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AU

*학생AU





"무슨 장학금인지 설명해주시지 않으면 저는 못받습니다. 선생님"


스티브가 단호한 자신의 의견만큼이나 경직된 표정으로 말했다. 학생과 교장선생님이라는 상하관계가 뚜렷한 둘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는 것은 교장선생님인 타일러 쪽이었다. 똑바로 올곧게 자신을 쳐다보는 로저스의 시선은 사회생활 몇년으로 어느정도 철갑을 두르게 된 타일러도 받아내기 힘들었다. 타일러는 괜시리 안경을 한번 올리며 근엄한 표정을 짓고 허흠 하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서는 빙그르르 의자를 옆으로 돌려 서류를 읽는척 아예 스티브의 시선을 회피하였다.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나, 로저스 군. 미술을 하는 학생들에게 주는 장학금이라고" 흠흠흠 하며 헛기침을 내뱉으면서 사전에 준비된 말을 꺼내었다.


"죄송하지만 선생님. 저희 학교에 예체능을 하는 학생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나 장학금은 없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처음 생긴거라고 말하지 않았나 로저스군. 저번에 보니 학교에서 상도 타지 않았나. 자네가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장학생으로 선별된거지"

"하지만 저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학우들도 이런 장학제도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는데요? 새로 생긴 거라면 더 많은 학우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홍보를 해야하지 않나요?"


본질을 꿰뚫는 날카로운 말에 타일러가 스티브의 말을 막기 위해 다시금 큰소리로 헛기침을 하였다. 그가 알고있는 한 스티브 로저스의 가정형편은 좋지 않은 편에 속했다. 불과 며칠전만해도 가정형편상 학교를 계속 다니기 어려워 자퇴서를 제출한다는 말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로저스가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된 것은 전액의 학비를 모두 면제해주는 새로생긴 미술 장학제도 덕분이었다. 학비 전액 뿐만 아니라 운동부에 비해서 비교적 주목을 덜 받고 있던 미술부에도 지원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보통 이런 신데렐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내뱉고서는 더더욱 자신의 활동분야에 매진을 하였을 것이다. 조금 과장되서 말하자면 쫓겨나기 직전의 학교를 다시 다니게 해주는 것이니 학교에 감사함을 가져도 무리가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스티브 로저스는 달랐다 보통의 아이들과


"홍보가 미흡했지. 로저스군 자네 말대로야. 워낙 급하게 만들어진 장학제도여서... 뭐, 웬만하면 받아주게. 학교에서도 인재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런것이니" 


이 스티브 로저스라는 학생은 장학제도로 학비를 면제받자마자 바로 담임선생님을 비롯하여 여러선생님들에게 따지고 들기 시작했다. 그는 감사하다는 말 대신에 이런 장학제도가 언제 생긴거죠? 라며 묻기 시작했고, 이런 반응이 올 줄 몰랐던 선생님들이 어물쩡하게 대답하자 바로 교장인 자신을 찾아왔다. 그러고서는 이 장학제도가 언제 생겼고 어떻게 생겼고 왜 자신이 뽑혔는지에 대해서 일일히 캐묻기 시작했다. 설정에 대한 구멍이 생긴것은 이때부터 였다. 그가 이렇게 행동할 줄 몰랐던 선생님들과 교장은 제대로된 변명도 준비하지 못한 상태로 로저스의 공격을 받았어야 했던것이다. 물론 로저스는 칼과 같이 이 미세한 설정 구멍들을 잘 잡아내었다. 그리고 왜 그부분은 이렇게 된거죠? 왜 홍보가 되지 않은거죠? 저 말고 다른 상을 받은 학생들에겐 왜 안간거죠? 등등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이 장학제도가 마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진다고 하였는데 실상을 말하자면 로저스의 말이 맞았다.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이 장학제도는 오로지 로저스만을 위해 만들어 진 것이었다.


'들키지 않게 해주세요'


그의 학비가 면제되도록 힘을 써달라고 말한 이가 추가로 부탁한 내용이었다.

교장선생님이라고 힘이 있는게 아니란다 로저스군. 나도 위에서 시키면 해야지..... 




"아니요, 저는 못받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만약 이것이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지원된 제도라면 아직 알지 못해 혜택을 받지 못한 학우들에게 불공정하고 만약 이것이 '비' 공식적으로 지원된 제도라면 이유가 없으니 받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좀 받아주게! 나도 곤란하단 말일세! 타일러가 마음속으로 어린아이처럼 불평을 하였지만 그 이야기를 입으로 꺼내기는 힘이 들었다. 타일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저스는 마지막 말을 마치고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리고 교장실을 나갔다. 그냥 감사합니다. 이 한마디면 되는것을 왜이리 고집을 피우는지 모르겠다. 융통성이 너무 없어, 딱딱해. "미치겠구만" 로저스가 나가 드디어 혼자가 된 타일러가 막혀왔던 숨을 내뱉으면서 웅얼거렸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군. 스티브가 가방에 짐을 싸면서 교실을 한번 쭈욱 둘러보았다. 장학금은 받지 않겠다고 거절하였고 학비를 낼 돈이 없으니 자연스레 자퇴처리가 될 것이었다. 스케치북과 삐죽빼쭉한 연필이 담긴 통을 가방안에 넣고 혹시 책상안에 쓰레기라도 들어있지 않은가 살펴보았다. 손을 넣고 책상의 안쪽서랍을 만져보았으나 쓰레기는 커녕 먼지 하나 나오지 않았다. "깨끗하네" 손을 빼고 탁탁하고 소리내어 털었다. 이제 짐도 챙겼고 정리도 하였으니 교실 밖으로 나가 집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직 미련이 있는걸까, 학교에. 낡은 책상위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쳐다보았다. 공부에 큰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자의가 아닌 타의로 배움의 터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꽤 씁쓰름한 일이었다. 


해가 지면 돌아가자. 

조금 더 남아있다가 그 때 돌아가자. 



기약없이 멍하니 창밖의 풍경 -풍경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텅 빈 운동장- 을 바라보고 있던 중 덜컹- 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만 빼꼼 돌려 뒤를 쳐다보니 익숙한 인물이 서있었다. 제임스 뷰캐넌 반즈. 클래스 메이트였다. 별로 친하지 않은....

친하게 인사할 사이도 아니었고 별로 친하지 않은 인물에게 먼저 인사를 건낼정도로 사교성이 뛰어나지 않은 스티브는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왜 다시 교실에 들어온 것일까....그에게 무엇하나 묻지 않고 머릿속으로 혼자 궁금해 하며 스티브가 발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있잖아, 로저스" 



자신에게 볼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웬일인가 반즈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향한것은 저의 곁이었다. 반즈는 자신의 책상이나 교탁, 사물함에 향하지 않고 문을 열자마자 등을 돌리고 있는 스티브를 향해 걸어왔다. 


"..나한테 무슨 볼일있어?" 

"저기..그..우연히..들었는데 말이야"


자세히 보니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고 숨을 헐떡이는 것이 어디선가 헐레벌떡 뛰어온 것 같았다. 반즈는 자신의 손에있는 땀을 닦으려는 듯이 자신의 바지에 손을 비비적 거렸다. 반에있는 친구들이 자주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행동도 반즈가 하니 뭔가 있어보였다. "그..장학금..말이야. 니가 선정된거. 그거 안받는다고 했다면서..어... 왜.. 왜 안받는거야? 그냥 받으면 좋잖아" 반즈가 말을 빙 돌리지 않고 바로 일직선으로 물어왔다. 내가 안받겠다고 말한건 교장실이었고 시간은 아직 한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걸 우연히 들었단 말이지. 급하게 물은티가 역력히 보였다.


 "...나한테 장학금 준거 너였구나"

"...뭐라고?"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스티브는 다시 자신의 얇은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며 창 밖을 바라 보았다. 사실 장학금을 받게되었을때 이 장학금은 공식적인 장학금이 아니다, 비 공식적인 것이다. 라고 확신에 찼던 이유는 반즈의 탓도 있었다.


"이사장님의 성이 반즈는 아니지만, 니가 이사장님 아들이라는거 아는 사람은 다 알아"

"어...너도 알았구나. 넌 뭔가 소문에 둔한줄 알았는데...아니. 그러니까"

"친구가 별로 없어도 유명하니까 듣게 되더라고"


아무리 소문에 둔한 사람이어도 가십에 흥미가 없는 사람이어도 알만한 내용이었다. 학교의 인기인, 브루클린의 멋쟁이, 모든 여자들의 왕자님 제임스 뷰캐넌 반즈가 이사장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훌륭한 용모에 빼어난 성적과 다정한 성품에 뒷받침 되는 재력가라니 그야말로 꿈에서나 나올만한 왕자님의 조건을 다 갖춘것이었으니 작은 학교에 떠들썩하게 소문이 날만 했다. 물론 아무리 떠들석한 이야기여도 소문에 워낙 관심이 없는 스티브라면 지나칠 이야기였을지도 모르지만, 스티브는 반즈에 대해서 어느정도 '인식'을 하고 있었고 '호감'을 갖고 있었기에 소문을 알 수 있었다. 까딱까딱 흔들리는 스티브의 발때문에 책상이 작게 끼긱끼긱- 하며 우는 소리를 내었다. 반즈가 스티브의 그런 모습을 보더니 천천히 다가와 바로 옆 책상에 걸터 앉았다.


"나한테 장학금을 주는 이유가 뭐야?"

"왜 나라고 생각해...? 아니, 이제와서 숨길것도 없지만. 내가 줬다고 확신하는거 같아서. 아무리 내가 이사장님의 아들이어도 너한테 줬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냥 때려맞춘거야. 이사장님이 날 알고있는 것보다, 클래스 메이트인 니가 줬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확률적으로 높으니까"

".......하아.."


이럴줄 알았으면 한번 아니라고 우겨볼껄. 그냥 때려 맞춘거라니... 반즈가 옆에서 힘없이 웅얼거렸다. 이제 슬슬 해가 져 창문으로 석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살짝 눈이 부셔 스티브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에도 옆에있는 반즈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미간을 좁혀 꿋꿋히 창밖만을 바라보았다. 둘은 그렇게 아무말 없이 조용히 창 밖만을 바라보았다. 몰래 장학금 혜택을 주려고 했던 자와 그 것을 거절한 자. 생각보다 미묘하고 서먹한 사이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스티브였다.


"혹시 말이야. 너 내가 불쌍해서.."

"아니, 그건 아니야. 널 동정해서 주는건 아니야"


스티브가 질문을 끝내기도 전에 반즈가 먼저 말을 단호하게 잘랐다. 그러고서는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돌려 스티브의 옆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받아낼 자신이 없던 스티브는 내리쬐는 태양빛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햇빛때문에 눈이 살짝 따가웠다. 


"그러면 나한테 왜주는 거야? 난 니가 줬다고 확신했지만. 불쌍해서 적선하듯이 주는거라고 생각했는데"

"불쌍한 사람으로 주는 거면 너말고 다른 사람을 줬을꺼야. 로저스, 의외로 이 학교에는 너보다 가난하고 힘든 사람이 많아"

"그래? 그러면 걔네한테 주면 되겠네. 왜 하필 나한테 준 거야? 클래스 메이트라서?"


둘은 클래스 메이트이긴 하지만 깊은 교류가 있던 사이는 아니었다. 버키는 항상 반의 중심에 서서 많은 이들과 어울리는 학생이었고 스티브는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은것이 다행인 외톨이였다. 몇몇 미술학부 아이들과 어울려 다니기는 하였지만 버키의 그룹과 교집합이 되는 이는 없었다. 스티브는 교탁의 맨 앞자리에 버키는 맨 뒷자리의 창가자리. 인간관계의 망도 먼 그들은 심지어 교실 내의 자리에서도 거리가 멀었다. 둘이 대화를 나누었던 적은 있긴 하겠지만 특별하게 기억날만한 대화는 없었다. 아마도 그냥 지나가는 소모적인 대화만 몇번 나눴을것이다. 니가 주번이야? 라든가, 좋은아침 이라든가 말이다. 불쌍해서 주는것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단순한 클래스 메이트여서 도와준것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스티브가 고개를 천천히 숙인다음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꼼지락 꼼지락 쥐었다폈다 하고있는 버키의 손이 보였다. 


"그..저..그게말이야. 음"

"말하기 힘든거면 말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거절했으니까"

"..거절한 이유가 뭐였어?"

"공식적인 제도라면 공평하지 않으니까, 개인적인 장학금이라면 이유가 분명하지 않으니까"

"..그러면 내가 분명한 이유를 말하면 장학금을 받고 계속 학교를 다닐꺼야?"

"이유가 뚜렷하면. 뭐.. 키다리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지"


스티브가 어깨를 으쓱하는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키다리 아저씨라고하기엔 똑같은 나이지만. 자신의 대답에 버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손을 올려 자신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었다. 그리고서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가 열었다가를 반복했다. 스티브야 버키의 평소 모습을 알지 못하여 몰랐지만 버키의 친구들이 봤다면 꽤 놀랄만한 광경이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그 제임스 뷰캐넌 반즈가 이렇게까지 긴장을 하고 있다니. 평상시에는 보지 못할 모습이었다. 


입을 떼었다닫었다를 반복하기 여러번. 버키가 "후우-" 하고 큰 한숨을 내쉬더니 다짐했다듯이 자신의 무릎을 철썩 내리쳤다. 일련의 과정을 지루하지 않게 보고있던 스티브는 그저 천천히 눈을 껌뻑였다.


"듣고 놀라지마, 스티브 로저스. 난 니가 학교에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내가 따로 장학제도를 만들어서 너 개인에게 준것도 맞아. 공권력 남용이지 뭐. 사실 너한테 안 들키고 주는게 목적이었는데. 니가 부담스러워 할까봐. 아니,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장학금을 준 이유는 말이야"

"응"


스티브가 이제서야 고개를 돌려 버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동시에 흔들흔들 떨리고 있었다. 



"내가..내가..많이 좋아해. 너의 그림을. 그러니깐 난 팬이란 말이야"



너..너의 그림의. 버키가 결국 마지막 말을 흐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무표정 했던 스티브의 얼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별다른 접점이 없는 둘이었지만 스티브는 반즈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남들처럼 반즈가 브루클린의 멋쟁이여서 빼어난 용모를 갖고 있어서와 같은것은 아니었다. 스티브가 반즈를 알게 된 계기는 전시회에서 자신의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스티브는 교내에 미술대회가 열리면 대부분 상을 타는 편이었다. 크게는 대상까지 받아보았고 작게는 동상까지 받았다. 어찌되었든 늘 상을 탔다. 상을 탄 학생들의 그림들로 항상 학교에서 작게 전시회가 열렸었다. 전시회라고 해봤자 교실 하나를 비어 놓고 상을 탄 학생들의 그림을 걸어놓는것 뿐이었지만 말이다. 오는 이들도 적었다. 대부분 여학생들이 점심을 먹고와서 산책하는 겸 돌아다니면서 전시회를 구경하였다. 스티브의 그림은 액자에 걸려있었다. 이 그림은 정말 내가 그렸지만 걸작이다! 정도의 그림은 아니었고 그저 평소 퀄리티의 그림이었다. 대상은 놓치고 아깝게 금상을 차지한 그림이었지만 사람들에게 보여져서 창피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티브는 자신의 그림이 걸려져있는 전시회에 하루에 한번씩은 들렸다. 어찌되었든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은것이니 뿌듯하였기 때문이다. 


어느 평소와 다름없는 날 점심을 먹고 전시회가 있는 교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예상했던 대로 그저 몇몇 학우들이 전시회를 돌아다니며 소근소근 잡담을 하고 있었다. 내 그림은 어디에 걸려있더라... 스티브가 기억을 더듬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교실의 오른쪽 구석편에 자신의 그림이 걸려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앞에 서서 자신의 그림을 빤히 보고 있었다. 그 인물은 클래스 메이트인 제임스 뷰캐넌 반즈였다. 왜 저렇게 빤히 보지? 뭐 실수라도 한게 있나? 자신의 그림앞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쳐다보고 있는 반즈를 보며 약간의 불안감이 생겼다. 반즈가 돌아가면 그림 상태를 확인해야겠어. 스티브가 바로 자신의 그림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의 그림과 반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예상외로 반즈는 점심 시간이 끝날때까지 그 긴시간동안 그림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스티브 또한 뒤에 멀건히 서서 반즈를 지켜보는 꼴이 되었다. 종이 울릴때까지 떠나지 않은 반즈의 뒷모습을 보며 스티브는 더더욱 걱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안도겠어, 내일은 꼭 확인해야겠어. 뭐가 틀렸는지. 


그러나 그 다음날도 반즈는 그림 앞에 자신보다 먼저 서있었다. 어제와 똑같이 그 앞에 우뚝서 빤히 자신의 그림을 쳐다보기만 했다. 내 그림이 마음에 든건가? 이틀째 같은 행동에 부정적이었던 마음이 살며시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스티브도 마찬가지로 어제와 똑같이 자신의 작품을 쳐다보는 반즈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전시회가 끝날때까지 제임스는 항상 자신의 그림 앞에 우뚝 서서 그림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창작물을 좋아해주는 인물. 그것만으로 친하지도 않았으면서, 대화를 하지 않았으면서, 무슨 관계가 있는것도 아니면서 반즈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되었다. 아마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기분을 알 것이었다 그 뒤 스티브는 제임스를 그저 클래스 메이트로서가 아닌, 브루클린의 멋쟁이 제임스 뷰캐넌 반즈가 아닌 다른 느낌으로 그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들리는 소문드 흘려 듣지 않고 차곡차곡 머리에 쌓아두었다.



'하지만 이렇게 개인적인 장학금까지 마련해줄줄은 몰랐어'


스티브는 반즈의 장학금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러한 '지원'이라면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다음에 꼭 갚을꺼야" 스티브가 반즈를 향해 다짐하듯이 이야기하였고 반즈는 웃으면서 이자까지 받아주겠다고 대답하였다. 이대로 학교를 다시 조용히 다녀도 좋았지만 스티브는 어찌되었든 반즈에게 은혜를 입은 셈이었다. 그는 자기가 좋아서 그런일이니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하였으나 그래도 은혜는 은혜였다. 자신이 반즈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작은 고민끝에 얻은 답은 하나였다.


"내 그림이 좋다면서, 원하는게 있으면 말해봐 그려줄게. 그렇게 좋은 실력은 아니지만"

"...........정말?"

"응. 어차피 그림때문에 학교에 남아있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신경 안써도 되는데"

"쓰인단말야. 뭐 하나만 말해봐"

"......그러면 나 그려주라"

"응?"

"초상화 같은거라도 좋으니까 그려줘"


왜인지 저를 그려달라고 말한 반즈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있었다.





*





스티브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실은 버키는 그림에 대해서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림과 관련된 추억이라고는 친구들끼리 시시덕 거리며 누드모델을 보기 위해 크로키 수업에 참가한 것 뿐이었다. 너의 그림의 팬이야 스티브. 자기가 생각해도 참 잘만든 거짓말 이었다. 덕분에 어물쩡하게 넘어가 스티브에게 장학금도 줄 수 있게되었고 말이다. 


사실은 그 반대란 말이지...


편하게 자세를 취하고있는척 하며 버키가 앞에서 자신을 그리고 있는 스티브를 쳐다보았다. 자신을 짧게짧게 쳐다보는 스티브와 몇 번씩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인데도 불구하고 그럴때마다 버키의 심장이 조금씩 빨라졌다. 버키는 스티브 그림의 팬 같은것이 아니었다. 한눈에 마음에 든 그림을 보고 화가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와 같은 로맨틱한 이야기였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전혀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림은 상관 없었다. 애초에 그림에 대한 취미가 없어 어느 그림이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도 몰랐다. 관심이 있는건 스티브 로저스, 스티브 였다. 버키는 스티브의 그림을 보러 종종 전시회를 찾아갔었다. 그림에 대한 관심은 없었지만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스티브라고 생각하니 없던 관심도 절로 생겼었다. 전시회에서 그림 앞에 우두커니 서서 버키는 오로지 스티브만을 떠올렸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까, 어디서 그렸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시간은 눈깜짝할사이에 사라지곤 하였다. 스티브가 그린 그림은 서커스를 하고있는 원숭이였다. 꽤나 기괴한 연출이 숨겨져 있는 그림이었지만 버키의 눈에서는 귀여운 원숭이일뿐이었다. 



"잠깐 쉬고 그리자, 몸 좀 풀고있어"

"쉬는시간이야?"



이렇게 마음껏 스티브를 대놓고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은 적었었다. 포즈를 취한다는 이유만으로 앞에 있는 스티브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으니 시간이 쏜 화살같이 지나간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버키는 몸을 푸는 척 어깨를 빙글빙글 돌리면서 스티브의 곁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뭐야? 별로 못그렸네. 얼굴도 완성 못했고.."

"먼저 구도를 잡은거야"

"흐음. 난 순서대로 얼굴부터 그리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러면 밸런스가 무너지거든"


"그림에 대해서 잘 모르는구나" 스티브가 샐쭉 웃으면서 말했다. 정곡이 찔려 심장이 철렁하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스티브는 별 다른 의미없이 말한 것인지 바로 자신의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말이 바로 이런짝이었다. "그냥 보기만 하니까.." 버키가 아무렇지 않은척 우물 거리며 뒤늦은 대답을 하였다. 사각사각- 스티브가 연필을 깎는 소리가 두 사람의 사이를 채웠다. 


"모델이 좋아서 그런가, 잘 그려진다"

"뭐?"


"반즈, 넌 키도 크고 몸도 좋잖아. 이상적인 피사체야" 스티브가 깎던 연필을 내려놓고서는 고개를 올려 옆에 서있는 버키에게 말했다. 저돌적인 성격이라는 것은 알고있었지만 칭찬도 돌직구로 잘 던진다. 여기서 얼굴이 빨개지면 안돼, 버키 반즈. 들키면 안돼. 버키가 침을 꿀꺽 하고 삼키고서는 스티브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미 목까지 빨개져 있었다. "나야, 뭐...." 여기서 무슨 칭찬을 해야하는 걸까. 스티브 너의 금발도 이뻐 라든가. 너무 여자들한테 하는 칭찬같나? 그러면 뭐라고하지. 작고 귀여워? 아냐.. 그것도 아냐. 뭐라고해야...


"....니 실력이 좋은거지 뭐"


결국 찾은 말이라고는 또 그림과 관련된 것 뿐이었다. 스티브가 버키의 말에 너무 띄워주지말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웃게했으니 어느정도는 성공이었다. "다 쉬었어? 그러면 이어서 그리자" 연필과 지우개 등을 모두 정리한 스티브가 재개의 뜻을 밝혔다. "..응" 옆자리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쉬워 버키가 꿈지럭 거렸다. 질질끄려가는것마냥 천천히 스티브의 곁에 벗어나 버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스티브의 눈동자가 또렷해지더니 다시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점점 깊어지는 시간에 해가 져 노을빛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살짝 부는 바람이 낡은 커튼을 팔랑팔랑 흔들기 시작했다. 퀘퀘한 나무판자 냄새와 고무 냄새 등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공간안에 스티브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자신도 마주할 수 있었다.




버키가 언제부터 스티브의 마른 등을 쫓았는지는 자신도 잘 몰랐다. 그나마 최초의 기억을 떠올리라고 하면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혼자 미술실을 갔던 때였을 것이다. 아무도 없을줄 알고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에서는 초등학생으로 보일만한 정도의 남자가 책상에 엎어져 누워있었다. 잠든건가? 싶어서 살금살금 소리를 죽이며 버키가 서류를 교탁위에 올려놓았다. 교탁에 서서 살펴보니 엎어져있는 학생은 클래스 메이트인 스티브 로저스였다. 눈에띄지 않고 조용한 그와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기에 이름만 알고있는 상대였다. 시간이 늦었는데....깨워줘야하나.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면서 자고있는 로저스를 보며 버키가 자신의 뒷목을 긁었다. 아무래도 이대로 두면 그가 늦은 밤까지 홀로 학교에 남아있을것 같아서 결국에 버키가 그를 깨우기로 결심하고서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저기 로저스"


그때였다. 누워있는 그의 책상 옆에 바로 도착한 순간, 강한 봄바람이 불었다. 차갑지 않은 따뜻한 봄바람이었지만 강한 세기였기 때문에 커텐이 팔랑하고 크게 춤을 추었다. "어.." 버키가 갑작스레 부는 바람과 다가오는 커텐에 손을 올리며 자신을 보호했다. 밑을 내려다보니 스티브또한 하얀 천 커텐에 둘러쌓여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황금빛 머리카락도 바람에 날려 살짝살짝 휘날리고 있었다. 


"어......"


커텐은 이제 그의 머리를 덮어 마치 신부의 예식복장처럼 장식되어있었다. 강하게 불던 바람이 멈춰졌고 버키를 향해 날리던 커텐도 제자리에 돌아갔다. 하지만 스티브의 머리에 걸린 하얀색 천은 계속 위에 올려져있었다.


"어..............."


언젠가 과학이 발달되면, 한 100년정도 지나면 사람의 감정을 잘 알 수 있을까?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사람이 짧은 몇초의 순간만으로 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밝힐 수 있을까.





다시 미술실 안에 둘은 같은 공간에 있었다. 


비록 대화는 없고 교실을 채우는 소리는 사각사각 연필이 종이를 긋는 소리 뿐이였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버키는 자신을 바라보는 스티브를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저 그가 계속 학교를 다녔으면 하는 마음에 시작한 일이었는데 이런 보상이 올 줄은 몰랐다.


아아-

만약에 오늘 내에 초상화가 완성 된다면.

살짝 아쉽다고 해서 아니면 너무 좋으니까 더 그려줄 수 있냐고 물어봐서

또 그려달라고 해야지.

계속 그려달라고 해야지.




오랜 짝사랑 상대와 단둘이서 미술실 데이트라니. 이거야말로 제대로 영화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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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합작을 하느라 웹연성 업데이트가 뜸했습니다. 처음으로 참가하는 합작이어서 어느정도 해야할지 몰라 감이 안왔어요. 이번 연성이랑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입니다만(웃음). 존잘님들 사이에서 못나보이지 않게 최대한 열심히 썼는데....그래도 쟤보다는 낫지의 쟤를 맡으면 되지않을까 싶습니다. 이게아니라 버키멸팁이 너무 보고싶습니다. 마블 커플링중 가장 좋아하는 커플링은 버키스팁이지만, 수 많은(웃음) 버키스팁 커플링중에 가장 좋은게 무엇이내고 물은다면 역시 버키멸팁이죠! 버키멸팁 연성 제꺼말고 너무 보고싶어요(광광) 버키멸팁 너무 좋은데...버키멸팁...버키멸팁은 버키가 짝사랑을 한다는 설정이 너무 좋아요.....잘난 남자의 짝사랑이라니..정말 황홀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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