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야 이 개자식아!"

 

예고도 없이 열린 문에서 나온 것은 크리스 였다. 조용한 대기실 속에서 혼자 소파에 고개숙이고 앉아있던 세바스찬이 갑작스런 등장인물에 놀라 눈을 껌뻑였다. 그의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과 느릿느릿한 행동 또한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인지 크리스가 문을 쾅하고 세게 닫고서는 성큼성큼 걸어왔다. 느닷없이 남의 대기실에 와서 개자식이니 뭐니 욕짓거리를 하는 것은 학교 선배라는 신분으로도 가벼이 할 수 있는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크리스에게는 앞뒤 볼것이 없었다. 이제 바로 세바스찬이 앉아있는 소파의 코앞까지 온 크리스가 바로 세바스찬의 멱살을 잡았다.

 

", 개자식이. 너 방금 꺼 뭐야."

"선배, 크리스 선배. 잠깐만..."

"뭐냐고 했잖아! 그것부터 대답해!"

"손을 놓아주셔야 대답을... . 숨막혀요."

 

표정 변화가 없기로 유명한 세바스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고나서야 크리스가 두 손을 풀어주었다. 크리스에게 멱살이 잡혀 강제적으로 서있었던 세바스찬이 자유롭게 풀리자 다시 떨어지듯이 소파에 앉았다. 곱게 말해서 멱을 잡은 것이었지 거의 목을 조르는 수준이나 다름 없었다. 목을 단단하게 잠그고 있던 나비넥타이를 풀고 목을 더듬어보았다. 그가 너무 세게 잡아당겨 새빨간 자국이 나있었다. 흠흠. 세바스찬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목을 풀고나서 크리스를 올려다보았다.

 

"...저기, 그런데 죄송한데, 도대체 제가 뭘 했나요? 짐작이 가지 않는데..."

"뭐라고했냐 개새끼야."

 

씨근덕거리며 숨을 내뱉으며 공격적으로 나오는 크리스의 태도에 세바스찬이 다시 두손으로 자신의 목을 잡았다. 또 한번 멱이 잡힐까 취한 방어적인 태도였지만 다행히도 이번엔 크리스가 바로 멱살을 잡지는 않았다. "진짜 짐작이 안가서 그래요. 왜 그렇게 화가 나신거예요?" 세바스찬이 짐짓 억울한 투로 말했지만 포커페이스라는 별명 답게 얼굴에는 어떤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세바스찬 자기 딴에는 그게 나름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진짜 몰라서 묻는거야? 아니면 나 속 답답해 뒤지라고 묻는거야?"

"진짜 몰라서 묻는거예요. 제가 선배한테 왜그러겠어요."

"... 아까, 방금 전 연주. 중간에 느려진 거 왜그런거야."

 

크리스가 지적한 것은 대회 도중에 일어났던 세바스찬의 실수였다. 방금 전, 실수 없이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던 세바스찬의 연주가 단 한순간, 비록 단 한순간이었지만 흐름을 잃고 느려졌다. 일반인이 듣기에는 차이가 없는 연주였을지 모르겠지만, 크리스나 심사위원과 같이 피아노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라면 단번에 알 수 있는 실수였으며 크리스와 같이 대회의 우승후보로 모두의 기대를 받고 있는 세바스찬에게는 결정적인 실수였다. 연주의 잘못된 해석이나 리듬감과 같은 경우가 아닌 그저 단순 미스였으니 우승은 물건너 간게 틀림없다.

 

그리고 크리스가 화가 난 것은 단순이 세바스찬이 실수를 해서가 아니었다.

 

"너 일부러 그랬지."

"? 무슨소리예요."

"니가 다른 것도 아니고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리가 없잖아. 너 일부러 그랬지."

 

크리스가 도끼눈을 뜨고 세바스찬을 노려보았다. 그의 실수때문에 화가난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는 소년만화나 성장만화의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정정당당하게, 최고의 상태인 라이벌을 이긴다, 와 같은 정열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건 창작물속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고 현실에서는 그날의 컨디션과 운 또한 실력이다. 만약 자신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던 라이벌이 그날의 컨디션 저하로 자신에게 패배하게 된다면 크리스는 웃을 인물이었다. 저 등신새끼 지 몸관리 못한다고.

 

하지만 세바스찬은 달랐다.

 

"...일부러라니요, 제가 왜 그랬겠"

"그런데 왜 그런 초보적인 미스를 하는건데? 너 내가 우습냐?"

"제가 선배를 왜 우습게 봐요."

"그런데 니미 시팔 왜 일부러 져주냐고!"

 

그가 특별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세바스찬 스탠이 특별하니까, 라이벌이니까 최고의 상태로 승부를 보고싶다, 그런 의미도 전혀 아니다. 그저 저 가증스러운 새끼가 일부러 실수를 했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빡친거다. 계속 씨근덕 거리던 크리스의 얼굴이 점점 빨갛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위압적이게 몸을 부풀리며 서있는것은 크리스이고 쭈그려 소파에 앉아있는건 세바스찬이었지만 표정차이때문인가 세바스찬이 크리스를 괴롭히는 걸로 보였다. 세바스찬이 씩식 거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크리스를 보며 입을 살짝 벌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저 멍청한 표정때문에 더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 너 나 불쌍해? 그래서 일부러 져주는거야? 돈 없는 새끼 상금이나 받아서 타먹으라 이거야? 시발 좋겠다? 집에 돈 많아서? 그것도 아니면 뭐야? 내가 우스워? 우스워서 져주는거야? 나같은건 상대도 안된다 이거야? 너 지금 나랑 장난치는거야? 아니면 대회랑 장난치는거야? 대회가 우스워?"

"...선배. 정말 오해하고 있는거예요."

"니미씨팔, 오해라는 개 좆같은 소리 할꺼면 그냥 닥치고나 있어! 내가 불쌍하냐고 묻잖아!"

 

크리스가 바로 앞에 있는 소파의 기둥자리를 뻥 차며 소리를 질렀다. 비교적 가벼운 소파는 크리스의 발차기에 밀려 움직였고 앉아있던 세바스찬도 덩달아 몸이 흔들렸다. 세바스찬은 일방적인 폭력적인 상황속에서도 눈만 느리게 꿈뻑 거렸지, 불평을 하거나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리고 크리스의 윽박때문인가 더이상 아니다, 오해다. 라는 변명같은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크리스의 눈치를 보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방금 전, 폭력으로 인해 긴장감이 팽팽 돌고 있던 대기실에는 적막감만이 감싸져있었고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있었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대답을 요구했고 세바스찬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시팔, 상금이고 트로피고 다 필요없어 개새끼야."

"..."

"안 받는다고 시발놈아."

 

아무말도 하지 않은 세바스찬을 더이상 상대하기 힘들었다. 오히려 저 답답하기짝이없는 면상을 보니 화만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다. 크리스가 마지막으로 그 말을 내뱉고 다시 한번 쿵, 하고 소파를 차고 세바스찬의 대기실을 나왔다. 문을 세게 닫고 나오는 그 순간까지도 세바스찬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콩쿨의 우승은 크리스가 차지했다.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세바스찬이 실수를 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세바스찬에게 상금이고 트로피도 받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건 개인적인 크리스의 생각이었고 대회의 심사위원들은 그의 개인적인 생각까지 고려하지 않았다. 크리스는 상금과 트로피를 고스란히 받게 되었고 그리고 그 덕분에 학교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자존심이 세서 세바스찬 앞에서는 그따위로 말했지만 크리스는 그것들을 거절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상금을 받지 않기에는 가정형편이 걱정되었고, 트로피를 받지 않는다면 학교로부터 받는 모든 장학 혜택은 사라질지 몰랐다. 오로지 피아노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크리스다. 크리스는 결국 세바스찬이 '져줘서' 얻게 된 상금과 트로피로 학교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세바스찬이 실수를 했다더라, 중간에. 그 전까지 완벽했는데."

"걔도 실수를 하는 때가 있구나."

", 빌 게이츠도 실수를 하는데 걔라고 못하겠어?"

"그래도... 그리고 잘은 모르겠지만 걔도 빌게이츠랑 같은 급 아니냐? 매스컴에서도 장난아니잖아."

", 그렇긴 하지."

 

학교 내에서는 우승을 차지한 크리스보다 한 순간의 실수로 4위를 한 세바스찬의 이야기가 더 화젯거리였다. 우승은 당연히 세바스찬의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놀라움과 안타깝게 실수를 하여 추락한 천재의 이야기에 대한 자극성이 합쳐진 결과였을 것이다. 예술계 고등학교가 아니어서, 피아노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일반 학생들은 그저 인터넷에 의존하여 세바스찬의 이야기를 떠들어대었다. 피아노 천재로 화제를 받고 있는 세바스찬이니 국제적인 콩쿨도 아닌, 지역규모로 열리는 콩쿨에서 우승을 차지하지 못한것이 꽤 충격이었는지 여기저기서 기사가 나왔다. 그 안에 크리스의 이야기도 섞여있었지만 좋은 수식어는 붙지 못했다. <운이 좋아> <천재의 실수로 탄생한> 등등.. 크리스는 모든 이야기가 듣기 싫어 수업시간을 제외한 때에는 항상 이어폰을 끼고 책상에 엎드려있었다.

"크리스. 정말 훌륭한 연주였어. 앞으로도 좋은 소리 들려주게."

"감사합니다."

이사장이 인자한 미소로 하며 크리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 손길이 황송스러워 크리스가 자신의 몸을 살짝 베베꼬았다. 이 분 덕분에 크리스는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재능이 있어도 터무니 없는 교육비와 악기의 비용 등으로 포기해야했던 피아노의 길을, 집안 살림과 어린 동생을 위해 포기해야할지도 몰랐던 학생의 삶을. 작은 지역 콩쿨에서 우승을 한 크리스를 보고 그저 재능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낌없이 지원을 해주었다. 크리스는 이 만남을 있게 해준 그 지역 콩쿨에 나간 것을 인생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의 이사장님을 진심으로 구세주라고 생각했다.

 

세바스찬, .. 이번에 안타까웠어.”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필요가 있나! 다음에 더 잘하면 되는거지.음음.늘 기대하고있네.”

 

이사장이 안타까운 얼굴로 세바스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모습에는 실망스럽다거나, 자신의 기대를 미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등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말 그대로 단순히 실수를 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지, 그의 재능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사장이 어깨를 두드려줬을 때 지었던 웃는 표정은 어디로 가고 크리스는 입술을 깨물고 앙칼진 눈으로 옆의 세바스찬을 노려보았다. 세바스찬은 전과 다름없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눈을 느리게 꿈뻑 거리며 미소 한번 짓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저 여유로운 표정도 재수 없다. 자신처럼 웃음을 팔며 꼬리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싫다.

 

세바스찬은 알까, 저의 존재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위협인지.

아마 모를 것이다.

 

 

“...선배. 요즘 몇 시에 연습하세요?”

“...”

그냥... 안보여서요.”

 

이사장실에서 같이 나온 둘은 조용한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수업 도중에 불려진 것이니 학생이 아무도 없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이 곳은 이사장실과 가까운 곳. CEO를 두려워하는 직장인의 특성 때문에 선생들도 없었다. 크리스는 이 불편한 공간에 입을 꾹 다물고 빠르게 걸었다. 조금이라도 저 재수 없는 놈과 같이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세바스찬의 발걸음도 크리스와 비슷하게 빨랐다. 평소에는 둔탱이처럼 느려터진 놈이 오늘은 왜이렇게 빠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세바스찬은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계속 뭐라 조잘조잘 말을 걸었다. 목소리에 생기가 없고 무뚝뚝하기 그지 없는 말투였지만 내용은 꽤 집요했다. 도대체 내 연습시간을 알아서 뭘 하려는 건지. 마주치기 싫어서 일부러 세바스찬이 없을 듯한 시간에만 가는 건데. 도대체 내가 점심을 먹든, 안먹든 무슨 상관인가. 너 때문에 밥맛 없어서 안먹는 건데. 크리스가 입술을 꾹 물고 걷다 나중에 같이 연습해요, 라는 소리에 참지 못해 고개를 훽 하고 돌렸다. 갑작스러운 방향전환에 세바스찬이 당황한것인지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학교의 왕자님이라고, 잘생겼다고 자자한 얼굴은 크리스가 보기엔 그저 얼빵한 만두 같았다.

 

나는 아직도 널 보면 존나 빡이쳐. 알아? 그래서 너 꼴보기 싫어서 일부러 안 마주치게 노력한거야. 근데 같이 연습?”

“...선배.”

너 내가 얼마나 우스운 꼴이 된지 모르지? 모르겠지. 니가 의도한게 이거냐? 다들 뭐라고 하는지 알아? 세바스찬의 실수로 운 좋게 우승한 크리스 에반스라고해. 다들 나만 보면 세바스찬의 실수부터 생각해. 그거 알아?”

“...죄송해요.”

그래, 알아. 너 피아노 존나게 잘치는거. 그리고 나보다 더 잘치는 거. 근데 그거 알아?”

 

어금니를 꽉 쥐고 말하는 크리스의 목에는 울긋불긋 힘줄이 돋아나있었다.

 

내가 시팔. 아무리 너보다 못치긴 해도. 졸라, 사람들한테 운 좋은 소리만 들을 정도로 못치는 건 아니거든?”

 

본교는 예술고등학교가 아니다. 지역명문사립학교로 공부벌레들이나 지역의 명문가 자제들만 오는 곳이다. 이 곳에서 예술형 장학제도를 받고 있는 사람은 크리스 단 한명밖에 없었다. 이는 학교의 방침이 아니라 이사장의 개인적인 자선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리스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피아노 솜씨로 인해 얻어진 것이라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피아노는 크리스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자존심이었으며, 자존감이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피아노 자체가 크리스의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크리스는 확실히 잘쳤다. 재능이 있냐, 없냐를 따지면 재능이 있었다. 그러니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고 동네 카페에서 혼자 피아노를 연주한 경험만으로 지역 콩쿨의 우승을 차지할 수 있던거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크리스는 길이 열렸고, 자신의 삶과 실력에 나름대로의 만족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건 세바스찬의 등장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크리스는 세바스찬의 모든 것이 싫었다. 자신 보다 어린 것도 싫었고, 자신처럼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되는 부잣집 도련님 인것도 싫었고, 또 자신보다 피아노를 늦게 시작했다는 점도 싫었다. 짧뚱하고 못생긴 손에 비해 잘생기고 두꺼운 손을 가졌다는 사소한 것부터 항상 치는곡이 자신이 잘 치는 곡이라는 점이라는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싫었다. 아니 역시, 그냥 존재자체가 싫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많은 이유 중, 세바스찬이 가장 싫은 점은 자신을 음습하고 비열한 인간으로 만들어서였다. 크리스는 선배선배하고 자신을 따르는 어린 후배의 연주를 듣고 어떻게 하면 그를 깎아내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 밖에 생각하지 않았고 그런 자신의 생각에 크게 좌절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마음은 변화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심화되어 이제는 대놓고 그를 싫어한다고 내비치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나는 나를 이렇게 만든 니가 너무 싫어. 세바스찬.

 

세바스찬에게 가장 원망하는 점은 왜 하필 우리 학교로 진학을 했냐는 점이다. 크리스가 알기로 세바스찬은 보스턴 사람이 아니다. 뉴욕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굳이 뉴욕에서 이쪽까지 와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는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보스턴이지만 뉴욕보다 나은게 뭐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주민들의 텃세도 센 편이고 심지어 이 학교는 예술계고등학교도 아닌 그냥 지역사립학교일 뿐이다. 명문이라고는 해도 지역의 안에서일 뿐, 뉴욕에는 더 만은 명문학교들이 있을터였다. 그런데 왜 이곳에 와서 자신이 독차지하고 있던 이사장의 사랑을 위협하는 지, 자신의 재능으로 만들어낸 특별한 공간을 위협하는지, 자신을 이런사람으로 만드는지.

 

도대체 왜 너는 이곳에 와서.

 

선배, 근데 진짜 이거 하나만 알아주세요.”

뭔데.”

저 진짜 일부러 그런거 아니예요.”

“...”

왜 안믿으시는지, 제가 고의적으로 실수 했다고 생각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진짜로, 일부러 그런거 아니예요.”

 

세바스찬이 무기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표정과 목소리도 존나게 싫다. 나 따위는 상대하지도 않는다는 듯한 여유로운 모습. 자신은 이렇게 열과 성을 내고있는데 그의 목소리에는 힘 하나 들어가있지 않았다.

 

세바스찬의 말에 크리스가 벅벅 뒷머리를 손으로 긁었다. 그렇게 조금 긁고서는 결심했다듯이 고개와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서있는 세바스찬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다시 한번 놀란 만두 같은 얼굴이 보여졌다. 애들은 이새끼를 포커페이스라고 부르지만 크리스가 보기에는 얼굴에 드러난 표정이 작아서 일 뿐, 포커페이스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앞에서 세바스찬은 항상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크리스는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손목을 붙잡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 나랑 일대 일로 피아노 대결해.”

?”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면 되는 거잖아. 니가 고르는 곡, 내가 고르는 곡. 두가지로 대결해.”

잠깐만요, 선배. 수업은...”

제발!”

 

니가 날 우습게 보는게 아니라면, 제발 닥치고 피아노 대결해.

목이 갈라 비명처럼 들리는 크리스의 목소리는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세바스찬은 그 소리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애절한 목소리에 뭐라 변명을 하며 안된다고 할까. 크리스에게 잡힌 손목이 뜨거웠다. 세바스찬은 그저 그것만을 생각하며 걸었다. 다행인 점은 연주실까지 가는 길은 꽤 멀었다.

 

 

 

대회 전 날, 크리스는 이사장실에 인사를 드리고 조금 늦게 집으로 귀가하게 되었다. 이사장은 크리스에게 기대한다고 말하였지만 내심 속으로 세바스찬의 우승을 확정하고 있었고 크리스의 눈에도 그게 다 보였다.

 

절대 안질 거야. 질 수 없어.

 

크리스에게 피아노란 살아갈 방법과 수단이자 자존심과 자존감이었다. 그걸 빼면 시체나 다름 없다. 아무리 천재니 뭐니 해도 대회에는 컨디션과 심사위원의 취향 등의 변수가 있다. 결과는 당일 날이 되어야 알 수 있는것이며, 세바스찬의 승리를 확신하는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두드려주겠다는 긍정적인 생각마저 했었다.

 

뭐야? 이시간에. 누가 연습하나?”

 

복도를 거닐던 중, 피아노의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어 확실하게 연주가 들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피아노 소리였다. 이 시간에 누구인가. 대회 전날이니 세바스찬은 집에 일찍 돌아가 자신의 피아노로 연습할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학생이 장난 삼아 피아노를 두드리는게 틀림없었다. 크리스는 피아노가 망가질까 걱정되어 치고 있는 학생을 쫓아내기로 마음먹었고 걸음을 재촉하여 연주실로 다가갔다.

 

그리고 다가가면서 쫓아내야겠다는 가벼운 마음이 점점 두려움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가까이 가면서 정확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연주자의 실력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듣질 말았으면 좋았겠거늘, 그냥 몸을 돌리고 집으로 달려갔으면 좋았겠거늘. 크리스는 멈추지 못하고 걸어 결국 연주실의 문 앞까지 서게 되었다.

 

감히, 음악에 완벽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만약 붙인다면 이 연주에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크리스는 아름다운 음악이 무서워 그대로 주저앉아 몸을 덜덜 떨며 웅크려 앉았다. 틀림없이 세바스찬이 연주하는게 분명했다. 일반학생이 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다. 아니, 크리스 자신도 이정도로 칠 수 없었다.

 

아름다운 선율이 크리스의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몸을 웅크리고 뒤늦게 귀를 막아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음악은 자비없이 크리스의 귀를 뚫고 들어왔다. 압도적인 재능 차이에 크리스가 몸이 덜덜 떨렸다. 세바스찬과 같이 합동 연습을 한 적은 있었지만 이 정도의 완벽함은 처음 들었다. 일부러 숨긴것인가.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왜? 숨길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방금 전, 세바스찬의 우승을 확신하는 이들의 코를 납작시켜주겠다는 생각은 이미 부서져 사라진지 오래였다.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 조차 가소롭다는 것을 알려주는 연주였다.

 

곡의 연주가 끝나고 드디어 소리가 멈춰졌다. 그제서야 쭈그리고 앉아 웅크린 몸을 펼칠 수 있던 크리스의 손과 등에는 식은땀이 잔뜩 묻어나있었다.

“...도망쳐야해.”

크리스가 혼자 작게 중얼거리고 자리에 일어났다. 다음 곡이 시작되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복도를 뜀박질 하는 내내 여러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생각은 세바스찬에 대한 저주였다. 왜 모든 것을 갖고 있으면서, 나보다 많은 것을 갖고 있으면서 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거야. 지금까지 저렇게까지는 아니었잖아.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다시 돌아가서 피아노를 부수고 세바스찬의 얼굴을 때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대로 벽에 자신의 머리를 박고 싶었다.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살리에르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의 재능이 무섭고 열등감에 몸이 뒤덮혀 미칠것만 같았다.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왜 너는 보스턴까지 와서 나의 앞에 선거야.

 

미친 듯이 뛰어 집에 도착한 크리스는 화장실로 바로 달려가 속에 있던 것을 게워냈다.

세바스찬이 싫은 진짜 이유. 인정하기 싫은 진짜 이유.

그를 싫어할만한 이유는 자신의 재능이 그보다 부족하다는 것 밖에 없어서. 그가 싫은데 원인 제공은 그가 아니라 자신이어서. 그러니까 아무 이유없이 상대방을 증오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줘서.

세바스찬 스탠이라는 인간이 자신보다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죽일 정도로 싫어하는 자신의 됨됨이를 알려줘서.

 

그래서 싫은거다.

 

 

세바스찬의 손목을 붙잡고 크리스는 지난 범, 온 몸을 웅크리고 앉아 덜덜 떨었던 연주실의 앞에 도착했다. 세바스찬은 진정으로 실수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크리스는 믿지 않았다. 세바스찬은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수 없다.

천재 모차르트니까.

 

들어가자. 준비 할 시간 필요해?”

“...아니요.”

 

크리스가 세바스찬의 손목을 놓아주고, 연주실의 문을 열었다. 연주실에는 크리스와 세바스찬의 몫으로 두 개의 피아노가 있었다.

 

세바스찬이 모차르트라면 자신은 살리에르일까.

끝내 그를 이기지 못해 재능을 질투해서 미쳐버린.

 

크리스가 시덥잖은 생각을 하고서는 의자에 앉았다.

어찌되었든 방금 전까지 세바스찬은 자신에게 실수가 아니라고 진심어린 눈빛으로 거짓을 토했다. 나를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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쩜오어워드에서 후기글에서 말한 외전 두개 쓰다가 문득 떠올라서...

근데 분명 개그로 쓰려고 했는데 요즘 우울한 일 있어서 그런가 우중충한 글이 나와버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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