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팁버키 + 럼로버키 < 사랑에 대하여 > 19세 미만 구독 불가. Only 선입금. 




샘플 1: http://junkfood.postype.com/post/438914/

샘플 2: http://junkfood.postype.com/post/438922/

샘플 3: http://junkfood.postype.com/post/439770/


현대AU. 오메가버스. 삼각관계. A5. 90P.10000원 (페이지 10p내로 달라질 수 있음)

어린 시절부터 스티브를 짝사랑하던 버키는 그가 약혼을 한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충격을 받아 절망하고 있던 그는 우연히 과거에 연인이었던 럼로우와 재회를 하게 된다. 끝날 줄 알았던 스티브와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기면서 럼로우와의 만남으로 그는 혼란스러워 한다.


선입금만 받으며 현장판매분은 파손대비를 위한 책 3~4권정도입니다. 



2. 로키버키/토르버키/럼로우버키 <Aduly Bucky2> 19세 미만 구독 불가. Only 선입금. 



A5/60p/5000원(페이지 10p내로 달라질 수 있음)

로키버키/토르버키/럼로우버키 세 개로 구성되어는 욕망의 떡 책.버키굴리는 것을 매우 좋아합니다. 샘플은 따로 준비되어있지 않으며 글의 분위기가 보고싶은 경우 포스타입 혹은 티스토리의 글을 읽어주세요. 샘플로 포스타입에 있는 스팁버키 글을 첨부하겠습니다.


예시 글 : http://junkfood.postype.com/post/355953/ 


3. 스팁버키 <Adult Bucky> 19세 미만 구독 불가. 재고 2권.



A5/90p/10000원

스팁버키 떡으로만 구성되어있는 쩜오온 재고 책. 

오메가버스/수인물/센티넬버스/돔섭AU/빌런스팁캡틴버키AU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간재고 선입금 하고싶은 경우 댓글이나 멘션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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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금 및 통판▶ http://naver.me/xA4grH6J





히트사이클이 끝나고 오메가로 발현되고 난 후, 버키가 느낀 감정은 절망이었다. 오메가로 발현되어서 절망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메가로 발현되는 거라고 생각했을 땐 기뻤으니까. 하지만 후에 밀려오는 히트사이클이라는 페로몬에 취해 스티브에게 성적인 유혹을 했다는 점과 그리고 스티브가 오메가 체취에도 넘어오지 않고 단호하게 돌아갔다는 점 때문에 깊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마지막, 페기. 페기 카터의 이름. 스티브는 페기와 자신에게 정말 미안한 짓을 했다며 돌아갔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자신이 베타가 된거랑 오메가인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는 거다. 자신이 오메가든, 베타이든. 스티브는 페기를 선택하였을 거다. 


IF라는 망상도 이제 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니, 이제 현실에서 스티브를 어떻게 볼 것인가.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스티브가 자신의 집에 온것은 자신이 연락을 해서였다. 몸이 아프니 와달라고. 기억은 중간중간 날아가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의 메신저에 연락이 남겨져있으니 분명했다. 


오메가로 발현된 이후, 여러가지 건강검진을 했어야 했다. 뒤늦게 발현된것이니 뭐하나 문제가 있나 더더욱 정밀히 검사해야했다. 평생을 베타로 살아왔던 그이기에 준비하는 하나하나가 생소하고 어려웠지만 스티브라는 정신적인 고통에 비하면 식은 죽 먹기였다. 


짝사랑 상대에게 페로몬 이라는 이유를 빌려 써 붙어먹으려고 했다라는 사실은 버키를 충분히 자기혐오적인 인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그렇게까지해서 스티브의 손길을 받아보려 애를 썼지만 결국에는 선택받지도 못했다. 비참함과 절망감과 슬픔. 모든것이 한 곳에 섞이고 나뒹굴어 버키의 속을 긁어 놓고 있었다. 좋지 않은 일은 연달아 일어난다더니, 페기와 스티브의 약혼에 이어 어젯밤과 같은 사건도 벌어지고. 


병원에서 받은 약과 진단서를 가방안에 넣고 버키가 천천히 길을 걸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돌아가는 것이 빠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걷고싶은 기분이었다. 저벅저벅 걷다보니 어느새 해질녘이 되었다. 여름의 낮은 긴데, 해가 저물고 있다는 것은 벌써 밤 여덟시는 되었다는 뜻이다. 때마침 다리 위를 걷고있던 버키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는 강을 바라보았다. 옆에 차선에는 차들이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었고 강은 해를 반쯤 담그고 있었다. 


지금 떨어져 죽을까.


멍하니 다리의 난간을 붙잡고 강을 빤히 쳐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물론 계획적인 생각이 아니라 그냥 튀어나온 거였지만. 아슬아슬할정도로 허리를 굽혀 강을 바라보고 있자, 옆에서 이봐. 뭐하는거야? 라는 소리가 들렸다. 자살시도자처럼 보이는 자에게 거는 말 치고는 담담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버키는 그냥 강을 보려는 거였어. 라고 웅얼거리고서는 고개를 돌렸다.


"...어?"

"...어."


순간 너무 놀라 약봉투를 강에 떨어트렸다. 


***


그 해에는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다. 버키는 이제 청년의 티가 나는 소년이었고 스티브는 아직 말라깽이 모습에서 벗어나지못했지만 학교에 몇 없는 알파였다. 스티브가 알파로 성질이 발현된 것은 15살이었지만 눈에 띄게 된 것은 17살이었던 올해부터였다. 그 이전까지는 모두들 알파니, 베타이니, 오메가이니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외관상 힘있어 보이는 이들이 우세였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기준이 달라졌다. 


버키에게 스티브는 늘 스티브였다. 늘 빛나는 자신만의 빛. 하지만 다른이들에게는 스티브는 여전히 같은 스티브가 아니었던거 같다. 입학 후, 스티브는 인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 성질이 뭐가 중요하다고? 버키의 딴에서는 이해가 불가능했지만 고등학교 이후의 사람들에게는 성질이라는 것이 사람을 판단하는데 꽤 중요한 역할인 것 같았다. 버키는 그것이 세상이 알파중심사회 - 아무리 공평하다고 그들이 우겨봤자 - 덕에 일어난 현상이라는 것을 더 나중에 깨닫게 되었다. 


비실비실하여 매일 맞고 살던 브루클린의 꼬맹이는 이제 학교에서 최고권력층이 되었다. 스티브는 여전히 스티브로 늘 변함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다르게 보았고. 그로 인해 그의 주변에는 사람이 모이면서 자신과 스티브의 관계에 불균형이 생기고 말았다. 자신에게 스티브는 아직 넘버원이었지만 스티브에게 자신이 온리원이 아니게 된 것이었다.


초조하고 불안했다. 스티브에게 그들은 니가 알파여서 좋아하는거야. 발현하지 않았으면 좋아하지 않았을껄? 라고 말하고 그를 상처주어 다시 자신만의 옆자리에 앉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가 새로운 친구덕분에 행복해하는것도 있었지만 그 스스로도 자신의 성질이 인간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가 되는 것에 시작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건 그 이후지. 그들이 후에도 내가 알파인것만으로 친구를 하고 있는 거라면 거절이겠지만 그것만이 아니게 된다면 거절할 필요는 없지."


담담히 그런식으로 말하던 스티브에게는 정말로 그가 '알파'여서만이 아니라 '스티브'여서 다가오는 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알파라는 형질은 전광판이되어서 스티브 라는 빛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지 스티브 자체를 '알파남성'으로 만들진 못했다. 결국 저 혼자 꼭꼭 숨겨두었던 빛이 발견되었구나. 모두들 알아버렸구나. 버키는 외로워졌고 비참했다. 스티브와 함께한지 꽤 오랜시간이 되어 짝사랑을 하며 괴로웠던적도 많았지만 그 중 오늘날이 가장 힘들었다. 


그의 주변에는 점차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고 베타 여성과 오메가들에게도 구애를 받기 시작했다. 자신은 속이 끓지만 그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아직 어린 버키는 연기를 잘하지 못해 감정표현을 숨길 수 없었다. 늘 항상 그 잘생긴 얼굴을 꾸기고다녔고 그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버키의 심정변화를 놓칠리 없는 스티브가 무슨 일이냐며 달래주기는 했지만 버키는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스티브는 많은 모임에 초대를 받았고 버키도 당연스레 같이 초대를 받았다. 스티브는 늘 버키와 함께이길 원하였기에 버키는 싫은 자리에도 꾹꾹 참가를 하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힘들어져 몇 번은 그냥 도망치기도 했다.  


럼로우와 인연이 닿은 것은 도망쳤던 날 중 하루였다. 입학 후, 점차 건강해지는 몸 덕분에 나날히 인기가 상승하고 있던 스티브의 주변에는 늘 오메가들이 있었고 그를 유혹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있으면 위장이 뒤틀릴 것 같아 도망을 쳤는데 뜬금없는 사람이 버키에게 말을 건 것이었다.


"오늘은 로저스랑 안있나?"

"...럼로우 선생님."


브룩 럼로우. 건장한 체격과 날카로운 인상때문에 체육선생님으로 보이지만 국어를 담당하는 교사였다. 가르칠때 시를 특히나 좋아해서 몇 몇 학생들 사이에서는 로맨틱 가이라는 의혹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 네. 저희도 따로다닐때가 있어요. 아직 첫만남이었을 때다. 교사와 학생이었으니 존댓말을 쓰는게 당연했을 때. 


"그래? 늘 로저스랑 붙어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예요. 걔친구가 제 친구가 아닌경우도 있으니까요."

"난 너무 붙어다녀서 둘이 친구사이가 아닌 줄 알았어."


갑자기 너무 사적인 말을 하는거 아니야? 당황한 버키가 숨을 헉 하고 몰아쉬고 고개를 돌려 럼로우를 쳐다보았다.가벼운 농담인가 싶었는데 그의 눈이 너무 진지해서 버키의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그냥. 힘들어보인다고. 럼로우는 뭐가 힘들어보인다고 말을 하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손을 들어 버키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고서는 자리를 떠났다. 




저의 뭐가 힘들어보이는데요? 나중에 버키가 도서관 구석탱이에서 몰래 담배를 피는 럼로우에게 물었다. 여긴 어떻게 찾았냐. 내 비밀기지인데. 금연인 학교, 그것도 도서관에서 담배를 피다걸린 이 치고서는 담담한 어투로 물었다. 그냥... 어디있냐고 물었는데 다들 도서관에 있을꺼라고해서. 근데 다 뒤져봤는데 없어서. 마지막으로 찾은곳이 여기예요. 버키가 슬쩍 몸을 뒤로 빼 코너의 이름을 읽었다. [종교 철학] 인적이 드물만 하기도 했다. 럼로우가 담배를 입에 물고서는 몸을 돌려 버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창틀에 몸을 기대고서는 팔짱을 끼고 울망한 눈망울로 자신을 쳐다보는 버키를 바라보았다. 


힘들어보여서 실수로 그런 말을 내뱉은 자신도 잘못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뭐가 힘들어보이냐고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를 캐물어 대답을 들으면 상황이 나빠지는 것은 자기 자신일텐데. 뭐라 대답해야할지 몰라 럼로우가 담배만을 들이키며 버키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학생은 종교카테고리에 알맞게 어린 양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자였다. 이 길을 잃고 헤매이는 어린양을 어찌합니까. 신도 믿지 않는 럼로우가 스스로에게 농담을 던지듯이 생각했다. 


"무슨 대답이 듣고싶은데?"

"선생님의 생각이요."

"뭐라고 대답할지 예상은 하고 묻는거냐?"


역으로 질문하자 버키의 눈에 습기가 뭉치는 것 같았다. 점점 빨개지더니 이윽고 눈가에 눈물 비슷한것이 맺히기 시작했다. 아, 얘는 내가 어떤 대답을 할지 알고있구나. 알고 있는데 묻는거구나. 단번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그렇다면 왜 자신에게 확인을 하려고 온 것일까. 나에게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는 것인가. 나이를 학생들보다 조금 더 먹었다고 그들의 행동패턴을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젊고 혈기왕성한 이들은 종종 자신들이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하니까. 


"로저스를 좋아하는데 계속 말도 못하고 친한친구 행세를 하는게 위태로워 보였어. 그리고 힘들어보였지. 내 딴에는."

"...동정하시는거예요?"

"동정도 하고 뭐. 이해도 하고..."

"선생님이 절 어떻게 이해해요?"


저흰... 지금까지 대화 한마디도 나눈 적 없잖아요. 아니, 제가 선생님 질문에 대답한적은 있겠네요. 출석부른적도 있고. 근데 그거말곤 없잖아요. 근데 어떻게 이해해요?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그렇게 많이 티났어요? 스티브를 좋아하는게? 걔도 알았으면 어떻게해요? 걔도 알았는데...알았는데 무시한걸까요? 속사포처럼 우다다 말을 내뱉었다. 숨을 쉬지도 않고 말을 내뱉는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던 럼로우가 당황해 반즈? 하고 불렀다. 


"걔도...걔도 알았는데 계속 무시한거면 어떻게하죠?"


결국 그 말을 끝으로 버키가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젠장. 울릴생각은 없었는데. 당황한 럼로우가 입에 물고있던 담배를 창가에 던지고서는 몸을 움직여 버키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아 자신보다 작은 브루넷 머리의 소년이 엉엉 울며 팔목으로 눈가를 문지르고 있었다. 럼로우는 바로 버키의 앞으로 다가와 등을 쓸어다 주며 달래주었다. 


"아니야, 반즈. 티가 많이 난게 아니라 내가 그냥 발견한거야."

"어떻게...어떻게 발견해요. 선생님이랑 흑...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근데...흑...그런 사람이 발견한거면...흑...분명 티가 많이 난게 분명해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젠장. 반즈, 그만 울어."


펑펑펑, 큰 눈물이 버키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럼로우가 결국 참지못해 손으로 반즈의 뺨을 잡고 올렸다.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고양이가 숨을 거칠게 내쉬며 울고 있었다. 니가 티를 낸건아니야. 넌 잘 참았어. 럼로우가 엄지 손가락으로 버키의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촉촉하며 보드라운 살결이 느껴졌다. 


"그냥... 내가 예쁜애를 잘 보거든." 


이게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예쁜애를 잘 보다니. 누군가가 듣는다면 그냥 쇼타콤 - 어린소년을 좋아하는 남자 - 로 보일게 분명했다. 또 한번의 말실수에 럼로우가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선생님 저 좋아해요?"


버키가 목멘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그 말은 선생님이라는 자의 도덕적인 규칙을 와르르 깨트릴만한 대사였지만 한편으로는 남자 럼로우의 감정을 타오르게할만한 대사였다. 제자한테 뭐하는 짓이야와 의혹으로만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진실인 로맨틱가이의 본능. 럼우가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몰라 삼초정도 고민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너한테 이렇게 관심 안가졌지."


삼초정도면 충분히 고민을 한 것이었다.




버키와 입을 맞춘것은 도서관의 [종교 철학] 책장사이였다. 금기시되는 짓들을 성전비슷한곳에서 하다니. 반즈가 배덕감이라는 것을 알고 그런것인가. 눈을 꽉 감고 까치발을 들고서는 자신의 입술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버키를 보며 럼로우가 생각했다. 그러다 자신의 눈에 7대 죄 라는 제목의 책이 밟혀 자신도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곳에는 두사람의 숨결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버키는 그 뒤로 스티브의 옆에서 참을 수 없게되면은 럼로우의 곁으로 갔고 럼로우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자신을 안식처라고 생각하는것인지 그의 대리인 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럼로우는 자신의 사람에게 워낙 무른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다짜고짜 입을 들이밀어 서툴게 입을 맞추고 떠나가더니 요새는 그래도 조금 럼로우의 곁에 머물기도했다. 럼로우는 바로 도망가지 않은 작은 소년을 그대로 품에 안고 그래, 이쁘다. 이뻐. 하며 등을 쓰다듬어 주기도 했다. 


럼로우, 날 사랑해줘. 좋아한다고 말해줘. 나에게 매달려 줘. 안그러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아. 이제 서슴없이 럼로우라고 말하는 버키를 안으며 그래, 예쁜아. 라고 럼로우가 대답했다. 


"난 건장한 베타 남자라고. 예쁜이라니 그런 닭살돋는 별명 붙이지마."

"에쁘게 생긴걸 어떻게 해."

"럼로우... 너 정말 로맨티시스트구나."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것 뿐이야."


아, 그래. 버키가 피식 웃고서는 자신의 몸을 완전히 럼로우에게 기대었다. 또래보다 건장한 체격이긴 해도 아직 럼로우보다는 작았다. 원래부터 딱 들어맞는 것 같은 모형처럼 둘은 편안했다. 졸린 것 같아. 버키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자. 늦기전에 깨워줄 게. 럼로우가 버키의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직 젖살이 완전히 빠지지 않아 통통한것이 럼로우에게 작은 죄책감을 심어주었다.




둘의 아슬아슬하고 편안하고 위험하고 복잡하고 잔잔한 시간이 약 삼개월 정도 흘렀다. 버키의 형편없는 입맞춤은 이제 그럴싸해졌고 둘은 더더욱 대담하게 도서관에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냥 꼬마의 장난으로 넘길 수 없는 입맞춤에 럼로우도 진지하게 임하기 시작했다. 작은 공간에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렸고 서로 넘기지 못하는 타액들이 입 주위에 흘러내렸으며 가끔식 둘의 움직임에 책장의 책이 한두권 떨어지기도 시작했다.


럼...럼로우. 숨을 거칠게 몰아내쉬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어린 소년을 자신을 어떻게 해야하는건가. 갈피를 잃은 손은 그저 버키의 뒷목만을 주물럭 거리고 가끔 아쉬운지 쇄골을 지나 어깨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너무 자극시키지마. 제임스. 럼로우는 버키를 예쁜아,반즈,제임스 라고 불렀지 단한번도 버키라고 부른적이 없었다. 참아주는거예요? 선생님? 버키가 입꼬리를 올리며 어설프게 유혹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래, 애송아."

"안 참아도 되는데."


버키가 대범하게 자신의 몸을 더욱 럼로우의 앞으로 밀착시켰다. 자신보다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자신의 가슴을 밀착시키고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꼬옥 자신에게 매달렸다. 단단한 두 남성의 것이 닿았고 서로가 얼마나 흥분하고 있는지는 뻔히 알 수 있었다. 럼로우. 버키가 다시한번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럼로우는 그런 버키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며 아무대답도 할 수 없었다. 윤리라든가 도덕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버키는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반즈, 이제 로저스는 괜찮은거야? 


묻지 못할 질문때문이었다.





어쩌면 럼로우를 좋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버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최근들어 스티브와 있으면 괴롭고 슬펐지만 럼로우와 있으면 편안하고 안락했다. 오히려 스티브의 옆에 있을때 짓는 미소가 가짜가 되어갔고 럼로우 옆에 있을때의 미소가 진짜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나, 스티브가 아니라 럼로우를 더 좋아하게된걸지도 몰라. 버키는 삼개월동안 럼로우와 만남을 이어가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예쁜아. 럼로우는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 정말 닭살돋기 짝이 없는 호칭이어서 싫었지만 자꾸 듣다보니 익숙해져갔다. 버키가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럼로우에게 저의 어디가 그렇게 좋았냐고 캐물은적이 있었다. 고양이 같이 생긴게 강아지 인상이어서 그게 신기해서 좀 보다가 이뻐보이더라고. 럼로우는 늘 항상 무심하듯이 말하지만 내용은 부끄러운 것 뿐이었다. 


"날 좀더 사랑해줘."


버키가 럼로우에게 더욱 대담하게 다음 진도를 요구했을 때, 그렇게 얘기했다. 럼로우는 망설이는가 싶더니 결국 이리저리 자신의 얼굴과 귓가와 목에 입을 맞추며 "...다음에." 라고 속삭였다. 그것만으로 온 몸에 전율이 돋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대로 스티브를 잊고 살 수 있을지 몰라. 그러면 모든게 해피엔딩인거야. 스티브는 친한 친구를 잃지 않을 수 있고, 나는 나대로 더이상 괴로워지지않을 수 있고. 


17살의 아직 낙천적이기만한 버키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윽고 그 버키는 날벼락을 맞듯이 그 생각을 접어야 했다.


스티브가 드물게 자신과 둘이서만 할 이야기가 있다며 방과 후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이제 저번보다 키가 자라고 몸에 살이 붙은 스티브는 건장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마르다고 표현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그래도 저 진지한 눈은 똑같아. 버키가 속으로 키득 거리며 알겠다며 순순히 승낙을 했다. 그것이 끝을 향한 길인지도 모르고.


"럼로우 선생님이랑 무슨관계야?"


대뜸 방에 들어오자마자 던진 말은 그것이었다. 버키는 스티브의 침대위에 편히 앉다 자신도 모르게 딸꾹 하고 소리를 내버렸다. 무슨소리야? 우리 국어선생님이잖아. 버키가 시치미를 잘 떼어냈다. 그러자 스티브가 삼초 정도 강렬한 눈빛으로 버키를 쳐다보더니 탁자 위의 책 한권을 올렸다. [신의 부름]. 지루해보이는 그 책이 어디에 꽂혀있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스티브는 책 한권만 들 뿐이지 따로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오로지 침묵을 하고서는 앉아있는 버키를 내려다보았다. 


"...봤어?"


결국 버키가 침을 꿀꺽 한번 삼키고 물었다. 뭐? 둘이 입맞추는 거? 스티브가 이제 책을 내려놓고서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는 명백히 분노가 묻어나있었다.


딱히 스티브에게 죄를 지은것도 아닌데 버키의 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봤구나. 스티브의 시선을 피하면서 말하는 버키의 목소리는 떨려있었다. 버키. 스티브가 다시한번 낮은 어조로 불렀다. 오랜만에 둘이서 방에서 놀자고 하길래 마냥 신났는데 이런 함정일줄은 몰랐다. 


버키가 스티브의 눈길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두근두근, 심장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날이 더워서 땀이 나는 것인지, 비죽비죽 땀이 흘러넘쳤고. 손에 자꾸 땀이 차 버키가 바짓단에 자신의 손을 비볐다. 버키. 스티브가 자신의 눈길을 비하는 버키의 이름을 다시한번 불렀다. 버키는 또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내 눈 봐바."


결국 스티브가 걸어서 버키의 앞에섰다. 그리고서는 두 손으로 버키의 뺨을 잡은 뒤, 천천히 위로 올렸다. 힘을 주면 피할 수 있는 것을, 그가 아무리 건강해졌다고 한들 아직은 자신이 우위이거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키는 꼼짝없이 스티브의 손길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스티브는 버키를 붙잡아두는 힘을 갖고 있었다. 시선이 올려지자 버키의 눈에는 딱딱하게 굳응 스티브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까지 화가 많이 난 스티브는 수도 없이 보았지만 이정도로 얼굴을 굳힌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두려움인지 긴장인지 알 수 없는 심리에 버키가 침을 다시 한번 꼴깍 삼켰다. 


"스티브...그러니까. 혹시 오해할까봐 말하는건데 강제로 그런건 아니야. 나랑 럼로우랑 상호합의하에...."

"럼로우라고 불러?"

"어? 어, 응. 그러니까. 스티브 니가 걱정하는 그런게 아니야."


버키가 스티브의 손길에 의해 올려진 상태로 최대한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떨리는 말투와 어색한 표정에도 스티브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계속 버키의 얼굴을 잡고만 있을 뿐이었다. 버키는 이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버키."


스티브가 드디어 입을 떼었다. 응. 스티브. 버키는 이제 선고를 받는 죄인처럼 대답했다.


"내가 화난 건 니가 럼로우 선생님이랑 입을 맞춰서가 아니야. 나도 오해할까봐 덧붙이면 니가 베타남성임에도 알파남성과 입을 맞춰서 놀란것도 아니야. 그것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그, 그러면..."

"내가 화난 건, 아직 미성년자인 너에게 성인인 그것도 교사의 신분인 그가 손을 댄거야."


그건 엄연히 법률적으로 위반되기도 한 거고 도덕과 윤리적으로도 옳지 않아. 버키. 내가 걱정하고 있는건, 내가 화가 난 건 그 것 때문이야. 스티브가 적당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담담한 어투로 말을 하며 버키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버키? 난 정말 너를 걱정하고 있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한 스티브의 눈에는 정말 진심어린 걱정이 담겨져있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그리고 그 때 깨닫고 말았다. 자신은 아직도 스티브를 좋아하고 있다고. 지금까지 럼로우에게 도망쳐 기대었지만 결국은 제자리걸음이었다고. 


왜냐하면 자신은 지금 스티브가 자신에게 질투때문에 화내주길 바라고 있었으니까.




"미안해요."


버키가 럼로우의 품속에 안겨 울고있었다. 앞뒤없는 사과였지만 럼로우는 그 한마디에 모든것을 알 수 있었다. 연륜과 경험이라는 것이 이래서 슬픈 것 같다. 무슨소리냐고 화를 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 작은 소년이 담고있는 감정이 자신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크기인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이기지못할 상대방이라는 것도 알았고 반즈에게 확신을 갖고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럼로우는 그저, 늘 항상 그답게.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대로 따라갔을 뿐이었다.


입고있던 검은셔츠의 가슴언저리가 축축히 젖어가고있었다. 입을 꽉 물고있는것인지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그가 얼마나 많이 울고있는지 알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의 뺨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눈가를 훔쳐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눈을 마주치면, 그 큰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여있는 것을 본다면. 참지 못하고 또 한번 입을 맞출 것 같았다.


"괜찮아."


럼로우가 버키에게 다시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 뿐이었다.


그 뒤로 럼로우와의 관계는 끝이났다. 표면적으로는 다시 보통의 선생님과 학생으로 돌아왔지만 복도를 지나갈 때, 수업을 할때 눈과 눈이 마주치는 것이 서로가 아직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졸업할때까지 계속 이대로인 것일까. 그런 고민을 했던 것도 잠시, 곧 럼로우가 전근을 가게되었다는 소식을 듣게되었다. 이유는 금연구역인 학교내에서 그것도 화재가 발생하기 쉬운 도서관에서 담배를 핀 것.


겨우 그걸로 선생을 전근시키다니. 은근히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던 그였기에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나왔지만 나름 뉴욕에서 엄격한 사립학교였기에 가능한 처사였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럼로우에게 작은 선물을 주기도했고 편지를 주기도 했다. 버키의 반에서도 전근을 가는 럼로우를 위해 롤링페이퍼를 썼다. 아이들 한명한명이 큰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쓰고 그를 향해 짧은 메세지를 쓰는 형식이었다. 자신의 차례가 왔을때 버키는 그 커다란 종이에 어떤 말을 써야할 지 몰랐다. 그저 입안이 까끌했고 속이 뒤틀렸을 뿐이었다. 


잊지못할꺼예요. 버키는 자신의 이름도 쓰지않고 일곱글자만 쓰고 난 뒤, 다른 친구에게 종이를 넘겼다. 자신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비겁한 자신은 사과를 해 죄책감을 덜어서도 안되었다.


럼로우의 전근이 확정된 날, 학교에는 소문이 돌았다. 신고자는 스티브 로저스 라는 소문이. 그리고 버키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있는 몇 안되는 자였다.


***


"다시는 못만날줄 알았어."

"난 이렇게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지."


더 이뻐졌어, 제임스. 다리의 중간 사이, 럼로우가 버키를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



--



드물게 버키가 아픈 날이었다. 늘 스티브가 아파 버키가 그의 침대에 맴돌았던 적은 있었지만 버키가 아파 스티브가 서성이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유행하고 있던 독감이라는 것에 걸렸다. 얼굴도 새빨개지고 눈은 퉁퉁 붓고 목에서는 걸걸한 소리가 났다. 이불을 목끝까지 덮고 이마에 찬 수건을 올리고서 쿨럭이고 있는 버키를 스티브가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옮아. 집에 가."

"니가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집에 가. 그리고 너도 맨날 내가 아팠을때 가라고 해도 안갔으면서."

"...난 동생들이 있잖아."

"우리집엔 간호사 어머니가 있었어. 그리고 니 동생들 놀이터갔어."


배신자들. 지 오빠,형이 아프다는데. 놀이터가서 놀기나하고.... 코를 훌쩍이며 속으로 불만을 토해내자 스티브가 대야에서 수건을 짜내고서는 버키 이마에있는 수건을 바꿔주었다. 


"병간호를 자주 당해서그런가 하는것도 어렵지 않네."


시덥잖은 이야기가 들려오면서 이마에 다시 기분좋은 차가움이 느껴졌다. 버키가 다시 한번 코를 훌쩍이고서는 눈을 또르륵 굴려 옆의 스티브를 쳐다보았다. 스티브는 손으로 턱을 괴고 자신만을 쳐다보고 있었다.그것이 괜시리 부끄러워져 버키가 고개를 벽쪽으로 돌려버렸다. 


"그러다가 물수건 떨어져."

"내 이마는 넓어서 안 떨어져, 바보야. 빨리 집에 가. 넌 감기도 자주 걸리는 애가 겁도 없이..."


이 때는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고 있을 때였다. 평소에 잘생긴 모습 - 버키는 스스로가 잘생긴 것을 알고있다 - 만 보여주다가 이렇게 못난 얼굴을 보여줘야하다니...그것도 좋아하는 상대방에게. 16살의 어린 소년의 마음으로는 싫을만도 했다. 그걸 아는지모르는지 스티브는 이제 한쪽 무릎을 침대에 꿇고서는 마른 손으로 버키의 어깨를 당기며 똑바로 누우라며 성화였다. 


"이런건 좀 환자 마음대로 있게 냅둬!"


자신의 어깨를 미는 스티브의 손을 탁 치고서는 버키가 소리를 질렀다. 걸걸한 목소리때문에 삑사리같은 음이 나 조금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했으니 스티브가 조용히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몸을 옆으로 돌리고 벽을 쳐다보며 씩씩 거리고 조금 있자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설마 화난건가 싶어 살짝 불안하기도 하였고 차라리 화를 내고 오늘은 돌아가줬으면 하기도 싶었다. 좋아하는 이에게는 항상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고싶다. 남녀노소 만국공통인의 심정일 것이다. 민망하게도 코를 몇 번 쿨쩍 거리자 버키의 등쪽 시트가 푹 하고 꺼지는 느낌이 났다. 뭐지? 싶어서 뒤를 돌아보려 했을때 딱딱한 살의 감촉이 느껴졌다.


"뭐, 뭐하는거야! 스티브! 너,너,너, 지금!"


돌아가라고 소리를 꽥 질렀것만 오히려 스티브는 반대로 버키의 옆으로 더욱 침범했다. 그러니까 그 작고 메마른 몸을 침대 안으로 들이민 것이었다. 당황해 몸을 한번 펄떡거리자 이마에 있던 수건이 주르륵 밀려 시트로 떨어졌다. 감기의 열때문이 아닌 다른 열로 버키의 얼굴이 달아오는 것도 모르고 스티브는 자신의 몸을 조금 더 당겨 버키의 곁으로 다가왔다. 


"감기는 누구한테 옮겨야 낫는거래."

"바,바,바보냐? 그래서 너한테 옮기라고? 몸도 허약한 애가 말도 안되는 소릴 하고있어!"

"왜 말도안돼. 내가 너보다 자주 아팠으니까 익숙하니까 괜찮아. 넌 간호를 자주해줬으니까 간호를 하는 편이 나은것 같아."


스티브식의 막무가내 이론이었다. 늘 바른말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친구는 때때로 이렇게 자기멋대로 굴기도했다. 버키는 이것이 스티브의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버키가 스티브를 걱정하는건 지나친 보호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버키를 걱정하는건 당연한 옳은 일이라고 여겼다. 


"버키, 이쪽 좀 봐바. 그렇게 등을 돌리고 있으면 이마의 열을 잴 수가 없잖아."


만약 스티브가 아파서 버키가 이렇게 침대에 기어들어갔다면 무슨 짓이냐며 정색을 하곤 화를 냈을 것이다. 해본적 없지만 바로 예상이 갔다. 그런 주제에 자신은 스스로 성큼 들어오고 마음대로 한다. 버키는 스티브식의 막무가내가 억울해 불평을 쏫고 싶었지만 반한 사람이 지는 거라고 이 스킨십이 나쁘지 않아 아무말도 내뱉지 못했다. 서로 가끔 장난치다가 몸이 부딪친적은 있지만 이런식으로 근접에서,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건 처음이었다. 


스티브의 말과 이론에 순응하는 척, 버키가 몸을 천천히 돌려 스티브와 마주했다. 코닿을거리에 바로 스티브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 코닿을거리가 아니라 코가닿은거리였다. 실제로 가깝게 밀착되어 둘의 코가 가끔식 타이밍에 엇갈려 마주쳤으니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스티브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스티브의 따뜻한 숨결이 느껴졌다. 이게 꿈인가 싶어 버키는 숨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조금만 숨을 들이켜도 스티브의 체취와 따스한 숨소리가 느껴졌다. 자신의 표정이 얼간이 같지 않은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버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찌르면 터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스티브 눈 진짜 파랗다. 뜬금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 작은 손이 이마로 다가왔다.


"...열이 더 높아진 것 같아. 많이 아파?"

"으,응? 아니야. 별로 안 아파."


스티브한테 감기를 옮기면 안되는데, 이렇게 있으면 안되는데. 이러면 안되는 이유가 수 십가지는 떠올랐지만 그저 이렇게 있는것이 기분 좋아서 버키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스티브는 버키의 괜찮다는 말에도 안심을 하지 못한것인지 걱정스레 눈썹을 올리며 자신의 하나뿐인 친구의 얼굴을 살폈다. 아까보다 얼굴이 더 시뻘개진것 같아... 내일은 어머니에게 출근하기 전에 상태를 봐달라고 해볼게. 스티브가 버키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친구끼리의 스킨십중에 이정도는 허용치인 것 일까.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릿속으로 버키가 그런 생각을 했다.


"버키, 일단 푹 자자."


스티브가 그 말을 하고서는 몸을 조금 위로 움직인 다음에 양 손을 벌려 버키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그리고서는 자신의 어깨죽지에 그의 머리를 당겼다. 스티브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생각 없는 행동이었지만 당하는 버키는 그런식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의 열때문에 환상을 보고있는 것가 싶을정도의 상황이었고 오랜 짝사랑에 대한 신의 선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스티브의 키는 자신보다 작다. 그런 스티브가 어깨로 자신의 얼굴을 안았으니 그의 발은 버키의 무릎언저리 근처에 있었다. 어찌보면 한심할만한 몸인데도불구하고 버키는 그저 설렐뿐이었다. 살가죽이 없어 딱딱한 쇄골도 자신의 머리카락에 닿는 그의 어깨도 좋았다. 비실비실한 몸이지만 그래도 알파라서 그런가 느껴지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의 품은 가녀렸지만 버키에게는 어떤 이보다 넓었고 바로 느껴지는 살내음에 여기저기에 피가 몰리는 것 같았다. 제가 어깨동무라도 하면은 치우라고 말했던 주제에 오늘은 이런식으로 침대에 기어들어와 자신을 안아준다. 정말 비겁한데 너무 좋다. 버키가 눈을 올려 스티브의 얼굴을 살폈다. 그 가녀린 턱선이 오늘따라 왜이렇게 날렵하게 보이는지. 이미 스티브는 눈을 감고 있었다.


스티브는 정말 진짜로 엄청 멋있어질꺼야. 


아무에게도 뱉지 못할 말을 혼자 속으로 생각하며 버키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이 오메가였으면 그의 체취를 맡을 수 있었을텐데 라는 작은 아쉬움을 생각했다. 


*** 


어린시절이 꿈에 나왔다.  그때는 그게 참 행복하고 좋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슨 고문인가 싶다. 좋아하는 상대방이 성적의도없이 그냥 안아주다니....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고 가라앉는 것이 몸살의 전조인 것 같았다. 식음땀으로 등 뒤는 축축히 젖어있었고 이마에서도 송글송글이 땀이 맺혀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축축한 등 뒤로 공기가 스쳐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구역질을 하더니 기어코 오늘 몸이 망가졌구나.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시작된 여름 덕분에 강한 햇볓이 버키를 감싸 안았다. 여름감기는 개도 안걸린다던데... 킁 하고 코를 훌쩍이고 이불로 몸을 더더욱 감싸안았다. 생명으로 가득 찬 여름 혼자서만 죽어가고 있구나.


땀으로 젖은 몸이 기분 나쁘다, 씻어야 한다. 병원에 가야한다. 머리로는 알았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버키가 아직 마지막 방학을 보내고 있는 학생이라는 점이었다. 회사에 전화해 아프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하며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다.


자신은 어제 막 십년된 비참한 짝사랑을 고백한번 못해보고 끝낸 참이었다. 그래도 생각했던것보다 충격이 덜하다고 느꼈는데 착각이었나보다. 버키는 그대로 다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이제 꿈에서 처럼 스티브가 자신을 간호하러 와줄까. 그 철 없던 어린시절 처럼 침대에 들어와 자신을 안아줄까. 


아무래도 아니겠지. 


전날 밤, 토악질을 하여 속이 텅텅비어 힘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몸살기운도 가진 버키의 머리는 멍해져있었고 버키는 차라리 정신이 아니라 몸이 아파서 다행이라는 자학적인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멍청한 버키 반즈. 고백한번 못하더니 이제 꼼짝없이 스티브의 결혼식에 불려가 베스트맨이 되겠구나. 친구로서 기뻐해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를 사랑한 사람으로 울며 슬퍼해줄 수도 없는 반푼이.... 버키가 탁자 옆에 올려놓은 스티브와 자신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같은 대학에 입학했을때 찍었던 걸로 두 사람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고있었다. 이것도 이제 치워야 할까. 버키가 그런 생각을 하며 도로 침대에 누웠다. 오늘 아프지 않았다면 울어 탈진했을지도 모른다. 고여오려는 눈물에 눈이 축축히 젖었다. 버키는 눈물이 아까워 떨어지지 않았으면 싶어서 눈을 감았다. 




언제 잠에 들었던 걸까. 눈을 뜨니 어수푸름한것이 벌써 해가 진 상태였다. 등이 꺼진 방은 달빛만이 유일했고 버키가 천천히 눈을 껌뻑일때는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은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문제인것인가. 흐릿한 시야속에 물건이 흔들흔들 움직이고 있었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껴져 몸을 일으키려 하였지만 손가락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낮에 버키의 몸을 감싸돌고있던 열이 그를 묶고있는 밧줄처럼 강해졌다. 


"흐으..."


기분이 이상했다. 뜨거운 열이 분명 기분나빠야할터였는데, 나쁘기는 커녕 어딘가 그를 들뜨게 만들었다. 너무 아프고 어지러우면 기분이 좋다던데 그런건가. 버키가 일어나기 위해 팔로 몸을 지탱했으나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하으,으으." 이상한 소리만이 자신의 입을 통해 나왔다. 이게 무슨 소린가 말인가. 


몸을 둘러메고있는 이불을 살짝 걷었다. 공기가 상대적으로 뜨거운 버키의 몸을 식혀주고 있었다. 그대로 몸을 움직여 다리로 시트를 긁었다. 차가운 시트가 기분이 좋아 버키가 몸을 살짝 떨었다. 이런 느낌 버키는 한번도 알지 못했다. 다리와 다리 사이로 주르륵 뭔가 흘러내렸다. 어차피 땀범벆이였던 몸이었지만 농밀함이 달라 단번에 알아차렸다. 내 몸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거지, 젠장. 어제는 실연, 오늘은 몸살이냐. 


숨을 가쁘게 몰아 쉬면서 천장을 살폈다. 이상하리만큼 뱃속 아래가 뜨겁고 민망하게도 성기가 자꾸 발기했다.아직도 시야는 흐릿했고 입에서는 뜨거운 숨만 내뱉어졌다. 손끝으로 시트를 움켜쥐고 아...! 하는 이상한 탄성을 내뱉고나자 그나마 잡혀있던 이성의 끝이 툭 하고 끊어졌다. 자신의 몸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버키, 버키! 정신차려 봐! 이게 무슨일이야!"

"...스티브...? 스티브야?"


들뜬 열에 잠식 되어 얼마동안 정신을 잃었을 까. 누군가 자신을 흔들어 눈을 떠보니 바로 앞에 스티브가 있었다. 꿈인가? 갑자기 스티브가 왜 우리집에...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차가운 손이 버키의 양 볼을 감싸안았다. 버키, 어디 아픈거야? 그래서 이렇게 열이나는거야? 걱정스레 묻는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느껴졌다.


"으으으응."


얼른 스티브에게 말을 해야하는데, 갑자기 열이 났다고. 몸살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그래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그의 손길과 체온이 너무 좋아서 내뱉을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얼굴을 감싸안는 손에 어린아이가 응석부리듯이 비비면서 달콤한 콧소리를 내었다. 버키...?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스티브가 좀 더 가까이와 버키의 모습을 살폈다. 


시원한 냄새. 그가 다가오자 달콤하면서 시원한 향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향일까. 민트향? 스티브랑 어울린다. 멍하니 그런생각을 하자 다시한번 울컥하고 다리 사이에 질척이는 것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흐으응.읏. 그리고 아까보다 더 간질간질한 느낌이 다리사이로부터 느껴졌다. 뜨겁고, 간지럽고, 안달나게하는... 무언가 쑤셔서 넣어줬으면 하는 기분. 스스로가 미쳤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외에는 표현할 수 없었다. 


"스티, 스티브. 흐읏. 응. 나, 이상한 것 같아."


버키가 울먹이며 스티브의 손목을 잡고서는 더더욱 그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자신의 행동이 이상해 낯뜨거웠지만 이렇지 않으면 견딜수가 없었다. 더더욱 스티브의 몸에 닿고 싶었고 스티브를 느끼고 싶었다. 그를 좋아하여 늘 항상 비슷한 기분을 갖고 있긴 하였지만 오늘밤은 그것과는 달랐다. 좀더 정열적이고 뜨거운 느낌. 몽롱한 눈을 열고 버키가 스티브를 쳐다보았다. 당황하여 멍청한 얼굴이 보여졌다. 


"버키, 너 설마. 발현 되고있는거야?"


발현? 내가? 이제와서? 스물세살까지 베타로 살아온 내가? 그건 아닐꺼야 라고 말하려는 순간 아! 하고 탄성이 흘러나왔다. 뱃속 아래가 짜릿했다. 더더욱 참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버키가 크게 숨을 헐떡거리고면서 마지막 동아줄인것마냥 스티브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런 것 같아, 흐으. 스티브. 나, 나좀 어떻게 해줘. 버키가 다리를 베베꼬면서 허리를 음란하게 살짝 들고서는 말했다. 이때 만큼은 스티브가 누군가의 연인이라는 점이라는 등의 도덕적인 것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눈 앞에 있는것이 자신의 욕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알파이며 자신이 십년을 그리워한 스티브라는 것만을 알았다.


남몰래 자신이 베타이기때문에 스티브와 이어지지 못한거라고 생각을 했던 버키였다. 스티브가 베타와 오메가 등으로 차별을 하는 편협한 인간이라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콤플렉스 같은거였다. 물론 그 콤플렉스는 스티브가 알파로서 오로지 오메가와 사귀는 전형의 인간이라는 점에서 생겨났지만 말이다. 내가 오메가라면 조금 달라졌을꺼야 라는 기대가 지금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한 없이 도덕적이기 위해 노력하는 스티브라고해서 이 상황에 그냥 침착할 수 있기만을 바라는것은 어려웠다. 눈 앞에있는 버키 반즈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하면서 이제 막 발현을 시작하여 히트사이클이 터진 오메가이기도 했다. 친구 사이에 성적매력을 평가하는 일은 없었지만 지금에서 말하자면 버키는 아주 매력적인 오메가다. 베타일때와 외모와 성격같은것은 똑같아도 오메가로 발현됨으로써 풍기는 분위기와 체향덕분에 그의 성적매력을 아주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스티브가 침을 꿀꺽 하고 크게 삼켰다. 버키는 수치심도 도덕도 잃고서는 이제는 몸을 들어 스티브의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면서 쪽쪽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풍성한 브루넷이 자신의 목을 간질일때마다 아랫도리가 단단해지는것이 느껴졌다. 이미 알파향은 개방이 되어서 버키의 방을 진하게 가득 채운지 오래였다. 


"하아, 스티브. 흐, 제발. 응? 미칠...미칠 것 같아. 흐으응."


대담하게 앙 소리까지 내면서 몸을 부비는 버키의 몸에서는 달콤한 향이 났다. 바닐라 향. 나도 꼭 자기같은것만 난다. 스티브가 다시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서는 버키의 등을 쓰다듬었다. 불타는 것처럼 뜨거운 온도가 손으로 느껴졌다. 이 옫도는 자신에게서 나는 것일까 버키에게서 나는 것일까.  


스티브가 몇번 씩이나 버키의 등을 문질러주었다. 그 작은 손길에도 민감하고 예민한 버키는 아...!아...! 소리를 내면서 허덕였다. 그 등을 쓰는 손길에 얼마나 많은 기분과 감정이 담겨져있는지 버키는 모를 것이었다. 농밀하고 질척하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버키의 등을 어루만져주었던 스티브가 이내 다짐하듯이 등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서는 양 손으로 버키의 어깨를 붙잡고 자신의 몸에서 떼어낸 뒤, 바로 강하게 밀어 그를 침대에 넘어트렸다.


"흐으, 스. 스티브...흐응."


눈물을 머금고 허덕이는 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버키. 어제까지만 해도 단순히 친한 친구로 보았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만큼의 뜨거운 눈빛을 갖고 스티브가 깔려있는 버키를 내려다 보았다. 버키. 그리고는 낮은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응, 응. 스티브."


경건한 신의 말씀을 듣는 어린 양인 척, 버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런 버키를 내려다보며 스티브가 짙은 한숨을 내뱉고서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에 계속 내가 있으면 안좋을 것 같아. 이러다가 정말 큰일이 벌어질꺼야. 그러니까... 히트사이클 억제제를 사놓고 돌아갈게. 물론, 발현하면서 일어나는 히트사이클은 어쩔 수 없이 막을 수 없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흐으, 스티브. 가지마, 응...!"

"안돼, 버키. 넌 지금 히트사이클 중인 그러니까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야. 그러니까 알파인 나에게 그러는 걸꺼야. 어쩔 수 없는 몸의 순리니까. 미안해, 버키. 빨리 떠났어야 했는데... 내가... 내가 너무 우물쭈물 거렸어."


그냥 돌아간다니, 스티브. 그게 무슨소리야. 예상치 못한 그의 판단에 버키가 절망적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왜 난 오메가인데. 넌 지금 알파인데. 내 체취에 취하지도 않는거야? 버키의 속마음을 알지도 못한 스티브가 계속 사과를 하며 옷을 정비하였다. 그는 버키가 자신에게 이러는 것이 오로지 발현때문에 히트사이클에 취해서 그런것이라 생각을 하였고 이대로 자신이 이곳에 있는다면 엄청난 사고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가지마, 가지마. 스티브. 이제 신음에 막혀 소리도 나지 않게 되었고 버키가 울것같은 눈으로 계속 스티브를 쳐다보았다.


"정말... 너와 페기한테도 내가 몹쓸 짓을 한 것 같아. 미안해."


페기.

결국 또 그 이름이야?


마지막 스티브의 사과와 함께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안돼, 스티브. 무서워. 이런 날 두고 가지마. 제발. 


뜨거운 열기 속 버키는 결국 그날 밤 혼자 침대 시트를 긁으며 울며 밤을 지새웠다.

그 와중에 터지는 눈물이 열기때문이 아닌 비참함때문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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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링버키 정말 좋아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스티브를 짝사랑했던 버키(현대AU)


웅성거리는 식당 안, 유일하게 홀로 테이블에 앉아있는 버키가 괜스레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고 있었다. 잘생긴 젊은 남자가 홀로 앉아있으니 여기저기서 권유가 끊이지 않았다. 수줍게 미소를 건내며 혼자 왔냐고 웃는 여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미소로 친구를 기다리고 있다고 회답을 몇 번이나 건내고 나서야 버키는 완전히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어깨를 돌려 뻣뻣하게 굳어진 몸을 조금에서야 풀고 난 뒤, 버키가 메마른 목을 축내기 위해 물이 담긴 유리컵을 들었다.  


물로 입안을 몇번 헹구고 있을 때 쯤, 저 멀리서 기다리고 있던 이가 보였다. 자신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는 모습이 골든 리트리버를 연상시키는 저의 친구가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아름다운 금발머리를 찰랑찰랑 흔들면서 다가왔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고 손을 번쩍 들고서는 살며시 흔들어주었다. 그와의 약속은 늘 항상 버키를 설레게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의 뒤에 보이는 다른 이의 모습에 얼굴이 점차 굳어지고 말았다.


"오래 기다렸어?"

"...응? 아니. 그보다 페기도 같이 올 줄 몰랐네?"

"아, 응. 너한테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해준다고 하니까 같이 오고 싶다고 해서."

"오랜만이야, 반즈."


아, 그래? 페기도 같이 오는 걸 알았으면 좀 더 꾸미고 오는건데. 버키가 멋쩍게 너스레를 떨었다. 수 년간 스티브의 옆에 서서 감정을 숨기느라 연기가 능숙해진 버키였다. 그의 거짓말이 통했는지 페기와 스티브가 동시에 그게 뭐냐며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이다, 지금 나 자연스럽구나. 혹여나 얼굴이 굳어지지는 않았을까, 지금 억지로 웃는것이 들키지 않을까. 페가의 등장은 버키에게 있어 늘 항상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연기를 할 수 있냐, 없냐의 오디션이었다.


"...난 너 혼자 오는 줄 알았지. 음, 전할 소식이라는게 뭔데?"


늘 그랬듯이 버키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의 스티브 로저스의 절친한 친구 버키 반즈 인 척 물었다. 스티브는 버키의 말에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페기의 방향으로 돌렸다. 페기 또한 고개를 돌려 스티브와 시선을 마주하고서는 그녀다운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너한테 가장 먼저 말하고 싶었어. 아직 버키를 쳐다보지도 않은 체, 스티브가 말했다. 


"나랑 페기. 약혼하기로 했어."


늘 자신에게 상냥하기만 했던 스티브가 잔인해진 것은 언제부터 였을까. 

아니, 스티브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자신이었지. 


***


버키의 짝사랑이 시작된 지, 올해가 꼬박 10년이었다. 십주년을 맞이해서 축하한다는 말은 당연히 필요 없었지만 설마 이런 최악의 선물을 줄지는 몰랐다. 아니 어찌보면 십주년을 맞이했다는 말도 틀릴지 몰랐다. 버키가 자각하고 햇수를 센 것이 십년인거지 어린 시절 꼬꼬마일때부터 좋아한다는것도 모르고 좋아했을지도 몰랐다. 그런것을 따져서 뭐하겠냐만은.... 어릴때부터 스티브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다른사람의 눈에서는 아닐지 몰라도 버키의 눈에서는 그랬다. 얇아서 늘 휘날리는 금발머리때문인가 아니면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때문인가. 스티브는 빛이 났고 그 빛은 늘 항상 버키의 시선을 빼앗았다. 


골목길에서 맞고 있는 스티브를 구해준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작은 체구때문에 저보다 몇 살이나 어린 동생으로 보였던 그는 사실 저보다 한살밖에 어리지 않았으며 심지어 학교를 일찍가 버키와 같은 학년이었다. 우연이 더해져 알고보니 같은 학교에 재학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계속 어울려다녔다. 사람의 인연은 년수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지만 어릴때는 더더욱 그랬다. 짝궁이서, 같은 동네에 살아서 등등. 정말 별것도 아닌 일로 짧은시간안에 금방 친구가 되기 마련이었다. 



"너는 왜 그런 애랑 다니냐?"


스티브와 어울리고 나서부터 버키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었다. 니가 뭐가 부족해서 그런 애랑 다니냐, 같이 다니지 마라 수준 떨어진다. 그런 애랑 놀지말고 우리랑 놀자. 처음에는 짜증이 났다. 스티브가 뭐가 어때서? 그런 애 라는게 뭔데?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스티브와의 있는 날이 길어지면서 비겁하게도 안심을 했다. 아직은 아무도 스티브의 '빛'을 발견하지 못했구나 라고. 늘 주위에게 환영을 받고 사람이 끊어지지 않는 것은 버키였지만 버키는 늘 항상 누군가에게 스티브를 뺏길 것 같아 불안했다. 다른 친한 친구가 버키의 이런 고민을 듣고 코웃음을 친적이 있었다. 걔가 하나뿐인 친구를 뺏기는걸 걱정해야하는거 아니야? 버키는 친구의 말에 굳이 토를 달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스티브에게는 빛이 나는 걸."


하나뿐인 친구를 뺏길까 걱정이라. 스티브에게 자신은 '유일한' 존재다. 버키도 그걸 알았다. 하지만 버키에게 스티브는 '특별한' 존재였다. 자신이 스티브의 세계속 '유일한' 사람이라면 스티브는 자신의 세계속 많은 이들중에 '특별'했다. 그러니까 '온리원'과 '넘버원'의 차이인것이다. 그렇다면 스티브의 세계속에 자신말고 다른 이가 들어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자신이 온리원이 아니게 될 때가 온다면, 누군가 자신처럼 스티브의 빛을 발견하게 된다면... 자신이 스티브에게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버키는 그게 항상 걱정이었고 고민이었다. 어린시절부터 쭈욱.


***


"잠깐만 차 좀 갖고올게. 기다리고 있어."

"아냐. 난 그냥 지하철 타고 갈게."

"아니야, 버키. 바로 근처에 주차했어. 조금만 페기랑 기다리고 있어."


자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티브가 웃으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방금 전, 식사로 인해 속이 망가진 버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더부룩한 상태로 억지로 웃으며 음식을 꾸역꾸역 입에 밀어넣어 생긴 결과였다. 페기와 스티브는 버키의 상태가 왜 나빠졌는지도 모르고서는 계속 정답게 버키의 걱정을 했다.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베스트맨은 역시 버키지. 이런 소리를 하는데 어떻게 내가 태연할 수 있겠어. 뱉고싶은 말도 뱉지 못하고 삼키고 싶지 않은 것들을 삼킨 버키의 위장은 완전히 뒤틀려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후 하고 한숨을 뱉자, 옆에서 페기의 걱정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즈. 괜찮아? 오늘 몸상태가 안좋은데 억지로 온거야?"

"응? 아니야. 괜찮아. 그보다 약혼이라니... 축하해. 제대로 축하를 못해준 것 같네."

"괜찮아. 몸이 안좋은데 어쩔 수 없지."

"응..."


둘 사이에 별다른 친분은 없었다. 페기는 스티브의 오랜 여자친구, 자신은 그의 어린시절부터의 단짝친구였지만 드라마처럼 셋이서 어울리고 다니는 그런 활동은 없었다. 몇 번의 권유가 있긴 하였지만 페기가 있는 자리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버키는 자잘한 이유를 대면서 거절하고 도망치기 바빴다. 그들은 거절하는 버키를 이런 상황에 끼기 어색하니까... 정도로 해석한 것 같았다. 


어색한 자리속 침묵만이 감돌았다. 평소라면 억지로 농담이라도 지어냈을텐데 오늘은 그것마저도 할 수 없었다. 울렁거리는 속을 다잡고 식은땀을 흘리며 페기의 눈치를 보던 버키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이야기를 꺼냈다.


"...스티브의 어떤 점이 좋았어?"


이런걸 알아서 뭐하려고. 뒤늦게 자책을 했지만 이미 말이 떠나간 뒤였다. 


"글쎄... 꼭 이유가 있어서 좋은건 아니지만."


뭐랄까, 스티브는 빛나잖아. 그렇게 말한 페기의 얼굴에는 낯뜨거운 애인자랑으로 인한 홍조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답게 당당하게 그리고 태연하게 빨간 입술을 호선으로 만들고 웃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든 생각은 뒤틀림밖에 없었다. 너도 발견했구나. 근데 내가 먼저 발견했는데. 내가 10년도 전에 발견했는데. 내가 더 먼저 발견했는데.


그런데 왜 너야.


스티브의 아기를 낳아줄 수 있는 오메가여서? 나는 베타여서 안되었던거야? 왜 내가 먼저 발견했는데 니가 차지한거야? 도대체 왜? 넌 스티브를 만난지 겨우 3년밖에 안되었잖아. 왜 벌써 약혼까지 하는거야? 왜? 도대체 왜? 도대체. 도대체.도대체.도대체.도대체.도대체.


"스티브를 잘 부탁해."


버키는 그 날 집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에 달려가 속을 몇 번씩이나 게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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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길다고 생각했는데 엄청나게 짧네요. 1,2편 괜히 나눈건가 싶을정도로(웃음)


*멸팁버키



"그러니까 뭐 별명을 만드는거야"


제임스가 물렁물렁한 남자였다면 스티브는 딱딱한 남자였다. 고지식했고 융통성이라고는 없었으며 철저한 규칙주의자였다. 그 규칙이라는 것이 "자신의 신념에 맞는다면 지킨다." 라는게 조금 다른 점이었지만. 스티브와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된 케이스 였다. 골목길에서 저보다 덩치가 두배는 되어보이는 남자들에게 둘러쌓여 발길질을 당하고 있던 것을 제임스가 구해주며 만난 것이었다. "나 혼자 끝낼 수 있었어" 제임스가 스티브를 구해준 것은 단순히 그가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면 안된다. 그 간단한 규칙을 지키기 위해 끼어든것이지 절대 맞고있는 남자에 어떠한 감정을 품고있어서 그런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친구가 될 생각도 계획도 없었다. 하지만 저 말을 듣는 순간, 그리고 얻어터져 입가에 피를 질질 흘리고 있으면서도 눈물 한망울 흘리지 않으며 표독스러운 눈을 뜨고 입가의 혈흔을 닦는것을 본 순간, 제임스는 인생의 시곗바늘이 돌아간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느꼈고 얼른 집으로 달려가야지 라는 계획은 빠르게 수정되었다. "내이름은 제임스 뷰캐넌 반즈야" 쓰러져 있는 금발머리의 사내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스티븐 그랜트 로저스야" 그의 이름은 스티브였다.


제임스는 남자치고 애교가 많은 편이었다. 웃음도 많았고 눈웃음도 많았으며 스킨십도 잦았다. 그에 비해 스티브는 애교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사내였다. 늘 딱딱하였으며 틱틱 거리는 말투였고 제임스가 스티브에게 제안을 하면 스티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응하는 형식이었다. 제임스에게 친구는 많았지만 그 중 스티브는 특별한 사람이었고 스티브에게는 친구는 없었지만 제임스가 특별한 사람인지는 몰랐다. 제임스는 그것이 퍽이나 섭섭했다. 스티브는 자신에게 어디에 놀러가자고 하지도 않았고 무언가 자신을 특별하게 취급하지도 않았다. 물론 제임스는 스티브의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이 유일한 것은 스티브가 언제가 다른 친구를 사귀면 깨지는 것이었고 제임스는 유일한것이 아니라 특별한것이 되고 싶었다. 언제 스티브에게 유일해지지 않아도 늘 시선이 닿을 수 있는 특별한 것이. 


고작 16살밖에 안된 제임스는 스티브를 향한 이 감정이 그저 '친구로서의 섭섭함'이라고만 생각하였다. 


스티브에게 속으로 불만은 갖고있긴 하였지만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같은 동성친구인 스티브에게 날 특별하게 봐줘 라고 말을 하긴 어려웠다. 게이도 아닌데 스티브에게 게이라는 낙인이 찍힐 것 같아 두려웠고 스티브가 거절할까 두려웠다. '나는 널 특별하게 생각하는데.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나한테는 언제나 너인데' 꿍한 마음을 어디에다가 털어놓기도 어려웠다. 결국 제임스는 스티브가 알 수 없게 혼자 속앓이를 하였고 그 속앓이가 깊어져 마음의 상처가 되어 이제는 "날 특별하게 보는게 그렇게 어려워!" 라는 억울함 마저 들었다.


대놓고 날 특별취급 해달라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어필할 수 있는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한 결과 제임스는 별명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제임스는 다른 친구들에게 '짐'이라고 불렸다. 제임스의 줄임말이니 가장 무난했다. 스티브도 제임스를 종종 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대부분은 제임스라고 불렀지만. 제임스는 스티브에게 불리는 별명을 따로하여 그에게 특별함을 얻고자 했다. 오로지 스티브 만이 부를 수 있는 나의 이름. 어쩌면 이것또한 스스로가 스티브를 특별 취급하는것일지도 몰랐지만 어찌되었든 '별명'이나 '이름'은 자신보다 타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니까 스티브에게서도 작게나마 특별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만 사용하는 별명에 무슨 의미가 있어?"

"왜 의미가 없어. 뭔가 공유하는 느낌이잖아. 형사들이 서로의 파트너에게만 암호를 공유하는 것처럼"

"내가 니 파트너야?"

"그..그러면 아니야?"


스티브가 못말린다는듯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임스는 살짝 긴장을 하며 스티브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 파트너긴 하겠네" 후우- 살짝 감돌던 긴장감이 빠졌다. 여기서 아니라고 했다면 실망하여 별명짓기를 고집할 수 없을지 몰랐다. 


제임스가 이 짧은 사이에 긴장을 하고 긴장을 푼것도 모르고 스티브는 골똘히 제임스의 말을 생각해보았다. 별명이라고 뭐가 좋을까. 뜬금없는 제안이긴 하였지만 딱히 크게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별명을 짓는게 어려운것도 아니고.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낸 별명이 일상생활에도 상용화 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별명이라는 것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이면 바로 떠오르는 걸로 지어지는 것이지 이렇게 "너의 별명은 이것이다" 라고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정해진 별명이 과연 일상생활을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떠올려질까....아마도 분명 별명을 자두로 정하면 "헤이 제임스! 가 아니라..음..자두!" 이렇게 얼토당토하게 불려질게 분명했다. 그런건 별명이 될 수 없다


'그러면 제임스를 보면 무의식적으로 당장 떠오릴 수 있는 별명이어야 하는데'


가볍게 시작된 이야기지만 스티브가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스티브가 턱을 괴고 고민을 하기 시작하자 제임스는 침을 꿀꺽 삼키고 기대하는 표정을 최대한 숨기려고 노력하며 말을 기다렸다. 스티브가 어떤 별명을 지어줄까. 시간은 흘러 오분정도가 지났고, 시곗바늘이 정확하게 오후 5시의 정각을 가리켰다.


"...버키"

"뭐라구?"

"버키. 버키는 어때? 별명으로"

"잠깐만...버키..? 버키라고? 그게뭐야...아니 나의 뭘 보고 버키라고 지은거야? 이름이랑도 안 비슷하잖아"

"BUC까지는 똑같잖아"

"하지만 버키는...개이름이잖아!"


기껏 지어준다는 별명이 개이름이라니! 특별함을 원했는데 이건 동네의 개들에게서 쉽게 볼 수 있는 흔다히 흔한 별명이었다. 버키가 뾰루퉁 해져 입을 쭉 내밀고 항의를 하자 스티브가 웃었다. 


"하지만 너 하면 단번에 떠오르는게 개였단말이야" 

"....나 개같아?"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욕처럼 들리는데..순화해서 강아지 같다고 표현하는게 어때"

"문제는 그게 아니야... 내 어딜봐서?"


버키가 내밀어진 입을 넣지 못하고 스티브를 빤히 쳐다보았다. 스티브는 버키의 모습에 풉 하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어딜 봐서라니.. 지금의 모습도 영락없이 주인의 말을 기다리는 강아지 모습이었다. 꼬리만 달려있다면 분명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냥....가끔 니가 웃으면서 나를 향해 뛰어올때가 있잖아. 사실 가끔이 아니라 많이지. 그 모습이..좀..주인을 반기는 강아지 같다고 해야할까"

"난 고양이과라고 생각했는데....개과는 오히려 스티브 너라고 생각했는데. 골든 리트리버쪽.."

"그래? 버키 니 성격이 더 서글서글 한게 개과고 난 오히려 좀 고양이과가 아닐"

"잠깐만"

"응?"


버키가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는 스티브의 말을 잘랐다.


"니가 내 주인이라고?"

"아니....그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 그런 뜻으로 사용한건 아니었어"


스티브는 버키가 기분나빠할까 손을 저으면서 변명하였다. 하지만 스티브의 생각처럼 버키가 기분이 나빠져 말을 자른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분은...아씨 이게 뭐라고 좋지. 나 사실은 변태아냐? 기분이 좋아진 버키가 샐쭉 웃으면서 스티브에게 장난을 걸기 시작했다.


"주인님. 그러면 먹이좀 주시죠. 이왕이면 최고급 먹이가 먹고싶네요. 글쎄요 스테이크라든가"

"뭐야 버키. 장난치지마"

"오, 버키는 귀여운 강아지랍니다. 얼른 먹이와 담요를 주시죠"

"아 내가 말실수 한거라니까 진짜 미안해"

"미안해하실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서 스테이크를 대령해달라니까요? 설마 밥을 굶기시려는건 아니죠? 동물학대인데"


둘은 깔깔 웃으며 금방 저들만의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버키는 능글맞게 계속 강아지에 빙의를 하여 스티브를 재촉 했고 스티브는 버키의 장난에 웃으며 미안하다고 하기 바빴다. 둘만이 있던 스티브의 방에서 금방 웃음 소리가 채워졌고 버키는 이제 멍멍 하며 강아지 소리를 흉내내기까지 이르렀다.


"원하는것도 먹이도 못주는 주인이라니 실망이네요"

"아- 미안해. 미안해"

"그러면 적어도 애정이라도 주세요. 애완동물은 애정에 굶주리면 죽는답니다"


이건 버키가 의도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놀이에 심취해서 스티브를 곤란하게 하려고 했던 대사였다. 절대 버키의 깊은 마음 속 스티브를 향한 무언가때문에 욕심내어 한 말이 아니었다. "애정? 이렇게 주면 되나?" 스티브가 오른손으로 버키의 머리를 쓰다듬고 왼손으로 버키의 턱을 긁었다. 


"어.."


버키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스티브의 스킨십에 당황해서였다. "오구오구, 우리 버키. 이제 기분 좋아요?" 한껏 장난에 심취한 스티브는 착실한 주인 역할을 하고 있었고 버키의 표정이 살짝 굳어진것도 깨닫지 못했다. "어..아니..." 버키의 얼굴이 금방 빨갛게 익고 말았다. 버키의 얼굴에 확연한 변화가 와서야 스티브가 자신이 과했다는것을 깨달았다. "미..미안.. 기분나빴지?" 스티브가 바로 손을 뺐다. 사라져버린 감각에 버키가 안타까워 "아.." 하고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심했나봐. 내가 미쳤나봐 그러니까"

"아니. 아냐아냐. 기분 나빴던건 아냐....."

"그래? 하지만 지금 얼굴이 엄청.."

"기분 나쁜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냥.."

"그냥..?"


아, 미쳤나봐. 왜 나 지금 기분이 좋았던 거지? 펑 하고 김이 솟아오를것처럼 열이 달궈진 얼굴에 버키가 고개를 숙였다. 스티브는 "버키?" 하고 부르면서 자신의 고개를 내려 버키와 눈을 마주치기 위해 노력하였다. 우와, 이런상태로 버키라고 불리니까 정말로 스티브의 강아지가 된 것 같아. 그 감각은 확실히 낯설면서도 버키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들었다.


"나.....나............강아지 타입이 맞나봐......."


인정할건 인정해야했다. 방금 전 스티브가 머리와 턱을 긁어줬을때 미치도록 기분이 좋았다. 





스티브는 버키와의 약속장소에 십분정도 일찍 도착하였다. 버키도 약속을 늦는편은 아니니 조금만 기다리면 곧 도착할 것이었다.


버키의 별명짓기는 성공하였다. 일상생활에서도 충분히 상용화가 되었으며 이제와서는 제임스라고 부르는것이 더 어색했다. 문제는 이것이 버키가 의도한 것처럼 흐르지 않는 것에 있었다. 버키는 스티브에게 스티브 만이 부를 수 있는 별명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 스파이들의 암호처럼 멋있지 않냐는 이유였다 - 별명을 지어줄 것을 요청했었다. 그런데 이것이 다들 버키에게 어울리는 별명이라고 생각하였는지 이제와서는 모두들 버키를 짐 이나 제임스라고 부르지 않고 스티브 처럼 '버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건 스티브 만이 부를 수 있는 별명이야 너넨 부르지마! 라고 할 순 없잖아.."

"확실히 이상해 보이겠네"


너무나도 가까워 간혹 게이냐고 의혹을 받는 둘이었다. 그런 말을 하다가는 빼도박도 그런 사이처럼보여질게 분명했다. "뭐, 그래도 상관없어" 멋있는 암호의 작전이 실패하여 버키가 시무룩해할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버키가 예의 눈웃음을 치고서는 스티브를 돌아보며 말장난을 하였다. "내 주인은 너 하나 뿐이잖아" 스티브는 그 장난에 웃으며 같이 장난으로 맞대응 해줬다. "그렇지, 나의 버키" 이제 버키는 스티브가 쓰다듬으면 고개를 부비적 거렸었다.


"스티브!! 일찍 왔네!!"


기다리고 있는 틈도 잠시, 저 멀리서 버키가 활짝 웃으며 뛰듯이 걷고 있었다. 이제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향해 손을 붕붕 흔들며 뛰어오지는 않았지만 저 웃는 모습은 변함없이 같았다.


"...역시 강아지 같잖아, 버키"


분명 꼬리가 있었더라면 이리저리 붕붕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었다. 




스티브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버키를 향해 그런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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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의 줄임말이 짐인지 아닌지 잘 모릅니다..()헤헤...영어..몰라요...일본어라면 잘 아는데...

골목길에서 맞는 스티브를 구해준 버키는 코믹스 오피셜...이었던거같은데...영화기반코믹스의 오피셜이었나...잘 몰라요..아니면 창작으로..(웃음)

그보다 제임스 뷰캐넌 반즈가 진짜 어떻게 "버키"가 된건가요? 저 이거 너무 궁금해요.


멸팁버키는 딱딱한 융통성 없는 남자와 능글맞은 버키의 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멸팁버키는 버키가 스티브를 짝사랑하는게 너무 좋아요.

스팁버키로는 혼란스러워하는 버키를 스티브가 묶어두는게 좋구요(흐뭇)

원고하느라 웹에 글을 너무 안올린것 같아서....원고는 스팁버키 떡치는게 대부분 이어서 스팁버키가 떡 안치는 내용으로 써봤습니다.

귀향

 

JunkFood

 

허억-”

 

버키가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눈을 떴다.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은 몸은 물을 빨아들인 솜처럼 무거웠다. ‘여기가 어디지?’ 만약 다음에 눈을 뜨게 된다면 보이게 되는 것은 천장이 아니라 스티브의 얼굴 일 것이라 생각 했다. 나무로 된 천장은 낯설면서 묘하게 익숙했다. 설마 와칸다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버키가 마른 침을 삼키며 몸을 움직였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다. “..이게 뭐야삐걱 거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무의식중에 사용한 것은 왼 팔이었다. 왼 팔. 현재 존재하면 안 되는 팔. 버키가 떨리는 마음으로 천천히 왼 손을 들었다. 버키의 시야에는 단단하고 굵은 성인 남성의 보통팔이 보였다.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이 지금 보이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미래의 최첨단 기술로 인해 만들어진 인공 팔인가? 언제 다시 달아준 거지? 시험해보기 위해 버키가 왼쪽 어깨를 움직이며 팔을 돌려보았다. 메탈암으로는 느껴질 수 없었던 뼈와 근육의 일체감이 느껴졌다. 진짜다, 이건 진짜 내 팔이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다시 팔이 생길 수 있는 거지? 낯선 곳에 눈을 뜬것도 익숙지 않은데 갑작스레 생긴 자신의 팔에 정신을 팔리고 말았다. 팔에 정신이 팔려 몸을 푸드덕 움직이고 있는 사이에 끼이익 하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이곳으로 들어왔다.

 

버키? 일어났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스티브였다. 하지만 생각했던 스티브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놀랍게도 캡틴아메리카, 살아있는 전설, 미국의 영웅인 스티브가 아니라 항상 마음 한 켠에 담아져있던 브루클린의 작고 마른 청년인 스티브의 모습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그래, 이 낯설지 만 익숙한 곳은 스티브의 방이었다. 과거에 잘 곳 이라고는 좁은 1인용 침대뿐인 스티브의 방에서 버키는 종종 억지로 끼어들어 잠을 청한 적이 있었다. 비좁은 침대에 서로 맞닿은 살결과 풀풀 나던 먼지 냄새,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공간속에 지금 다시 서있는 것이다.

 

무슨상황이냐니...기억 안나? 술을 얼마나 마신거야. 늘 있는 일이지, 너는 어제 누군가와 술을 거하게 마셨고 또 너희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 집 문을 두드렸고 기어코 바닥에 자라고 해도 꾸물꾸물 내 침대에 기어들어왔고 또 나는 술 냄새 나는 니 옆에서 잠이 든거지

아니..그게 그게 아니라

 

스티브는 버키의 이게 무슨 상황이야? 라는 말을 70년 전 스티브와 버키가 자주 겪던 해프닝을 묻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런 의미로 묻는 것이 아니었던 버키는 혼란스러워 어지러운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짧은 머리카락이 만져졌다. 어떻게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속이 많이 안 좋아? 안색이 창백해버키가 혼란스러워 하는 것을 단순한 숙취로 여겼는지 스티브가 짓궂은 표정을 거두고 천천히 버키의 곁으로 다가왔다. “버키스티브가 침대에 오도카니 앉아 안색이 하얗게 질린 친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뼈밖에 느껴지지 않은 딱딱한 손가락의 감촉이 어깨로부터 느껴졌다. “스티브.....” 생생한 감촉이 느껴지자 울컥 하면서 뭔가 뜨거운 것이 안속에서부터 솟구쳤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솟구친 열이 머리끝까지 점령하였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스티브를 단숨에 와락 하고 안았다.

 

..돌아온거야?...”

 

 

*

 

스티브의 배에 얼굴을 묻고 버키는 오랜 시간 동안 눈물을 흘려보냈다. 갑작스럽게 이유를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서 울고 있는 자신의 친구를 보며 스티브가 느꼈던 감정은 당황스러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만해도 기분 좋게 취하고 들어와서 어느 때와 다름없이 숙면을 취한 친구가 일어나자마자 자신을 붙잡고 우는 것이었다. 당황을 넘어서 황당스러운 상황이었다. 버키가 눈물을 그치자 스티브는 버키의 손을 잡고서는 부엌의 식탁에 앉혀놓았다. 방금 전 감정의 여파가 남아있는지 버키는 잘생긴 얼굴을 잔뜩 찡그린 상태로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평소의 버키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스티브는 우유를 냄비에 넣고 살짝 끓여 따뜻하게 데운 상태로 버키의 앞에 놓아주었다. 그러고서는 버키의 맞은편에 앉아 재촉하지 않고 버키를 기다려주었다. 자신의 소중한 친구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울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해주기를. 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버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악몽을 꿨다고?”

악몽...이라고 하기엔 너무 길고 생생한데

 

어린애도 아니고 악몽을 꾸고 지금 그렇게 엉엉 울었단 말이야? 라는 말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스티브가 인내심을 담아 꾸욱 참아내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덩달아 나올 것 같은 웃음도 참느라 힘이 들었다. 버키는 스티브가 웃음을 참고있는것도 모르는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스티브가 슈퍼혈청을 맞고 캡틴 아메리카가 된 일, 그 뒤 자신을 구출한 일, 자신이 기차에서 떨어진 일, 스티브가 뉴욕을 구하기 위해 빙하에 얼려진 일, 미래에 다시 일어난 일 그리고 자신이 윈터솔져로 활동한 일. 몇 십 년을 걸친 장황한 내용들이 막상 밀로 나오자 삼십분이 안 되어 끝이 났다.

 

미안, 버키. 진지한데 조금 웃어도 될까?”

웃을 일이 아니야, 스티브. 단순히 꿈이 아니라니까?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져 내 팔이..”

“..니 팔이 강화된 메탈암이었던 순간이?”

그래..!”

 

스티브가 이제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자신의 친구가 이렇게 진지하게 악몽에 대해 토로하고 있거늘, 이 상황이 그저 웃기기만 했다. 아무리 그대로 캡틴 아메리카라니, 미국 대장이라니. 네이밍 센스가 너무 떨어지잖아. 윈터 솔져라니, 겨울 군인이라니. 너무 멋있어서 동경해버릴 것 같잖아.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아 스티브의 몸이 덜덜 떨렸다. 버키는 자신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웃기만 하는 저의 친구가 야속하기만 했다.

 

스티브, 진지하게 듣고 있어? 지금 엄청난 일이 벌어진 거라고. 캡틴 아메리카인 네가 다시 이렇게 되다니. 미국이 난리가 날꺼라고!”

, 잠깐만. 버키. 이제 못 참겠으니까 이야기하지마봐. 정말...정말 꿈에 그리운 일이네. 내가 그러니까 미국대장님이 되어서 전쟁과 하이드라에서 세계를 구하다니. 그 꿈 소설로 쓰면 잘 팔릴 것 같다

꿈이 아니라니까!”

 

버키가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그 진지한 모습조차 웃길 따름이었다. 결국 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스티브의 앞에 버키가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쭈욱 올렸다. 이 그리운 곳을 돌아온 것과 스티브와 다시 재회한 것은 감동적이었지만 천천히 생각해보면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잠들었던 시대를 생각하면 그를 따르던 동료들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리더-캡틴 아메리카-가 사라진 것이었다. 큰일도 이런 큰일이 없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스티브의 몸을 어떻게 되돌려야할지, 해결방법이 떠오르지 않은 문제에 버키의 골머리가 썩어 들어갔다.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이런저런 가정을 생각하던 도중, 버키의 뺨에 딱딱한 촉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올려보니 어느새 자신의 가까이로 다가온 스티브가 자신의 뺨을 붙잡고 있었다. 이게 무슨..? 버키가 미간을 찌푸리자 스티브가 자신의 손가락으로 버키의 통통한 볼살을 잡아당겼다. 쭈우욱- 하고 효과음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이게 므하느지시야

아프지?”

벼로아프지는아느데

그래?”

 

아프지 않다는 버키의 말에 스티브가 좀 더 힘을 줘 쭈우욱 하고 버키의 볼을 늘렸다. 거의 최대한으로 볼이 잡아당겨지자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프아 그마네지금 서로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망정 스티브는 버키에게 어린애와 같은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프지? 그래, 버키. 꿈은 끝났어. 지금이 현실이라고현실. 순간 버키의 심장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꿈이 끝났다고? 지금이 현실이라고?

 

동양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호접지몽이라고 알아?”

...접지몽..?”

어떤 사람이 꿈속에서 나비가 된 꿈을 꿨는데, 근데 그게 너무 실감이 넘쳤다는 거야. 마치 정말 나비의 삶을 산 것 처럼. 근데 일어나보니 그 사람은 사람이었지. 하지만 그 꿈이 너무 생생해서 잊혀지지 않았다는 거야. 그래서 이런 말을 남겼어.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건가, 나비가 내가 된 꿈을 꾸고있는건가. 꿈이 너무 생생해서 현실과 구별할 수 없는걸 말해. 넌 지금 그런 꿈을 꾼 거야

말 도안돼..그럴 리가 없어

원한다면 뺨이라도 한 대 내리쳐줄까? 꿈이라면 깰 텐데

스티브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호접지몽. 버키는 그런 스티브의 장난을 받아들여주지도 못하고 방금 들었던 말을 웅얼거렸다.

 

모든게 꿈이었다.

 

정말로?

 

 

*

 

 

브루클린으로 돌아온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돌아왔다라는 표현을 쓰면 스티브가 이상하게 생각할 지도 몰랐지만, 자신에게는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술에 취해서 어느 때와 같이 스티브의 침대에서 잠을 들었던 날의 하룻밤 꿈. 겨우 하룻밤 꿈이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길고 지독하고 끔찍한 꿈이었다. 아무래도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것 같다며 스티브가 자신을 집 까지 데려다 주었다. 70년 전의 나, 과거의 나였더라면 너에게 배웅을 받을 정도로 약하지 않다며 너스레를 떨었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나는 스티브가 말한 대로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순순히 호의를 받아들였다.

 

스티브의 배웅으로 집 안에 들어서면서 버키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을 뻔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도 동생들. 그들은 하룻밤 정도 돌아오지 않은 버키를 보고서는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었다. “또 스티브의 집에서 잤니?” “자꾸 그렇게 폐 끼치면 안 된다식탁에 앉아 동생들에게 줄 과일을 깎아주는 어머니의 말씀도 신문을 넘기며 엄한 척 꾸짖는 아버지의 말씀도 너무 오랜만이고 따뜻했다. 그대로 주저앉아 오열을 하자 다들 모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서는 버키의 주위에 원을 그리듯이 모여 무슨 일 이냐며 그를 달랬다. 버키가 했던 말은 똑같았다. “돌아왔어. 돌아왔어요

 

정말로 돌아온 것일까. 다시 브루클린의 일상으로 돌아온 버키는 제임스 뷰캐넌 반즈로서 생활을 하려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 많은 사건과 사고를 그저 꿈이라고 치부하고 없었던 일로 생략하기에는 자신은 너무 달라져 있었다. 그렇다고 스티브에게 그랬던 것처럼 모두에게 자신의 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기란 어려웠다. 그 이야기를 실제라고 하기에는 증거도 없었고, 만약 자신이 겪었던 꿈들이 실제라고 말한다면 지금은 어떤 상태란 말인가? 시간여행인가 무엇인가? 시간여행이라고 한다면 자신은 팔 한쪽이 없는 상태로 브루클린에 도착했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의 왼팔은 멀쩡하고 거울에서 본 자신의 모습은 박물관에서 보존되어있는 버키 반즈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자신이 겪었던 일은 전부 꿈이고, 이곳이 정말 현실인걸까? 스티브의 말대로 호접지몽처럼 현실과 꿈을 혼동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여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결국 버키가 선택한 길은 일단 모두 잊고 현대의 시대를 즐기자라는 것이었다. 너무 낙천적인 것일지 모르지만 고민하여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누군가가 해결책을 내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냥 지금의 생활을 무시하기에는 곁에 있는 가족들은 따뜻하였고 옆에 있는 스티브는 달콤하였다. 전 보다 조금 더 무뚝뚝해지고 심각한 표정을 짓는 버키를 걱정 하는 것인지 가족들과 스티브는 더욱 그의 안위를 살펴주곤 하였다. 스티브는 특히 그랬다. 기억하기에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딱딱한 스티브는 자신에게 먼저 무언가를 하자며 권유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매일같이 버키의 집에 찾아와 영화를 보자는 둥, 밖에 나가서 무얼 하자는 둥 신경을 써주며 곁에 있기를 자처하였다. 버키는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이때의 스티브와 버키는 아직 연인이 아니었다. 풋풋하게도 서로에 대한 마음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어 고백하지 못하고 서로를 의식하고만 있던 시기였다. 미래에 비록 꿈이라고 치부 되었지만 이미 서로가 연인인 것을 알고 있던 버키에게는 달콤하면서도 낯간지러운 시간이었다. 그때의 스티브 보다 훨씬 더 미숙하고 어리석고 사랑스러운 스티브는 은근슬쩍 보내는 시선이나 행동 몸가짓으로 버키를 좋아한다는 분위기를 잔뜩 뿜어내고 있었다. 이때의 난 왜 그걸 몰랐을까. 아마도 자신도 스티브만큼 미숙해서였겠지. 그런 스티브를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아니 엄청나게 좋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행동과 티를 내는데 그것이 기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버키는 이 달콤한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그래 그러기로 다짐했다. 그랬었다. 그런데.

 

약속은 15시의 영화관 앞이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간단하게 저녁이나 먹자고 하였다. ‘이미 봤던 건데....’ 지금의 일어난 일들이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버키에게는 모두 과거형이었다. 영화는 시시한 내용이었다. 여자와 남자가 사랑에 빠지고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뻔하고 뻔한. 그럼에도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역시 스티브와 만나고 싶어서였다. 물론 그에게 영화보기싫어라고 말했다면 다른 구실로 약속을 잡았겠지만 굳이 그의 수고를 더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버키는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 영화관을 향해 길을 거닐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역시 낯설면서 익숙했다. 미래에 보았던 것과 다르게 이 시대의 색은 대부분 비슷했다. 노랗지만 어딘가는 어두운, 회색빛을 띄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모두들 비슷한 색의 옷을 입고 건물도 비슷한 색으로 칠해져 있다. 텁텁하다고 하면 텁텁할 수 있는 이 색들 속에 자신도 비슷한 색을 입고 거닌다는게 꿈만 같았다.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나의 꿈을 꾸고있는것인지

 

정말로 그 모든 것은 꿈이었을까. 이게 현실이고 그건 정말 긴 악몽이었을까. 이제는 고민하지 않고 놓아도 되는 것일까. 이 행복한 일상을, 작지만 소중한 일상을 보내도 되는 것일까. 제임스 뷰캐넌 반즈로 돌아가도 되는 것일까. 아무리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돌아온 것인가, 정말로. 그렇게 갑작스럽게 주어진 무한한 행복에 어찌할 줄 몰라 멍하니 길을 걷고 있던 때, 버키는 무언가를 목격하였다.

 

무언가를 보았다. 목격해버렸다. 모두와 비슷한 색을 띄고 있는 회색빛 브루클린 속에서 유일하게 쨍하게 컬러 빛을 띠고 있는 남자를. 그러니까 이 시대의 브루클린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남자를. 갑작스럽게 이제 일상에 동화되어 모든 것을 받아들여도 될까 싶을 때, 어느 날처럼 스티브와의 약속에 맞추기 위해 걷고 있을 때. 그게 정말 꿈이라고 생각해? 라고 묻는 듯이 그 남성을 목격하고 말았다.

 

럼로우...?”

 

절대 지금의 브루클린에서 볼 수 없는 자를.

 

 

*

 

 

럼로우였다. 분명 럼로우였다. 착각같은게 아니다, 환영같은게 아니다, 잘못본게 아니다,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는 분명 럼로우였다. 시대에 섞이지 못한 반물질처럼 이질적인 존재로 그 수많은 인파속에서 자신의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버키가 알고 있는 럼로우였다.

 

럼로우를 멈추기 위해 버키가 소리를 질렀다. “럼로우!” 하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유유히 인파속에 섞여 앞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그를 잡기 위해 인파를 헤치고 뛰었지만 어쩐 일인지 뛰고 있는 버키가 걷는 그를 쫓을 수 없었다. “거기서, 럼로우!” 손을 뻗어가며 급하게 사람들 사이로 달렸지만 결국 잡을 수 없었다.

 

럼로우를 목격하고 난 후, 버키는 다시 일상 속에 섞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을 꿈으로 치부하고 이 행복을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싶을 때 버키의 머릿속을 들여다본 것인지 악마와 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예지몽을 꾼 걸까? 예지몽이라면 미래의 럼로우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럼로우의 존재가 버키의 가슴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럼로우가 있다는 것은 버키의 꿈이 단순한 꿈이 아니란 소리였다. 럼로우가 있다는 것은 이 현실이 가짜라는 뜻도 아니었다. 럼로우는 버키가 꿈꿨던 미래가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켜주기도 하였으면서 지금의 현실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켜주기도 하였다. 만약, 그게 정말 그냥 악몽이라면 꿈속에서 같이 대화를 나눴던 그 남자가 어떻게 똑같이 튀어나올 수 있냔 말인가?

 

뭐가 어떻게 되가고 있는 거야

 

버키가 고개를 숙이고서는 낮게 중얼거렸다.

 

 

*

 

 

럼로우의 목격만으로도 혼란스럽고 미칠 것 같은데 버키를 괴롭히는 존재가 또 하나 있었다.

 

하지만 꿈에서 넌...!”

버키, 그건 꿈일 뿐이야. 현실이 아니라고!”

스티브가 오히려 답답하다듯이 큰 소리를 냈다. 현실이 아니라고? 내가 겪었던 그 순간들이 현실이 아니라고? 꿈이라기엔 너무나도 길었던 악몽,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던 경험들. 그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그모든갈망것부식들이용광로현실성냥이하나아니라고귀향그렇다면아홉내가새벽겪은열입곡일들은화물칸.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고 머릿속에 끔찍한 단어들이 되새겨졌다. 꿈에서처럼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 폭주할 것 같지는 않았으나 속이 울렁거리고 뒤틀렸다. 버키가 몸을 비틀 거리며 넘어질 뻔하였다. 이제 몸에서 식은땀이 났다.

 

"버키..? 괜찮아? 어디아파?"

"아니야..아니야 괜찮아 스티브"

"..버키 너 요즘 이상한 거 같아. 무슨 일 있는 거야? 그냥 단순히 꿈때문에 그러기엔..“

 

럼로우를 보았단 말이야, 스티브. 꿈속의 인물이 현실에 등장했단 말이야. 버키가 목까지 차오르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아무리 저를 신뢰하는 그여도 이런 뜬금없는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둘은 오늘 스티브의 4번째 입대지원을 두고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70년 전의 버키라면 이 날 스티브를 위로해주었을 것이다. 이번엔 어느 지역을 썼냐면서 너스레를 떨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버키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럼로우를 목격한 이상 이 단순한 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만약 그 꿈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는 내용이라면. 스티브는 입대를 하고 캡틴 아메리카가 된다. 캡틴 아메리카가 되어 미국을 구하고 얼려지게 된다. 일상적인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모든 것을 이곳에 남긴 상태로 날아가 버려 살아있는 전설 캡틴 아메리카로 박제가 되어버리고 만다. 스티브 개인은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진 모르지만, 적어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버키는 스티브가 행복해졌으면 했다.

 

어떻게 하면 스티브의 입대를 막을 수 있지? 어떻게 하면 스티브가 캡틴 아메리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어떻게 하면 나의 작은 친구가 이대로 브루클린에서 행복해 질 수 있지? 버키는 곧 있으면 징집이 되어 영국으로 가게 될 것이다. 말이 좋아 지원이지 사실상 이 시대의 젊은 남자들은 모두 군에 징집이 되어 떠났다. 꿈에서 엄청난 것을 보았기에 군대에 갈 수 없습니다. 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블데이트. 그래, 스티브와 함께 더블데이트를 했고 스티브는 거기서 그 박사를 만났어. 버키가 천천히 머릿속으로 과거 - 아니 현재일까? - 를 생각해보았다. 그래, 그때 미래에 데려가주겠다 뭐니 하면서 갔던 곳에서 스티브는 그 박사와 만났다고 했다. 그러면 그곳에 가지 않으면 돼. 그 날은 슬픈 날이니까 둘이 하루 종일 집에서 술이나 마시자고 하면 돼. 그렇게 하면..

 

그렇게 하면 정말로 스티브가 캡틴 아메리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돌아오면 모든 것이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오히려 머릿속은 고민투성이로 터질 것만 같았다. 창문을 열고 멍하니 달을 바라보았다. 입대를 지연해 볼까? 계단에 크게 구르면 지연되지 않을까? 스티브를 지키는 거야. 캡틴 아메리카가 될 수 없게 계속 그의 곁에 머물고 있으면 그러면...

 

그건 불가능해. 버키 반즈. 그보다 니 일부터 걱정하는 게 좋지 않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등 뒤로부터 들려왔다. 버키가 재빨리 뒤를 돌아보며 상대방을 확인하였다. 가족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스티브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럼로우

안녕, 버키 반즈

 

버키가 침대에서 튀어 올라와 럼로우의 멱살을 잡았다. 저번처럼 놓칠 수 없어 붙잡은 마음도 있거니와 지금의 상황의 원인이 모두 그의 탓인 것과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워워- 진정해. 지금 설명해주려고 나타난 거니까. 이렇게 하면 내가 아무 말도 못하잖아손을 들어 항복 태세를 취하면서 럼로우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럼로우 맞지?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당장 설명해!” 끝까지 손을 놓지 않은 상태로 말하였다.

 

손 좀 놓아달라니까. 거 참

그 말과 함께 럼로우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 와 동시에 버키의 몸이 스르륵 하고 힘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럼로우의 멱살을 놓친 것도 놓친 거니와 다리에도 힘이 풀려 털썩하고 주저앉고 말았다.

 

아직 한 달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브루클린의 멋쟁이로 돌아온 거야? 꽤나 감정적인데? 윈터솔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

이게..이게 어떻게 된 거야. 뭐야

하나하나 차근차근 설명해줄게. 일단 난 럼로우가 아니야. 럼로우의 형상을 띄긴 하였지만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타임워프 그 이상의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왜 럼로우의 모습이냐면. 스티브 로저스 외에 너에게 가장 눈에 띄면서도 이 시대에 이질적이다 라고 느껴져야 하는 사람이어야 하거든. 선택지는 한가지 밖에 없었어. 럼로우 브룩. 이 나자의 모습이라면 바로 알아차릴 꺼라 생각했지

원하는 게 뭐야. 왜 날 여기로 돌려보낸 거야

(), 즐거움, 재미, 유쾌, 오락, 쾌락. 네가 과거로 돌아가서 어떤 선택을 할 지 궁금하고 재미있을꺼같아서. 별 깊은 뜻은 없어

변태새끼

 

럼로우, 아니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냐고 하니까 무엇도 아니라고 하였다. 악마라고 묻자, 그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인간이 아니다, 신이 아니다, 악마도 아니다, 천사도 아니다. 하지만 특별한 힘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차원의 존재다. 그는 버키를 과거로 보냈다고 한다. 타임워프 같은 의미가 아니다. 시간을 뛰어 넘어 과거에 왔다면 버키의 왼팔은 잘라져있어야하고 현시대의 버키와 함께 공존하여 지금의 시대에는 2명의 버키가 있어야 하니까. 타임 워프 따위 같은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버키를 과거로 보낸 거다. 미래의 버키의 의식을.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지 못해 물었다. “왜 불가능하지?” 남자는 더 어이가 없다듯이 물었다.

 

방사능에 노출되어서 헐크가 생기고 아스가르드라는 외계의 왕자가 지구의 신화속 토르와 같은 이름과 이야기를 갖고 있고 몸이 약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남자가 무엇이든 4배 이상으로 만들어준다는 약을 먹고 강해진 건 말이 되고 네 의식이 과거로 돌아간 건 왜 말이 안 돼?”

그건..적어도 과학적이잖아

이 세상에 과학적이지 않은 건 없어. 귀신도 유령도 모두 과학적이지. 나도 과학적인 원리로 널 이렇게 보낸 거야. 다만 네가 알던 시대에 밝혀지지 않은 것 뿐

남자의 말에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얼추 듣기로는 논리적이었지만 또다르게 들으면 그저 말싸움에 이기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 같았다.

 

그렇다면..미래의..그러니까 현재의..아니..미래의 나는 어떻게 되어있지?”

잠들어 있잖아

아니.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계속 이곳에서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네가 겪은 일들은 정말 말 그대로 이 되어버려. 가상의 이야기가 되어버리지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현실들이 저 하나로 가짜가 되어버린다는 이야기였다. 말도 안 되고 분에 넘치는 일들이었다.

 

그래도 걱정 마, 바뀌는 건 네 운명 하나뿐이니까. 세계는 그리고 운명은 너를 제외하고 모두 똑같이 흐를 거야. 내가 거기까지는 영향을 못 미치거든. 인간은 60년대에 달로 갈꺼고, 케네디 대통령은 암살당할꺼고 토르도 다시 내려올꺼고 죽을 사람은 죽을 거고 산사람은 계속 살 거야

“‘로 인해 야기되는 것들은?”

전부 수정되어 똑같이 될 거야. 예를 들어 윈터솔져는 버키 반즈 개인이 아니라 하이드라에서 만든 단체들이 될 수 있고. 뭐 그네들 인생이 거기서 거기여서 별로 바뀌진 않을 거야

그러면..스티브는..스티브는 어떻게 되는 거야?”

"스티브는 캡틴 아메리카가 된다. 바꿀 수 있는 건 버키 반즈 너의 운명뿐이라니까? 스티브 로저스의 운명은 바꿀 수 없어"

"스티브가 캡틴 아메리카가 되는 게 운명이라고? 헛소리마"

"헛소리가 아니야. 그가 그렇게 되기를 원했고 선택했다. 운명은 스스로가 결정하는 거야, 생각한 자의든 생각지 못한 자의든. 애초에 난 너에게밖에 영향을 못 끼쳐. 큰 운명은 바꿀 수 없지. 너로 인한 결과는 달라지겠지만 뭐, 다 수정될 거야. 그냥 간단하게 생각해. 지금 넌 그냥 기회가 주어진 것뿐이야.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 하지만 스티브는 구할 수 없다. 스티브가 캡틴 아메리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스티브가 얼음에 갇히는 것을 되돌릴 수 없다. 스티브 로저스와 함께할 수 있는 브루클린의 미래 따위는 없다.

 

"그렇다면 내 운명은 무엇을 바꿀 수 있다는 거지? 방금 전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했잖아"

"네 운명을 바꿀 계기가 되는 곳이 있어. 너는 그곳에서 선택을 하면 된다. 어떻게 할지"

"그때가 언제지? 무슨 선택을 하라는 거야"

"조만간. 나는 그때 다시 너에게 나타날 거다. 대답을 듣기 위해"

 

그때 보자고. 너는 어차피 그때까지 살아있을 운명이니까.

 

어마어마한 말을 남기고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남기고 어마어마한 전개를 남기고 남자가 웃으면서 사라졌다. 정말 마법처럼 모습의 파편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며 사라졌다. 버키에게 보란 듯이 자신이 신비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

 

버키는 계단에 굴러 다리가 부러트려 입대를 지연시켰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스티브의 곁에 남아 군대로부터 그를 지켜내기 위해 힘을 썼다. 스티브와 곁에 있는 순간순간 계속 말을 하였다. 위험한 시도를 하지마, 만약 누가 실험을 하자고 하면 거절해, 꼭 군대에 입대하는 것만이 애국은 아니야, 너는 너만의 방식이 있을 거야. 귀에 질릴 정도로 버키의 잔소리를 듣는 스티브는 지나가는 말로도 알았다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그것이 버키의 마음을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버키는 군대에 가는 순간까지 스티브의 약속을 받아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군대에 입대 후 버키는 하이드라의 포로로 잡혔고 똑같은 실험을 당했다. 그 와중에 들었던 생각은 누군가 나를 구한다면 그것이 부디 스티브가 아니길 이라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물론 그 간절한 마음은 배신당했지만 말이다. 생각했던 것 보다 커진 스티브는 자신을 구하러 왔고 모습을 보아하니 그 빌어먹을 실험에 참가한 게 분명했다. 뒷이야기도 똑같다. 미래의 하울링 코만도가 될 대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스티브를 보면서 버키는 펍 밖으로 나왔다.

 

승리의 열기로 펍안은 휘황찬란하고 따뜻했지만 바깥은 대조적으로 어둡고 차가웠다. 아무도 없는 구석진 골목으로 들어가 벽에 기대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은 상황이 갑갑하면서도 이것이 정말 운명인건가 싶어 허망했다. 혼자 그렇게 열기를 식히고 있던 중 누군가가 옆으로 걸어왔다.

 

"네가 말한 선택의 시간이 지금이구나"

"그래, 지금이야. 너의 미래가 결정되는 순간, 너의 역사가 시작된 순간, 너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

 

우습다. 스티브에게 구해져 이제 들어가 그와 함께 정답게 술을 나눠마실 이 시간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니. “이 결정으로 너의 인생은 크게 달라졌어, 버키 반즈예상 못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선택을 하던 때는 지금 이었으니까.

 

내가 뭘 결정하면 되는 거지?”

이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돌아갈 것인가

돌아가면 어떻게 되는데?”

지금 겪은 일들이 꿈이 돼. 그리고 지금 얼려있는 버키 반즈가 현실이 되겠지

돌아가지 않는다면?”

스티브에게 가서 말을 해. 너를 따라갈 수가 없다고. 그러면 너의 운명은 크게 뒤바뀌게 될 거야. 새로운 삶을 사는 거지. 네가 겪었던 그 일들이 꿈이 될 거야. 지금처럼 생생하게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바뀌게 될 거야.”

 

언제 들어도 실감이 나지 않는 큰 스케일의 이야기다. 나의 선택으로 꿈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꿈이 된다니. 아무리 영향이 스스로에게 한정 되어있다 하더라도 정말 분에 넘치는 이야기였다. 남자는 선택을 기다린다듯이 옆에 나란히 벽에 기대고 얼굴만 돌려 버키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다른 인물이라고는 하여도 얼굴이 럼로우니 기분이 묘했다. 버키가 숨을 내뱉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음은 우울하기 그지없는데 빌어먹게도 밤하늘은 아름다웠다.

 

"내가 현세에서..왜 자살하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해"

"사랑스러운 스티브 베어 때문이잖아"

"그래, '스티브' 때문이야. 하지만 자세한 서술이 없잖아, 잘 생각해봐. '스티브를 죽이기 위해서'도 스티브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고 '스티브가 있어서 혼자가 아니니까' 라는 말도 스티브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어. ‘스티브 때문이라는 단순한 말로 몇 십 가지의 가능성을 얘기할 수 있어. 그런데 내가 어떤 이유로 스티브 때문에 죽지 않았다고 생각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이야기였다. 버키 반즈가 스티브 때문에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 막연한 한 줄의 문장은 당연하고 납득이가고 논리적인 말이어서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는 어떤 이유로 스티브 때문에 죽지 않았던 걸까? 버키는 확연히 표정을 굳힌 남자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다른 것도 오직 즐거움과 호기심 하나만으로 자신을 과거로 돌려보낸 작자였다. 궁금증이나 호기심이 인간보다 높은 생명체겠지. "이유는 간단해" 딱히 못 알려줄 것도 아닌 버키가 입을 떼었다.

 

스티브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서야

 

자신이 말하고도 낯간지러운 말에 피식 하고 절로 웃음이 새었다. 그래, 그렇게 스티브로부터 벗어나 도망을 치고 다녔던 시절 버키는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은 넘게 자살을 시도하였다. 떠오르는 과거에 의해 밀려오는 죄책감에 의해 끓어오르는 분노에 의해 당장이라도 죽고 싶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죽지 못했다. 내 죄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든가 책임을 지겠다는 당당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 스티브. 스티브 로저스. 자신의 작은 친구 스티브 로저스 때문이었다. 내가 죽는다면 스티브는 혼자다. 혼자가 되어버린다. 그의 옆에 수많은 믿음직한 친구들이 있는 것도 안다. 자신을 과대평가해 그들보다 자신의 존재가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티브가 저와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자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필시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내가 오로지 스티브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스티브 또한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자신이 죽는다면 그는 혼자가 된다. 외롭고 삭막하고 고독한 곳에서 그를 혼자 둘 수 없다. 이 생각만이 버키의 죽음을 막았다.

 

“..겨우..겨우 그런 이유라고?”

겨우라니. 나한테는 대단히 중요한 이유였어. 스티브 때문에 죽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뭘 생각한 거야?”

스티브가 남아있으니까, 버팀목이 있으니까 살 수 있어. 뭐 이런걸

스티브를 버팀목으로 삼아서 살고 싶을 정도로 삶에 대한 의지도 없었고 그렇게 짐이 되어서 살고 싶지도 않아

대단한 순정 납셨군

 

남자가 비꼬면서 버키를 향해 돌려있던 머리를 돌렸다. 사랑에 빠져서 그윽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의 얼굴 따위 볼 것이 못되었다. “그래서...지금 다시 돌아가겠다고 돌려 말하는 거야?” 궁시렁 거리는 듯 남자가 웅얼거렸다. 남자에게 있어 사실 그다지 재미있는 결과는 아니었다. 결국 아무것도 변치 않은 거니까. 똑같은 길을 가려는 것을 재차 확인한 꼴 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 돌아가야지

돌아간 다라. 꼭 돌아갈 필요는 없어. 여기를 현실로 만들어도 되니까. 행복한 미래가 기다릴꺼라고? 지금과 같은. 가족들 곁에서 오순도순 살 수 있어

스티브의 운명은 바뀔 수 없다면서. 내가 여기서 하울링 코만도가 안 되어도 스티브는 얼음 속에 갇히겠지, 70년 뒤에 혼자 깨어날 거야. 그리고 그 미래에는 내가 곁에 없을 거야. 스티브를 그런 상태로 만들 순 없어

“...팔이 잘린 상태로 소련의 포로가 될 거야. 그런데도 상관없어?"

"알아. 상관없어."

"쉴드에 기생하고 있는 하이드라의 실험체가 될 거야"

"그렇겠지"

"윈터솔져로 널 사용하기 위해 많은 고문이 행해질 거야. 브레인 워싱같은거말야. 그리고 너의 몸을 미친 듯이 혹사시킬 거야"

"너무 끔찍한 기억이라 잊을 수 없지"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될 거야. 너의 친구도. 물론 네가 아니어도 그는 그 시간에 다른 자에게 죽겠지만. 죄책감으로 잠을 못 이루고 제대로 먹지도 못 할 거야. 하루하루를 후회하며 살고, 죽지 못해 살 거야"

"......알고 있어"

"그런데도...돌아가겠다는 건가? 겨우 스티브 로저스를 혼자 둘 수 없다는 이유로?"

"

 

만약 스티브도 똑같은 상황을 겪는다면 똑같이 행동할 거야. 말을 하려다가 집어 삼켰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닭살 돋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남자는 버키의 속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젠장하고 욕을 내뱉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이해가 되는 선택이었다. “그래, 이제 됐어. 정말 재미없었어. 다음엔 너 같은 애는 고르지 않을 거야남자가 벽에서 등을 떼어내고서는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서는 아직 멍하니 벽에 기대고 있는 버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돌려보내주지. 현실로. 눈을 뜨면 세월이 지난 그쪽일 거야

 

돌려 보내준다라 현실로. 그렇다면 지금 겪은 한 달이 꿈이 되는 것인가. 버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말 그대로 호접지몽이 아닌가. 무엇이 꿈인지 어디가 현실인지 알 수 없다. 버키가 눈을 감은 상태로 남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기차에서 떨어지고, 포로가 되고, 실험체가 되고, 병기가 되었던 일들. 아늑한 브루클린을 버리고 정말 그때로 돌아가고 싶냐라니, 사실 버키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조금 있자 몸이 두둥실 하고 떠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버키는 돌아가는 것이다. 죄책감으로 잠을 못 이루고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토해내고 하루하루가 고통스럽고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며 괴롭운 그런 나날들로. 버키는 마지막으로 스티브의 얼굴을 떠올렸다.

 

스티브, 나에게 선택지는 없었어.

 

나는 언제나 브루클린의 꼬맹이인 너를 따라 갈 테니까.

과거에도 미래에도 현재에도.

네가 나의 돌아갈 장소니까.

 

이제 돌아가자.

 

꿈에서 깨고 진짜 현실로.

스티브가 기다리고 있는 지옥으로.

 

 

 

 

 

 

버키가 눈을 떴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은 투명한 막을 통과하여 보이는 스티브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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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쩜오디 온리전에 참가합니다]



부스명은 스티브 허억 허억 입니다.


버키스팁 스팁버키의 신간도서가 나올 예정입니다.

예상으로는 각각 두권씩 나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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