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작은 당신 때문이었다. 


무대 위에서 빛나는 당신이 좋아서, 더 가까워 지고 싶어서, 더 알고 싶어서, 같은 것을 하면 옆에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시작한거였다. 지금은 피아노 그 자체에 즐거움과 만족을 얻고있긴하지만 분명 시작은 당신 때문이었다. 


***


피아노 연습을 게을리 하였다고 이사장실에 불려가 혼이 났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대회에서 입상을 한걸로 자만에 빠진거냐고 자신을 닦달하는 이사장의 모습에 이제 전처럼 초조해지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이제 어찌되었든 좋았으니까. 다 끝났으니까. 


고개를 한번 꾸벅이고서는 이사장실에 나와 문을 닫았다. 닫히는 순간에 큰 한숨소리가 들렸지만 그것 또한 아무런 상관 없었다. 이제 다 끝났다. 나는 피아노 연습을 게을리 하는것이 아니라, 이제 아예 피아노를 포기했고. 피아노를 치지 않으니 이사장은 날 후원할 이유가 없을테고 그러면 사립학교를 다닐 돈이 없으니 이 학교를 나가야 할 게 분명했다. 그러면 공립으로 전학을 가게 되는걸까. 그 정도의 돈이 우리집에 있을까. 일을 시작해야하는 걸까. 내가 피아노 말고 할 수 있는게 있을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 우뚝 복도에서 멈춰섰다. 아니, 방금 전 말은 취소. 피아노를 포함해서 할 줄 아는게 뭘까.


세바스찬과의 피아노 연습 후, 크리스는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이제 더이상 대회도중 세바스찬이 한 실수가 일부러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세바스찬이 일부러 져준거든, 아니든 어쩌란말인가. 자신은 세바스찬의 발끝도 못따라가는 실력인데. 


세바스찬과의 대결 이후, 그 다음날은 수업도 빠지고 하루종일 피아노만 쳤다. 학교의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수위 아저씨를 관객 삼아 계속 피아노를 쳤다. 미친듯이 치면서 느끼는 감정은 불안감과 공포였다. 아무리쳐도 따라갈 수 없는 실력차와 알기 싫어도 자신의 귀로 들리는 재능차이. 치면칠수록 비교가되었고 연주는 우울함만을 낳았다. 


계속 치다보니 알 수 있었다. 자신은 그의 발끝에도 따라갈 수 없다고. 그와 자신의 재능은 확연하다고. 만약 자신이 그보다 더 노력한다해도 탄생으로 주어진 이 차이는 따라잡을 수 없다고. 재능이 왜 재능(gift)인가, 말 그대로 하늘의 선물이기 때문 아닌가. 하늘의 선물을 고작 인간따위가 어찌 따라가겠는가.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에 매달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포기하면 편하다, 계속 부딪치니 괴롭고 힘든 거다. 잊으면 된다. 어쩔 수 없는건 어쩔 수 없다. 




크리스는 오늘도 여러명의 이들과 몸을 섞었다. 원래부터 이렇게 방탕하게 굴었던건 아니다. 피아노에 몰두하고 있을 때는 다른 것에 몰두할 시간이 없어 이러지 않았다. 


다수의 인원과 몸을 섞으면 정신없이 뒤로 몰려오는 쾌감을 느낄 수 있었고 그렇게 하여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어서 좋았다. 아니, 때때로 자신과 몸을 섞는 이들에게 자신을 좀 더 모질게굴어달라고 애원한적도 있으니 자기파괴적인 행위로 이런 일탈을 즐기는 걸지도 몰랐다. 돈으로 자신의 뺨을 쳐달라하고, 창녀라고 욕을 해달라하고, 묶어 놓고 방치해달라고도 했다. 뭐가 되었든 자신을 파괴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장소도 구하기 쉬웠다. 이 연주실은 세바스찬과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세바스찬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자신만의 공간이 된 셈이었다. 


'그래봤자... 얼마 안있으면 나도 없어지지만.'


피아노 위에 납작 엎드려 박힐때는 흔들려 삐걱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어줄 돈도 없으면서 이대로 피아노가 부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피아노를 치지 않으니 시간은 남아돌았다. 아무리 남자들이랑 몸을 섞는다해도 하루종일 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럴때면 집에 돌아가 침대에 박혀 하루종일 잠을 자거나, 아니면 영화를 다운 받아 보곤했다. 집중할만한 것이 필요했고 또 시간을 허비할 만한 일도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리 잠을 자도, 영화를 봐도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무엇을 해도 활기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저 이 무료한 시간이 얼른 흘러가길 바랬다. 


이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내일이 되면, 모레가 되면, 일 년이 지나면 뭐가 달라질까. 나는 뭘 원해서 시간이 이렇게 흐르길 원하는 걸까. 햇빛이 들어오는 창가를 바라보며 크리스가 멍하니 생각했다. 아무것도 달라지는게 없다. 자신의 삶은 이제 늘 이렇게 무료하게 흘러갈 것이었다. 피아노 하나만 사라졌을 뿐인데 크리스의 세상은 빛을 잃고 허무해졌다. 피아노, 아 피아노. 다시 한번 생각을 떠오리니 울컥 무언가 솟아 올랐다. 


내가 왜 그렇게 피아노에 죽자살자 매달렸을까. 도대체 언제부터 쳤을까. 나는 치면서 즐거웠던 걸까.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 무엇이. 


눈을 감으면 피아노의 소리가 들렸고, 아직 딱딱하게 굳은 손은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분명 즐거웠다. 피아노를 치는거. 어머니가 일하는 카페에서 마감시간에 퇴근을 기다리면서 처음 쳤던게 시작이었다. 손님이 없는 시간이니 마음대로 갖고 놀아도 된다는 주인의 말에 처음 생긴 장난감처럼 갖고 놀았다. 그 때가 다섯살이었을까, 여섯살이었을까. 질리지 않고 계속 치고 있자 아르바이트 누나가 체르니이니 뭐니 교본을 가져다 주고 가볍게 읽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처음 시작은 분명 순수했다.


그저 치는것이 즐거워서,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야만 하는 무료한 시간에 무엇을 할 수 있는게 즐거워서. 저의 손가락에 만들어지는 음악이 아름다워서 가끔 저의 연주를 들으며 박수를 쳐주는 점장님이 좋아서. 즐거우니까 더 치고 싶어서, 더 잘하고 싶어서. 분명 그래서 시작했던 거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재능을 주지 않은 것일까.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니까, 재능이라도 주었어야 하는게 아닌가. 세바스찬 스탠은 다 가졌는데, 하나도 아쉬울 게 없는 놈인데. 왜 그 개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주고 나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은 것일까. 노력을 해서 따라잡을 수 있다면 노력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저의 수준차이는 그 정도가 아니다.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장벽, 철저한 재능 차이. 그 모든것이 크리스를 괴롭히고 허탈하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정말 재능의 차이는 불공평하다. 너무 불공평하다, 어쩔 수 없는 불공평함이다.

어떻게 해서도 센스는, 재능은 따라갈 수 없다.

매달리면 매달릴 수록 무력감과 허탈감 그리고 열등감에 자기 자신만 죽어갈 뿐이다.

자신은 이미 재능 차이 하나만으로 남에게 악담을 퍼붓는 최악의 인간이 되었다. 이제 그만 인정하고, 포기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자꾸 피아노 생각이 나는 것이란말인가.




이사장은 예상 외로 너그러운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피아노 연습을 하지 않아도 대회에 참가하지 않아도 크리스를 향한 장학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크리스를 불러 피아노를 하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이 데려온 학생이니 끝까지 책임을 질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사장의 마음을 대충 깨달은 크리스는 이대로 퇴학을 기다리는 것보다 자퇴를 하는 것이 더 빠르다 생각하여 학교를 무단결근 하기 시작했다. 다시 이사장의 얼굴을 보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아 자퇴서는 우편으로 보냈다. 아무말 없이 처리해줄 것이라 믿었다. 


학교를 나가지 않는 크리스에게 가족이 염려와 분노를 동시에 보냈다. 왜 갑자기 피아노를 관둔거냐는 어머니의 말에 교육비도 안대주면서 무슨 말이냐고 꽥 소리를 질렀다. 그것이 어머니의 아픈 손가락이란것은 알았지만 그리 말하지 않으면 계속 캐물을 것 같아서였다. 차마 가족에게 자신의 추악한 질투와 열등감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어머니는 그 뒤로 크리스에게 피아노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어떻게 할 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정하라고만 하였다. 어떻게 해야할까, 누군가 정해줬으면 좋겠는데. 삶의 목표도 이유도 잃은 크리스에게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유가 속박이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리고 있다 라는 표현이 맞을정도로 지내고 있을때, 뜬금없이 세바스찬에게 메세지가 왔다. 만날 수 있냐 라는 말 부터 시작해서 요즘 학교에 왜 안보이냐 등등. 그와 '그날'이후 학교를 다니고 있을 적에도 마주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자신이 '요즘' 학교에 없다는 것을 알고있는 것일까. 답장은 보내지 않고 메세지는 오는족족 지웠다. 꼴도 보기 싫었다. 그만 보면 자신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살리에르가 되었다. 분명 나중에는 미칠것이었다. 


지워도 지워도 오는 메세지에 익숙해질 무렵, 느닷없이 늦은 밤에 전화가 왔다. 한 통을 받지 않고 그냥 보내자, 받지 않으면 집으로 전화를 건다는 메세지에 어쩔 수 없이 다음 전화를 받았다. "...선배예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지금 어디 있어요?"

"집. 왜 전화했어. 나한테 무슨 볼 일 있어?"

"...선배 잠깐만 나와요, 할... 할 얘기가 있어요."

"전화로 해. 꼭 만나서 해야하는 이야... 잠깐만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만나서, 만나서 해요. 선배."

"너 울어? 지금?"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는 갈라지고 쇠어있었다. 늘 덤덤한 목소리만을 기억하고 있던 크리스에게는 예상치 못한 소리였다. 침대에 누워서 통화를 받고 있던 크리스는 들리지 않게, 작게 허어 하고 한숨을 내뱉고서는 머리를 긁었다. 도대체 얘는 뭐가 문제여서, 이렇게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지 몰랐다. 왜 이렇게 자신에게 참견을 하는지. 크리스는 지금까지 줄곧 세바스찬에 대해서 생각은 했어도, 세바스찬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가져본적이 없었다.


"오기...오기 싫으면, 제가 찾아갈게요."

"잠깐만, 찾아온다고? 우리집에? 너 우리집 주소는 어떻게 알아?"

"그냥...그냥 얘기하고싶은게 있어요. 선배. 여기 선배네 동네 근처 공원인데... 귀찮으시면."

"니가 우리집에 오면 뭐라고 설명해!"


그냥 학교의 친한 후배라고 얼버무릴 수 있지만 크리스는 세바스찬을 그런식으로 소개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세바스찬의 존재 자체가 크리스의 열등감이었으니 자신의 가족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강제적으로 치부가 드러나는 느낌일게 분명했다. "내가 갈게.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 세바스찬을 다시 보고싶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크리스가 전화를 바로 끊고서는 침대 위에있는 남방을 걸쳤다. 


***


도대체 우리집 주소는 어떻게 알고, 여긴 어떻게 찾아왔는지. 주 타겟이 아이들인 공원은 밤이 되자 텅 비어있었고 세바스찬만이 주인인 것처럼 혼자 있었다. 그네 위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인영은 그 어느때보다 작고 왜소해보였다. 끼익끼익- 들리는 철의 울음소리만이 공원을 채우고 있었다. 크리스는 벌써부터 피곤함이 들었다. "헤이." 그에게 다가가면서 작게 불러보자 숙여있던 고개가 번쩍 하고 들렸다.


"...선배."

"도대체 너 여기서 뭐하냐?"


지금까지 줄곧 세바스찬의 피아노에 대해서는 신경을 써왔지만 정작 그 본인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기행들이 모두 이해가 가지 않았고 또 왜 이러는지 추측도 되지 않았다. 그저 그만 보면 좋지않은 것들만 생각이 나니 피하고만 싶었다. 더이상 자신의 열등감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한숨을 깊게 내쉬자하얀김이 모락모락 나왔다. 침대 밖에 나오는게 추워졌다 싶었더니 훌쩍 겨울이 오고있었나 보다. 추워 빨갛게 부은 코로 훌쩍이며 양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대화는 없었다. 할말이 있다고 해서 날 부른건 이새끼인데 정작 친히 납셔줬는데도 아무말도 없었다. 


"...할 얘기 있다면서. 빨리 말해, 아니면 나 그냥 갈꺼..."

"중학교때 선배가 피아노 치는 걸 봤어요."


갑자기 뜬금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중학교 때? 피아노? 언제 본거지? 근데 갑자기 그 이야기를 왜 해? 그때면 더 못쳤을 땐데? 정말 좆구렸다고 얘기하고싶은건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세바스찬의 말에 크리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네위에 앉아있는 세바스찬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눈물을 그친 상태였지만 빙금 전 통화를 하고 있었을 때 울어서 그런가 젖어있던 볼과 빨갛게 부어오른 눈이 신경쓰였다.


"처음엔 피아노에 관심도 없었어요. 그러다가 선배가 연주하는 걸 보고 관심을 갖게 된거예요. 진짜예요. 그 때는 아버지때문에 억지로 연주회에 끌려가서... 저 그 때 선배랑 얘기도 했어요. 기억 안나시는 것 같지만. 그 때 모차르트 이야기도 했었어요. 저는 잘 몰라서 알아듣진 못했지만...선배가 연주한거 보고 선배랑 대화해보고 관심이 생겼어요. 피아노에. 그냥 나도 선배처럼 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그 날 바로 피아노를 시작했어요."


세바스찬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내려다보는 크리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점점 치는 것이 재미있어졌어요. 그리고 점점 치면 칠 수록 선배랑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냥... 절 이 세계로 이끌어 준 분이니까. 그 뒤로도 계속 생각났거든요. 그래서 보스턴으로 오게 되었어요. 선배가 여기에 다니고 있으니까. 같은 학교에 다니면 좋을 것 같아서. 같이 이야기도 하고 연주도 하고... 그러면 더 좋을 것 같아서. 항상 생각했어요. 연주회도 가고... 어떻게 말을 걸어야할지 몰랐지만."

"...말하고 싶다는게 그거였어?"

"아니요, 이게 아니라. 그러니까. 아, 저 그 때 일부러 의도해서 실수한거아니예요. 진짜로 그냥 실수한거였어요. 절대 선배가 생각하는 그런게 아니예요. 제가 왜 그랬겠어요, 선배.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진짜...!"

"그만! 그만말해! 됐어! 됐다고! 도대체 뭘 얘기하고싶은거야?"


가만히 있던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이야기를 듣다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이야기에 크리스가 어떤 반응을 줄지는 예상을 하지 못했지만 이런 반응은 범위 밖이었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뜬금없는 과거의 이야기에 황당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세바스찬이 얘기하고자 하는게 무엇인가? 그토록 싫어하던 세바스찬이, 존재 자체가 싫은 세바스찬이. 도대체 왜 보스턴까지 와서 나를 위협하냐고 마음속으로 백번 소리를 지르게 만든 세바스찬이. 자기 자신때문에 뉴욕에서 보스턴으로 왔다? 자신을 열등감의 구렁텅이에 빠트리던 놈이 자기 자신때문에 피아노를 시작했다? 정말 듣자듣자하니 기가 차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이 자신이라는 것 아닌가? 


세바스찬이 싫어서, 왜 도대체 너는 여기에 왔냐고. 나를 이런 괴물로 만드냐고 외쳤는데.

그를 만든것 자체가 자신이었다니. 

이런 코미디도 따로 없었다. 그 연주회가 어떤 연주회인지는 몰라도 당장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뒷통수를 세게 때려 못나가게 해주고 싶었다. 


"진짜... 진짜 어이없다. 그게 하고싶은얘기야?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 참. 진짜..."


이제 자신의 눈에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너는 왜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거야. 겨우겨우, 다 네탓이라면서 눈을 감고 귀를 막았는데. 그런 너를 탄생한게 과거의 나라니. 그러면 난 누구에게 이 감정을 맡기면 돼? 누구 잘못이라고 떠밀면 돼? 모든게 내가 나쁜거야? 그냥 재능있는 니가 나쁘면 안돼? 왜 재능 없는 내가 또 나빠야해? 넌 다 가졌잖아. 그냥 니가 잘못한거면 안되냐고. 


왜 이렇게 불공평해야해? 


꼴사납게 그의 앞에서 울고싶지는 않았다. 이제 정말 끝이다. 집에 가서 수면제를 찾아보고 한통을 전부 다 먹고 자살하고 싶었다. 아니, 수면제로 자살 안된다고 했던가. 모르겠다. 목 멜 자신은 없으니 미친척 그러고 잊고 싶었다. 아니, 그냥 여기서 벗어나야겠다. 더이상 세바스찬과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가 다시 코를 훌쩍이며 뒤를 돌렸다. 그러자 "선배... 잠깐만요, 제발!" 하는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자신의 손을 붙잡는 감촉이 느껴졌다. 이게 뭐냐고 놓으라고 신경질을 내려했지만 자신의 손을 잡는 촉감이 이상했다. 크리스가 고개를 아래로 내려보았다.


자신의 손을 잡고있는 손은 칭칭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너...이게 뭐..."

"좋아해요. 크리스 선배."


손이 왜이렇게 되었냐고 물으려는 순간 망치로 뒷통수를 때리는 것과 같은 말이 들려왔다. 세바스찬은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제가...제가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게... 그게 말하고 싶었어요. 좋아한다고..."


그게 말하고 싶었다. 좋아한다고. 어쩌면 중학교때 그 첫만남에서부터 반했던걸지도 모른다. 첫 만남 이후부터 단 하루도 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모차르트가 좋다던 그의 말이 떠올라 항상 모차르트 곡만을 고집했었다. 같은 학교에 오게 된 이후, 마음은 점점 더 커져갔다. 같이 있으면 좋고 이야기 하고 싶고 연습을 하고 싶고. 아직 사랑을 몰랐던 저이기에 이 모든 감정이 '동경' 인 줄 알았다. 


그러다가 '그 날'에 알게 되었다. 자신의 감정이 동경이 아님을. 동경이라면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몸을 섞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을리가 없으니까. 그리고 그 모습을 잠들기 직전에 계속 생각할리 없으니까. 그게 나였더라면 이라는 생각을 안할테니까. 


감정을 뒤늦게 알아차렸을 때, 크리스는 피아노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자체가 싫다고 했다. 자신의 마음에도 둔한 자신은 타인의 감정에도 둔했다.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은 슬프지만 알고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싫어하는 지는 몰랐다. 왜 크리스는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왜 자신때문에 피아노를 그만 둔다고 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자신이 싫다기에 그의 앞에 나타날 순 없었지만 보는 것을 포기할 순 없었다. 그래서 몰래몰래 말 없이 그의 반을 창문 너머로 보거나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늘 눈으로 쫓았다. 하지만 고민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크리스가 학교에서 종적을 감췄다. 듣자하니 자퇴를 할 생각 인 것 같았다.


피아노 때문이다. 세바스찬은 그제서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미워하는 이유. 대회와 그의 자존심. 자신때문에 그만두겠다는 말. 그리고 끝내 알아버린 그의 열등감. 


자신이 그를 파괴하고 있었다. 

나의 손이.

나의 연주가.


고민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깊게 고민한 것도 아니었다.

세바스찬에게 우선순위는 늘 피아노가 아니라 크리스였다.


나의 손과 연주가 그를 망치는 거라면 부수면 되었다. 


"다시는...다시는 피아노 안 칠게요. 선배. 이런게... 이런게 선배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진 모르지만. 저... 저 진짜 안쳐도 괜찮아요... 진짜."


"선배... 학교 그만 두지 마요. 선배, 저 때문에 그러는 거면 그러지마요. 제가... 제가 전학 갈게요."


"저 진짜... 진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선배. 저는 진짜 선배랑 가까워 지려고 그런건데. 그런데. 진짜..."


아직 피가 멈추지 않던 손을 남들 눈에 띌까 대충 붕대로 감고 온 것이었다. 통증 때문인가 감각이 없어 자신이 제대로 크리스의 손을 잡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잡아야 했다. 지금 놓치면 더욱 영영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다. 


세바스찬은 감정이라는 것이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감정은 오로지 쌍방향인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일방적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감정이라는 것은 이유도 없이 생기기도 했다. 불공평하게 자신만 바라보고 자신만 애타고 자신만 매달리고. 그런데... 그런데 어쩔 수가 없었다. 상대방에게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억지로 만들어 낼 수 있는것도 아닌데. 불공평하게도 둘 중 우위는 언제나 크리스였다. 세바스찬은 늘 질 수 밖에 없었다.


가끔은 이런 자신만 매달리는 불공평한 상황에 분통이 터질때도 있었다. 그 때가 언제였던가. 크리스가 일방적으로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3시간 정도 바람을 맞을 때였다. 많이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도 없이 나타나지 않아 화가 잔뜩 났었지만, 나중에 자신에게 잘 웃지 않던 그 얼굴이 미안함을 잔뜩 묻고 어색하게 미소를 짓는 순간 사르륵 하고 풀렸었다.


이건 진짜 불공평하잖아.


재능이 신이 내린 선물이라면 감정은 누구의 탓을 하면 좋을까. 오로지 저의 마음에서 태어난 이 산물을 어찌하면 좋을까. 왜 자신에게 저렇게 못되게 구는 사람이 좋아서. 자신을 싫어하는 것을 아는데도 그런데도 너무 좋아서. 세바스찬이 다시 한번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비명을 질렀고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제발... 다른 사람이랑 자지마요. 그러지마요."


결국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이거였을까. 그러면 나 진짜 최악인데.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손을 잡아 당겼다. 말없이 끌리는 그의 손에 자신의 얼굴을 부볐다. 





세바스찬의 예상치 못한 고백에 크리스가 하하, 하고 마른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마른웃음은 점차 활력을 띄우더니 미치광이처럼 하하하하! 하고 큰 웃음소리로 번졌다. 이건 정말로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아까부터 세바스찬의 이야기는 전부 상상도 하지 못했었지만... 자신 때문에 피아노를 시작했다는 것도 놀랄 노자였는데. 이제는 나를 좋아한다고 절절하게 고백한다. 이건 정말.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보통 고백을 받을 때 웃는다곤 했지만... 아마 이런 감정때문에 웃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저의 손을 잡아당겨 얼굴을 비비고 있던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웃음에 놀랐는지 고개를 올리고서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잘 따른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런 이유로 따르는 건 줄은 몰랐다. 크리스가 혼자 킥킥 거리며 웃으며 돌린 몸을 다시 바로잡았다. 세바스찬과 마주하고서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듯이 앉았다. 그네에 앉아있어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있던 세바스찬이 이제는 자신보다 높은 시야를 차지했다. "선배...?" 이제 알 수 없다듯이 표정을 짓는 건 세바스찬 쪽이었다. 크리스는 주저앉은 그대로에서 대답하지 않고 세바스찬의 다친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리고서는 살살, 다치지 않게 붕대를 풀어주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것인지, 손에는 피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손가락을 살짝 건드리자 움찔 하며 세바스찬의 몸이 떨렸다. 아마도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많이 아파?" 크리스가 한번도 세바스찬에게 들려준 적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배?" 얼떨떨한 세바스찬은 그저 크리스만을 부를 뿐이었다. 크리스도 세바스찬의 부름에 답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할 일만을 했다. 자신은 의사가 아니라서 그가 얼마나 다쳤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뼈 자체가 아작이 난 건 아닌 것 같았다. 크리스가 호오- 하고 입으로 불어주었다. 그리고서는 "많이 아파?" 하고 물었다. 세바스찬은 창백하게 얼굴만 굳히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바스찬. 방금 전 말을 듣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네."

"역시 너는 피아노를 계속 쭉 쳐야할 것 같아."

"...네?"


세바스찬이 놀란 눈으로 크리스를 쳐다보았지만 오로지 정수리만 보일 뿐이었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손만 보면서 말을 이었다.


"네가 피아노를 계속 치면... 다른 사람이랑 자거나 그러지 않을 게. 원한다면 너랑 자줄 수도 있어. 학교도 다니라면 다닐게. 이사장이 허락할 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무슨..."

"대신 있잖아. 나는 너를 평생 좋아하지 않을꺼야."


그제서야 크리스가 고개를 올려 세바스찬을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울음을 멈추지 못했던 세바스찬이 지금에서야 놀라 눈물을 멈췄다. 


"평생 네 옆에 있으면서 너를 싫어할꺼야."


이게 공평하잖아. 나도 내가 갖고싶은 걸 못가지고, 너도 니가 갖고 싶은것 못가지고. 의외로 신은 공정한 것 같아. 이래야 수지가 맞지. 그치? 

크리스의 말도안되는 제안에 세바스찬이 아연실색을 하며 쳐다보았다. 그와의 해피엔딩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식의 전개는 더더욱 바라지도 않았다.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크리스는 그러건말건 실실 웃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니가 날 좋아해서 다행이야."


니가 나에게 열등감이라는 불행을 선물한 것 처럼, 나도 너에게 불행을 선물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크리스가 그 말과 함께 세바스찬의 피묻은 손에 쪽 하고 입술을 부비었다.




이미 모든게 뒤늦은 상태였다.


***


"...왜 이렇게 저장했어요?"

"뭐가?"


세바스찬이 크리스의 물음에 쥐고있던 스마트폰을 옆으로 건네주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두 몸은 하얀 시트 위에 겹쳐져 있었다. 크리스는 푹신한 베개에 묻고있던 얼굴을 세바스찬쪽으로 돌렸다. 그리고서는 눈썹을 한 번 까딱 올리고서는 건네 쥔 스마트폰을 보았다. 모차르트. 크리스는 세바스찬을 그렇게 저장해놓았다. 아- 이거? 크리스가 베시시 웃으면서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푹식한 촉감이 마음에 들어 자주 이런짓을 하였다. 세바스찬은 자신의 얼굴을 가린 크리스를 보고 그의 어깨를 잡고 자신의 쪽으로 좀 더 당겼다. 그리고서는 보채지않고 천천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넌 나에게 있어 천재 모차르트거든. 그래서. 그리고 나는 너를 질투한 살리에르."

"...제가 모차르트고 선배가 살리에르예요?"

"응. 딱 맞지?"


다시 크크큭 하고 자조적인 웃음이 들려왔다. 

세바스찬은 그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거 알아요? 모차르트의 재능에 질투해 미쳐버린 살리에르 이야기는 <아마데우스>에서 만들어진거고 실제로는 오랜시간 동안 평안하게 왕궁에서 궁정음악가로 지냈데요."

"아, 진짜? 영화가 날 속였네."

"네. 그러니까 그런식으로 비유하지마요."


세바스찬이 다시 크리스의 스마트폰을 뺏고서는 꾹꾹 눌러 연락처에 있는 자신의 이름을 바꿨다. 크리스의 제지는 없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르. 실제의 역사를 따지면 두 사람은 아무런 관계도 점접도 시기도 열망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싫다, 그런식으로의 비유는. 결국 자신과 크리스와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것 처럼 들려서.


이제 더이상 두사람간의 대화는 없었다. 크리스는 다시 잠이 든 것인지 조용히 숨소리만을 들려주었고 세바스찬은 한쪽 팔로 자신의 머리를 기대고서는 크리스의 뒷통수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심심해서 나머지 한쪽 손을 들고 크리스의 새하얀 등을 만졌다. 오늘은 화창한 일요일 오후였고 날씨는 따뜻했으며 들어오는 햇빛이 둘을 축복하듯이 비춰주고 있었다. 크리스의 등을 만질거리고 있던 세바스찬이 이제는 손을 세워 마치 피아노를 치듯이 크리스의 등을 두드렸다.


솔,솔,레,미,미,도,도.


아무런 의미도 없는 연주였고 건반은 당연히 소리를 내지 않았다. 


모차르트라. 크리스가 자신을 모차르트라고 비유했다. 세바스찬이 혼자 장난 연주를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실제 모차르트가 어땠더라.




어린 나이에 일찍 병을 앓고 죽지 않았던가?



열어놓은 창문에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침대까지 들어온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릿결을 간질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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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재능은 정말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다는 점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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