집 열쇠도 없었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뱡과 연결되어있는 벽을 쳐다보았다.


얇디 얇은 벽.

그렇기에 모든 소리가 너머로 전달되었던 벽.


모든것은 이 벽으로 부터 시작 되었다.


세바스찬을 구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크리스가 후- 하고 심호흡을 내뱉었다. 

할 수 있어. 크리스 에반스. 몸 튼튼한건 자랑이었잖아. 


크리스가 막무가내로 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벽 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세바스찬이 흐릿한 정신으로 벽을 쳐다보았다. 위에 앉아있던 제임스도 새하얗게 얼굴이 질려있었다. "설마 벽쪽으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제임스는 무언가 예상이라도 한 모양이다. 지금 도저히 어떤 상황인지 감도 잡기 힘들었다. 쿵- 쿵- 쿵- 둔탁한 소리는 계속 그치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저 벽 너머에는...크리스가..있었지....


아련한 생각과 함께 모든것이 슬로우모션으로 보였다. 살짝 당황한 제임스의 모습, 쿵-쿵- 하고 느리게 들려오는 소리, 흔들 거리는 천장, 그리고....그리고



쾅.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와..이건 진자 대박" 제임스의 어이가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바스찬은 아직 오메가향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 벽이 부숴진 것도, 부서진 벽때문에 먼지가 풀풀 날리고 있는것도, 그리고 그 먼지구름 속에 서있는 인영이 크리스라는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세바스찬은 그저 쿨럭이면서 몸을 회복하기에 바빴다.


"그만둬요 제임스!! 뭐하는 짓이예요!!"


크리스가 앙칼지게 소리를 쳤다. 제임스도 설마 벽을 부수고 올 줄은 몰랐었다. 허나 당황하는 것도 여기까지, 제임스는 제 역할을 했어야 했다. 


"뭐하는 짓이라니, 보고도 몰라요? 아니면 눈치가 없는거예요?

"눈치..눈치 문제가 아니잖아요! 지금 억지로..!"

"네에? 억지로오? 억지로 뭘요? 저희가 뭐 했나요?"


제임스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윽. 크리스는 제임스의 능청스러운 회피에 다시 입을 콱 물었다. 비겁해! 치사해! 범죄자! 감정적인 크리스가 순간 욱하여 제임스에게 달려들을뻔했다. 제임스는 크리스의 모습을 한번 살피고, 그리고 눈을 살짝 돌려 아래에 있는 세바스찬의 상태를 살폈다. 설마 이렇게 나올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타이밍은 잘 맞았다. 지금이 딱 제임스가 원하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런데 크리스 지금 뭐하는거예요? 남의 집 벽을 부수다니. 이거 가택침입에 이어 사유재산파괴 아닌가요?"

"그건..그건 제임스때문에.. 제임스가 세바스찬에게 이상한 짓 했잖아요!"

"그게 크리스랑 무슨 상관이예요? 아무사이도 아닌데"


제임스가 미끼를 던졌다. 

크리스의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았다. 보통 강간의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 없었다. 그런 당연한 사실 머릿속으로는 알고있었다. 그것에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는 것이라는 말도 할 수 있었고 뭐라는 거야 이 또라이새끼가 라는 단순한 욕짓거리를 내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감정적일대로 감정적인 크리스는 냉정하면서도 열정적인 크리스는 욱한 성질때문에 사람과 치고받는 것이 꽤 일상적이었던 크리스는 제임스의 미끼에 쉽게 덥썩 물리고 말았다. 


"제가 세바스찬을 좋아하니까요!!!!!!!!!!"


아아- 바보같은 크리스. 이래서 겁쟁이들은 손이 가서 싫단 말이다. 

제임스가 겁쟁이의 외침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크리스?"


세바스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크. 제정신인가보네" 제임스가 진지한 어조의 세바스찬의 말에 냉큼 몸을 돌려 그의 곁에서 떨어졌다. 세바스차은 자신에게 떨어진 제임스에 상관하지 않고 또렷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 서있는 크리스만을 바라보았다. 크리스는 의도치 않게 제임스의 도발에 휩쓸려 세바스찬에게 고백을 하고 만 것이었다. 자신의 고백에 부끄러워 크리스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말은 입밖으로 나왔고 세바스찬은 그 말을 똑똑히 귀에 담아 들었다. 뚫린 벽 덕분에 공기는 더 넓게 순환되어 제임스의 오메가향은 희석되어 거의 사라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덕분에 빠르게 정신을 차린 세바스찬의 귀에 들린 말은 큰 소리로 외치는 크리스의 고백이었다. 세바스찬은 결코 크리스의 고백을 잘못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바스찬이 크리스를 상대로 무언가를 놓칠리가 없었다. 크리스가, 그 크리스가, 자신이 애가 닳도록 부르짖었던 크리스가, 사랑스러워 안타까운 크리스가 자신에게 고백을 했다.


크리스는 자신의 고백에 스스로가 놀라 몸을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이미 자신을 찬거나 마찬가지인 상대방에게. 제임스는 세바스찬과 크리스의 모습을 살피고서는 슬금슬금 문으로 향했다. "사랑은 열린문이라고 했잖아요 크리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제임스는 문을 가볍게 돌리고 밖으로 나갔다. 돌린 문에 철컥 소리가 없는것이 문은 잠겨있지 않았던 것 같았다.


이제 장소에는 세바스찬과 크리스 단 둘만이 남아있었다. 세바스찬은 침대에 넋이 나간듯 앉아 크리스를 쳐다보고 있었고 크리스는 울먹 거리며 세바스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선은 계속 맞닿았고 떨어질줄은 몰랐으며 서로가 상황이 거짓 같아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다가가야 할까, 도망쳐야 할까. 


크리스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었다. 


"저 좋아해요 크리스?"


세바스찬이 나지막히 물었다. 분명 조용한 어조인데 소리가 쿵 하고 크리스의 심장을 세게 강타하였다. 저릿저릿한 심장은 세포를 통해 전류를 전달하였고 그 덕에 크리스는 온 몸이 마비가 되는 것 같았다. 저릿저릿한 발을 힘 있게 움직여 크리스가 조금더 세바스찬을 향해 앞으로 나아갔다. 그 움직임은 아주 미세하고 작았지만 적어도 크리스에게 있어서는 용기를 낸 한걸음이었다. 세바스찬은 이제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걸 알고있다. 지금 세바스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것은 어찌보면 민폐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헛된 일인것은 분명했다. 고백을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모든것이 끝이 난 것을 나는 이미 알고있다.


"네, 제가...제가 세바스찬을 사랑하는 거 같아요"


하지만 말할 수 밖에 없다.

직장이든, 톰이든, 세바스찬이든. 더이상 도망치는것은 싫다.

이미 몇번이나 도망쳐왔다. 도망치지 않는다고 말을 하고 다짐하고 맹세하면서도 계속 도망쳐왔다.

아마 도망치지 않는다고 말을 하고서도 또 도망칠지 모른다.

원래 인간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나는 분명 미래에 또 도망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말해야한다. 지금은 도망치면 안된다. 적어도 자신을 향해 늘 항상 용기있게 다가와준 세바스찬에게 그러면 안된다.


크리스의 말에 세바스찬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벅차올랐고 환희에 몸이 떨렸다. 세바스찬은 자리에 일어나 성큼성큼 크리스의 앞으로 다가갔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걸음을 결코 피하지 않았다. 역시 세바스찬은 용기 있는 사람이다. 다가오는 것이 빠르구나.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바로 크리스의 코앞에 다가온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어깨를 잡았다. 가까이서 보니 눈이 붉은게 세바스찬이 울고있는 것 같았다. 우냐고 물어보려고 하는 순간 크리스는 저의 목이 메여있다는 것을 알았다. 몰랐지만 스스로도 울고있었던 것이었다.


"맥키가 그랬어요. 크리스를 포기하라고"


세바스찬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맥키가 누굴까, 세바스찬의 친구일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세바스찬은 눈물이 가득한 얼굴에서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상관 없다. 크리스가 환승을 한 것인지, 톰에게 돌아간 것인지, 이미 남자친구가 있는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 


크리스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였다..

그것 이외에 중요한 것은 없었다. 

중요한것은 오로지 그것 하나였다.


"이번엔 피하지 말아요 크리스"


세바스찬이 나지막히 말하고 천천히 크리스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크리스는 다가오는 세바스찬을 쳐다봤다.


"안 피해요, 세바스찬"


그러고서는 손을 뻗어 세바스찬의 뒷머리를 잡고 힘있게 당겨 자신이 먼저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말캉한 입술이 드디어 서로 닿았고 뜨거운 숨이 겹쳐졌다.


세바스찬이 몇번의 시도들로 실패했던 일이

단 한번의 크리스의 용기로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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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해도 너무 막장스러운것 같지만 로코의 묘미는 후반부의 주인공의 막무가내적인 극적인 행동에 있습니다!(아무말)

정말로 뻥 안치고 초반부분을 쓸때부터 마지막은 >>벽뿌수는걸로 끝내야지<< 라고 생각했어요. 원래는 세바스찬이 뿌수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어서 크리스가 뿌수는걸로 바뀌었습니다(웃음) 읽는 분들이 좀 당황했을꺼같네요.....로코..로코는 이게 재밌단 말이예요..!(변명)


크리스가 뿌수는걸로 바꾼 이유는 로코의 백미는 주인공의 극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구해지면 로코물의 주인공이 아니예요!! 행동하고 바뀌고 행동하고 상대방을 사로잡고 행동해서 난장판을 만드는 것! 그것이 로코물의 주인공!! 아 근데 너무 막장스러워서 웃기네요.....죄송합니다....


요즘 오버워치 너무 재미있어서 큰일이예요. 


세즈반스 로코물 소장본 ▶ http://me2.do/FujaaZMa 



제임스는 코를 훌쩍 거리며 눈물을 닦고 있는 크리스를 향해 어떻게 말을 건내야할지 몰라 초조하게 자신의 탁자를 두드렸다. 복도에서 오열을 하고 있기에 집에 데려온 것은 좋았는데...왜 저기서 울고있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제임스가 마지막으로 크리스를 본건 불과 5분전도 안되어서 였다. 무언가 다짐했다듯이 활짝 웃으며 세바스찬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던 크리스를 보며 '아, 역시 저 둘 뭔가있구나. 아깝네 노리고 있었는데' 라고 생각은 들었지만 제임스가 보기엔 이미 꽤 얽히고 설킨 깊은 사이인것 같은 두 사람의 관계에 끼어드는 것은 무리인것 같아 빠르게 포기했다. 어차피 진심을 담아서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사실 조금 귀찮은 것도 있고. 그래서 그냥 힘내라고만 말하고 저의 집으로 돌아갔다. 아아, 커플 탄생인가. 이 집 벽 굉장히 얇은 것 같은데 밤에 이상한 소리 들려오는거 아니야 란면서. 그런 제임스가 복도로 나온 이유는 바로 '아, 잠깐 나 크리스한테 저녁 먹자고 제안하려고 나온거잖아. 근데 내 저녁찬거리를 안 사왔네' 라는 일상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흥얼흥얼 혼자 콧노래를 부르면서 저녁거리를 사오기 위해서 집을 나왔을 때 제임스는 복도에서 훌쩍이며 울고있는 크리스를 보고 처음에는 잘못본건가 싶었다. 


"크리스? 지금 울어요? 뻔히 울고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한테 말할 내용은 아니었지만 제임스는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크리스는 그냥 훌쩍이는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거의 오열하는 정도로 눈물을 쏟아내며 엉엉 울고있었다. 빌어먹을 알파놈! 울렸으면 자기가 처리하고 가야지 이렇게 두고 가면 어쩌자는거야! 울고있는 자를 그것도 자신의 친절한 이웃이자 어찌보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을 그냥 둘 순 없었다. 제임스는 울고있는 크리스를 다독여주고 일으켜세워주면서 일단은 자신의 방으로 데려갔다. 눈물과 콧물을 질질짜면서 엉엉 울고있는 크리스를 일으켜세우기는 힘들었지만 저도 오메가 치고는 한 덩치 하는 편이었다. 울고있는 크리스를 일으키고 안듯이 끌고가서는 자신의 침대에 앉혔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예요? 네?"

"흐으........저..저..어떻게해요"

"말을 해야 제가 알죠, 크리스"

"저는..저는...망했어요..흐으..."


도대체 뭐가 망한걸까....한숨을 내쉬고 싶어졌지만 그러면 크리스에게 악영향을 끼칠꺼같아 제임스는 꾹 하고 숨을 참았다. 제임스는 냉장고를 열어 마실거리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우유가 조금 남아있었다. 차가운 우유보다는 따뜻한 우유가 안정되기 좋을 것 같아 우유를 냄비에 데우고서는 쪼르르 컵에 담아주었다.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것인지 아직도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고 있는 크리스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컵을 건냈다. "진정하고 이거 마셔요 크리스" 고개를 올려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새빨개진 눈이 마치 토끼같았다. 크리스는 고마..고맛흡이다..라며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우유잔을 건내 받았다. 마치 커다란 어린아이를 돌보는 느낌이었다.


제임스는 이제 크리스에게 우유잔을 건내고 그의 옆에 앉았다. 쿨쩍쿨쩍이는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제임스는 다시한번 물어볼까, 아니면 그냥 위로를 할까 잠시 고민을 하였다. 무언가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위로의 수단이 될 것 같아 물어본 거였는데 크리스의 상태를 보면 물어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제가..흐으..제가....세바스찬을 좋아하거든요?" 안물어보는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크리스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청개구리 같은 사람! 자신의 은인은 꽤나 성가신 사람일지도 몰랐다.


"아..네..뭐..예상을 아예 못한 건 아니예요"

"원래..원래...사이가 좋았던건 아닌데..흐윽.."

"네. 듣고있어요"


크리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어느 드라마보다도 드라마틱한 전개의 로맨틱 코미디였다.





"나도 사실 우리의 이야기가 끝났다고 생각은 안했어"

"그런데 그렇게 피했어?"


헴스워스가 빠진 자리는 삭막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면 둘이 이야기해, 미안해 크리스" 라고 덩치에 맞지 않게 꽁무니를 뺀 헴스워스는 줄행랑 치듯이 방을 나갔고 크리스틑 톰에게 가로막혀 헴스워스에게 뭐라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긴장된다. 역시 톰의 앞에 서면 긴장이 된다. 크리스가 입안이 바짝 말라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전까지 일을 하다 온 모양인지 블랙수트를 입은 톰의 모습은 그 어느때와 다름없이 단정하고 정갈하였다. 무엇하나 빠져나온 것을 용서하지 않는 완벽함. 톰에게서는 절대 세바스찬 처럼 추리닝을 입고 뻗친 머리가 삐죽삐죽 나온 일상적인 모습은 나오지 않을 것이었다.실제로 그와 동거 비슷한 경험을 해본적은 있었지만 흐트러진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톰의 앞에 있으면 그의 연인이었던때에도 늘 항상 긴장되었다.


톰은 크리스의 맞은 편에 앉아 저의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크리스도 톰을 바라보며 꿀꺽 하고 다시한번 목울대를 울리고서는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헴스워스의 주선으로 의도치 않게 만나긴 하였지만더이상 도망갈 생각은 없었다. 이미 톰의 앞에서 몇 번 씩이나 도망친 크리스 였다. '만약 다시 만난다해도 그때는 화려하게 취직을 성공하고 나서' 라는 변명으로 계속 도망치기만 하였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에게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마리아 선배의 결혼식 이후에 톰에게서 꽤 많은 연락을 받았다. 전화부터 시작해서 메세지, 타인의 휴대전화로 걸려오는 전화 등등. 그것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도망친것은 크리스 였다. 그러니까 그는 그답지 않게 타인의 손을 이용한 방법을 사용했겠지만. 크리스는 눈을 감고 세바스찬을 떠올렸다. 이제 세바스찬을 위해서라도 톰과의 일을 지지부진 하게 미룰 수 없었다. 그래, 크리스는 세바스찬을 위해서 용기를 내보기로 한 것이었다.


"용건이 뭐야?"

"너무 많아서 일일히 대답하기 힘드네"

"이제 너한테 왜 찾아왔어? 라는 말은 안 물어볼래. 사실 알고있으니까"


톰을 똑바로 응시하기 힘들었지만 끝까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톰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크리스를 살펴보았다. "그 알파랑 진짜인거야?" 톰이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그는 여전히 어떤 상태에서도 냉정하다. 크리스는 뭐라 말을 할까 고민을 하였다. 하지만 이내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톰을 속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아는 그를 어떻게 속일 수 있으랴.


"아니. 빌어먹게도 니가 생각했던 것처럼 진짜가 아니야. 내가 남자친구인척 부탁한거야. 너한테 안 우습게 보일려고"

"난 니가 어떤 상태여도 널 우습게 본 적이 없었어"

"니가 그렇게 생각해도, 난 그렇게 느끼지 못했어. 그리고 상황도 상황이니까. 대기업에 떵떵거리면서 팀장직으로 승진한 전 남자친구를 상대로 아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하면서 일자리 하나없는 내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겠어"


크리스는 저도 모르게 자조하듯이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렇게 떵떵 큰소리를 내고 나갔는데 지금 이 꼴이 뭐냔말인가. 정말. 어차피 거짓말은 통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이제와서는 그 거짓말의 진실을 스스로가 입밖으로 내뱉고 있으니. 자조하듯이 웃는 크리스에도 톰의 얼굴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다시한번 저의 잔을 들어 술을 들이킬 뿐이었다. 


"...내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날 빨리 잊지 못할꺼라고 생각해서야" 

"4년이나 사귀었으니까"

"아니 시간은 별로 상관없어. 왜냐하면 내가 널 잊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너도 잊지 못했을거라고 생각했어"


오늘 따라 톰의 목소리가 조금 격앙된듯해보였다. 마치, 그날 이별을 선언했던 날처럼. 땀으로 축축히 젖은 손을 크리스가 바짓단을 주물러 닦았다. 나를 잊지 못했다. 등에서 소름이 돋아나고 심장이 두근 하고 뛰어올랐다. 이게 기뻐서인지 슬퍼서인지 아니면 화가나서인지는 몰랐다.


"내가 너한테 연락을 안한건, 자존심이 강한 너인걸 알아서야. 니가 화를 좀 식히기를 기다렸어"


"그때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안들었으니까. 그래서 그런거였어"


"그때의 넌 내 얼굴을 보는것만으로도 화를 냈으니까"


역시 톰이다. 나보다 나를 잘 안다. 나보다 나를 잘 아는 이가 있는것은 기쁜일인걸까, 나쁜일인걸까. 적어도 크리스에게있어서는 톰의 성질은 불유쾌했다. 모든것을 간파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래, 맞았다. 아마도 톰의 행동은 잘한 선택이었다. 스스로도 저의 성격을 알기에 알았다. 


"하지만 나도 할말은 많아. 나도 하고싶은 말을 다 참고 너에게 연락하지 않은거야" 


그때의 톰의 기분을 크리스는 상상이라도 해봤을까.



톰도 스스로가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알고있다. 크리스의 워커홀릭적인 성향을 몰랐던 것도 아니었고, 크리스가 일에 대해 많은 욕심을 갖고있었던것도 알았다. 자존심이 강하고 승부욕이 넘쳤으며 괄괄한 성격으로 마리아 선배와 함께 '오메가 답지 오메가'라는 수식어가 달라붙어 사내내에서도 꽤 유명한 사람인것을 연인인 톰이 모를리가 없었다. 크리스의 성질을 잘 알고있음에도 톰이 말실수를 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프로포즈에 실패했으니까, 크리스가 저의 결혼을 거절했으니까. 아무리 냉철한 사람이어도 사랑하는 연인의 거절은 꽤나 타격이 컸을터였다. 톰에게 있어 크리스의 거절 이유도 충격적이었다. "결혼을 하면 오메가가 불리하잖아. 난 더 일하고 싶단말이야. 내가 좀 더 안정되면 그때 이야기하자" 좀 더 안정? 도대체 언제쯤의 이야기란 말인가.사회적으로 오메가들은 대다수가 결혼을 하고 일을 그만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오메가들이 대부분 결혼을 하고 가정주부로의 전향을 꿈꾸는 것도 한 몫 했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이미 정착된 사회제도와 사회의 시선의 탓이 더컸다. 그래서 오메가가 결혼을 하는 것이 커리어에 안좋다는 것을 톰도 이해를 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안정되고 난 뒤라니? 어느정도의 기간인가. 그건 도대체 몇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보통의 오메가가 한 개인으로 회사에 자리를 잡는것에는 실력과 시간과 그리고 운 세가지의 요소를 갖춰야했다. 크리스의 나이가 27살이니 아마도 안정적인 자리를 잡으려면 적어도 5년은 걸려야 하는 일이었다. 5년. 그래도 그게 성공이 되면은 다행이지 실패할 가능성도 컸다. 


"만약 기다리고 나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면?"

"..그게 무슨소리야? 날 못믿는거야?"

"못믿고 안믿고의 이야기가 아니잖아"

"그땐.....그땐 더 기다려 줘. 결혼때문에 내 인생을 막을 순 없잖아"


나와의 결혼이 니 인생이 막아지는거야? 아무리 냉정한 톰이어도 크리스의 그 말은 큰 상처였고 자존심의 상처였다. 

그래서 였다. 답지 않게 소리를 높여 화를 내기 시작한 것은. 결정적인 말 실수가 튀어나온 것은.


"어차피 오메가로는 성공하지 못해"


톰은 후에 이 말을 하지 않았으면 이라는 후회가 섞인 가정을 수십번이나 했다. 결정적으로 크리스는 이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헤어짐을 고했고 톰은 바로 크리스를 붙잡는것보다 그를 기다리는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해 잠잠히 있었다. 톰이 생각한 시나리오대로라면은 어느정도 화가풀린 시기를 정확하게 말하자면 재취직에 성공하여 어느정도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된 크리스를 재회하여 그때의 일을 사과하고 다시 천천히 이야기 해보는 것이었다. 자신의 시나리오가 꼬아지게된것을 톰은 저의 탓도 아니고 크리스의 탓도 아니고 중간에 끼어들은 알파놈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만 없었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를 도발하는 그 눈빛과 행동. 톰은 세바스찬만을 생각하면 치가 떨렸다.




"나도 그때 당황했어. 크리스, 니가 결혼을 바로 승낙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아니, 거절을 한다해도 조금 더 고민을 하고 거절할 줄 알았어"


"나만 너를 스스로의 짝이라고 생각지는 않았을테니까"

"그래, 그때 나도 너를 내 짝이라고 생각했어"

"...그때는 내가 미안했어, 크리스"


결국 톰이 한발 뒤로 물러섰다. 지금 재결합을 원하는건 톰이지 크리스가 아니었다. 톰이 양보하고 양보해서 크리스를 어르고 달래야 할 때였다. 


크리스는 톰의 사과에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그 자존심 강한 톰이 이렇게 바로 사과를 하는 것은 드문일이었다. 둘은 사귀던 당시 별로 싸우지 않는 커플이었다. 설사 싸운다 해도 대부분은 크리스의 잘못이었고, 크리스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을 알았기에 화가 난 톰에게 다가가 사과를 하는 형식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말실수를 했던것도 알아, 결혼이 많이 성급하면 미뤄도 괜찮아"

"..갑자기..갑자기 그런말을 해도"


역시 톰은 크리스를 어떻게 다뤄야할 지 알았다. 크리스는 방금전 공격적인 태세는 어디로 가고 톰의 사과에 방어막이 깨져 금세 본인의 본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널 사랑해...크리시"


톰은 알고 있었다. 

크리스가 아직 저를 '완벽히'잊지 못했다는 것을.




감정적이게 된 상태는 불리하다. 크리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톰은 꿰뚫고 있었다. 저가 세바스찬에게 마음이 있는것과 그리고 아직 톰을 완벽히 잊지 못했다는 것을.스스로보다 스스로를 더 잘아는 톰인것을 알면서 왜 항상 이렇게 방심을 하는지 몰랐다. 크리스는 마음속으로 세바스찬을 떠올렸다. 그와 다시 시작하기 위해, 새 출발을 하기 위해서 용기를 내고 만난 톰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흔들려서 어떻게 하냐는 말인가. "..다음에 다시 얘기해" 크리스는 결국 한발짝 물러나기로 했다. 이것은 도망이 아니었다. 누가본다면 정신승리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전략적 후퇴였다.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톰을 만나 이야기하는 것은 불리했다. 크리스는 헴스워스에 의해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를 만난 거였다. 크리스가 자리에 일어나 바로 문을 열고 밖을 향했다. 톰이 차라리 저에게 화를 냈으면 몰라도 이렇게 사과를 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자꾸만 잊으려고 했는데도 톰과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저를 크리시 라고 다정하게 부르며 웃고있는 톰이 떠올랐고 그와 웃으며 달콤하게 사랑의 속삭임을 나눴던것이 생각났다. 역시 4년이라는 시간은 길었고 톰은 막강했다."크리스, 오늘은 도망 안간다고 했잖아" 톰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달리듯이 나가는 크리스를 바로 뒤쫓았다. 


"다음에, 다음에 이야기 하자고! 다음에!"

"그놈의 다음이라는 이야기좀 그만좀해!"


처음으로, 톰이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크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로 눈 앞에는 격앙된 표정을 짓고있는 톰의 얼굴이 보였다. 톰은 크리스가 도망가지 못하게 그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다. 거리의 인파들은 신경쓰이지 않았다. 수 많은 사람들의 시선도 보이지 않았고 수근거림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만큼 둘은 서로밖에 의식하지 못했다. 서로의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이 도대체 언젠데?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근데 그게 언젠데? 도대체 언제인데?"

"내일..내일 내가"

"정말 내일이면 될 것 같아?"


"..아니..모르겠어..근데..지금은..지금은..아냐" 결국 크리스가 울음을 터뜨렸다. 크리스는 결국 머릿속에 세바스찬에 대해서 새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를 떠올리기에 앞에있는 톰은 너무 무섭고 크리스는 흔들렸다. 4년의 뜨거운 연애가 단순히 싫증으로 끝났으면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둘의 연애는 그런 이유로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모르겠다고 우는 크리스를 잡고 톰은 바로 입을 맞추었다. 크리스는 처음에는 반항한듯 해보였으나 이내 톰의 입맞춤에 응하듯이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입맞춤을 피하기엔 크리스는 아직 톰에게 마음이 남아있었고 바로 눈 앞의 알파는 너무 매력적이었다. 이곳이 길 거리 한가운데라는 것도 잊고 둘은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 열정적인 시간이 지나자 쪼옥 하고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랑 다시 시작해" 명령같은 톰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바스찬은 결국 소개팅이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 거의 처음으로 해본 소개팅은 지루하였고 세바스찬은 그답지 않게 오메가를 기쁘게 하는 방법을 모조리 까먹은것처럼 지루한 목석처럼 굴었다. 처음에는 잘생긴 외모로 세바스찬에게 호감을 갖고있던 오메가여성도 "네..네..네..아..그렇구나.." 라는 재미가 없는 대답만 하는 그에게 화가나 흥 소리를 내면서 자리를 뛰쳐나갔다. 세바스찬은 떠나가는 여성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그저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맥어택한테 혼나겠네"


초라하게 혼자 자리에 앉아 이런 소리를 중얼거리니 참 꼴사나운 모습이었다. 후- 하고 한숨을 불어내쉬며 세바스찬은 방금 전 크리스를 떠올렸다. 저에게 무슨 할말이 있어보이는 듯했는데.무엇이었을까. 이야기라도 들었어야 하는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자니 바로 맥키의 호통이 들리는 것 같았다.


"만약 그새끼한테 연락오면 다 무시해, 다 씹어. 알았어? 그새끼 환승까지 찍어놓고 너한테 연락하는거면은 그런거라고. 나갖기는 싫고 남주기는 아깝고. 아니면 어장관리라든가. 여튼 크리스인즈 제리스인지 모르지만 다 무시해!"


당시 세바스찬은 눈물콧물을 다짜내고 있었다. 엉엉 울면서 크리스 연락을 어떻게 무시하냐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맥키의 가슴을 더 타들어가게 햇었다. 

그래도 오래된 친구의 깊디 깊은 조언이었다. 자신을 생각해서 그런말을 했다는 것쯤은 세바스찬도 알고있었다. 맥키와 같이 있을때는 어떻게 그러냐며 맥키의 속을 타들어가게했지만 결과적으로 세바스찬은 맥키의 조언을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크리스 보고싶다. 세바스찬은 반사적으로 또 하면 안되는 생각을 했다. 안돼, 정신차려. 크리스는 임자가 있어. 짝짝- 하고 두손으로 자신의 볼기짝을 때려보았다. 하지만 그래도 계속 크리스의 얼굴과 모습이 생각났다. 방금 전 자신을 향해 방긋 웃으며 할 이야기가 있다던 크리스의 모습이. 세바스찬은 아른 거리는 크리스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서는 고민하듯이 세바스찬은 휴대폰을 들어 연락처를 열었다.




크리스와 톰은 급하게 골목으로 들어갔다. 입맞춤을 끝내 정신을 차린 크리스가 사람들의 시선에 부끄러워 톰을 붙잡고 들어간 것이었다. 톰은 저를 끌고가는 크리스에게 반항하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자, 크리스"


어두운 골목 속, 톰은 거리 때문에 달라붙듯이 앞에 있는 크리스를 향해 다시한번 말했다. 이 골목은 전적으로 톰에게 유리했다. 크리스는 숨을 깊게 한번 들이셨다. 그와 이렇게 가까이 있자 개방을 하지 않은 상태의 톰의 시원한 알파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향에 다시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크리스는 톰의 손목을 잡고있던 저의 손을 들고서는 짝 하고 스스로의 볼기짝을 두드렸다. 갑작스러운 톰의 만남과 사과 그리고 달콤한 그의 제안과 입맞춤에 순식간에 흘려들어갈뻔했다. 크리스는 다시한번 생각했다. 스스로가 왜 톰과 헤어짐을 결심했는지. 그것은 비단 '결혼'때문만은 아니었다. 크리스에게 있어서 결혼보다 더 큰 문제가 있어서 톰에게 이별을 고한것이었다.


"..아니, 나는 다시 시작하지 않을꺼야"


크리스의 대답은 톰이 기대하지 않은 말이었다.


"니 말이 맞아. 나 너 완전히 다 못잊었어. 그리고 지금도 흔들려. 이렇게 니가 내 앞에 서있을때마다 옛날이 생각나고 심장이 떨려. 머릿속에서는 4년이라는 긴 시간이 담겨져있는 추억이 떠올라. 근데...그래도 안돼"

"결혼 때문이야? 내가 기다릴게. 크리스"

"결혼때문이 아니야. 톰"

"그러면 그 알파때문이야?"

"아니, 아니야. 톰.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너랑 왜 헤어졌는지? 꼭 결혼때문은 아니야"


이건 톰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말이었다. 결혼때문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놀란 톰이 드물게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줄곧 결혼의 문제와 톰의 말실수때문에 이별했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이 아니라면 둘은 어울렸고, 잘 맞았으며 많이 닮았다. 서로 완벽한 한쌍이었다. 일말의 실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크리스가 왜 저에게 헤어짐을 고했는지, 결혼이 아니라면 이유가 무엇인지. 그러면 이유가 무엇이냐라는 말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크리스는 조용히 있는 톰을 향해 고개를 들고 눈을 똑바로 뜨며 말했다.


"톰. 니가 나몰래 날 도와줘서야"




크리스는 자신의 일에 프라이드도 높았고 또 자신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실제로 크리스의 업무성과는 높은 편이었고 실적은 다른 알파들과 대등, 아니 때때로는 그 이상을 실현했을때도 많았다. 몇몇 알파듯이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것도 알고 있었다. 오메가주제에 나댄다는 뒷담화도 쉴 새 없이 들었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어차피 이게 내 실력이니까. 그들의 불평과 불만도 저를 향한 시기와 질투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오메가는 성공하지 못한다고? 그냥 집에서 청소를 하는게 보통이라고? 엿먹으라고 그래. 척척 쌓여가는 자신의 커리어에 크리스는 자기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그건 크리스가 아무것도 몰랐을때의 일이었다.


"어차피 오메가로는 성공하지 못해!"


결혼 문제는 큰 싸움이 되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말투의 톰에게 화도 났고 결혼을 강행하려는 듯한 태도도 불유쾌하였다.  크리스가 계속 안된다고 하자 톰이 저런말을 내뱉었다. 톰의 말에 이미 화가나 감정적일대로 감정적인 크리스가 울컥하여 소리를 높였다


"왜? 왜 못하는데? 웃기지마, 톰. 오메가여도..!"

"사회적인 시스템이 그렇게 만들어졌어. 절대 오메가가 쉽게 오르지 못하도록"

"...하지만! 난! 나는 실제로 잘 해내고있어! 오메가지만 다른 알파들과 대등하게 일하고있고, 오히려 실적도 더 높을때가 많아! 사회적인 시스템이란 말은 변명에..!"

"내 도움 없이도 그럴 수 있을꺼라 생각해?"


뭐? 순간 톰의 말을 잘못들은건가 크리스는 스스로의 귀를 의심하였다. 톰의 도움이라니 무슨. 난 톰에게 도움 받은 적 없는데? 크리스보다 높은 위치에있는 톰이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크리스에게 좋은 혜택을 줄 수 있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은 크리스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구분하여 공과 사를 지켰다. 그런데 도움이라니? "그게 무슨소리야" 톰에게 묻는 크리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메가의 실적을 알파들이 그냥 넘어갈꺼같아? 당연히 아니지. 자존심만은 누구보다 센 종족이니까. 몇번이나 크리스 너의 공을 뺏으려는 시도가 있었어"


한번도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게 싫었어. 알파가 오메가의 공을 뺏는일은 다반사였지만. 크리스, 너에게만큼은 그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진 않았어"


확실히 대다수의 오메가들은 알파보다 실적이 낮은 편이었다.


"그래서 내가 지켜준거야. 그러지 못하게, 너의 공은 너가 돌려받을 수 있게"

"그..그게무슨.."

"하지만 내가 그렇지 않았더라면? 전처럼 내가 너를 지켜줄 수 없다면?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할래?"


아무것도 몰랐었다. 톰이..톰이 그런짓을 했었다니. 자신을 남몰래 보호하고 있었다니. 크리스는 톰이 갑작스럽게 말해놓은 진실에 크게 충격을 받고 말았다. 망치로 세게 뒷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싸워서 뜨겁게 올랐던 몸의 열이 차갑게 식었고 뱃속안부터 얼음이 쌓여있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은 오메가로서 힘들게 커리어를 쌓아온것이아니었다. 자신은 다른 오메가와 다르게 알파의 힘을 얻어 알파와 똑같은 위치로 쌓아온것이었다. 이는 어찌보면 크리스의 실적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다른 오메가와 비교하여 차별대우를 받고있었던 것이었다. 크리스는 다른 오메가와 다르게 자신의 실적 그대로를 평가 받았다. 차별받지 않은 것은 어찌보면은 다른 오메가에 비해서는 크리스는 차별대우를 받은 것이었다. 크리스는 지금까지 기고만장하게 굴며 다른 오메가들을 무시했던 스스로의 과오가 빠르게 떠올르며 혼란스러웠다. 온몸이 차가워져 추위에 떠는것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충격적인 이야기로 혼란스러운 머릿속, 크리스는 톰에게 소리를 지르며 이별을 고했었다.






"겨우 그런거였어? 겨우 그런"

"겨우가 아니야 톰. 그건 나한테 가장 중요한 일이었어"


이제 혼란스러운 머리가 진정이 된 크리스가 똑바로 톰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세바스찬때문은 아니야. 비록 톰과 다시 마주하는 이유는 세바스찬때문이었지만 톰과 재결합을 하지 않는 이유는 세바스찬 때문이 아니었다. 크리스는 결코 알파에 좌지우지되어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오메가가 아니었다. 크리스는 항상 '자기자신'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이기적인 오메가였다.


"설마 나한테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어? 아니야, 톰. 그건 정말 아니야. 도대체 날..날 뭘로 생각한거야? 내가 도와달라고 했어? 그건 절대 나를 도와준게 아니야. 날...날 무시한거라고"


비록 말이 떨리긴 하였지만 크리스는 톰에게 자신의 생각을 똑바로 밝혔다. 그래, 크리스가 톰과 헤어짐을 고한 이유는 이것때문이었다. 이건 크리스에 대한 모욕이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불리한 위치의 오메가로 싸워왔다고 믿었다. 그리고 큰 실패없이 자신의 커리어를 쌓았으면서 때때로는 알파에 대한 차별로 일을 못하겠다는 오메가들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자신의 실력이 좋으면 되는걸, 왜 남의 탓을 하는걸까? 이런 오만한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크리스의 착각이었고 지금까지의 모든것은 톰의 보호가 있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것을 알았을때 크리스의 절망과 실망. 

결국 알파인 톰은 이해를 하지 못할꺼였다.


"톰, 너한테 아직 흔들려. 아직 너를 다 못잊었어. 너를 보면 옛날 추억이 떠오르고 가슴이 떨리고 몸이 먼저 반응해" 


"하지만 난 너랑 재결합 같은건 하지 않을꺼야. 세바스찬때문은 아니야"

.

"내 자존심때문이야"


크리스가 지키는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스스로의 프라이드였다.


크리스의 말에 톰은 단단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게 재결합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렇게 재결합이 완전히 불가능 할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었다. 그리고 설마 이유가 결혼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 때문이라니. 기가막히고 어이가 없으면서도 너무 크리스 다운 이유여서 납득이 갔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저처럼 상대방을 못잊었으면서 어떻게 이런 결단을 내리는지 톰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뒤돌아 골목을 빠져나가려는 크리스의 손을 톰이 붙잡았다. 지금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직각점으로 깨달았다. 지금 크리스를 보내면 크리스는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톰이 말했다. "한번만..한번만 그 잘난 자존심을 꺾으면 안돼? 날 위해서 한번만 그래주면 안돼?"  기회는 단 한번이면 충분하다. 단 한번이라도 좋다. 한번만, 다시 한번만...


"그러면 니가 꺾어. 톰"

"...뭐라고?"

"잘난 자존심 나만있는거 아니잖아. 니가 꺾어, 톰. 나한테 결혼하고 일 그만두라고 했지? 너는 그럴 수 있어? 내가 너한테 나랑 결혼하자 일 그만둬. 하면은 일 그만둘 수 있어? 왜 나만 자존심을 꺾어야돼? 그 한번의 자존심 니가 꺾으면 안돼?"


이건 예상치 못한 역공격이었다. 보통 결혼을 해서 오메가가 일을 그만두는 경우는 많아도 알파가 그만두는 경우는 없었다.

톰이 대답을 못하자 크리스가 예상했다듯이 피식 웃었다.


"너랑 나는 너무 닮아서 안돼, 톰"

 

"둘다 이기적이잖아. 우리한테 어울리는건 우리랑 정 반대의 사람이야"


방금전 눈물콧물 흘리며 울고있던 크리스는 없었다. 

톰은 크리스의 말에 잡고있던 그의 손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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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대가 너무 뒤죽박죽이어서 헷갈리실지도 모르는 분을 위해 스피드웨건타임!


현재의 크리스 : 제임스방에서 질질짜면서 자기 얘기하는중 

현재의 세바스찬 : 크리스한테 소개팅 간다고 말하고 소개팅 개판남. 

히들이와 크리스의 거리 씬 : 과거의 이야기(세바스찬이 크리스의 키스씬 목격했을때)

히들이와 크리스의 쌈박질 이야기 : 대 과거의 이야기(크리스와 히들이가 헤어졌을때)


다들 읽으시면서 혼란이 오시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너무 뒤죽박죽인 타임라인인것 같아서(웃음) 이제 정말 끝이 다왔습니다.

하루에 한편씩 올라올 수 있을꺼같아요! 진짜로!


세즈반스 소장본 : http://me2.do/FujaaZ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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