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JunkFood
“허억-”
버키가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눈을 떴다.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은 몸은 물을 빨아들인 솜처럼 무거웠다. ‘여기가 어디지?’ 만약 다음에 눈을 뜨게 된다면 보이게 되는 것은 천장이 아니라 스티브의 얼굴 일 것이라 생각 했다. 나무로 된 천장은 낯설면서 묘하게 익숙했다. 설마 와칸다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버키가 마른 침을 삼키며 몸을 움직였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다. “..이게 뭐야” 삐걱 거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무의식중에 사용한 것은 왼 팔이었다. 왼 팔. 현재 존재하면 안 되는 팔. 버키가 떨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왼 손을 들었다. 버키의 시야에는 단단하고 굵은 성인 남성의 ‘보통’ 팔이 보였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이 지금 보이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미래의 최첨단 기술로 인해 만들어진 인공 팔인가? 언제 다시 달아준 거지? 시험해보기 위해 버키가 왼쪽 어깨를 움직이며 팔을 돌려보았다. 메탈암으로는 느껴질 수 없었던 뼈와 근육의 일체감이 느껴졌다. 진짜다, 이건 진짜 내 팔이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다시 팔이 생길 수 있는 거지? 낯선 곳에 눈을 뜬것도 익숙지 않은데 갑작스레 생긴 자신의 팔에 정신을 팔리고 말았다. 팔에 정신이 팔려 몸을 푸드덕 움직이고 있는 사이에 끼이익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이곳으로 들어왔다.
“버키? 일어났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스티브였다. 하지만 생각했던 스티브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놀랍게도 캡틴아메리카, 살아있는 전설, 미국의 영웅인 스티브가 아니라 항상 마음 한 켠에 담아져있던 브루클린의 작고 마른 청년인 스티브의 모습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그래, 이 낯설지 만 익숙한 곳은 스티브의 방이었다. 과거에 잘 곳 이라고는 좁은 1인용 침대뿐인 스티브의 방에서 버키는 종종 억지로 끼어들어 잠을 청한 적이 있었다. 비좁은 침대에 서로 맞닿은 살결과 풀풀 나던 먼지 냄새,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공간속에 지금 다시 서있는 것이다.
“무슨상황이냐니...기억 안나? 술을 얼마나 마신거야. 늘 있는 일이지, 너는 어제 누군가와 술을 거하게 마셨고 또 너희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 집 문을 두드렸고 기어코 바닥에 자라고 해도 꾸물꾸물 내 침대에 기어들어왔고 또 나는 술 냄새 나는 니 옆에서 잠이 든거지”
“아니..그게 그게 아니라”
스티브는 버키의 이게 무슨 상황이야? 라는 말을 70년 전 스티브와 버키가 자주 겪던 해프닝을 묻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런 의미’로 묻는 것이 아니었던 버키는 혼란스러워 어지러운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짧은 머리카락이 만져졌다.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속이 많이 안 좋아? 안색이 창백해” 버키가 혼란스러워 하는 것을 단순한 숙취로 여겼는지 스티브가 짓궂은 표정을 거두고 천천히 버키의 곁으로 다가왔다. “버키” 스티브가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 안색이 하얗게 질린 친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뼈밖에 느껴지지 않은 딱딱한 손가락의 감촉이 어깨로부터 느껴졌다. “스티브...나..” 생생한 감촉이 느껴지자 울컥 하면서 뭔가 뜨거운 것이 안속에서부터 솟구쳤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솟구친 열이 머리끝까지 점령하였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스티브를 단숨에 와락 하고 안았다.
“나..돌아온거야?...”
*
스티브의 배에 얼굴을 묻고 버키는 오랜 시간 동안 눈물을 흘려보냈다. 갑작스럽게 이유를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서 울고 있는 자신의 친구를 보며 스티브가 느꼈던 감정은 당황스러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만해도 기분 좋게 취하고 들어와서 어느 때와 다름없이 숙면을 취한 친구가 일어나자마자 자신을 붙잡고 우는 것이었다. 당황을 넘어서 황당스러운 상황이었다. 버키가 눈물을 그치자 스티브는 버키의 손을 잡고서는 부엌의 식탁에 앉혀놓았다. 방금 전 감정의 여파가 남아있는지 버키는 잘생긴 얼굴을 잔뜩 찡그린 상태로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평소의 버키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스티브는 우유를 냄비에 넣고 살짝 끓여 따뜻하게 데운 상태로 버키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러고서는 버키의 맞은편에 앉아 재촉하지 않고 버키를 기다려주었다. 자신의 소중한 친구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울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해주기를. 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버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악몽을 꿨다고?”
“악몽...이라고 하기엔 너무 길고 생생한데”
어린애도 아니고 악몽을 꾸고 지금 그렇게 엉엉 울었단 말이야? 라는 말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스티브가 인내심을 담아 꾸욱 참아내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덩달아 나올 것 같은 웃음도 참느라 힘이 들었다. 버키는 스티브가 웃음을 참고있는것도 모르는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스티브가 슈퍼혈청을 맞고 캡틴 아메리카가 된 일, 그 뒤 자신을 구출한 일, 자신이 기차에서 떨어진 일, 스티브가 뉴욕을 구하기 위해 빙하에 얼려진 일, 미래에 다시 일어난 일 그리고 자신이 윈터솔져로 활동한 일. 몇 십 년을 걸친 장황한 내용들이 막상 밀로 나오자 삼십분이 안 되어 끝이 났다.
“미안, 버키. 진지한데 조금 웃어도 될까?”
“웃을 일이 아니야, 스티브. 단순히 꿈이 아니라니까?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져 내 팔이..”
“..니 팔이 강화된 메탈암이었던 순간이?”
“그래..!”
스티브가 이제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자신의 친구가 이렇게 진지하게 악몽에 대해 토로하고 있거늘, 이 상황이 그저 웃기기만 했다. 아무리 그대로 캡틴 아메리카라니, 미국 대장이라니. 네이밍 센스가 너무 떨어지잖아. 윈터 솔져라니, 겨울 군인이라니. 너무 멋있어서 동경해버릴 것 같잖아.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아 스티브의 몸이 덜덜 떨렸다. 버키는 자신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웃기만 하는 저의 친구가 야속하기만 했다.
“스티브, 진지하게 듣고 있어? 지금 엄청난 일이 벌어진 거라고. 캡틴 아메리카인 네가 다시 이렇게 되다니. 미국이 난리가 날꺼라고!”
“아, 잠깐만. 버키. 이제 못 참겠으니까 이야기하지마봐. 정말...정말 꿈에 그리운 일이네. 내가 그러니까 미국대장님이 되어서 전쟁과 하이드라에서 세계를 구하다니. 그 꿈 소설로 쓰면 잘 팔릴 것 같다”
“꿈이 아니라니까!”
버키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그 진지한 모습조차 웃길 따름이었다. 결국 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스티브의 앞에 버키가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쭈욱 올렸다. 이 그리운 곳을 돌아온 것과 스티브와 다시 재회한 것은 감동적이었지만 천천히 생각해보면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잠들었던 시대를 생각하면 그를 따르던 동료들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리더-캡틴 아메리카-가 사라진 것이었다. 큰일도 이런 큰일이 없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스티브의 몸을 어떻게 되돌려야할지, 해결방법이 떠오르지 않은 문제에 버키의 골머리가 썩어 들어갔다.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이런저런 가정을 생각하던 도중, 버키의 뺨에 딱딱한 촉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올려보니 어느새 자신의 가까이로 다가온 스티브가 자신의 뺨을 붙잡고 있었다. 이게 무슨..? 버키가 미간을 찌푸리자 스티브가 자신의 손가락으로 버키의 통통한 볼살을 잡아당겼다. 쭈우욱- 하고 효과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게 므하느지시야”
“아프지?”
“벼로아프지는아느데”
“그래?”
아프지 않다는 버키의 말에 스티브가 좀 더 힘을 줘 쭈우욱 하고 버키의 볼을 늘렸다. 거의 최대한으로 볼이 잡아당겨지자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프아 그마네” 지금 서로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망정 스티브는 버키에게 어린애와 같은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프지? 그래, 버키. 꿈은 끝났어. 지금이 현실이라고” 현실. 순간 버키의 심장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꿈이 끝났다고? 지금이 현실이라고?
“동양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호접지몽’이라고 알아?”
“호...접지몽..?”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나비가 된 꿈을 꿨는데, 근데 그게 너무 실감이 넘쳤다는 거야. 마치 정말 나비의 삶을 산 것 처럼. 근데 일어나보니 그 사람은 사람이었지. 하지만 그 꿈이 너무 생생해서 잊혀지지 않았다는 거야. 그래서 이런 말을 남겼어.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건가, 나비가 내가 된 꿈을 꾸고있는건가. 꿈이 너무 생생해서 현실과 구별할 수 없는걸 말해. 넌 지금 그런 꿈을 꾼 거야”
“말 도안돼..그럴 리가 없어”
“원한다면 뺨이라도 한 대 내리쳐줄까? 꿈이라면 깰 텐데”
스티브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호접지몽. 버키는 그런 스티브의 장난을 받아들여주지도 못하고 방금 들었던 말을 웅얼거렸다.
모든게 꿈이었다.
정말로?
*
브루클린으로 돌아온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돌아왔다’라는 표현을 쓰면 스티브가 이상하게 생각할 지도 몰랐지만, 자신에게는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술에 취해서 어느 때와 같이 스티브의 침대에서 잠을 들었던 날의 하룻밤 꿈. 겨우 하룻밤 꿈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길고 지독하고 끔찍한 꿈이었다. 아무래도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다며 스티브가 자신을 집 까지 데려다 주었다. 70년 전의 나, 과거의 나였더라면 너에게 배웅을 받을 정도로 약하지 않다며 너스레를 떨었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나는 스티브가 말한 대로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순순히 호의를 받아들였다.
스티브의 배웅으로 집 안에 들어서면서 버키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을 뻔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도 동생들. 그들은 하룻밤 정도 돌아오지 않은 버키를 보고서는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었다. “또 스티브의 집에서 잤니?” “자꾸 그렇게 폐 끼치면 안 된다” 식탁에 앉아 동생들에게 줄 과일을 깎아주는 어머니의 말씀도 신문을 넘기며 엄한 척 꾸짖는 아버지의 말씀도 너무 오랜만이고 따뜻했다. 그대로 주저앉아 오열을 하자 다들 모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서는 버키의 주위에 원을 그리듯이 모여 무슨 일 이냐며 그를 달랬다. 버키가 했던 말은 똑같았다. “돌아왔어. 돌아왔어요”
정말로 돌아온 것일까. 다시 브루클린의 일상으로 돌아온 버키는 제임스 뷰캐넌 반즈로서 생활을 하려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 많은 사건과 사고를 그저 꿈이라고 치부하고 없었던 일로 생략하기에는 자신은 너무 달라져 있었다. 그렇다고 스티브에게 그랬던 것처럼 모두에게 자신의 ‘꿈’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기란 어려웠다. 그 이야기를 실제라고 하기에는 증거도 없었고, 만약 자신이 겪었던 꿈들이 실제라고 말한다면 ‘지금’은 어떤 상태란 말인가? 시간여행인가 무엇인가? 시간여행이라고 한다면 자신은 팔 한쪽이 없는 상태로 브루클린에 도착했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의 왼팔은 멀쩡하고 거울에서 본 자신의 모습은 박물관에서 보존되어있는 버키 반즈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자신이 겪었던 일은 전부 꿈이고, 이곳이 정말 현실인걸까? 스티브의 말대로 호접지몽처럼 현실과 꿈을 혼동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여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버키가 선택한 길은 ‘일단 모두 잊고 현대의 시대를 즐기자’ 라는 것이었다. 너무 낙천적인 것일지 모르지만 고민하여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누군가가 해결책을 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냥 지금의 생활을 무시하기에는 곁에 있는 가족들은 따뜻하였고 옆에 있는 스티브는 달콤하였다. 전 보다 조금 더 무뚝뚝해지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버키를 걱정 하는 것인지 가족들과 스티브는 더욱 그의 안위를 살펴주곤 하였다. 스티브는 특히 그랬다. 기억하기에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딱딱한 스티브는 자신에게 먼저 무언가를 하자며 권유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매일같이 버키의 집에 찾아와 영화를 보자는 둥, 밖에 나가서 무얼 하자는 둥 신경을 써주며 곁에 있기를 자처하였다. 버키는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이때의 스티브와 버키는 아직 연인이 아니었다. 풋풋하게도 서로에 대한 마음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어 고백하지 못하고 서로를 의식하고만 있던 시기였다. 미래에 –비록 꿈이라고 치부 되었지만 – 이미 서로가 연인인 것을 알고 있던 버키에게는 달콤하면서도 낯간지러운 시간이었다. 그때의 스티브 보다 훨씬 더 미숙하고 어리석고 사랑스러운 스티브는 은근슬쩍 보내는 시선이나 행동 몸가짓으로 버키를 좋아한다는 분위기를 잔뜩 뿜어내고 있었다. 이때의 난 왜 그걸 몰랐을까. 아마도 자신도 스티브만큼 미숙해서였겠지. 그런 스티브를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아니 엄청나게 좋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행동과 티를 내는데 그것이 기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버키는 이 달콤한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그래 그러기로 다짐했다. 그랬었다. 그런데.
약속은 15시의 영화관 앞이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간단하게 저녁이나 먹자고 하였다. ‘이미 봤던 건데....’ 지금의 일어난 일들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버키에게는 모두 과거형이었다. 영화는 시시한 내용이었다. 여자와 남자가 사랑에 빠지고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뻔하고 뻔한. 그럼에도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역시 스티브와 만나고 싶어서였다. 물론 그에게 ‘영화보기싫어’ 라고 말했다면 다른 구실로 약속을 잡았겠지만 굳이 그의 수고를 더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버키는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 영화관을 향해 길을 거닐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 낯설면서 익숙했다. 미래에 보았던 것과 다르게 이 시대의 색은 대부분 비슷했다. 노랗지만 어딘가는 어두운, 회색빛을 띄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모두들 비슷한 색의 옷을 입고 건물도 비슷한 색으로 칠해져 있다. 텁텁하다고 하면 텁텁할 수 있는 이 색들 속에 자신도 비슷한 색을 입고 거닌다는게 꿈만 같았다.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나의 꿈을 꾸고있는것인지”
정말로 그 모든 것은 꿈이었을까. 이게 현실이고 그건 정말 긴 악몽이었을까. 이제는 고민하지 않고 놓아도 되는 것일까. 이 행복한 일상을, 작지만 소중한 일상을 보내도 되는 것일까. 제임스 뷰캐넌 반즈로 돌아가도 되는 것일까. 아무리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돌아온 것인가, 정말로. 그렇게 갑작스럽게 주어진 무한한 행복에 어찌할 줄 몰라 멍하니 길을 걷고 있던 때, 버키는 무언가를 목격하였다.
무언가를 보았다. 목격해버렸다. 모두와 비슷한 색을 띄고 있는 회색빛 브루클린 속에서 유일하게 쨍하게 컬러 빛을 띠고 있는 남자를. 그러니까 이 시대의 브루클린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남자를. 갑작스럽게 이제 일상에 동화되어 모든 것을 받아들여도 될까 싶을 때, 어느 날처럼 스티브와의 약속에 맞추기 위해 걷고 있을 때. 그게 정말 꿈이라고 생각해? 라고 묻는 듯이 그 남성을 목격하고 말았다.
“럼로우...?”
절대 지금의 브루클린에서 볼 수 없는 자를.
*
럼로우였다. 분명 럼로우였다. 착각같은게 아니다, 환영같은게 아니다, 잘못본게 아니다,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 럼로우였다. 시대에 섞이지 못한 반물질처럼 이질적인 존재로 그 수많은 인파속에서 자신의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버키가 알고 있는 럼로우였다.
럼로우를 멈추기 위해 버키가 소리를 질렀다. “럼로우!” 하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유유히 인파속에 섞여 앞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그를 잡기 위해 인파를 헤치고 뛰었지만 어쩐 일인지 뛰고 있는 버키가 걷는 그를 쫓을 수 없었다. “거기서, 럼로우!” 손을 뻗어가며 급하게 사람들 사이로 달렸지만 결국 잡을 수 없었다.
럼로우를 목격하고 난 후, 버키는 다시 일상 속에 섞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을 꿈으로 치부하고 이 행복을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싶을 때 버키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인지 악마와 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예지몽을 꾼 걸까? 예지몽이라면 미래의 럼로우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럼로우의 존재가 버키의 가슴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럼로우가 있다는 것은 버키의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니란 소리였다. 럼로우가 있다는 것은 이 현실이 ‘가짜’라는 뜻도 아니었다. 럼로우는 버키가 꿈꿨던 미래가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켜주기도 하였으면서 지금의 현실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켜주기도 하였다. 만약, 그게 정말 그냥 악몽이라면 꿈속에서 같이 대화를 나눴던 그 남자가 어떻게 똑같이 튀어나올 수 있냔 말인가?
“뭐가 어떻게 되가고 있는 거야”
버키가 고개를 숙이고서는 낮게 중얼거렸다.
*
럼로우의 목격만으로도 혼란스럽고 미칠 것 같은데 버키를 괴롭히는 존재가 또 하나 있었다.
“하지만 꿈에서 넌...!”
“버키, 그건 꿈일 뿐이야. 현실이 아니라고!”
스티브가 오히려 답답하다듯이 큰 소리를 냈다. 현실이 아니라고? 내가 겪었던 그 순간들이 현실이 아니라고?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길었던 악몽,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던 경험들. 그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그모든갈망것부식들이용광로현실성냥이하나아니라고귀향그렇다면아홉내가새벽겪은열입곡일들은화물칸.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고 머릿속에 끔찍한 단어들이 되새겨졌다. 꿈에서처럼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 폭주할 것 같지는 않았으나 속이 울렁거리고 뒤틀렸다. 버키가 몸을 비틀 거리며 넘어질 뻔하였다. 이제 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버키..? 괜찮아? 어디아파?"
"아니야..아니야 괜찮아 스티브"
"..버키 너 요즘 이상한 거 같아. 무슨 일 있는 거야? 그냥 단순히 꿈때문에 그러기엔..“
럼로우를 보았단 말이야, 스티브. 꿈속의 인물이 현실에 등장했단 말이야. 버키가 목까지 차오르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아무리 저를 신뢰하는 그여도 이런 뜬금없는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둘은 오늘 스티브의 4번째 입대지원을 두고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70년 전의 버키라면 이 날 스티브를 위로해주었을 것이다. 이번엔 어느 지역을 썼냐면서 너스레를 떨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버키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럼로우를 목격한 이상 ‘꿈’이 단순한 ‘꿈’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만약 그 꿈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는 내용이라면. 스티브는 입대를 하고 캡틴 아메리카가 된다. 캡틴 아메리카가 되어 미국을 구하고 얼려지게 된다. 일상적인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모든 것을 이곳에 남긴 상태로 날아가 버려 살아있는 전설 ‘캡틴 아메리카’로 박제가 되어버리고 만다. 스티브 개인은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진 모르지만, 적어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버키는 스티브가 행복해졌으면 했다.
어떻게 하면 스티브의 입대를 막을 수 있지? 어떻게 하면 스티브가 캡틴 아메리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어떻게 하면 나의 작은 친구가 이대로 브루클린에서 행복해 질 수 있지? 버키는 곧 있으면 징집이 되어 영국으로 가게 될 것이다. 말이 좋아 지원이지 사실상 이 시대의 젊은 남자들은 모두 군에 징집이 되어 떠났다. 꿈에서 엄청난 것을 보았기에 군대에 갈 수 없습니다. 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블데이트. 그래, 스티브와 함께 더블데이트를 했고 스티브는 거기서 그 박사를 만났어. 버키가 천천히 머릿속으로 과거 - 아니 현재일까? - 를 생각해보았다. 그래, 그때 미래에 데려가주겠다 뭐니 하면서 갔던 곳에서 스티브는 그 박사와 만났다고 했다. 그러면 그곳에 가지 않으면 돼. 그 날은 슬픈 날이니까 둘이 하루 종일 집에서 술이나 마시자고 하면 돼. 그렇게 하면..
그렇게 하면 정말로 스티브가 캡틴 아메리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돌아오면 모든 것이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오히려 머릿속은 고민투성이로 터질 것만 같았다. 창문을 열고 멍하니 달을 바라보았다. 입대를 지연해 볼까? 계단에 크게 구르면 지연되지 않을까? 스티브를 지키는 거야. 캡틴 아메리카가 될 수 없게 계속 그의 곁에 머물고 있으면 그러면...
“그건 불가능해. 버키 반즈. 그보다 니 일부터 걱정하는 게 좋지 않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등 뒤로부터 들려왔다. 버키가 재빨리 뒤를 돌아보며 상대방을 확인하였다. 가족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스티브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럼로우”
“안녕, 버키 반즈”
버키가 침대에서 튀어 올라와 럼로우의 멱살을 잡았다. 저번처럼 놓칠 수 없어 붙잡은 마음도 있거니와 지금의 상황의 원인이 모두 그의 탓인 것과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워워- 진정해. 지금 설명해주려고 나타난 거니까. 이렇게 하면 내가 아무 말도 못하잖아” 손을 들어 항복 태세를 취하면서 럼로우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럼로우 맞지?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당장 설명해!” 끝까지 손을 놓지 않은 상태로 말하였다.
“손 좀 놓아달라니까. 거 참”
그 말과 함께 럼로우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 와 동시에 버키의 몸이 스르륵 하고 힘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럼로우의 멱살을 놓친 것도 놓친 거니와 다리에도 힘이 풀려 털썩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아직 한 달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브루클린의 멋쟁이로 돌아온 거야? 꽤나 감정적인데? 윈터솔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
“이게..이게 어떻게 된 거야. 뭐야”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해줄게. 일단 난 럼로우가 아니야. 럼로우의 형상을 띄긴 하였지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타임워프 그 이상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왜 럼로우의 모습이냐면. 스티브 로저스 외에 너에게 가장 눈에 띄면서도 이 시대에 이질적이다 라고 느껴져야 하는 사람이어야 하거든. 선택지는 한가지 밖에 없었어. 럼로우 브룩. 이 나자의 모습이라면 바로 알아차릴 꺼라 생각했지”
“원하는 게 뭐야. 왜 날 여기로 돌려보낸 거야”
“락(樂), 즐거움, 재미, 유쾌, 오락, 쾌락. 네가 과거로 돌아가서 어떤 선택을 할 지 궁금하고 재미있을꺼같아서. 별 깊은 뜻은 없어”
“변태새끼”
럼로우, 아니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냐고 하니까 무엇도 아니라고 하였다. 악마라고 묻자, 그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인간이 아니다, 신이 아니다, 악마도 아니다, 천사도 아니다. 하지만 특별한 힘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존재다. 그는 버키를 과거로 보냈다고 한다. 타임워프 같은 의미가 아니다. 시간을 뛰어 넘어 과거에 왔다면 버키의 왼팔은 잘라져있어야하고 현시대의 버키와 함께 공존하여 지금의 시대에는 2명의 버키가 있어야 하니까. 타임 워프 따위 같은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버키를 과거로 보낸 거다. 미래의 버키의 의식을.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지 못해 물었다. “왜 불가능하지?” 남자는 더 어이가 없다듯이 물었다.
“방사능에 노출되어서 헐크가 생기고 아스가르드라는 외계의 왕자가 지구의 신화속 토르와 같은 이름과 이야기를 갖고 있고 몸이 약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남자가 무엇이든 4배 이상으로 만들어준다는 약을 먹고 강해진 건 말이 되고 네 의식이 과거로 돌아간 건 왜 말이 안 돼?”
“그건..적어도 과학적이잖아”
“이 세상에 과학적이지 않은 건 없어. 귀신도 유령도 모두 과학적이지. 나도 과학적인 원리로 널 이렇게 보낸 거야. 다만 네가 알던 시대에 밝혀지지 않은 것 뿐”
남자의 말에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얼추 듣기로는 논리적이었지만 또다르게 들으면 그저 말싸움에 이기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 같았다.
“그렇다면..미래의..그러니까 현재의..아니..미래의 나는 어떻게 되어있지?”
“잠들어 있잖아”
“아니.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계속 이곳에서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네가 겪은 일들은 정말 말 그대로 ‘꿈’이 되어버려. 가상의 이야기가 되어버리지”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현실들이 저 하나로 가짜가 되어버린다는 이야기였다. 말도 안 되고 분에 넘치는 일들이었다.
“그래도 걱정 마, 바뀌는 건 네 운명 하나뿐이니까. 세계는 그리고 운명은 너를 제외하고 모두 똑같이 흐를 거야. 내가 거기까지는 영향을 못 미치거든. 인간은 60년대에 달로 갈꺼고,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당할꺼고 토르도 다시 내려올꺼고 죽을 사람은 죽을 거고 산사람은 계속 살 거야”
“‘나’로 인해 야기되는 것들은?”
“전부 수정되어 똑같이 될 거야. 예를 들어 윈터솔져는 버키 반즈 개인이 아니라 하이드라에서 만든 단체들이 될 수 있고. 뭐 그네들 인생이 거기서 거기여서 별로 바뀌진 않을 거야”
“그러면..스티브는..스티브는 어떻게 되는 거야?”
"스티브는 캡틴 아메리카가 된다. 바꿀 수 있는 건 버키 반즈 너의 운명뿐이라니까? 스티브 로저스의 운명은 바꿀 수 없어"
"스티브가 캡틴 아메리카가 되는 게 운명이라고? 헛소리마"
"헛소리가 아니야. 그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고 선택했다. 운명은 스스로가 결정하는 거야, 생각한 자의든 생각지 못한 자의든. 애초에 난 너에게밖에 영향을 못 끼쳐. 큰 운명은 바꿀 수 없지. 너로 인한 결과는 달라지겠지만 뭐, 다 수정될 거야. 그냥 간단하게 생각해. 지금 넌 그냥 기회가 주어진 것뿐이야.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 하지만 스티브는 구할 수 없다. 스티브가 캡틴 아메리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스티브가 얼음에 갇히는 것을 되돌릴 수 없다. 스티브 로저스와 함께할 수 있는 브루클린의 미래 따위는 없다.
"그렇다면 내 운명은 무엇을 바꿀 수 있다는 거지? 방금 전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했잖아"
"네 운명을 바꿀 계기가 되는 곳이 있어. 너는 그곳에서 선택을 하면 된다. 어떻게 할지"
"그때가 언제지? 무슨 선택을 하라는 거야"
"조만간. 나는 그때 다시 너에게 나타날 거다. 대답을 듣기 위해"
그때 보자고. 너는 어차피 그때까지 살아있을 운명이니까.
어마어마한 말을 남기고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남기고 어마어마한 전개를 남기고 남자가 웃으면서 사라졌다. 정말 마법처럼 모습의 파편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며 사라졌다. 버키에게 보란 듯이 자신이 신비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
버키는 계단에 굴러 다리가 부러트려 입대를 지연시켰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스티브의 곁에 남아 군대로부터 그를 지켜내기 위해 힘을 썼다. 스티브와 곁에 있는 순간순간 계속 말을 하였다. 위험한 시도를 하지마, 만약 누가 실험을 하자고 하면 거절해, 꼭 군대에 입대하는 것만이 애국은 아니야, 너는 너만의 방식이 있을 거야. 귀에 질릴 정도로 버키의 잔소리를 듣는 스티브는 지나가는 말로도 알았다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그것이 버키의 마음을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버키는 군대에 가는 순간까지 스티브의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군대에 입대 후 버키는 하이드라의 포로로 잡혔고 똑같은 실험을 당했다. 그 와중에 들었던 생각은 누군가 나를 구한다면 그것이 부디 스티브가 아니길 이라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물론 그 간절한 마음은 배신당했지만 말이다. 생각했던 것 보다 커진 스티브는 자신을 구하러 왔고 모습을 보아하니 그 빌어먹을 실험에 참가한 게 분명했다. 뒷이야기도 똑같다. 미래의 하울링 코만도가 될 대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스티브를 보면서 버키는 펍 밖으로 나왔다.
승리의 열기로 펍안은 휘황찬란하고 따뜻했지만 바깥은 대조적으로 어둡고 차가웠다. 아무도 없는 구석진 골목으로 들어가 벽에 기대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은 상황이 갑갑하면서도 이것이 정말 운명인건가 싶어 허망했다. 혼자 그렇게 열기를 식히고 있던 중 누군가가 옆으로 걸어왔다.
"네가 말한 선택의 시간이 지금이구나"
"그래, 지금이야. 너의 미래가 결정되는 순간, 너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 너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
우습다. 스티브에게 구해져 이제 들어가 그와 함께 정답게 술을 나눠마실 이 시간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니. “이 결정으로 너의 인생은 크게 달라졌어, 버키 반즈” 예상 못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선택을 하던 때는 지금 이었으니까.
“내가 뭘 결정하면 되는 거지?”
“이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돌아갈 것인가”
“돌아가면 어떻게 되는데?”
“지금 겪은 일들이 꿈이 돼. 그리고 지금 얼려있는 버키 반즈가 현실이 되겠지”
“돌아가지 않는다면?”
“스티브에게 가서 말을 해. 너를 따라갈 수가 없다고. 그러면 너의 운명은 크게 뒤바뀌게 될 거야. 새로운 삶을 사는 거지. 네가 겪었던 그 일들이 꿈이 될 거야. 지금처럼 생생하게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바뀌게 될 거야.”
언제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는 큰 스케일의 이야기다. 나의 선택으로 꿈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꿈이 된다니. 아무리 영향이 스스로에게 한정 되어있다 하더라도 정말 분에 넘치는 이야기였다. 남자는 선택을 기다린다듯이 옆에 나란히 벽에 기대고 얼굴만 돌려 버키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다른 인물이라고는 하여도 얼굴이 럼로우니 기분이 묘했다. 버키가 숨을 내뱉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은 우울하기 그지없는데 빌어먹게도 밤하늘은 아름다웠다.
"내가 현세에서..왜 자살하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해"
"사랑스러운 스티브 베어 때문이잖아"
"그래, '스티브' 때문이야. 하지만 자세한 서술이 없잖아, 잘 생각해봐. '스티브를 죽이기 위해서'도 스티브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고 '스티브가 있어서 혼자가 아니니까' 라는 말도 스티브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어. ‘스티브 때문’이라는 단순한 말로 몇 십 가지의 가능성을 얘기할 수 있어. 그런데 내가 어떤 이유로 ‘스티브 때문’에 죽지 않았다고 생각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이야기였다. 버키 반즈가 스티브 때문에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 막연한 한 줄의 문장은 당연하고 납득이가고 논리적인 말이어서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는 어떤 이유로 스티브 때문에 죽지 않았던 걸까? 버키는 확연히 표정을 굳힌 남자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다른 것도 오직 즐거움과 호기심 하나만으로 자신을 과거로 돌려보낸 작자였다. 궁금증이나 호기심이 인간보다 높은 생명체겠지. "이유는 간단해" 딱히 못 알려줄 것도 아닌 버키가 입을 떼었다.
“스티브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서야”
자신이 말하고도 낯간지러운 말에 피식 하고 절로 웃음이 새었다. 그래, 그렇게 스티브로부터 벗어나 도망을 치고 다녔던 시절 버키는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은 넘게 자살을 시도하였다. 떠오르는 과거에 의해 밀려오는 죄책감에 의해 끓어오르는 분노에 의해 당장이라도 죽고 싶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죽지 못했다. 내 죄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든가 책임을 지겠다는 당당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스티브. 스티브 로저스. 자신의 작은 친구 스티브 로저스 때문이었다. 내가 죽는다면 스티브는 혼자다. 혼자가 되어버린다. 그의 옆에 수많은 믿음직한 친구들이 있는 것도 안다. 자신을 과대평가해 그들보다 자신의 존재가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티브가 저와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자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필시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내가 오로지 스티브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스티브 또한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자신이 죽는다면 그는 혼자가 된다. 외롭고 삭막하고 고독한 곳에서 그를 혼자 둘 수 없다. 이 생각만이 버키의 죽음을 막았다.
“..겨우..겨우 그런 이유라고?”
“겨우라니. 나한테는 대단히 중요한 이유였어. 스티브 때문에 죽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뭘 생각한 거야?”
“스티브가 남아있으니까, 버팀목이 있으니까 살 수 있어. 뭐 이런걸”
“스티브를 버팀목으로 삼아서 살고 싶을 정도로 삶에 대한 의지도 없었고 그렇게 짐이 되어서 살고 싶지도 않아”
“대단한 순정 납셨군”
남자가 비꼬면서 버키를 향해 돌려있던 머리를 돌렸다. 사랑에 빠져서 그윽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의 얼굴 따위 볼 것이 못되었다. “그래서...지금 다시 돌아가겠다고 돌려 말하는 거야?” 궁시렁 거리는 듯 남자가 웅얼거렸다. 남자에게 있어 사실 그다지 재미있는 결과는 아니었다. 결국 아무것도 변치 않은 거니까. 똑같은 길을 가려는 것을 재차 확인한 꼴 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응, 돌아가야지”
“돌아간 다라. 꼭 돌아갈 필요는 없어. 여기를 현실로 만들어도 되니까. 행복한 미래가 기다릴꺼라고? 지금과 같은. 가족들 곁에서 오순도순 살 수 있어”
“스티브의 운명은 바뀔 수 없다면서. 내가 여기서 하울링 코만도가 안 되어도 스티브는 얼음 속에 갇히겠지, 70년 뒤에 혼자 깨어날 거야. 그리고 그 미래에는 내가 곁에 없을 거야. 스티브를 그런 상태로 만들 순 없어”
“...팔이 잘린 상태로 소련의 포로가 될 거야. 그런데도 상관없어?"
"알아. 상관없어."
"쉴드에 기생하고 있는 하이드라의 실험체가 될 거야"
"그렇겠지"
"윈터솔져로 널 사용하기 위해 많은 고문이 행해질 거야. 브레인 워싱같은거말야. 그리고 너의 몸을 미친 듯이 혹사시킬 거야"
"너무 끔찍한 기억이라 잊을 수 없지"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될 거야. 너의 친구도. 물론 네가 아니어도 그는 그 시간에 다른 자에게 죽겠지만. 죄책감으로 잠을 못 이루고 제대로 먹지도 못 할 거야. 하루하루를 후회하며 살고, 죽지 못해 살 거야"
"......알고 있어"
"그런데도...돌아가겠다는 건가? 겨우 스티브 로저스를 혼자 둘 수 없다는 이유로?"
"응“
만약 스티브도 똑같은 상황을 겪는다면 똑같이 행동할 거야. 말을 하려다가 집어 삼켰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닭살 돋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남자는 버키의 속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젠장” 하고 욕을 내뱉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이해가 되는 선택이었다. “그래, 이제 됐어. 정말 재미없었어. 다음엔 너 같은 애는 고르지 않을 거야” 남자가 벽에서 등을 떼어내고서는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서는 아직 멍하니 벽에 기대고 있는 버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돌려보내주지. 현실로. 눈을 뜨면 세월이 지난 그쪽일 거야”
돌려 보내준다라 현실로. 그렇다면 지금 겪은 한 달이 꿈이 되는 것인가. 버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말 그대로 호접지몽이 아닌가. 무엇이 꿈인지 어디가 현실인지 알 수 없다. 버키가 눈을 감은 상태로 남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기차에서 떨어지고, 포로가 되고, 실험체가 되고, 병기가 되었던 일들. 아늑한 브루클린을 버리고 정말 그때로 돌아가고 싶냐라니, 사실 버키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조금 있자 몸이 두둥실 하고 떠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버키는 돌아가는 것이다. 죄책감으로 잠을 못 이루고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토해내고 하루하루가 고통스럽고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며 괴롭운 그런 나날들로. 버키는 마지막으로 스티브의 얼굴을 떠올렸다.
스티브, 나에게 선택지는 없었어.
나는 언제나 브루클린의 꼬맹이인 너를 따라 갈 테니까.
과거에도 미래에도 현재에도.
네가 나의 돌아갈 장소니까.
이제 돌아가자.
꿈에서 깨고 진짜 현실로.
스티브가 기다리고 있는 지옥으로.
버키가 눈을 떴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은 투명한 막을 통과하여 보이는 스티브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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